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5권 10화 –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

와리스 후작은 그 비대한 얼굴에 가려진 자그마한 눈망울을 열심히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뭔가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와리스 후작은 아직까지 미네르바의 실각과 같은 미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대략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을 파괴한 사람이 치레아 대공이라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사실은 치레아 대공이 직접 루빈스키 대공에게 말한 것으로서, 정보부에서 알아낸 사실이 아니었다. 그만큼 크라레스의 모든 정보력은 현재 알 카사스와 아르곤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와리스 후작은 프루니아의 여름 궁전 아니, 크루마의 임시 황궁에 도착한 후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직 감적으로 느꼈다.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분위기가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챘던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이 품었던 의문은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똑똑.

짧게 노크를 한 뒤 문이 활짝 열리며 근엄하게 생긴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와리스 후작에게 자신을 정중하게 소개했다.

“나는 라이언 반도로스 후작이라고 하오.”

외교담당관은 예전부터 가레신 후작이었기에 와리스 후작은 의문을 느꼈다. 어디로 간 것인가? 아니면……

“가레신 후작은 어디에……?”

“아, 그분은 지금 몸이 안 좋으셔서 귀하를 접대하실 수 없소. 그래, 본국을 방문한 용건은 무엇이오?”

성급하게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상대를 보며, 와리스 후작은 속으로 비웃었다. 상대는 아직 외교적 화술의 기본조차 모르고 있는 애송 이인 것이다.

“예, 우선 귀국의 수도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시고 본국의 폐하께서 귀국의 폐하께 심심한 조의를 표하셨소.”

자국의 수도가 가루가 난 것에 대해 상대가 화제로 올리자, 그 진의를 알 수 없었던 반도로스 후작은 조금은 언짢은 어조로 대답했다.

“예, 귀국의 폐하께 하찮은 타국의 일에까지 신경을 써 주셔서 감읍할 따름이라고 전해 주시오.”

타국이라는 말이 나오자, 와리스 후작은 일부러 과장되게 감정을 표현하며 떠들어 댔다.

“타국이라니요, 이거 섭섭하군요. 귀국과 본국은 제1차 제국 전쟁 때 코린트를 물리친 혈맹이 아니었소이까? 요 근래 한동안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그 래도 과거의 친분을 잊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대제국 코린트와 싸우기 위해 서로의 국력을 합쳐 총력전을 벌였던 혈맹들이었는데 말이오.”

‘과거의 친분 따위가 중요할까?’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반도로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상대의 말은 도덕적 관점에서 봤을 때 충분히 납득이 갈 만큼 논리 정연했기 때문이다.

“그거야 그렇지요.”

상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긍하자, 와리스 후작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이 의도하는 페이스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모든 것을 보면 귀국과 본국은 작은 일 따위로 사이가 벌어질 관계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 폐하의 생각이십니다. 사실 제2차 제국 전쟁에서 본국이 위태로 울 때, 귀국이 갑자기 미란을 침공하여 합병하였잖습니까?”

그건 사실이었기에 반도로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와리스 후작은 꼭 상대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곧장 말을 이었다.

“다른 국가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역시 동맹이라는 것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말이오. 크루마가 동맹국인 크라레스가 잠시 어려워지자 크라레스의 동맹국 인 미란을 일거에 점령해 버렸다고 말이오.”

제2차 제국 전쟁 때의 치부를 드러내자 반도로스 후작의 안색은 약간 벌게졌다. 그런 그를 보며 와리스 후작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지금 상대의 심리 를 완전히 읽고 있는 상태였다. 원래 외교관이란 상대가 속마음을 읽을 수 없도록 자신의 표정을 절대로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저 애송이 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다.

“허허, 하지만 내 말을 오해하지 마시오. 본국이 설마 그런 속 좁은 무리와 같이 동맹국인 귀국이 우리가 어려운 틈을 타 미란을 진정으로 점령했다고 생각하고 있 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오.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실 우리같이 생각이 짧은 자들은 귀국의 행동을 오해했었소. 하지만 본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귀국을 굳게 믿으셨지 요. 황제 폐하께서는 만약 귀국이 미란을 삼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냐고 저희들에게 말씀하시며 믿음이 부족했던 저희들을 깨우쳐 주셨소.

