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4권 14화 – 죽음의 기사

죽음의 기사

펄럭이는 망토를 아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기에 그 생김새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농민들이 밀을 거둬들일 때 사용하는 거대한 낫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농민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밀을 거둬들일 시기도 아니었고, 또 이런 무덤 앞에서 무슨 농작물을 거둬들일 것이라고 낫을 들고 설치겠는가? 무덤 을 단장하기에 그 낫의 크기는 너무나도 컸다. 그는 뼈가 앙상하게 보이는 손을 이용해서 큼직한 책자를 뒤적거리다가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클클클클… 바로 이곳이군.”

그곳은 바로 코린트의 모든 전쟁 영웅들이 잠들어 있는 황실의 묘역이었다. 물론 자신이나 그 후손들이 그가 이곳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딴 곳에 장사지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귀족들이나 기사들에게 있어서 이곳에 묻힌다는 것은 자손 대대로 이어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었기에 아직까지 단 한 사람도 이곳에서 잠들 수 있는 특권을 거절한 경우는 없었다.

그는 주위를 잘 살펴봤다. 하지만 예상외로 경비는 아주 허술했다. 코린트 최고의 성역이라고는 하지만, 무덤들이 모여 있는 묘지일 뿐이었다. 무덤 속에 들어 있 을 값진 부장품(副葬品 시체와 함께 넣는 물건들)을 노리는 도둑들 정도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렇듯 경비가 허술한 것이었다. 그는 일단 가장 유명하면 서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의 묘지부터 선택했다.

“어디에 있나?”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찾은 무덤, 고생해서 찾아내긴 했지만 이번에도 그의 예상과는 달리, 위대한 무인의 무덤치고는 너무나도 검소해 보이는 무덤이었다. 그는 상대가 코린트 최고로 지칭되는 무인이었던 만큼 무덤 또한 아주 호화로울 것으로 생각하고 그 순서로 뒤졌기에 시간이 더욱 많이 걸렸던 것이다.

“젠장! 아무리 검약한 것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영웅의 무덤을 이따위로 만들다니, 죽은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도 모르는 것들 같으니라구.” 그는 잠시 투덜거린 후 두 손을 하늘 위로 뻗으며 주문을 외웠다.

“잠들어 있는 위대한 기사의 영혼이여, 대마왕 크로네티오 님의 권능을 받아 그대에게 명하오니 지저(地底)의 혼돈에서 깨어나, 나 캐론(Charon) 일족의 권능을 이어받은 라쿠나의 명령에 따르라.”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라쿠나는 당황한 듯 다시 한 번 주문을 외웠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무덤 안에서 사자(死者)의 응답 소리가 들려와야만 하 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한이 무엇인지 죽은 자가 말하고, 그다음 그 원한을 푸는 것에 대해서 몇 가지 흥정이 오고간 후에 이쪽에서 그를 만족시켜 줄 수 있다면 그는 죽음의 기사(Death Knight)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라쿠나는 당황하여 다시 한 번 책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곳에는 분명히 ‘전사(戰死)’라고 되어 있었다. 전쟁터에서 죽은 인물인 만큼 그 원한은 당연히 뼛속까 지 사무쳐 있을 것이고, 웬만한 조건만 충족된다면 깨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처음부터 좌절된 것이다.

“이럴수가… 어떻게, 전사했는데도 그 어떤 원념(怨念)도 남아 있지 않을 수가 있지?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군.”

무덤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무덤 속을 관찰하던 라쿠나는 이윽고 뭔가 느꼈다는 듯 외쳤다. 그는 사자(死者)를 관장하는 마족인 만큼 정신만 집중한다면 직접 무덤 을 파 볼 필요도 없이 충분히 자세한 관찰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제기랄! 전사한 것이 아니라, 참수(斬首)당한 시체였군. 게다가 이건 위대한 무인 따위가 아니야. 해골 병사(Skelton)로도 만들 수 없는 형편없이 삭아 빠진 뼈다귀…….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따위 장난을 해 놓은 거야?”

투덜거리며 라쿠나는 딴 무덤으로 향했다. 그가 두 번째로 시도한 무덤은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이라는 뛰어난 무사였다. 그녀도 키에리가 전사했다고 전해 지는 바로 그 전쟁, 그러니까 제1차 제국 전쟁에서 크루마와 교전 중에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라쿠나는 리사의 무덤 앞에 서서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이 번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상하군. 이번에도 가짜인가?”

라쿠나는 전번처럼 두 번이나 주문을 외우지 않고, 곧장 무덤 내부의 관찰로 들어갔다. 곧이어 라쿠나는 감탄 어린 신음을 삼켰다.

“정말 대단한 뼈야. 화려한 영기(靈氣)가 감도는군. 진짜가 분명해. 그런데도 왜 응답이 없는 거지?”

잠시 생각해 보던 라쿠나는 그녀가 아무런 원한 없이 죽었다고 결론짓고는 또 다른 무덤으로 미련 없이 자리를 옮겼다. 원념 없이 죽은 기사의 시체는 무슨 짓을 해도 깨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원한을 품은 기사의 영혼은 그 원념이 강한 정도에 따라 복수를 하기 위해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십 년간 세상을 떠돈다. 그런 그들을 죽음의 기사로 만들 수 있었 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육체를 부여받은 후 복수를 위해 날뛰는 마물이 되는 것이다.

마왕은 1천5백 년 만에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후, 세계 정복이 그렇게 만만한 작업이 아님을 곧 눈치 챌 수 있었다. 그것은 1천5백 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 았던 타이탄이라는 마법 병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월이 흘러서 자신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진다면, 마계의 강력한 힘을 지닌 부하들을 불러들여 타이탄을 직접 상대 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불러들일 수 있는 부하들의 양과 질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대마왕 어르신이 생각해 낸 새로운 돌파구가 이것 이었다.

자신을 향해 원한을 품지 않은 기사들에게 다시금 육체를 부여하여, 꼭두각시로 삼는 것이었다. 물론 죽음의 기사들은 예전만큼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겠지만, 그 래도 충분한 숫자는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조종할 수 있는 특별한 엑스시온의 제작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엄청난 힘이 순식간에 굴러 들어오게 되는 것 이다. 그걸 생각해 낸 후 카론 일족 네 명을 불러들여 죽음의 기사들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파워가 좀 떨어지더라도 암흑의 마나에 동작할 수 있는 엑스시온의 개발 작업 또한 병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