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3화 – 극악한 정신 교육 이후

극악한 정신 교육 이후

“아아함, 잘 자긴 한 것 같은데 머리가 깨질 듯 아프네.”

다크는 힘껏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어떻게 침대까지 와서 자고 있지? 젠장,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시…….”

다크는 잠시 어제의 일을 생각해 보다 뭔가를 떠올렸는지 안색이 창백해지며 닭살이 마구 돋기 시작했다. 아무리 겉모습은 여자 애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고령의 남자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털이 뿌숭뿌숭 난 사내에게 안겨서 펑펑 울다니. 이거야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술김에 행한 일이 었다. 꼭 따진다면 다크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런 원인을 제공한 놈이 전부 다 잘못한 것이 아닌가? 자신의 잘못은 하나도 없는 것이 다. 분노를 아르티엔에게로 돌리며 어제의 실수를 자위하려고 하는 다크였다.

“이 영감탱이, 가만 안둔다. 변신할 대상이 따로 있지. 감히 사부님의 모습으로 변신을 해? 껍질을 홀랑 벗겨놓을 테닷!”

다크가 씩씩거리며 1층 식당에 도착했을 때, 일행들은 모두 다 식사 중이었다. 한쪽 탁자에 팔시온 일행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식사를 하고 있었고, 또 다른 탁자에 는 드래곤 일가가 앉아서 느긋하게 식사 중인 것이 보였다. 다크는 팔시온 패거리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곧장 드래곤들이 앉아 있는 식탁으로 씩씩거리 며 다가갔다.

아르티엔은 다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얘야, 잘 잤느냐? 어제 보니까 너무 피곤한 것 같더구나. 몸 생각도 해야지.”

다크는 아르티엔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며 얼떨결에 대답했다.

“예? 예. 사…, 아니 예, 그래요.”

“우리들은 이미 식사를 끝냈으니까 너도 빨리 식사를 하거라. 아무리 전날 술을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도 아침을 거르면 안 되지.”

따뜻한 말 한마디를 남기고, 아르티엔은 다크에게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고 있는 아르티어스를 끌고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뭔가에 홀린 듯이 아르티엔을 바라보 고 있던 다크는 아르티엔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주먹으로 탁자를 쾅 소리가 나도록 내리치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이런 빌어먹을! 내가 왜 이러지?”

그녀는 투덜거리며 팔시온 일행이 앉아 있는 탁자로 걸어갔다.

“닮아도 너무 닮았단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부드러운 미소까지 똑같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중얼거리던 다크는 점원에게 외쳤다.

“이봐, 주문받아!”

순간 점원은 인상을 팍 쓰며 다크를 노려봤다. 아무리 손님이라고 하지만 꼬맹이의 말투가 너무 시건방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손님은 왕이니 까.

“아, 예.”

다크도 당연히 점원의 인상이 일그러졌다가 억지로 펴지는 모습을 봤다. ‘내가 누군데 저게 감히…’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크는 일단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안 그래도 마음이 싱숭생숭한데 점원 따위와 드잡이하기도 귀찮았던 것이다.

“이봐, 채소 수프에다가 고춧가루를 듬뿍 뿌려서 얼큰하게 해 가지고 와. 그리고 소시지하고 빵도 적당히 가져와.”

고향의 요리를 어떤 식으로 만드는지 몰랐던 다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고향의 얼큰한 맛을 내려면 고춧가루 외에는 없다는 것밖에 알지 못했다. 그 외의 복잡한 향 신료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고, 또 알고 있다고 해도 이곳에 그런 것이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렇기에 고춧가루를 듬뿍 넣으라는 주문을 한 것이다.

“예? 수프에 고춧가루라니요? 후추가 아닙니까?”

“임마! 후추 뿌려서 얼큰한 맛이 나오냐?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가져와.”

점원은 뭔가 맞받아치려다가 그녀의 옆에 앉아 있는 미카엘의 거대한 등을 힐끔 바라보고는 ‘내가 참아야지’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낮은 목소리로 궁시렁거리며 주방으로 돌아섰다.

“젠장! 내 점원 생활 십수 년에 저딴 주문은 처음 받아 보네.”

다크는 앞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수프를 떠먹고 있는 팔시온을 향해 말을 걸었다.

“야, 내가 언제 그렇게 취했었냐? 한창 마시던 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이상하게 그다음에는 기억이…… 어? 너 얼굴이 왜 그래? 푸하하핫!”

팔시온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자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평상시에도 조금 험악한 인상이 드는 팔시온의 얼굴이었는데, 이제는 아예 괴물이 되어 있 었기 때문이다. 얼굴 전체가 울긋불긋 푸르뎅뎅했고, 오른쪽 콧구멍은 휴지조각을 쑤셔 넣었기에 불룩 솟아올라 있었다. 팔시온이 쪽팔린다는 듯 다시금 고개를 푹 숙이자, 다크는 옆에 앉아 있는 미카엘을 쿡 찌르며 말을 건넸다.