사실 크루마가 그 당시 미란을 점령하지 않았다면 코린트는 본국을 정리한 후, 곧장 군세를 돌려 공개적인 본국의 동맹국인 미란을 침공했을 것이오. 그것을 잘 알 고 계신 귀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크라레스의 동맹국인 미란이 야욕에 찬 코린트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미리 손을 쓴 것이지요. 본국과의 의리를 생각해서 크루마가 악역을 담당하신 것이라고 본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상당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 그렇지요. 귀국이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너무나 감사한 일이외다.”

와리스 후작은 대화가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잘 흘러가자 상대방에게 회심의 쐐기를 박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제 본국 사정도 어느 정도 호전되었고, 코린트와의 관계도 그런대로 정상화되었소. 그러니 더 이상 귀국이 악역을 감당하실 이유가 없 어졌다는 황제 폐하의 말씀이셨소.”

갑자기 화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반도로스 후작은 기겁했다.

“뭐, 뭐라고요?”

“그러니까 코린트가 미란을 집어삼킬 염려가 없어진 만큼 미란을 풀어 줘도 된다는 말이외다. 또한 수도 엘프리안이 파괴된 터라 귀국도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 을 테고 말입니다.”

여태껏 자신이 상대에게 농락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반도로스 후작은 안색을 굳혔다. 사실 와리스 후작의 논리대로라면 크루마는 미란을 토해 내야 하는 것 이다. 하지만 그것을 약속했다가는 자신의 목이 달아날 것이 아닌가? 반도로스 후작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소. 이 사안은 아무래도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닌 것 같으니 윗분들에게 보고를 해야겠소.”

와리스 후작에게 양해를 구한 반도로스 후작은 회의장을 나와 곧장 원로원 의장 대리인 어스무스 그랜딜 공작의 집무실로 갔다. 현재까지 행방을 알 수 없는 그린 레이크 공작을 대신해서 그가 임시로 원로원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왔다고 하던가?”

“미란을 되돌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전하”

반도로스 후작의 말에 깜작 놀란 그랜딜 공작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미, 미란을 말이냐?”

“예, 전하.”

반도로스 후작은 굳은 안색으로 차분히 와리스 후작과의 회담 내용을 그대로 전한 뒤,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송구스럽사옵니다, 전하. 저로서는 도저히 역부족이옵니다.”

“그렇게 대단한 자인가?”

“말솜씨가 대단한 인물이옵니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있어도 계속 대화를 나누다 보면, 결국은 그놈이 의도한 방향으로 화제가 진행되는…….

“에잇, 이런 멍청한! 하긴 처음부터 경에게 능숙한 외교관으로서의 역량을 기대한 내가 잘못인지도 모르지.”

한심스럽다는 듯 반도로스 후작을 쳐다보던 그랜딜 공작은 펜을 들어 뭔가를 종이에다가 쓴 다음, 경비병에게 건네주며 지시했다.

“너는 지하 감옥에 가서 가레신 후작을 인계받아 오너라.”

“옛, 전하.”

경비병이 명을 받고 나가자, 그랜딜 공작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우선, 한동안은 가레신 후작을 따라다니며 그의 옆에서 일을 배워라. 그는 미네르바의 측근이지만 외교관으로서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던 인물인 만큼 배울 것이 많을 것이다.”

“옛, 전하.”

그랜딜 공작은 슬며시 미소 지으며 말을 끝냈다.

“어느 정도 경이 일을 배우면 그때 그놈을 처형하기로 하지.”

현재 미네르바의 측근에 있던 모든 인물들은 투옥된 상태였다. 미네르바를 숙청하는데 그 측근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취해진 조치였다. 그리고 사실상 그 측근들이 군의 요직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미네르바를 제거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와리스 후작은 반도로스 후작과 함께 가레신 후작이 회담장에 들어오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별로 유쾌하지 못했다. 또다시 머리싸움을 치열하게 벌여야 할 자신의 천적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오호, 가레신 후작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십니까?”

가레신 후작은 조금 수척해진 얼굴로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꾸했다.

“오랜만입니다.”

“옆에 계신 분은 영 얘기가 안 통하더군요. 역시 가레신 후작님 정도는 되어야 서로 말이 통하지 않습니까? 또 밀고 당기는 재미도 있고…….”

“껄껄껄, 과찬의 말씀이오. 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반도로스 후작에게 접대를 맡겼더니, 귀하의 기대에 못 미쳤나 보오. 미안하게 생각하오.”

