묵향 14권 2화 – 제임스의 이상적인 기사상
제임스의 이상적인 기사상
“헉헉헉!!”
가쁜 숨을 내쉬며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소녀,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는 찰랑거리는 금발과 더불어 한껏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큼직한 철봉을 양손에 쥐고 달리 고 있었는데, 가녀린 몸매로 미루어 봤을 때 굉장히 힘이 드는 듯했지만 소녀는 연신 땀을 흘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에게 허용된 범위인 둥근 마법진 안을 쉬 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체력이 완전히 바닥났는지 헐떡거리면서 쓰러졌다.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벌떡벌떡 요동치는 심장, 온몸은 솜털 하나의 무게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나른해져 오고 있었다. 몸속의 모든 피는 어디로 가 버렸는지 가벼운 현기증까지 치밀어 올라 순간적으로 사위가 시커멓게 보이기까지 했다. 다크는 헐떡거리면서 이렇게 자신이 힘겹게 수련한 것이 몇 년 만인지 생각했다.
수십 년 전, 아직 내공의 힘이 쌓이기 전에 이런 단순무식한 육체의 수련을 했었다. 하지만 내공이 쌓이기 시작한 후에는 이런 수련은 무의미해졌다. 폭발적인 내 력을 근력에 싣는 요령을 익힌 후 순간적이나마 수십 배의 힘도 뽑아낼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육체 수련보다는 정신 수련에 더욱 무게를 두기 시작했고, 강기(剛氣) 를 익힌 후 육체 수련은 더 이상 할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왜냐하면 그때를 전후하여 그는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새롭게 더욱 강인한 육체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그녀에게 남은 것은 환골탈태를 거쳐 보통 사람들보다는 월등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강화된 육체뿐이었다. 하지만 말이 좋아 강화된 것이지, 처음부터 형편없이 가느다란 이 육체가 힘을 내면 얼마나 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일단 단단한 근육이 붙고 또 그곳에 원활하게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 해 줄 혈관이 두텁게 발달하지 않은 팔다리는 큰 힘이 되어 주지 못했다.
크루마의 지하 궁전에서 탈출 시도를 했을 때, 그녀가 기사들에게 뭇매를 맞은 것도 당연했다. 일단 그들은 육체적으로 강인한 남자였다. 그것도 엄청난 수련을 거 친. 거기다가 맹목적인 견인족들과 달리 원활하게 돌아가는 대가리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라면 그녀의 수십 배가 넘는 힘을 한꺼번에 낼 수 있었다. 근위 기사단의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들을 상대로 두 명이나 부상을 입힌 것도 알고 보면 상대가 방심한 덕분에 얻어 낸 행운에 가까웠다. 약간의 가속이 붙었을 때 얘기기 는 하지만 1초에 2, 30미터를 움직일 수 있는 기사들을 상대로 내공 없이 승부를 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달리다가 지쳐서 쓰러지는 소녀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제임스의 입가에는 살며시 미소가 어렸다. 저 머나먼 아르곤의 오지(奧地)에서 그녀를 처음 알게 된 후부터 그녀는 계속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헤즐링인지 인간인지조차 헷갈리는 그녀였지만, 어찌 되었건 그녀는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에게 검술로써 패배를 안겨 준 유일한 인물이었 다. 그것만 해도 제임스의 존경심을 사기에 충분한데, 그녀는 미네르바의 함정에 빠져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는 것 이다. 전혀 기죽지 않고 말이다.