“이봐, 어떻게 된 거야?”

다크는 역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미카엘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탁자에 얼굴이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너도 그러네. 어제 나 빼놓고 너희들끼리 패싸움이라도 한 거야?”

미카엘은 도저히 다크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들었다. 미카엘의 준수한 얼굴도 역시 떡이 되어 있었다. 미카엘은 뺨이 퉁퉁 부어서는 입 안이 다 헐었는지 불분명한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흑흑, 나가이 고기하시 기조기 이러 꼬으 다하다니. 마야 아버이가 보셔다며 기저하셔을 거야.(나같이 고귀하신 귀족이 이런 꼴을 당하다니. 만약 아버지가 보셨 다면 기절하셨을 거야.) 어허허헝.”

미카엘은 너무나도 분하고 원통했는지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다크는 미카엘이 도저히 대답을 할 만한 정신 상태가 아 니라는 것을 깨닫고 비교적 느긋한 성격인 가스톤을 향해 말을 건넸다.

“이봐, 가스톤. 어떻게 된 거야?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고개를 드는 가스톤의 얼굴은 그래도 비교적 깨끗했다. 물론 그것은 미카엘이나 팔시온 등과 비교했을 때의 얘기지 결코 상태가 양호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2층으로 올라간 후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버릇이 없다고 우리들을 밖으로 불러냈거든.”

“그래서?”

“밤새도록 훈계를 들었지.”

“그런데 모두들 얼굴이 왜 그래?”

“조금만 움직이거나 말대답을 하면 정신 상태가 글러먹었다고 엄청 두들겨 맞았거든. 나는 저놈들보다는 그래도 머리가 잘 돌아가잖냐. 끽 소리 않고 있었기에 비 교적 덜 맞았지, 히히힛”

빙긋 미소 짓는 가스톤의 가지런한 치아의 한 군데가 비어 있었다. 히히덕거리고 있는 가스톤이 얄미웠던지 그 앞에서 억지로 식사를 하고 있던 미디아가 화난 어 조로 외쳤다. 그녀의 얼굴 또한 떡이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명색이 여자인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무자비하게 두들겨 팰 수 있단 말인가? 팔시온하고 나 란히 세워 놓으면 거의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둘의 얼굴은 닮아 있었다.

“그에, 너 자나다.(그래, 너 잘났다.) 그리고 저 시추이느 뭐 저어케 시이 나서 처머냐?(그리고 저 식충이는 뭘 저렇게 신이 나서 처먹냐?)”

빵을 수프에 적셔 와구와구 입속에 밀어 넣고 있던 팔시온은 고개를 쓱 들더니 손가락으로 왼쪽 콧구멍을 막고 콧김을 확 뿜었다. 킁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 콧구 멍을 막고 있던피에 절은 휴지조각이 탁자 밑으로 날아갔다.

“킁! 때리면 맞아야지 별수 있냐? 그리고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을 신께 감사한다구. 누가 드래곤에게 그렇게 쥐어 터지고 살아남았다는 거 들은 적 있어? 그 정도면 많이 봐준 거라고 봐야지.”

팔시온의 말에 미디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팔시온이 여태껏 이렇게 자포자기한 모습을 보인 적이 언제 또 있었던가? 그런 것을 보면 확실 히 팔시온의 적응력은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모양이다.

다크는 이런 동료들을 보고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동료라는 것을 잘 알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두들겨 팰 수 있단 말인가? 저 나약한 애들을 두들겨 팰 데가 어디 있다고, 저런 상태로 만들었단 말인가? 다크가 열이 더 받았던 것은 이들을 감옥에서 겨우 구해 와서 풀어 준 것인데, 해방감을 채 느껴 보기도 전에 저렇 게까지 무자비한 만행을 저지르다니.

“이런 주책바가지 드래곤이?”

다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동료들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아르티어스에게도 화가 났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유백의 모습으로 변해 있는 아르티엔은 정말 가 만히 놔둘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성질을 건드리고 있었다.

어떻게 아르티엔이 유백의 모습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만약 아르티엔이 중원에라도 가 봤다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뭔가 마법 을 사용하여 자신의 기억을 훔쳐봤다는 말밖에 안 되지 않는가? 자신이 기억하기 싫은 부분까지도 자신의 동의도 받지 않고 훔쳐봤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기분 나쁘게 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이건 자존심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다크는 발을 쿵쾅거리며 2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다크가 씩씩거리며 들어서자 방 안에 앉아 있던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가 그녀 쪽으로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다크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아르티엔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식사는 안 하고 왜 올라왔느냐? 끼니를 거르면 속 버린단다.”