“그건 그렇고 괜찮으시겠습니까? 얼굴이 많이 수척해지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저야 비축해 둔 지방질이 너무 많다 보니 가끔은 단식도 하곤 하지만, 후작님이 그 러신다면 며칠도 안 돼 신관에게 신세를 져야 할 가능성이 클 텐데요?”

“하하! 무슨 말씀을. 저는 필요한 영양분을 뼛속에 저장해 두는 체질이라고 신관이 말하더군요. 그러다 보니 불필요한 지방질을 늘릴 필요가 없죠. 또 이 나 이쯤 되면 비만에 의한 고혈압도 두렵고 말입니다.”

반도로스 후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와리스 후작과 가레신 후작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랜딜 공작은 옆에서 보고 들으며 가레신 후작의 외교술을 배우라고 했 지만, 도대체 뭘 배운단 말인가? 서로 간에 쓸데없는 잡담만 주고받으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저들에게서 말이다.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와리스 후작과 가레신 후작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신경전은 놀라울 만큼 치열한 것이었다. 반도로스 후작에게는 잡담으로밖에 안 들렸겠지 만, 그들은 서로 간에 나름대로 치열하게 탐색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상대가 뭘 원하는지, 또 뭘 알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양보해야 할지, 그런 모든 것에 대한 정보의 꼬투리를 잡기 위한 머리싸움이었던 것이다.

반도로스 후작은 밀려오는 졸음을 억지로 참으며 계속 그들의 잡담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기대했던 근사한 대화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지루함을 이 기지 못해 잠시 끄덕끄덕 졸다가 일어났을 때도 그들은 계속 잡담으로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반도로스 후작은 외교라는 것이 자신의 마누라가 친구들과 쓸데없 는 화제로 수다 떠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자신의 마누라를 외교관으로 임명하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들의 잡담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가 대화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만나 잡담을 나누기 시작한 지 두 시간 정도가 흐른 뒤였다.

“글쎄요, 본국의 황제 폐하께서 어떤 생각으로 미란을 흡수했는지는 저희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 폐하께 여쭈어 보려고 해도 지금 잠시 여행을 떠나 계신 터 라 좀 곤란하군요.”

가레신 후작의 말에 와리스 후작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바로 이때가 적기라고 생각하고는 쐐기를 박기 시작한 것이다.

“허허허, 저희 치레아 대공께서 엘프리안을 방문하신 후 모든 것이 오해였다고 하시더군요. 그러시면서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다고 폐하께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동안 귀국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숨기지는 않겠습니다. 역시 서로 간에 대화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에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두꺼운 철판과 같이 표정의 변화가 없던 가레신 후작의 얼굴에 동요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화는 무슨 얼어 죽을 대화, 복날 개 패듯이 팬 것이 대화인가? 그리고 엘프리안을 가루로 만든 것이 대화라는 말인가? 가레신 후작이 분노를 삭이고 있을 때, 그의 표정을 보며 와리스 후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직까지 양국 간에 오해의 여지가 남아 있다면 치레아 대공 전하를 다시 이곳에 오시도록 제가 주선해 드리겠습니다. 그편이 훨씬 시간도 절약될 테니 서로 간 에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와리스 후작의 위협은 명확한 것이었다. 까불면 또다시 그녀를 보내서 크루마를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그 말에 가레신 후작은 당황해서 말했다.

“아, 아니 잠깐만, 그렇게 바쁘신 분을 또 다시 이 누추한 곳까지 방문하시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이제 완전히 자신이 주도권을 쥐었다고 생각한 와리스 후작은 비대한 몸집을 출렁거리며 능글맞게 말했다.

“어허~ 그래도 서로 간에 몇 날 며칠 동안 말싸움하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좋지 않겠소? 그분이 오시면 금방 오해도 풀릴 것이고 말이외다.”

“이 사안은 치레아 대공께서 오신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왜냐하면 미란의 독립은 본인이 약속할 만한 범주를 벗어나 있소. 본인의 생각에도 귀국과의 오 랜 친분을 생각해서 미란을 지금 당장이라도 독립시켜야 함이 옳다고 생각하오. 처음에는 야욕에 찬 코린트에게 미란의 국민들이 불의의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본 국이 먼저 군대를 투입하였소. 나중에 귀국이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었을 때, 그때 그들을 독립시켜 주면 되니까 말이오. 하지만 그동안 사정이 많이 바뀌었소.” “어떻게 말입니까?”

