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89화 : NWG (Neo Wind Gate). II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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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89화 : NWG (Neo Wind Gate). II (1)


7. NWG (Neo Wind Gate). II (1)

닥터 제이가 구중천을 떠나는 것은 예상했었다. 이 사람은 어디까지나 전략적 제휴를 맺은 손님이지, 지하무림 식구가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그럴 경우에는 자신의 아지트인 그랜드캐년의 지하기지로 돌아갈 것도 쉽게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시기가 하필 지금이라는, 타이밍의 문제랄까? 아니, 아니! 타이밍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 타이밍의 이유를 내가 명확하게 모른다는 것이 진짜 문제지. 근데, 그렇다고 그걸 물어도 친절하게 설명해줄 양반이 아니지?

“알겠습니다. 어차피 우리 쪽에선 딱히 써먹을 곳도 없긴 했어요.”

“후훗. 너무 그러지 말게나. 적어도, 자네 집 마트의 매출 신장에는 기여했다고 자부하네. 일일평균 8% 정도였지.”

“예, 뭐, 그건 인정.”

그러고 보니, 우리 가게 매상을 올려주던 존재들이 전부 빠져 나간 셈이네? 최대한 빨리 소미령이 미소녀 자매라도 카운터에 투입해야 매상 유지…가 지금 문제가 아니고!

“크흠! 흠. 어쨌든, 전 본래 가는 사람 잡는 성격이 아니니, 맘대로 하세요. 다만, 한가지, 프리메이슨으로 돌아가지 마시라는 거, 그 명령,만은 계속 유효합니다.”

“알겠네, 노력하지.”

에? 지금 이 양반, 뭐라고 한 거야?

“뭡니까! 지금 배신 때릴지 모른다고 공언하시는 겁니까?”

“아직은, 그만큼 상황에 변수가 많다는 뜻일세. 미안하네.”

“그, 젠장. 알겠습니다.”

더 삐딱하게 따져 묻고 싶은걸 참은 건, 닥터 제이의 ‘미안하네’라는 말이 진심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당신과 원판, 댁들, 음흉 콤비의 구체적인 계획은 이번에도 묻지 않기로 하죠. 그래도 이거 한가지만은 들어야겠어요.”

나는 닥터 제이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물었다.

“하은이, 끝까지 안전한 거죠?”

“당연하지.”

닥터제이의 목소리도, 눈동자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왜 참아왔겠는가.”

덧붙인 닥터제이의 말에는, 상당히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모님을 해친 범인, 그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었다는 말도 거짓이었군요.”

“맞아. 난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랬었군요. 사실 당신 정도 인물이 5년 동안이나 범인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는 말이 믿기지는 않았었죠. 그렇지만, 12인의 사도들 중에서, 누가 범인인지 몰라도 상관없다. 전부 다 없애 버리면 되는 거니까’라는 당신의 태도, 거기에 살짝 감동 먹는 바람에 속고 말았었네요.”

내가 쓴웃음을 짓는데 비해, 닥터 제이는 여전히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상관없지 않은가. 자네도 어차피 속아도 상관없는 요소라고 생각해서 깊이 따지고 들지 않았던 걸 테니 말야.”

쳇. 역시 날 너무 잘 알아서, 더 얄미운 양반이야.

“뭐, 그런 건 이제 됐고, 하은이 안전 문제에 자신이 생기신 것 같으니까, 당장은 더 묻고 싶은 사항도 없네요.”

나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흐음, 정말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건가?”

닥터 제이는 슬며시 뭔가 더 알려 줄 수 있다는 눈치를 보였지만, 나는 그냥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가장 급하고 중요한, 하은이의 안전을 장담해 주셨으니, 그거면 만족합니다. 다른 일들은 지금까지처럼 직접 부딪쳐서 알아 낼랍니다.” 나름 쿨한 태도를 보이는 나에게, 닥터 제이는 더욱 만족스런 기색으로 웃었다.


잠시 후.

격납고를 나서는 내 눈앞으로 요몽이 포르릉~ 날아올랐다. 가벼운 날갯짓이 녀석의 기분을 말해주고 있었다.

