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1-1화 : 두 명의 공주.(1)

극악서생 2부 – 31-1화 : 두 명의 공주.(1)


4-7. 두 명의 공주.(1)

세외의 전통 깽판 명문 컬트 왕국 북해빙궁.

단어들이 제대로 조합된 것 같지는 않지만… 하여간 북해빙궁은 이 시대 중원에서 상당히 인정받는 괴물집단이다.

여기서 인정받는다는 건 기본적인 ‘강함’과 함께 비화곡처럼 ‘전통’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 북해빙궁이지만 역시 서로 교류가 적은 세외라 그런지 오해도 많아서 그 중 대표적인 루머는 화천루처럼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졌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건 중원 땅에 모습을 드러냈던 이들이 주로 여자였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고 실제로는 오히려 여자들의 수가 상당히 적은 곳이라고 한다.

이 동굴 입구에서부터 중간중간 경비를 서고있는 무사들이 전부 여자인 건 호위 대상이 공주님 씩이나 되니 그런 걸 테고 말이다.

자옥령이 우릴 안내한 장소는 커다란 바위를 탁자로 삼아 몇 개의 나무 의자가 놓여져 응접실 비슷하게 꾸며진 곳이었다.

“우선 이 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언니의 상세가 좋지 못하니 다소라도 안정이 되었을 때 가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옥령의 말에 따라 얌전히 자리에 앉아서 차 대접까지 받기 시작했더니, 이건 완전히 병 문안 왔다가 대기실에 있는 분위기다.

뭐… 사실 환자의 소식을 알았을 때부터 나도 병 문안을 오긴 와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말이다.

여기서 자옥령이 ‘언니’라고 칭한 환자는… ‘신수성녀(神手聖女) 조예린’이다.

몇 달 전, 황실과 강호 양쪽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인기 스타…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이자 신수성녀로 추앙받는 조예린 공주가 뜬금없이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비교하긴 좀 뭐하지만… 비화곡주 살해사건 만큼이나 강호를 진동시키기에 충분한 초대형 사고인 셈이지만, 실제로는 아직 그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고 한다.

올해는 그녀가 강호행을 나가지도 않았기 때문에 강호 인들은 아직 대부분 모르고 있는 거고, 황실에서만 은근히 난리인 상태라는데 황실 인간들은 그들대로 사정이 있어서 예의 ‘비공식적’으로만 그녀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이 일을 천이단에 의뢰를 한 정계의 실력자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천이단은 그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한 의뢰에 대해서는 한 의뢰인만을 인정한다는 원칙 때문이었는데, 그 선수친의뢰인은 바로 신수성녀 미스 조 본인이었다.

말하자면 그녀 스스로가 잠적해 버린 것인데… 거기에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공주께서는 자신의 병세가 다시 악화될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해서 그 동안 계속 우리 천이단을 통해 모종의 장소를 찾고 계셨다고 하네.”

원판에 버금가는(?) 신수성녀의 지병… 천형칠음절맥(天刑七陰切脈)이 악화되었을 때 그 진행을 늦출 수 있는 장소란 당근 현재의 이 동굴을 말함이다.

문제는 현재의 이 동굴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왜 황실의 고수들이나 강호에서 그녀의 호위를 자처하던 명문정파의 후기지수(後起之秀)들이 아니라 엄한 북해빙궁의 병력이라는 점일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 공주님은 천수성자 어르신의 진전을 모두 이어받은 수제자이니 이번의 나쁜 일로 심화(心火)가 깊어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급박한 상황이 되지도 않았을 것을.”

“예린 언니는 진정 가엾은 분이지요. 그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안주하지 못하고 떠돌았으며 이제 생사의 갈림길에 이른 마당에도 친족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처지라니……”

자옥령은 습관처럼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음성에는 약간 촉촉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중원 황실의 공주와 이 변방 작은 왕국의 공주는… 당근 친자매가 아니다.