그녀를 납치하는 등 지어 놓은 죄가 많은 까미유는 그녀에게 공포심을 느낄지 몰라도 제임스가 바라보는 다크에 대한 시각은 조금 달랐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 망을 잃지 않고 조금의 틈이라도 엿보이면 돌파하겠다는 그 근성, 정말이지 기사로서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제임스가 알고 있는 한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살아남고자 하는 마음이 진짜로 강했다면 포로가 된 즉시 코린트에 협조하겠다고 공언했을 것 이다. 원래가 자신의 삶을 중시하는 놈들은 남의 삶 따위는 하찮게 생각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빈말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 번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는 사람, 최악의 상황에서도 국가와 황제를 향한 충성심에 변함이 없고 약자를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강자들과 싸우는…, 그것이야말로 제임스가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기사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운명의 장난 덕분에 서로가 적인 채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제임스가 그리는 이상적인 기사상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조금의 오해가 가미된 착각이라 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것만 해도 그의 존경을 사기에 모자람이 없는데, 그녀의 용모는 남자라면 누구라도 빠져들 만큼 사랑스럽지 않은가? 거기에다가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에 따라 그녀를 책임지면서 곁에서 지켜보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제임스는 점점 더 그녀에게 빠져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될 수 있는 한 그녀에게 너 무 가까지 다가가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여자를 많이 다뤄 봤던 그의 본능이 그렇게 만드는 것도 있었지만, 일단 그녀는 포로였고 가장 중요한 죄수였기 때문 이다.
“왜 여기에 계시나요? 안 들어가실 건가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제임스는 흠칫하며 시선을 뒤로 돌렸다. 그의 등 뒤에서 무녀가 다소곳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임스는 무녀가 이토록 가깝 게 다가올 때까지도 몰랐을 정도로 딴 곳에 신경 쓰고 있었던 자신을 책망했다. 그랬기에 무녀에게 대한 말투도 은연중에 약간 딱딱해져 있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예? 예, 방금 왔습니다.”
“그러십니까? 함께 들어가시지요.”
무녀는 슬며시 제임스의 옆쪽에 자리를 잡고 마법진 안으로 들어섰다. 신분상으로 따지자면 제임스가 앞장서고 그녀가 뒤에서 따라가야 옳았지만, 그는 검객 특유 의 습관상 딴 사람이 뒤에 서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자그마한 불쾌감을 알아챈 후부터 그녀는 제임스와 함께 걸어갈 때는 언제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높은 신분과 직책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하는 그에 대한 자그마한 배려였던 것이다.
“오늘도 열심이시네요, 아저씨.”
“으으흠!”
아름다운 무녀는 반가이 인사를 건넸지만, 소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헛기침을 세차게 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두통은 어떠신가요?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소녀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없자 무녀는 다시금 부드러운 어조로 끈질기게 말을 걸었다.
“두통이 일어나는 횟수가 조금 줄지 않았습니까?”
“너 따위와 다시 말을 한다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소녀는 투덜거리며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일으켰다. 소녀는 이곳에 온 후 매일같이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러면서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또다시 기회가 올 것이다. 그때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충분한 대비가 되어 있어야만 했다. 소녀를 감시하는 기사들은 그녀가 마법진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하 지 않았기에 그녀는 마음껏 육체를 혹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투덜거리면서 실내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무녀는 생긋 미소만 보냈다. 여태껏 수련을 하며 별의별 사람들을 다 겪어 본 그녀에게 있어서 그런 퉁명스 런 반응쯤은 별로 특별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녀가 몸을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여태껏 무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기다리고 있던 제임스가 다크를 향해 말했다.
“좋은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드로아 대 신전에 치료를 부탁했더니 대신전으로 온다면 치료를 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답니다.”
“뭔데?”
“원칙적으로 정신계 마법에 대한 부작용을 치료받는 것은 드로아 종단의 무녀여야 한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치레아 대공께서는 여자시니까 무녀로 등록만 하신 다면 치료를 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나보고 무녀가 되라고? 오래 살다 보니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네.”
퉁명스럽게 말하는 다크를 향해 제임스는 조리 있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무녀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무녀로 등록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태껏 대공을 괴롭히던 그 두통은 완전히 없어질 겁니다.”
“겨우 두통 때문에 나보고 팔자에도 없는 무녀가 되라는 말인가?”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이대로 계속 그것을 방치한다면 언젠가는 미쳐 버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점차 증상이 가벼워지기 시 작해서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운에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한 번 안 한다고 했으면 안 하는 거야. 뭐 미쳐 버린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겠지. 도중에 치유된다면 그것도 좋고.”