와리스 후작이 뚱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가레신 후작은 정색을 하며 차분히 설명했다.

“이제는 미란의 국민들이 크루마의 우수한 정치적 지도력을 신뢰하여 우리에게 편입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말이오. 그리고 일부 국민들은 그전의 나약했던 미란의 왕들보다는 크루마의 황제 폐하를 더욱 존경하며 따르고 있소. 일부 귀족들의 경우에는 아예 황제 폐하께 충성을 서약하며 신께 맹세한 사람들까지 있는 형국이오. 이렇다 보니 그들을 억지로 내몰다가는 미란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소. 미란이 본국의 속국이 되기를 원하는 상황인데, 어떻게 독립 시킬 궁리를 한단 말이오? 허~참, 난감하군.”

와리스 후작이 미란 국민들을 상대로 여론 조사를 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가레신 후작의 뻔뻔스러운 대답이었다. 바로 이때 밖에서 경비하 고 있던 병사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크 폰 치레아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뭣이?”

은근슬쩍 넘어가기 위해 머리를 굴리며 한참 말을 하고 있던 가레신 후작은 기겁을 한 듯 튕기듯 일어섰다. 그런 다음 곧장 시선을 문 쪽으로 돌렸다. 잠시 후 경비 병이 열어 준 문으로 들어서는 다크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가레신 후작은 와리스 후작을 째려보며 나직하지만, 잔뜩 힘을 준 어조로 물었다.

“귀하가 치레아 대공을 부른 것이오?”

와리스 후작은 천천히 일어서며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절대로 모르는 일이요. 나는 어제 크루마에 가서 미란 건에 대해서 협상하라는 루빈스키 전하의 지시를 받았을 뿐이요.”

슬그머니 발뺌을 하는 와리스 후작의 유들유들한 표정을 보며 가레신 후작은 더욱 화가 뻗쳤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다크의 뒤를 따라서 장난기 있는 표정으로 이 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들어오는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는 순간 창백하게 바뀌었다. 엘프리안을 가루로 만든 그 드래곤의 얼굴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와리스 후작은 재빨리 일어서서 다가오는 다크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했다.

“치레아 대공 전하를 뵈옵니다.”

그리고 가레신 후작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어찌 되었건 상대의 신분으로 봤을 때, 정중히 예의를 갖춰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 자네가 여기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이리로 왔지. 협상은 어떻게 되었나?”

“저… 그게… 송구하옵니다, 전하. 아직 진전이…….?”

“그래? 하기야 저런 잔챙이를 상대로 밀고 당기고 해 봐야 결과를 빨리 얻어 내기는 힘들겠지.”

그 말에 ‘잔챙이’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다크는 가레신 후작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전에 한 번 본 얼굴인 것 같군. 그래, 미네르바는 잘 있나?”

다크의 물음에 가레신 후작은 약간 비꼬아 대답했다. 하지만 말투는 아주 정중한 것이었다.

“미네르바 전하께서는 대공 전하 덕분에 자알~ 계십니다.”

다크 덕분에 미네르바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다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잘 있다니 다행이군. 미네르바를 불러와라. 내가 직접 협상할 테니까 말이야.”

“예? 하, 하지만…….?”

“왜? 무슨 문제가 있나?”

계속되는 다크의 질문에 가레신 후작은 진땀을 흘리며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크루마의 내부 사정이 외부에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대 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게…, 전하께서는 지금 이곳에 안 계십니다. 전방을 순시하러 가셨기에….”

“그래? 그러면 기다리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진을 이용하면 금방 올 수 있을 것 아닌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빨리 불러와.”

“아, 예.”

가레신 후작은 머리를 움켜잡으며 자신을 그 망할 협상 장소로 보낸 그랜딜 공작에게 달려가 상황을 보고했다. 현재는 그가 크루마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뭐야, 벌써 협상이 끝났나?”

“그게 아니옵니다, 전하.”

그랜딜 공작은 또 뭐가 문제이냐는 듯 짜증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럼, 뭔가?”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이 왔사옵니다.”

“그래?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다크가 지닌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고 있었던 그랜딜 공작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생각을 고쳐먹었다. 일단 상대국의 공작이 왔으니 이 것을 계기로 자신이 공식적으로 외부로 등장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음, 하기야 상대국에서 공작이 왔는데, 자네를 보내어 영접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기는 하지.”

