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4권 3화 – 리치가 된 마왕
리치가 된 마왕
“우와아아! 드디어 퇴원이로군요.”
신이 난 듯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 까미유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로젠이 투덜거렸다.
“야, 제발 호들갑 좀 떨지 마라. 제2근위대장이자, 후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 원……. 체통을 생각해야지. 낯 뜨거워서 함께 다니겠냐?”
“그러는 형은 기분 좋지 않수? 나는 감옥에서 풀려난 기분인데…….?”
헤벌쭉 미소를 지어 대는 까미유를 바라보며 로젠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야야, 안 그래도 내가 감옥에서 풀려난 해방감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데 옆에서 계속 밀래? 오스카 너, 퇴원 기념으로 오늘 나한테 죽도록 맞고 싶냐?”
까미유가 뜬금없이 옆에 앉아 있는 자신을 보며 시비를 걸어 오자 오스카는 황급히 변명했다.
“제가 아니라 옆에서 스칼이 미는 거라니까요.”
슬쩍 옆에 앉은 스칼에게 책임을 떠넘기자 스칼이 펄쩍 뛰며 변명했다.
“옆에 각하께서 앉아 계신데 어떻게 제가 감히 오스카를 밀 수가 있겠습니까? 마차가 비좁은 거라니까요.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어떻게 마차 한 대에 다섯 명씩이나 타고 갈 수 있단 말입니까?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와 크로데인 후작 각하께서 퇴원하시는데 겨우 마차 한 대만 보낸 놈들이 죽일 놈들이죠. 그러니까 나중 에 거기에 도착한 다음 이따위로 마차를 배정한 수송부 장교 놈을 작살내 버리십쇼.”
“으음, 물론 그것도 생각해 두고 있었어. 하지만 두들겨 패버리고 싶은 수송부 장교 놈은 여기에 없는데 어떻게 할까? 참, 이것은 어때? ‘필요는 창조의 어머니’라 는 말이 있지 않나?”
능글능글 미소 짓는 까미유의 속마음을 모르겠다는 듯, 두 부하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데요?”
“너희 두 놈이 옆에 찌그러져 있으면 내 공간이 조금 더 확보되지 않을까?”
능청스레 말하는 까미유를 향해 오스카와 스칼이 기가 차다는 듯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원, 농담도…….?
“농담? 내가 지금 농담하는 것으로 보이나? 죽고 싶냐?”
오스카와 스칼은 까미유의 시퍼런 눈동자에 질려서 옆으로 사사삭 이동하여 최대한 붙어 앉았다. 사실 그들이 타고 있는 마차는 세 사람이 충분히 앉아서 갈 수 있 는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 탑승할 때 발렌시아드 패거리와 함께 자리할 수 없다고 농담을 흘리며, 앞에 발렌시아드 기사단 둘을 앉게 하고 뒷좌석에 근위기사단 패거리 셋이 앉았던 것이다. 그런데 한참 가다가 자리가 좁다고 몰아붙이는 데야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까미유가 뒷좌석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앉아서 히히덕거리고 있는 꼴을 보며 로젠이 말했다.
“이봐, 메글리 경.”
“옛, 대공 전하.”
“저놈하고 자리 바꿔 줘. 저래서야 오스카하고 스칼이 너무 불쌍하잖아.”
까미유는 로젠의 말에 얼른 반박을 하며 나섰다. 사실 두 부하들에게 시비 건 것은 순전히 재미를 위해서 그런 것이지, 자리가 비좁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 이다.
“메글리는 좋을지 몰라도 저는 싫다구요. 여기가 얼마나 편한데…….?”
“괜히 죄 없는 부하들 들볶지 말고 이리로 와. 여태까지 쌓여 있던 스트레스를 그런 식으로 엉뚱한 데 화풀이하면 로체스터 전하께 일러바친다.”
로체스터 공작을 들고 나오자 까미유는 언제 자신이 그랬냐는 듯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막 나가는 그라 해도 로체스터 공작은 좀 상대하기가 껄끄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예? 제가 언제 싫다고 했습니까? 헤헤. 이봐, 메글리 경, 이쪽으로 와 주게. 발렌시아드 대공 전하께서는 내가 옆으로 가기를 원하시니 말일세.”
“그러죠, 각하.”
자리를 바꿔 앉은 후 까미유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는 점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요즘 ‘대’ 발렌시아드 공국을 다스리시는 대공 전하의 지위가 밑바닥으로 떨어진 모양이죠? 직접 처리하지 못하시고 로체스터 전하의 이름까지 파시는 걸 보 “면…….”