다크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툴툴거렸지만, 제임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만약 진짜로 그녀가 미쳐 버린다면 그 뒷수습이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 다. 제임스는 다크와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시간 동안만 대화를 한 후, 헤어지자마자 곧장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실로 갔다.
“그녀가 드로아 교단으로 가는 것을 거절했사옵니다, 전하.”
“그래? 그렇다면 일이 어려워지기 시작하는군.”
“예, 전하.”
“그렇다면 어떻게 한다? 그녀가 미칠 때까지 여기다가 잡아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드래곤에게 인계를 할 수도 없고 말이야. 크루마와 뒷공론까지 했다는 것을 드래곤이 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말이야. 이래저래 문제군.”
이때, 뒤에서 듣고 있던 레티안이 참견해 왔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사옵니까? 전하.”
그 순간 제임스와 로체스터의 시선이 레티안 쪽으로 즉시 움직였다. 둘 다 뭔가 좋은 대답을 구하는 듯한 표정들이었기에 레티안으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러하듯 나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치레아 대공의 처리는 본국으로서는 가장 골치 아픈 사안이옵니다. 죽이자니 뒤가 껄끄럽고, 또 드래곤에게 넘기자니 크루마와의 맹약이 걸린다는 것이옵니다. 2차 제국 전쟁에서 본국이 막대한 희생을 떠안았을 때, 크루마는 참전하지 않고 조용히 힘을 키워 왔지 않사옵니까? 그런 만큼 크루마의 신경을 건드린다는 것 또 한 별로 본국에게 유익하지 않사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어떻게?”
“일단 치레아 대공을 처형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옵니다. 물론 드래곤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게 비밀스럽게 소문을 내야 하지만, 크루마에는 그 정보가 들어 가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크루마는 그 사실을 드래곤에게 알릴 가능성이 크옵니다.”
레티안의 말에 로체스터가 약간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설마, 그들이 그것을 드래곤에게 알려 봐야 좋을 것이 없을 텐데… 그리고 그들은 치레아 대공의 뒤에 있는 드래곤의 존재를 아직 모르는 것이 아닐까? 만약 미네르바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드래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녀를 납치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거야. 만약 드래곤에게 그 사실이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 면 크루마는 곧장 멸망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을 잘 알 테니까.”
레티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인했다.
“물론 전하의 말씀도 옳으시옵니다. 하지만 그녀의 두통은 정신 마법의 후유증이 아니옵니까? 그것을 보면 그들은 정신 마법을 동원하여 치레아 대공을 신문했음 이 틀림없사옵니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그들은 그녀와 드래곤의 관계를 알아냈을 것이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국에다가 그 골치 아픈 일을 팔밀이한 것이지요.” “일리가 있군.”
“예, 그들은 본국에서 치레아 대공을 죽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사옵니다. 그런 다음 드래곤에게 밀고하면 곧장 본국은 파멸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옵니다.” “아니지, 그건 경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 만약 우리 쪽에서 화풀이하러 온 드래곤에게 전후 사정을 알려 준다면 어떻게 되겠나? 드래곤도 바보가 아닌데, 설마 한쪽 말만 듣고 일을 처리할 리가 없지 않나? 치사한 방법을 동원해서 그녀를 잡아들인 것은 그쪽이 아닌가 말이야.”
“그렇지 않사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짓은 슬쩍 숨기고 드래곤에게 코린트가 강압적으로 시켰기에 어쩔 수 없이 했다고 말할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렇게 되면 큰일이 아닌가? 그것을 잘 알면서도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자는 이유는 뭔가?”
“그러면 당연히 드래곤이 응징하기 위해서 올 것이고, 그때 본국에서는 그녀를 드래곤에게 양도하는 것이옵니다. 아마도 치레아 대공은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곳 으로 잡혀 왔는지 드래곤에게 고자질하겠지요. 그러면 크루마는 끝장이옵니다. 또 설혹 크루마가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맹약을 깬 것은 자신들이기에 이 쪽에다가 뭐라고 탓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더 이상 본국에서 뒤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겠사옵니까?”