“그분께서는 켄타로아 전하와 직접 협상하시기를 원하고 계시옵니다.”

“뭐? 크하하하! 미네르바를? 그녀가 투옥된 것도 알지 못할 정도로 정보력이 형편없다니, 크라레스는 소문으로 듣던 것만큼 그렇게 굉장한 나라는 아닌 모양이 군.”

“그, 그게 아니옵니다, 전하.”

가레신 후작이 필사적으로 변명하려 했지만, 그랜딜 공작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 옆에 서 있는 엘프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봐.”

후작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새하얀 피부의 아름다운 엘프 청년이 즉각 대답했다.

“옛, 전하.”

“국무대신한테 그녀를… 아니야, 지금은 별로 할 일도 없으니 내가 직접 만나 볼까? 소문대로 그렇게 미인인지 한번 보고 싶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호비트 가 아름다워도 우리들 엘프만 하겠나?”

호기롭게 말한 그랜딜 공작은 반도로스 후작을 향해 지시했다.

“안내하게. 내가 협상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직접 가르쳐 주지.”

“옛, 전하.”

당당하게 나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레신 후작은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허허, 참, 크루마 황실의 미래가 걱정되는군.”

“어스무스 엘 그랜딜 공작 전하께서 드시옵니다.”

경비병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아르티어스가 과자를 씹어 먹다가 중얼거렸다.

“그랜딜이 누구냐?”

“글쎄요. 미네르바는 전방 순시 갔다고 하잖아요. 아마 미네르바가 곧장 오지 못하니까 대신 접대하기 위해 나오는 녀석이 아닐까요?” 

“그런가? 어? 그러고 보니 엘프네.”

아르티어스는 포도주를 한 잔 더 따르면서, 실내에 들어선 후 자신들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서 있는 그랜딜 공작에게 말했다.

“이봐, 과자 좀 더 가져와. 쩝쩝, 이거 맛이 괜찮군. 제법이야.”

자신의 상관을 마치 시종을 대하듯 편하게 말하는 금발 청년의 태도에 반도로스 후작이 화가 잔뜩 난 어조로 질책했다.

“무례하다. 이분이 누구이신 줄 알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이번에는 다크가 빙글빙글 미소 지으며 장난 삼아 대답했다.

“누군데?”

“대 크루마 제국의 의회 의장이시자, 원로원 의장 대리이시며, 총사령관 대리를 겸임하고 계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린레이크 공작 전하와 함께 본국에 단 두 분밖 에 안 계시는 7사이클급 마법을 마스터하신 마법사협회의 부의장이시기도 하다. 지금 당장 무례를 사죄하지 않는다면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아빠, 뜨거운 맛을 보여 준다는데요?”

아르티어스는 기가 막힌 듯 어이없어 하다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허어~참, 너 이리 와 봐.”

아르티어스는 멍청한 부하는 무시하고, 그 옆에서 이미 눈치를 챘는지 벌벌 떨고 있는 그랜딜 공작을 향해 험상궂게 인상을 긁었다. 그의 표정을 본 그랜딜 공작은 생명에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며 휘청휘청 아르티어스에게 다가갔다. 아르티어스는 상대의 면상을 손바닥으로 힘껏 후려친 후 투덜거렸다.

“도대체가 쫄다구들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빨리 이리 튀어와!”

뒤로 나자빠졌던 그랜딜 공작은 후다닥 일어선 후 신음성을 터뜨릴 여유도 없이 재빨리 아르티어스의 앞으로 달려갔다. 그런 상관의 모습을 보며 반도로스 후작의 얼굴은 천천히 핏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요, 용서하십시오, 위대하신 분이시여. 감히 위대한 일족을 몰라 뵈었습니다. 하찮은 호비트가 어리석어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말이니 제발 노여움을 푸시기 바랍 니다.”

옆에서 빙글거리며 가만히 보고 있던 다크가 이죽거렸다.

“어? 나도 호비트인데…….”

아르티어스는 힐끗 다크의 눈치를 본 후 더욱 화가 난 어조로 외쳤다. 상대가 다크를 향해 한 말이 아님을 알긴 하지만, 아들이 그걸 탓하는데 자신이 그것을 무시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다크가 얼마나 귀여운 자식인데…….

“이 짜식이, 그럼 내 아들이 하찮고 어리석다는 말이냐?”