까미유는 일부러 ‘대’에다가 힘을 주어 말했다. 키에리 대공과 로젠 대공을 비교하여 비꼬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로젠의 눈초리가 실쭉 가늘어지며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주먹에서 우드드득 소리가 났다. 발렌시아드 공국은 순전히 키에리의
실력에 의해 손에 넣은 광대한 영지였다. 거기에다가 황제로부터 발렌시아드 기사단까지 받았다. 그 정도면 웬만한 국왕에 못지않은 지위였던 것이다. 까미유는 아 무 생각 없이 단순히 농담으로 한 것이었지만, 로젠은 갑자기 그 엄청난 국가를 이어받았다는 것에 대해 심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아버지로부터 물 려받았던 발렌시아드 기사단까지 전멸당했으니,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가 느끼고 있던 자괴감(自愧感)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까미유가 무의식중에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슬쩍 찌르자 로젠은 평상시와 달리 매우 분명하게 분노를 표출했다. 평상시에 온화했던 그가 평상심을 잃자, 마차 안의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로젠은 마스터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키에리로부터 직접 사사받은 매우 실력 있는 검객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까미유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가는 건지 알아요? 형.”
로젠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허탈감을 억지로 참으며 까미유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말투는 매우 딱딱하게 변해 있었다.
“가는 방향을 보니, 근위 기사단 기동 연습장일 가능성이 커 수도가 아니라 코린티아시 쪽으로 가고 있잖나.”
“기동 연습장이요? 우리들은 모두 타이탄도 없는데 거기 가서 뭐 하려구요.”
“글쎄, 그건 가 보면 알겠지.”
그 말을 끝으로 로젠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버렸다.
근위 기사단의 기동 연습장은 지금은 사라져 버린 코린티아시 외곽에 있었다. 물론 그때는 근위 기사단을 위해서 가까운 수도 외곽에 훈련장을 마련해 놓은 것이 었지만, 코린티아시가 먼지로 화해 버리고 케락스로 수도를 옮긴 후에는 얘기가 조금 달라졌다. 근위 기사단의 기동 연습장에서 훈련을 하게 되는 타이탄은 모두 다 근위 타이탄, 즉 코린트가 보유하고 있는 최신형 타이탄이 된다. 그렇기에 첩자들의 이목을 차단하기 위한 각종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야 했고, 그런 만큼 그 면적도 엄청나게 넓었다. 또, 그것은 타이탄이 움직일 충분한 공간 확보라는 것 외에도 첩자가 육안으로 관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 로 근위기사단 기동 연습장은 그 면적이 엄청나게 넓었고, 그런 것을 또다시 케락스시 옆에 하나 더 만든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사라져 버린 코 린티아시 쪽으로 방향을 잡고 3일 간의 마차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드넓은 코린토비아 평원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 그들은 마차의 오른쪽 창문을 통해 선홍빛 해가 검붉은 대지 아래로 잠겨 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사방이 모두 핏빛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자연이 하루에 한 번씩 만들어 내는 장관이었다. 그 황홀한 장관을 바라보던 까미유의 눈이 이채롭게 빛 났다.
“형! 혹시 느꼈수?”
“뭘?”
“사악한 뭔가가 저 앞쪽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까미유가 가리킨 방향은 마차가 지금 나가고 있는 그 방향이었다. 즉, 남쪽이라는 말이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런가? 너무 희미한 느낌이라서… 내가 잘못 느낀 것인지도 모르지.”
그렇게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까미유는 자신의 느낌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을 알아채지 못한 로젠에게 설명할 방법이 막막했 기에 그냥 얼렁뚱땅 넘겨 버렸다. 또 로젠이 뭣 때문인지 확실히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인데 로젠보다 자신의 실력이 높은 것 같은 티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해는 져 버렸고, 마차는 어두운 밤길을 희미한 등잔불에 의지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겨울이라서 낮이 짧았기에 어쩔 수 없이 강행군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세 시간 정도 더 달린 후 그들은 여관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까미유는 늦도록 잠들 수 없었다. 점점 더 밤이 깊어갈수록 남쪽에서 느껴지는 사 악한 기운이 더욱 또렷하게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까미유는 창문을 열고는 은은하게 마기가 뿜어져 나오는 남쪽의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내뱉듯 말했 다.
“저 남쪽에 뭐가 있는 거지?”