로체스터 공작은 이 기가 막힌 계략에 놀랐다는 듯 감탄사를 터뜨렸다.
“호오! 정말 기가 막힌 계책이군, 그래.”
“과찬이시옵니다, 전하.”
“그럼 지금부터라도 슬슬 소문을 퍼뜨리게.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야. 크루마 쪽에서 이쪽의 속셈을 눈치 챈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뿐더러 더 이상 그런 잔꾀를 써먹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게. 크루마는 똑같은 수단에 두 번 속을 만큼 만만한 놈들이 아니야.”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전하.”
이때 밖에서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앙 통신실에서 전하께 전할 급한 통신문이 있다고 하옵니다.”
“들라고 해라.”
“옛! 전하.”
곧이어 나이가 꽤 많아 보이는 노마법사가 들어와서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로체스터 공작 전하를 뵈옵니다.”
노마법사는 지체하지 않고 그가 가지고 온 서류를 건넨 후 말했다.
“일단 현 지점에 대기하라고 일러 놨사옵니다. 용병 기사단의 향후 행동에 대한 지시를 조속히 내려 주시옵소서.”
“알았네, 물러가게.”
“옛, 전하.”
노마법사가 물러간 후 로체스터 공작은 서류를 쭉 훑어봤다. 그런 다음 그것을 레티안에게 건네며 말했다.
“기사단까지 괴멸시키는 것을 보면 몬스터들의 세력이 아주 대단한 모양이야.”
서류에 쓰인 내용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기에, 레티안은 모든 것을 빠른 속도로 훑어본 후 담담하게 물었다.
“용병대장이 건의한 대로 타이탄의 잔해를 추격하라고 이를까요?”
로체스터 공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지시를 내릴 필요도 없네. 아마도 그는 벌써 잔해를 따라 이동하고 있을 거야.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말이지.”
“만약 그가 독단적으로 행동하려고 한다면 내부에서 충돌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용병들은 그의 말을 따른다고 해도, 마법사들은 그의 부하가 아니니까요.”
“후후훗, 누가 감히 그에게 반항하겠나? 반항하다가 몇 대 맞고는 지시에 응할 테지. 그건 그렇고, 까미유와 로젠은 어떻게 되었지? 아마도 며칠 내로 그 녀석들을 써먹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예, 퇴원하는 즉시 근위 기사단 기동 연습장으로 가라고 지시해 뒀사옵니다.”
“좋아, 그들에게 지급할 타이탄은 기동 연습장에 도착했나?”
“예, 전하, 분명히 네 대의 적기사이 도착한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레티안은 이렇게 말한 후 로체스터 공작을 슬쩍 살펴봤다. 그녀는 분명히 네 대의 적기사 생산하여 그곳으로 보내라던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를 받았었다. 하지 만 그곳으로 보내지고 있는 초특급에 랭크되어 있는 기사는 다섯 명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혹시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숫자까지 말하며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슬쩍 고개만 끄덕임으로써 그녀의 보고가 틀림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렇다고 로체스터 공작이 말하지도 않는데, 자신 이 왜 네 대만을 보내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기에 그녀는 그 부분을 슬쩍 넘긴 후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생산창에 가서 받아가라고 하면 될 것을 왜 기동 연습장까지 가라고 하셨사옵니까?”
“어차피 그 녀석들은 기동 연습장으로 가서 여태껏 빈둥댔던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지. 오랫동안 검술 연습도 안 했을 텐데, 곧바로 타이탄을 지급한 후에 전장 으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지만 레티안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제임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경은 당장 근위 기사단 기동 연습장으로 가게. 원래는 그 말썽꾸러기들의 훈련을 용병대장에게 맡길 계획이었는데, 그는 지금 임무를 맡아 없잖나. 그렇다고 이 렇게 어수선한 상황에서 내가 직접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아무래도 자네 정도는 되어야 그놈들의 상대가 되지 않겠나?”