아르티어스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하자, 그랜딜 공작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고위급 마법을 수련한 만큼 민감한 정신 체계를 가지고 있던 그는 지금 아르티 어스가 뿜어내고 있는 거대한 드래곤의 존재감만으로도 기절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그의 머릿속은 두려움에 질려 하얗게 텅 비어 있었다. 그 오랜 삶을 거치며 배운 수많은 지식도, 연륜도, 경험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완전히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저, 절대로 오해이십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저, 저는 제 부하를 두고 생각 없이 한 말이었습니다.”

“멍청한 자식,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미네르바를 데려와. 내 아들이 보고 싶다고 하잖아. 기다리기 지루하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알겠어?”

“예, 옛!”

후다닥 문을 박차며 달려가는 그랜딜 공작의 뒤통수에 대고 아르티어스가 외쳤다.

“이봐, 과자도 좀 더 가져와.”

곧장 감옥으로 달려간 그랜딜 공작은 다짜고짜 미네르바에게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왜 드래곤이 치레아 대공하고 함께 다니는 것이오?”

하얗게 질린 상대의 얼굴에 미네르바는 고소하다는 듯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미네르바는 자신의 예상보다 그녀의 방문이 훨씬 빠르다는 것에 일순 안도감을 느끼 고 있었다.

“후후, 그녀가 온 모양이군.”

“당신은 뭔가 알고 있소?”

“물론, 드래곤은 그녀의 양아버지야. 그리고 그녀를 대단히 사랑하고 있지. 인간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드래곤의 관례를 깨고 엘프리안을 날려 버렸으니까.” 미네르바의 대답에 그랜딜 공작은 기절할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엘프리안을 파괴한 드래곤이 바로 그, 그 드래곤이었소?”

“호오, 몰랐던 모양이군. 하기야, 그녀와 그 드래곤에 대한 접대는 여태껏 내가 직접 했으니 몰랐을 수도 있겠지. 그래, 접대를 한번 해 보니까 총사령관직이 해 볼 만하던가?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생명의 위협 정도가 아니라 크루마가 박살 날 수도 있으니 기분이 짜릿짜릿하지? 어떤 면에서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크루마의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에 함께 따라다니는 청량제라고나 할까. 자극이 조금 지나쳐서 그렇지, 계속 그들을 상대하다 보면 꽤 재미있을 거야.”

“그, 그렇다면 당신은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그 드래곤과 자주 만났단 말이오?”

미네르바는 창백한 안색의 그랜딜 공작을 바라보며 그가 지금 엄청난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랜딜 공작 정도로서는 도저히 크루마를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드래곤? 흥. 드래곤뿐이라면 내가 말도 안하지. 드래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상대하기 쉬운 족속이야. 그들은 어느 정도 비위를 맞춰 주면 조용하지만, 치레아 대공은 얘기가 달라. 한때 세계 최강이라고 불렸던 키에리 발렌시아드를 박살 냈을 만큼 엄청난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전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거든.

키에리의 행동이야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지. 그는 언제나 국가를 제일로 생각했으니까 거기에 맞춰서 추리하면 금방 속마음을 알 수 있었거든. 하지만 그녀는 도대체가 뭘 원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지. 그녀는 국가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니까 말이야. 거기에다가 비위를 거스르면 엘프리안 정도가 아니라 크루마도 하루아침에 박살 내 버릴 정도로 성격까지 지랄 같지.”

“헉! 말도 안 돼! 어떻게 호비트 따위가 그런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 막강한 코린트의 전권을 잡았던 키에리라도 본국을 하루아침에 박살 낸 다는 호언장담을 하지 못했어.”

“웃기고 있네. 물론 그녀 혼자서 크루마를 멸망시킬 수는 없겠지. 하지만 방금 자네가 봤던 그 드래곤이 누구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인다고 보나? 그녀의 말 한마디 면 망설이지 않고 크루마를 하루아침에 가루로 만들걸.”

“그, 그럴 리가…….?”

“잘해 보게. 그녀의 비위 맞추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

미네르바의 말에 그랜딜 공작의 두뇌는 맹렬히 회전했다. 이제는 대화를 종료하고 싶다는 듯한 상대의 말.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협상을 원하는 듯한 말이 아닌 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협상할 용의가 있었다. 그만큼 드래곤은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족속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렇다면 그대는 그녀를 다룰 수 있다는 말이오?”