까미유는 그것이 매우 궁금했다. 자신이 병실에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동안 세월은 흐르고 흘러 또 다른 사건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까미유에게 시간이 있었다면 그는 곧장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혼자, 혹은 부하들을 이끌고 달려갔을 것이다. 그에게 주어져 있는 제2근위대장이란 직책은 그만큼 자유스러웠던 것이다. 일단 사건을 저지른 후에 보고를 올려도 될 정도의 막강한 권한이 주어져 있었다.
제2근위대가 이렇듯 전폭적인 권한을 쥐게 된 것은 지금은 권력의 전면에서 물러나 있는 키에리 발렌시아드 대공의 배려였다. 그는 제2근위대에 단독 행동을 할 수 있을 만한 막강한 권한과 함께 충분한 힘 또한 줬다. 적기사 다섯 대와 거의 마스터급에 근접하는 최고급의 검객들만 배치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제2근위대가 그토록 엄청난 권한과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첫 번째 대장으로 임명되었던 제임스 드 발렌시아드 후작의 인품을 모두가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대장으 로 임명된 까미유 드 크로데인 후작 또한 약간 엉뚱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이어받기에 손색이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아무리 단독 행동을 할 수 있는 전폭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까미유는 밤하늘의 저편에 은근히 퍼져 있는 사악한 기운을 보며 궁금증 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지금 권한만 있을 뿐 힘이 없었다. 전번 전투에서 모든 타이탄을 상실한 탓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지금 수행해야만 하는 로체스 터 공작의 지시가 있었다.
‘왜 기동 연습장으로 가라는 것일까?”
까미유는 창문을 닫고는 천천히 걸어가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어쨌든 이틀 후면 로체스터 공작의 계획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크라레스 황성 지하 깊숙이 마련되어 있는 마왕의 안식처. 예전에는 국가반역죄 같은 것을 저지른 중죄인들만이 수감되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마왕의 안식처로서 새롭게 변모해 있었다. 죄수들을 수감하던 감방監房)들과 그들의 탈출을 막던 수많은 구조물들은 어느새 철거되어 없었고, 드넓은 광장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광장의 바닥에는 수많은 마법진들이 설치되어 어둠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거대한 마법진의 수는 총 여섯 개로, 자그마한 한 개의 마법진을 사이에 두고 네 개의 마법진이 둘러싸듯 존재하고 있고, 그 밑에 또 다른 마법진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마왕은 제일 밑에 따로 떨어져 있는 마법진 위에 서 있었다. 마왕은 지 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다 짜내고 있는 듯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흉악한 모습을 하고는 마법진을 발동시키고 있는 중이다.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있는 마왕의 주변으로 사악한 기운이 엄청나게 모여들고 있다. 그가 모아들인 사악한 기운은 주위에 모여 있는 네 개의 증폭 마법진을 거 쳐 중앙의 마법진으로 집약된다. 크라레스의 황성인 크라레인시의 외곽을 방어하게 되어 있는 방어 마법진의 모든 힘이 이곳 증폭 마법진으로 흘러들고 있기에 마 왕의 힘은 수십 배로 증폭되어 세찬 마나의 폭풍을 만들고 있다. 토지에르라는 나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을 그 매개체로 삼고 있는 한, 그가 뿜어낼 수 있는 마력(魔 力)에는 한계가 있기에 이런 거추장스러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마왕의 모든 힘이 집중되는 그 순간, 내밀고 있던 마왕의 손이 마나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청난 폭주가 시작되려 했다. 그것을 보고 마왕의 뒤에 서 있던 몇몇 하급 악마들이 뛰어들어 그것을 막고자 했으나 이미 중앙의 한 지점에 뭉쳐진 마나의 양은 그들의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고 있었다.
“피하시옵소서.”
“이제 금방이다. 네놈들은 마나가 폭주하지 못하게만 막아!”
마왕이 여태껏 불러들이는 데 성공한 다섯의 하급 악마들은 사력을 다해 마왕을 도왔다. 그리고 토지에르는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도 흉측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하면 되는 것이다. 그는 어둠의 마왕, 마계에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최고의 다섯 마왕 가운데 하나였다.
여흥으로 즐기는 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과도한 수고와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악조건을 뛰어넘어 목적을 달성하면 그 쾌감은 더욱 진할 것이 분명했다. 초인적인 노력으로 토지에르라 불리던 늙은 육신의 모든 것을 다 쥐어짜는 그 순간 암흑의 기운이 한군데로 모이며 엄청난 회오리를 형성하기 시작 했다. 그리고 한순간 그 회오리는 흩어져 버렸고 그 속에는 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악마가 검은 날개로 몸을 감싼 채 송곳니를 드러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성공했는가?”