그러나 신수성녀의 사부인 천수성자(天手聖者)가 행방불명되기 전 마지막으로 맡은 환자가 바로 자옥령의 어머니였던 모양이고 그때의 인연으로 두 사람은 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돈독한 의자매의 정을 맺고 있었다고 한다.

천수성자… 그러고 보니 이 양반도 은근히 끈질기게(?) 언급되는 인물이다.

비화곡 성지에서 대교의 주화입마를 풀어 줄 때 몽몽이 사용한 수법도 바로 천수성자가 저술한 의학서에 나온 거였고 말이다.

암튼, 이번 일의 결정적 상황은 그녀의 아버지인 현재의 황제가 만든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아끼는 공주가 좀처럼 지병을 치유하지 못해 황실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자 날이 갈수록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그녀가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라는 식의 얘기를 심심치 않게 언급한 모양이었다.

그걸 그녀의 이복 오래비들인 여러 왕자들은 ‘공주를 행복하게 해주는 자에게 나라를 물려주겠다’ 정도로까지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복동생인 조예린 공주를 지 마누라로 삼으려는 싸가지 왕자도 있다는 건 근친결혼이 허용되는 이 시대 황실이니 그럴 수 있는 발상이라고 쳐도… 어쨌든 공주님 입장에서는 명색이 오래비라는 것들이 그런 이유로 자신을 차지하려고 드는 자체가 매우 환장하실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조예린이 아예 깽판을 놓자는 마음으로 잠적을 해 버린 건 아닌 모양이었다.

혐오감에 의한 일종의 울화병으로 인해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버린 그녀에게 있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의 요양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던 것이다.

평소의 그 좋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멀고 먼 북해빙궁에서 달려 온 자옥령만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된 조예린의 안타까운 사연도 그렇고, 은인의 제자이자 의자매인 조예린을 돕기 위해 자신의 금기를 깨고 ‘여름에’ 중원으로 달려온 자옥령의 의리…

이런 걸 계산적으로만 따져보는 건 참으로 미안한 노릇이겠지만 나로서는 참으로 기특한 맞춤의 찬스가 아닐 수 없다.

솔직히 애초에 북해빙궁과 자옥령의 협조를 얻는 일은 지극히 난감했었다.

그 방도를 알아보려고 시도하는 순간 주어진… 누군가 애써 꿰어 맞춰 친절을 베풀어 준 듯한 이 상황… 잘만 되면 자옥령도 날로 먹을 수 있겠고(어감이 좀…) 덤으로 조예린에게 신세진 것도 갚는 셈이며, 삼태자와의 관계가 애매해질 경우 조예린이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도랑치고 가재잡고,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헐어 군불 때며 그 불에 가재 굽고 전봇대로 이쑤시는… 비유가 어째 끝이 좀… 하여간, 내게는 일거잔득(?)의 호재이다.

단 하나 불안한 요소가 있다면… 내 인생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했을 때… 그가 과연 정말로 이렇게 친절한 존재일까…?하는 점이었다.

“일단… 공주의 상세를 내가 직접 보았으면 좋겠소.”

내 말에 자옥령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천우신을 돌아보았다.

“아, 실은 곧 찾을 수 있을 것이라던, ‘빙룡(氷龍)의 내단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이 친구입니다.”

천우신이 새삼스런 어조로 나를 소개하자, 자옥령은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두 손을 모았다.

“실례했습니다. 본녀는 진유준님께서 단순히 언니께 문안을 온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조금 전보다 눈에 띄게 더 정중한 태도로 변하는 자옥령에게 난 여유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뭐. 그 것도 틀린 건 아니지요. 내 아우인 진하운이 전에 성녀께 신세를 진바 있다니 그 인사도 할 겸해서 왔는데, 혹시라도 내 능력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겠죠.”

닥터 몽몽… 난 자네만 믿네.

나와 천우신이 조예린에게 안내된 것은 그로부터 30분 정도가 더 지난 후였다. 동굴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조예린 전용 ‘중환자 실’은 이 시대 식 표현으로 천지간의 정기가 무지 강하게 집중되는 곳이라는데 몽몽의 해석으로도 용어만 ‘에너지’로 바꾸면 크게 틀린 개념은 아닌 모양이었다.