「호홍~! 제가 두 분의 대화를 잘못 분석한 것이 아니라면요, 결국 블랙씨의 암호 메시지를, 저도 맞게 풀어낸 거였네요? 그렇죠, 주인님!」

-훗, 그래. 아무래도 그런 거 같다.

「대~박! 이럴 수가! 나도 두뇌파였어!」

요몽은 기쁨의 환호성과 함께 사방을 날았고, 녀석이 뿌려대는 자축의 빛무리가 폭죽쇼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정신 사납다고 야단치지 않은 건, 나 역시 상당히 기분이 좋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닥터 제이가 하은이를 정말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 좋았어. 하은이의 출생의 비밀을 생각하면, 닥터 제이가 하은이를 진심으로 자신의 딸이라 생각하는지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야.

사실, 내가 닥터 제이를 통해서 확인하고 싶었던 사안은 하은이 문제 말고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최근에 내가 새롭게 감잡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닥터 제이에게는 ‘앞으로 직접 부딪치며 스스로 알아내겠다.’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난 왠지 오늘 이미 닥터 제이에게 모든 얘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요몽, 윈드 게이트 시운행도 성공적이었고, 여러모로 기분 좋은 밤이다. 까짓것, 원판 녀석에게, 내 안부 메시지 하나 띄워줘라.

「예? 정말요?」

나는 반색을 하고 날아 내려오는 요몽에게, 나로서는 매우 다정다감한(?) 안부 메시지를 천천히 불러주었다.

-원판, 밥은 먹고 다니냐?


다음날.

정확히 말하면, 같은 날 아침이었다. 새벽에 집으로 복귀하고도 아침까지 시간이 남아서 몇 시간 취침하고 일어났더니, 간밤의 일들이 모두 아스라한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훗! 간밤의 일들이 꿈이라면, 꿈의 2탄은 더 판타스틱하지. 몇 시간 뒤에 나와 대교가 하게 될 건, 어찌 보면 시간여행(?)을 겸한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 말야. 오늘은 부모님께 정식 외출을 미리 보고해 놓았으니까 복장부터 어제와 달리 신경 써서 준비를…………

「굿모닝, 주인님! 언능 일어나셔서, 청소 하실 시간입니당!」

-우쒸. 요몽, 너. 일부로 분위기 깨는 거지.

「에이, 그럴리가요. 이건 어젯밤, 대교님께 약속하신 일정 맞잖아요.」

이 녀석, 아무래도 내가 원판에게 보낸 문자에 불만이 있어서 심통 부리는 거 같지? 난 분명 기분 좋은 김에 최대한 정성가득한(?) 안부 문자를 해준 거였는데도 말이야.

요몽이 나름 교묘하게 딴지를 걸었음에도, 기분 좋은 흐름의 대세를 어쩔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막연히 귀찮게 생각했던 집 안팎 청소 및 정리 정돈이 의외로 빠르고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흐으음. 무공을 펼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일하는데 몸이 반자동으로 막 움직여 주니까, 나 자신이 조금 놀랐네. 역시 대한민국 군대에서의

‘생활밀착형 생존 훈련(정비 및 작업이라고도 불린다)’의 효과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구먼.

몰라보게 말끔히 정리정돈 된 옥상에서, ‘잡일 마스터’로서의 자부심을 만끽하고 있자니까, 몽몽이 진짜 중요한 일정이 시작될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왔다.

「후후, 모든 시스템 점검은 물론이고, 주인님께서 말씀하신 선물도 준비완료 됩습지요.」

요몽이 재밌어하는 건 소위 ‘선물’의 종류 때문이겠지만, 그거야 어쨌든.


잠시 후.

나와 대교는 평소와 달리 정장을 갖춰 입고 어머니께 외출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대문 밖으로 나가는 척을 하다가, 슬며시 은신술 모드와 함께 소미령이 자매들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미령이들은 아직 우리 구중천 본부에 있고, 오늘 이곳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건 산드라였다. 첫 번째 윈드 게이트가 옆 건물에 설치된 것은, 바로 이렇게 그곳으로부터 우리집 어디든 산드라가 자유롭게 워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거, 이거~ 내가 그동안 산드라를 너무 몰랐었던 건가? 완전히 다른 존재를 보는 기분까지 드네. 이건 아무래도 처음으로 보는, 새하얀 드레스차림 때문만은 아닌 거 같지?