아르티엔의 자상한 말을 듣자 다크는 일순 할 말을 잊어버렸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명 유백으로 변신한 아르티엔의 모습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일 뿐이고, 그녀를 휘감고 도는 감정은 그게 아니었다. 그리운 모습에다가 자상한 말까지 곁들이자,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공허했던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다크로서는 당혹스러웠다.

“아니, 저…….

“음식이 입에 안 맞느냐? 그럼 먹고 싶은 것을 말해 보렴. 손자를 위해서 내가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 허허헛.”

“아니, 저… 으이구. 그게 아니구요. 저… 차라도 한잔 드시겠어요?”

버벅거리던 다크는 결국에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토해 내고 말았다. 속으로는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러자꾸나. 아침에는 차를 잘 안 마시지만, 손자가 마시자는데 거절할 수가 없지. 안 그러냐? 아르티어스야.”

“그럼요, 아버지. 헤헤헤, 나도 한 잔 부탁하자.”

“예? 예……. 그럼 가 보겠습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 다크는 어이가 없는지 허허 웃으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된 거지? 제길! 닮아도 너무 닮았단 말이야.”

도저히 제어가 잘 안 되고 있는 자신을 향해 투덜거리며 식당으로 내려가자, 이미 그곳에는 주문해 놨던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점원을 불러서 2층에 차 두 잔을 가져다줄 것을 부탁한 후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얼큰한 수프가 뱃속으로 들어가자 속이 확 풀리면서, 옛날 중원에서 먹던 해장국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크, 이 맛이야. 속이 확 풀리는군. 역시 술을 마신 다음 날은 얼큰한 국물이 최고지.”

그리운 얼굴에, 그리운 목소리, 그리고 그리운 맛까지. 다크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이때, 다크가 주문한 음식을 과연 인간이 먹을 수 있는지 살펴보고 있던 점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런 것도 음식이라고 먹는 년이 있는 걸 보면 과연 세상은 요지경이야.”

순간 다크의 눈썹이 꿈틀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한 기분을 저따위 점원 녀석이 망치다니.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다크가 벌떡 일어서는 것을 보고 옆에 앉 아서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던 팔시온이 궁금한 듯 물었다. 입속에 음식이 가득 들어 있었던 탓에 그 발음조차 불분명했다.

“야, 왜 그애?(왜 그래?)”

“아니, 저 녀석이 어제부터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데 말이야. 방금 전에도 뭐라고 이죽거리잖아.”

다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팔시온이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그는 입속에 잔뜩 들어 있던 음식물을 바닥에 퇘 뱉어 버린 후 유쾌한 듯 말했다.

“그래? 잘됐다. 네가 나설 것까지 있냐? 내가 해 줄게. 거기서 지켜만 보라구.”

팔시온이 팔을 걷어붙이고 점원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고, 가스톤이 벌떡 일어서면서 외쳤다.

“야, 나도 같이 하자.”

다크는 40대 중반이나 되는 비쩍 마른 가스톤까지 희색이 만연해서 일어서는 것을 보며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바라봤다. 평상시 침착하게 혈기왕성한 팔시온이나 미카엘을 뒤에서 밀어주던 형같이 자상했던 가스톤마저 저런 상태로 만든 것을 보면 어젯밤의 정신 교육이 대단하기는 대단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다크였다.

다크가 자신을 노려보며 신경질적으로 일어서는 것을 볼 때까지만 해도 점원의 표정은 가소롭다는 듯 여유만만했었다. 하지만 갑자기 험상궂게 생긴 큰 덩치의 사내가 일어서서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는 재빨리 주방 쪽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먹이를 놓칠세라 달려 들어가는 팔 시온과 가스톤.

곧이어 주방을 완전히 때려 부수는 듯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 소리 또한 식당 안을 가득 메웠다. 거기에다가 간간이 약간 카랑카 랑한 가스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상시와는 달리 엄청난 독기를 머금은 듯했다.

“죽어! 죽어! 죽엇”

주위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몇몇 손님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슬금슬금 식당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팔시온과 가스톤이 개운한 듯한 표정으로 두 손을 탈탈 털면서 걸어 나왔다. 그것을 보며 미카엘과 미디어가 원통하다는 듯 탁자를 치며 분해했다.

“제자, 내가 가서야 하는 거데.(젠장, 내가 갔어야 하는 건데.)”

“저 녀서드은 이러 때마 도자이 재사다 마이야.(저 녀석들은 이런 때만 동작이 잽싸단 말이야.)”

이것을 보며 다크는 아연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제저녁에 아르티어스에게 어떤 교육을 받았길래, 저들이 저렇게까지 변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 나도 궁금한 다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