1년, 아니 벌써 2년 정도 전에 잠깐 만났을 뿐인 신수성녀 조예린. 그녀는 우리가 들어갔을 때에도 서늘해 보이는 돌 침상에 의식도 없이 누워 있었는데… 젠장, 농담으로도 더 예뻐졌다거나 그런 말은 꺼낼 수가 없는 몰골이었다. 병색 완연한 미녀도 어느 정도지, 이건 너무 초췌하여 별 관계없는 나도 가슴이 아릿해질 지경이었다.

자옥령은 그런 조예린에게 다가가 얼굴을 매만지며 잠시 눈물을 짓는 것 같더니 곧 입술을 깨물며 내게 부탁한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모두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주시오. 그리고 내가 진맥을 하는 동안 환자의 몸에 돌발적인 변화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해도 결코 날 방해하지 말아 주시오.”

나는 짐짓 심각한 어조로 경고를 한 다음 침상으로 바짝 다가가서 진맥을 짚는 장면을 교묘히 내 몸으로 가리는 자세로 섰다. 곧 조예린의 몸에 탐지기를 침투시킨 몽몽은 별의별 스캔에 이런저런 반응 테스트에… 하여간 근 30분 정도나 온갖 검사를 다 실시했다.

“후우~”

힘들었다기 보다는 지루했던 탓에 길게 한숨을 몰아내며 침상에서 물러서자 자옥령은 내(?) 진맥 전보다 힘겨워하며 숨을 몰아쉬는 조예린에게 달려갔고, 천우신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 동안 천수성자의 금침대법으로 이 동굴의 정기를 환자에게 계속 흡수시켜 왔던 모양인데… 그건 일단 현명한 조치였던 것 같아.”

우선 아는 체 좀 하고 나서……

“거기다가 한기(寒氣)의 정수인 빙룡의 내단과 동천 만년 영삼(東天萬年令蔘) 같은 극양(極陽)의 영약을 복용한 적이 있는…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한 이유도 알겠어. 하지만… 정말 대책이 이게 전부였어?”

“나는 그렇게만 들었네.”

공연히 추궁을 당한 천우신이 조금 억울한 표정으로 자옥령과 조예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갑자기 낯익은 음성이 힘없이 흘러나왔다.

“…저의 소견으로는… 그 정도가 한계였습니다.”

신수성녀였다. 몽몽의 터프 한 진찰 때문에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아, 깨어나셨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비화곡주 진하운의 의형인 진유준 하사라 합니다.”

눈을 뜨니 그나마 조금 전보다는 시체스러움(?)이 사라진 것 같지만, 너무나 야위어서 다시 손대기도 두려울 정도의 조예린은 자옥령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 조치들을 지시한 것은 저였습니다만… 사실… 완치를 자신할 수는… 없었지요. 진유준 하사께서는… 다른 고견이 있으신지요.”

제기… 원판의 경우와는 달리 필요한 수준의 영약이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또 얘기가 달라지잖아?

[ 금침대법의 시행에서 몇 군데를 역순으로 한 이유를 물어 보십시오. ]

에구, 고민은 조금 있다 하고 이미 시작한 명의 놀이(?)까지는 마쳐야겠다.

“시행된 금침대법이 몇 군데는 역순인 것 같던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똑같은 말인데 괜히 문장 순서와 단어를 조금 바꿔 편집하기…! 리포트 베껴내던 실력 나온다.

“…과거… 역혈사진대법(逆穴死進大法)이라는… 특이한 발상의 치유법을… 개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를 조금 응용한 편법이었습니다만……”

어랏? 역혈사진대법?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용어인데?

[ 이번에는 적송조(赤松照)나 유사 계열의 약재를 상용한 일이 있는지를 알아보십시오. ]

“적송조… 또는 비슷한 효능의 약재를 장기간 사용하셨습니까?”