미네르바는 필사적인 상대의 태도에 빙글거리며 대답했다.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이라고 느낀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주 여유만만했다. “꼭 다룰 수 있다는 말을 한 적은 없어. 그녀를 다루는 데 실수 한 번 했다가 엘프리안이 날아갔으니까 말이야. 물론 그런 커다란 대가를 지불한 만큼 나는 그녀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지. 그런 만큼,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가능성은 줄어들지 않겠나? 하지만 자네는 어떨까? 자네도 나처럼 실수를 되풀이하며 정보를 쌓을 텐가? 아마 아차하다가는 도시 하나 둘 정도는 잃을 각오는 해야 할 거야.”

공갈이 조금 섞인 미네르바의 말을 듣던 그랜딜 공작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안 그래도 무시무시했던 아르티어스의 눈초리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 었던 그랜딜 공작으로서는 미네르바의 말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때서야 미네르바가 자신의 생명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실 아르티어스의 그 지독한 존재감에 억눌려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 건넸던 그랜딜 공작으로서는 미네르바라는 존재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핑계였 던 것이다. 엘프인 그에게 다크라는 호비트의 능력은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호비트보다 훨씬 더 민감한 정신 체계를 가지고 있는 엘프인 그로서는 에인션트급에 가까운 그 엄청난 드래곤의 존재감은 공포 그 자체로 다가왔었다. 어 차피 자신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드래곤이었고, 또 상대하지 않고 무시했다가는 이곳 크루마의 임시 황궁마저 파괴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만약 그렇 다면 그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네르바의 말은 드래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매혹적인 제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별로 대단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드래곤이 무 섭다고 하자니, 영 자존심이 상했기에 그랜딜 공작은 상대가 두려워하는 다크로 말을 돌렸다.

“그 호비트가 그렇게 대단하단 말이오?”

미네르바는 자신의 위협이 제대로 먹힌 것으로 생각하고 미소 지었다. 다크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데……. 빌어먹을 년.

“당연하지.”

“그렇다면 그대가 크루마를 구해 주시오. 또다시 수도를 날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글쎄…, 하지만 나한테는 그만한 실권이 없다는 것을 경도 잘 알 텐데? 나는 이미 크루마의 총사령관이 아니라 한낱 초라한 죄수일 뿐이야.”

미네르바의 빈정거림에 그랜딜 공작은 황급히 대답했다. 사실 이번 건만 처리해 준다면 무슨 약속인들 못 하겠는가? 이 일만 무사히 끝난다면 확실하게 미네르바 를 단두대에 올려놓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는 그랜딜 공작이었다.

“그건 염려 마시오. 드래곤만…, 아니 그녀만 처리해 주시오. 이 일에 크루마의 장래가 달려 있지 않소?”

상대의 얄팍한 술수에 놀아나기에 미네르바는 너무 똑똑했다. 그리고 사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뻔한 상황에서 무슨 권한으로 협상을 한단 말인가?

“쯧쯧, 한낱 죄수의 신분인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녀와 협상을 한다는 말인가?”

정곡을 찌르는 미네르바의 지적에 그랜딜 공작은 당황하며 말했다.

“그, 그렇지. 그럼 내 지금 당장 황태자 전하께 말씀드리겠소.”

그랜딜 공작의 말에 미네르바는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황태자전하라니, 그건 무슨 말이요? 이건 황제 폐하께 말씀드려야 할 사항이 아니요?”

어이없다는 미네르바의 질문에 그랜딜 공작은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아아, 말이 잠시 헛나왔군. 내 황제 폐하께 즉시 아뢰겠소. 그럼…”

서둘러서 감옥을 나서는 그랜딜 공작의 뒷모습을 보며, 미네르바는 절망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폐하께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그렇다면 본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직 젊은 황태자 전하의 주위에 저런 녀석들만 있다면…….

큰소리는 쳐 놨지만, 아무래도 호되게 당했던 기억이 남아 있는 미네르바로서는 다크에게 웃으며 말을 건네기는 힘들었다.

“여~ 오랜만이군.”

슬금슬금 다가오는 미네르바를 보고 다크가 방긋이 웃으며 손을 들어 흔들자, 미네르바는 상대의 그 귀여운 모습에 오히려 오한이 드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렇지?”

미네르바는 재빨리 시선을 옆으로 돌려 감탄사를 연발하며 과자를 열심히 먹고 있는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위대하신 분이시여. 요즘 자주 뵙는군요.”

아르티어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미네르바를 째려보며 말했다.