악마는 천천히 다가와서는 토지에르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음침하면서도 사악한 어조였다. “지고하신 어둠의 마왕께서 이계 정복에 다시금 소인과 같은 미천한 종을 불러 주셔서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마왕은 이미 탈진해 버렸는지 그 ‘미천한 종에게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는 정말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극심한 중노동을 한 것이다. 폭 주하는 것을 바로 잡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엄청난 폭발에 휘말려 마계로 강제 소환당할 뻔한 것이다. 물론 그가 힘들여 여기까지 끌고 온 하급 악마들과 함께 말 이다.
악마는 마왕의 상태를 지긋이 바라본 후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마왕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나를 뿜어 넣었다. 그 역시도 하급 악마이기는 했지만, 지금 이곳 에 모여 있는 다른 놈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했고, 어느 정도 고위급의 흑마법도 사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마왕은 정신이 드는지 고개를 들어 악마를 천천히 올려다보며 투덜거렸다.
“발록(Barlog) 따위를 소환하는 데도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발록은 여전히 음침한 어조로 말했다.
“주인님, 예전에는 드래곤의 육신을 빼앗아서 사용하지 않으셨사옵니까? 그런데 왜 이번엔 이렇게 허약한 인간의 몸을…….”
“멍청한 것! 전에는 그것 때문에 드래곤들이 개입하는 바람에 실패하지 않았더냐? 똑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하라는 말이냐?”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힘드실 것이옵니다, 주인님. 그 늙은 육신과 허물어져 가는 뼈대, 그리고 물렁한 뇌에서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은 보잘것없기 때문입니 다.”
“그것은 나도 알고 있으나…….?”
“이렇게 하면 어떠하는지요. 그 늙은 육신으로도 몇 배의 힘을 끌어낼 방도가 있사옵니다. 생사를 뛰어넘어 정신만이 남게 하는 것이옵니다. 원래가 정신은 주 인님의 것, 육신의 장벽을 뛰어 넘는다면 어떻겠사옵니까?”
더 이상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 마왕이 외쳤다.
“리치(Lich)가 되라는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주인님.”
“그래,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군. 크하하하핫!”
리치라는 것은 매우 우수한 실력을 지닌 고위급의 흑마법사가 마법의 힘으로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보석 같은 어떤 유형의 물체 안에다가 가둬 버리면서 탄생하게 되는, 속된 말로 ‘걸어 다니는 시체’였다. 물론 일반적인 언데드(Undead)들과는 달리 마법도 사용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리치는 이미 자신의 모든 생명의 근원을 어 떤 물체에 가둬 버린 후였기에, 나이를 먹지 않을뿐더러 죽지도 않는다. 또 웬만한 상처 따위로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없다. 리치를 죽이는 방법은 본체를 완 전히 박살 내 버리든지, 아니면 그가 생명력을 저장해 놓은 물체를 파괴하는 것뿐이었다.
대부분의 언데드들 중에서도 리치는 매우 특이한 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좀비(Zombie) 같은 대부분의 언데드 몬스터들의 경 우 그들이 무덤에서 살아 나오는 것은 타의적인 것이다. 하지만 리치는 자신 스스로 불사의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영생을 얻는다는 매우 훌륭한 이점이 있 음에도 대부분의 흑마법사들이 리치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일단 그 외모에 있다.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리치가 되면 거의 말라비틀어진 살점이 붙어 있는 뼈다귀뿐인 시체의 형상으로 바뀌게 된다. 마법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을 뿐, 그 육체는 이미 사멸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치가 되는 것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눈에 띄는 그놈의 외모 덕분에 꼼짝하기 힘들다. 리치가 된 그 순간, 그는 ‘나는 아주 사악한 흑마법사니까 누구든 지 나를 죽인다면 영웅이 될걸?”하고 공포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모든 생명을 담아 놓은 물체의 보관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누군가 가 슬며시 숨어 들어와서 그것을 파괴한다면 그의 목숨은 바로 그 순간 끝장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리치가 된 그 순간부터 그는 누구도 찾기 힘든 산간벽지에 숨 어 살아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흑마법사들이 리치가 된다면, 얻는 것도 많지만 잃는 것은 더욱 많다. 그래서 흑마법사들은 영생이 탐나기는 하지만 절대로 리치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다. 하지만 현재 마왕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더욱 많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마왕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하잘것없는 육신 따위는 어떻게 되 어도 상관없었다. 특히나 그 육체는 자신의 것이 아니니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순전히 마왕 마음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