제임스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거기에 도착하면 네 대의 적기사I이 도착해 있을 거야. 그것을 까미유를 제외한 전원에게 분배해 주도록 하게.”
“예? 그렇다면 까미유는…….”
로체스터 공작은 일부러 제임스의 말을 끊으며 확정적으로 말했다.
“경은 그렇게만 하면 돼. 그럼 이만 가 보게나.”
제임스 역시 레티안과 같은 의문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까미유의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대답해 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 다.
“옛, 전하.”
레티안은 제임스가 떠나고 난 후 자신이 가지고 왔던 서류를 공작에게 건넸다. 레티안은 이것을 제임스에게까지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아직까지 보고하 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크라레스 쪽에서 도착한 최신 정보이옵니다.”
“벼룩이 보낸 것인가?”
“예, 전하.”
로체스터는 서류를 읽어보다가 문득 말했다.
“왜 크라레스는 치레아 공국에 몬스터가 침입한 것을 방관하고 있는 거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상부로부터 지시가 있었다고 하옵니다. 치레아 공국의 파괴를 막기 위해서, 그곳에서의 접전은 칙명으로써 불허한다는 것이지요.”
레티안의 설명이 도움이 되지 않은 듯,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야. 아무리 치레아 공국이 독립 국가고, 또 치레아 대공이 자리를 비운 상태라고 하지만 그곳은 크라레스 제국의 속국이 아닌가? 그녀가 없으니 그 공백을 크라레스의 황제가 책임져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몬스터들과 모종의 협약을 맺은 것 같사옵니다.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지 않사옵니까?”
레티안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모종의 협약이라고?”
“예, 사실 치레아에서 몬스터들을 상대로 대규모 접전을 벌인다면 그곳은 폐허가 될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러니 크라레스는 치레아를 몬스터에게 그냥 넘겨주는 대가로 그곳을 파괴하지 말라든지, 뭐 그런 밀약을 맺지 않았을까요?”
“쯧쯧, 레티안 경은 간혹 가다가 한 번씩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예?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전하.”
“경은 쉬운 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해서 본질적인 문제를 놓칠 때가 있어. 이것은 인간들끼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 무식하기 짝이 없는 몬스터와의 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해. 그렇다면 한번 말해 보게. 크라레스가 왜 그놈들과 밀약을 맺어야 하지?”
“방금 전에 말씀드렸지 않사옵니까? 치레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로체스터 공작은 딱하다는 듯 혓바닥을 차면서 말했다.
“쯧쯧, 그게 아니지. 몬스터들이 인간들과 맺은 그딴 협약을 제대로 이행할지도 의문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거야. 크라레스 황제의 입장에서는 치레아가 몬 스터들에게 짓밟히는 것이 훨씬 유리해. 치레아 대공은 없어졌지만, 그녀의 영지인 치레아가 몬스터 따위에게 뭉개졌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과연 그녀를 돌봐 주는 드래곤이 가만히 있을까?”
레티안은 그제야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을 보며 로체스터는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크라레스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몬스터들이야. 그 때문에 전번에 뚱뚱한 놈이 사신으로 와서 구원을 청한다고 주절거리지 않았었나? 하지만 치레아가 짓밟 힌다면 그 모든 것을 드래곤이 한꺼번에 해결해 줄 거야. 자기 아들의 영토에 침입한 몬스터들을 드래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그 저주받을 생명체에게는 그 정 도는 아주 손쉬운 일이니까 말이야. 그것을 보면 뭔가 있는 것이 분명해. 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과연 그렇사옵니다, 전하. 즉시 크라레스에 대한 첩보 활동을 더욱 강화하라고 이르겠사옵니다.”
“나도 설마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몬스터의 배후에 크라레스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군. 하지만 과연 그들이 무슨 재주 를 부려서 그 포악하고 무식하기 그지없는 몬스터들을 포섭했을까? 그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