“젠장, 저 얼굴을 또 보게 되다니.. 쩝쩝, 확실히 호비트는 튀는 데 일가견이 있는 족속이란 말이야. 그때 확실히 보냈어야 하는데.”

아르티어스의 말에 안색이 핼쑥해지는 미네르바를 보며, 다크가 질책하듯 말했다.

“아빠, 그만 좀 해. 얘가 무서워서 말도 못 하잖아.”

“아, 알았다.”

미네르바는 대 제국 크루마의 총사령관이었던 자신을 애송이 취급하는 다크의 말에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열불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얘가 무서워 말도 못 해? 내가 앤 줄 아냐? 이런 빌어먹을 년.’

하지만 노회한 미네르바는 분노를 차분히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누군가 분노는 두려움을 초월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분노의 힘 덕분인지 미네르바는 아르티어 스라는 존재를 잊고 다크와 차분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 때문에 왔지? 우리 서로 편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구.”

“아아, 전에 왔을 때, 깜빡 잊고 간 게 있어서 말이야. 미란을 돌려받아야 하는데, 그걸 까먹었단 말이지. 너도 아마 예상하고 있었을 텐데?”

상대의 말에 미네르바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이 제안을 거절해 봐야 그 뒷감당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대의 제안은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 하겠지만, 자신은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좋아, 독립시켜 주겠어.”

화끈한 미네르바의 말에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와리스 후작과 가레신 후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저렇게 빨리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말인가? 협상 이 전문인 그들로서도 이렇게 빠른 속도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 와리스 후작을 향해 다크가 외쳤다.

“이봐, 문서 가져왔겠지? 빨리 내놔.”

와리스 후작이 허둥지둥 문서를 꺼내 놓고, 서명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미네르바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뭐? 조건? 까불지 마.”

퉁명스런 다크의 대답에 미네르바는 약간 당황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한번 들어 봐. 결코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조건일 거야. 본국과 다시금 동맹을 맺는 것이 좋지 않겠어? 사실 그런 조건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미란을 돌려받는다고 해도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잖아.”

다크는 미네르바의 말에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럴지도 모르겠군. 다시 크루마를 동맹국으로 삼는다면 아마 루빈스키가 좋아할지도…….”

“그리고 미란을 포기하면 본국은 쟈코니아 평원과 단절되게 돼. 그런 만큼 미란과 본국의 동맹을 크라레스에서 주선해 줬으면 해. 3국이 단결하여 평화를 누리자 는 말이지. 그편이 독립하게 되는 미란에게도 좋지 않겠어? 사실 지금 미란은 독립시켜 준다고 해도, 자국을 방어할 여력 따위는 하나도 없잖아.”

“뭐? 방어할 여력? 웃기고 있네. 만약 또 다시 미란에 손을 대면 내가 가만히 놔둘 줄 알아? 이번에는 아예 지도 상에서 크루마라는 이름 그 자체를 없애 주지.” 으르렁거리며 인상을 팍 쓰던 다크는 잠시 생각하다 크게 인심을 쓴다는 듯 덧붙여 말했다.

“좋아. 뭐, 그 정도 조건은 들어주지.”

마치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 다크가 말하자 미네르바는 속으로 열불이 치밀었지만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내 얼굴을 봐서 그렇게 큰 양보를 해 줘서.”

다크는 와리스 후작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기에 대충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말했다.

“이봐 뚱땡이, 방금 미네르바가 말한 조건을 들었지? 서류를 다시 작성해.”

“옛, 대공 전하.”

미네르바는 주위를 슬쩍 둘러본 후 다크에게 나직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리고 잠깐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은데…….”

“뭔데? 그럼 얘기해 봐.”

다크는 약간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곧장 기를 움직여 주위에 막을 쳤다. 뭔가 강력한 마나의 움직임을 느낀 미네르바는 놀라서 물었다.

“이게 뭐지? 뭐가 우리를 둘러싼 거지?”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다며? 우리 주위에 음파를 차단하는 막을 쳤을 뿐이야.”

‘헉! 무서운 년.

미네르바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마나를 움직여 음을 차단하는 다크를 보며 아무래도 드래곤이 폴리모프(Polymorph)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다시 하기 시작 했다.

“사실 지금 나한테는 별로 힘이 없어. 만약 네가 떠나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말이야.”

“엘프리안이 파괴되었기에 그런가?”

“응, 그래서 하는 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