“…지나친 음기의 축적에 의한… 내장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적송조를 반년 정도 사용했습니다. 최근에는 진수초(珍水草) 즙을 병행하고 있었고요.”

[ 앞으로는 진수초 즙의 양을 반으로 줄이라는 지시를 내리십시오. ]

“흐음~ 역시 잘 하고 계셨군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앞으로 당분간 진수초를 절반 정도 줄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연기력 좋고~

[ 이번에는…… ]

사실 나로서는 당췌 뭔 소린지 모를 대화여서 상당히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편집하는 재미로 그럭저럭 얼마간을 버티고 있자니… 결국 먼저 항복을 선언한 것은 신수성녀 쪽이었다. 그녀는 이 정도의 대화도 길게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약화된 상태였던 것이다.

신수성녀가 잠든 후 중환자실을 빠져 나온 나는 자옥령에게 ‘혼자만의 연구 시간’을 요청했다. 제공된 독방에 누운 나는 가상현실 속에서 몽몽의 브리핑을 받으며 나름대로의 대책 연구에 들어갔다.

[ 이 쪽, 주인님의 임시 사용 육체와의 비교 도표를 보면 아시겠지만 두 남녀의 병세는 유사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차이점은 백혈병 등의 치명적 질병에 대한 취약성은 주인님의 임시 사용 육체 쪽이 심했고, 신수성녀 측은 에너지 통로의 타고난 손상이 더 심합니다. ]

< 야, 몽몽. 말 잘라먹어서 미안하다만… 환자가 당장에 오늘 낼, 오늘 낼하고 있는 마당에 지금부터 의대 입시 공부할 일 있냐? >

[ 또 특유의 극단적인 비유법으로 상황을 넘기려 하시는 군요. 하지만, 이번에는 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인님도 기본적인 지식의 습득은 물론이고 상세한 시술을 몸에 익히셔야 합니다. ]

< 어쩐지 뒤에 ‘각오하십시오.’라는 말이 생략된 것 같다, 너. >

[ 각오하십시오. ]

< …너, 원판 몽몽 맞냐? >

[ 원하신다면 코드명 요정몽을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

< 쳇! 완전히 연옥도의 특훈 코치 모드로군. 좋아, 그걸로 가자구. >

[ …현 상황에서 제가 제시할 수 있는 환자의 치유법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환자 자신이 준비하고 있던 시술을 그대로 시행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이미 시술 시기를 놓쳤기 때문에 50% 이상의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우며 5년 이내 재발 확률 70% 이상입니다. ]

< …두 번째는? >

[ 생사금마도결의 기본이 되는 현천기공(玄天氣功)을 이용하여 시술자와 환자의 에너지 흐름을 일체화한 후 역혈사진대법을 시전하는 방법입니다. 시술 도중 시술자의 실수를 계산에서 제외한 다면, 환자의 회복률은 90% 이상이며 재발 확률은 5% 미만입니다. ]

< 뭐야. 그렇게 좋은 방법이 있었어? >

[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요점만을 말씀드리자면, 시술 과정에서 환자보다는 시술자 쪽이 위험합니다. ]

제기, 뭐 그런 게 다 있어?

[ 세 번째 방법을 택한다면 두 번째 시술에서 단점만을 없앨 수 있습니다. ]

< 에이 쒸~ 장난하냐? >

나는 툴툴댔지만, 막상 몽몽의 설명을 들어보니 세 번째 방법도 문제가 많았다.

< 제기… 어째 이런 얘기가 안 나오나 했다! 야! 어떻게 거의 같은 방식인데 상대와의 일체를… 그 뭐냐, 응응응…을 하면서 하면 위험성이 없어진다는 거냐? >

[ 음양의 조화에 대한 인체의 본능적인 에너지 제어 능력은 저의 기계적 간섭보다 우월합니다. ]

으으~ 왜 요정몽도 안 나오고 심각 모드로 간다 했더니 이런 식으로 날 몰아붙이려고 그랬구나. 미치겠네. 대교만 아니면 바로 3번인데… 이를 우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