산드라가 수준급 미모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요즘 워낙 많은 미모의 아낙네들과 지내게 되어서인지, 산드라는 그렇게까지 눈에 띄는 미모로 평가하기 어려웠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산드라가 생각보다 별로 꾸미지 않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대교는 감탄하여 산드라의 자태를 살피며 칭찬의 말을 하고 있었지만, 난 뭐라 구체적으로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거참. 평소보다 신경 쓴 티가 나긴해도, 그렇게까지 심하게 분장한 거 같진 않는데 이렇게 느낌 차이가 심한・・・ 응? 가만?

-뭐야, 산드라! 당신, 지금까지 계속 쌩얼이었던 거야?

쌩얼을 몽몽이 어떻게 번역했는지 모르겠지만, 산드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는 제가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인 걸 좋아합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걱정했는데, 두 분이 예쁘게 봐주셔서 기쁩니다.”

으음, 그랬었군. 오늘 우릴 초대한 쪽의 미녀도 만만치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 산드라가 조금 더 우세할 거 같은데?

내가 다소 핀트가 어긋난 생각을 하는 사이, 산드라와 대교의 손이 맞잡아진 모양이었다. 팟 하고 워프가 이루어졌다. 지난밤과 달리, 오늘은

빈방이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로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오는 건, 산드라의 마스터 시그마였다. 시그마와 나의 ‘피의 고리’는 이미 완전히 끊긴 상태이다. 하지만 시그마와 내가 맺은 계약의 증표인 그의 머리카락 몇 올이 몽몽에게 묶여져 있어서, 이제 나와 그의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헤에. 역시 시그마씨, 뱀프 특유의 패션 감각도 짱이야!」

산드라의 변신에는 시큰둥했던 요몽이 시그마에게만 반응하는 거야 그렇다쳐도, 시그마의 레이스달린 셔츠 디자인이 그와 잘 어울리는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로드.’

시그마가 돌아 본 게이트 한쪽 벽에는, 내가 준비해 두라고 했던 선물 두 팩이 놓여져 있었다.

‘이런 초대에 저런 선물정도로 괜찮겠습니까?’

-훗, 걱정 마. 저게 가격은 비싸지 않아도 의미는 큰 거니까 말야.

시그마는 미심쩍어하는 기색이면서도 두 팩의 커다란 선물을 들었고, 그 옆에 놓여져 있던 산드라의 여행 가방까지 챙겨들었다.

「주인님! 너무해요! 매력만점 뱀프 비주얼이, 짐꾼으로 전락해 버렸잖아요!」

-됐거든? 그럼 짱인 내가 들리? 아니, 못 들어줄 것도 없지만, 워프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그걸……….

파츠츠으읏!

이런 제기! 요몽 녀석과 티격태격하다가, 최장거리 워프의 감상을 느낄 틈도 없이 와버렸네.

얼결에 와버린, 너무나 멀고 먼 나라의 윈드 게이트의 내부는 간밤에 경험했던 게이트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십여 평의 넓은 실내 공간은 미래 SF디자인이 아닌 건 물론이고, 오히려 과거 중세의 저택안과 같은 분위기였다.

‘아! 여긴 이 곳은 설마?’

시그마가 놀라서 멍한 표정이 되는 걸 보니, 산드라에게 미리 듣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산드라! 여긴 당신과 나의, 그・・・ ‘바람의 저택인 것이오?”

‘예, 마스터. 바로 그 곳이에요. 우린 어쩔 수없이 이곳을 떠나야했지만, 로드께서 다시 돌려 주셨어요.’

시그마는 이 깜짝 선물에 감격한 듯, 정신없이 실내를 돌아보다가 한쪽의 커다란 창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창밖의 풍경을 확인하고

싶어서겠지만, 바깥 상황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인지, 머뭇거리며 커튼을 열지 못했다.

-산드라, 아직 약속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까, 둘은 잠시 추억의 장소를 돌아보도록 해.

‘예. 감사합니다. 로드’

산드라는 재빨리 시그마 곁으로 이동하더니, 주저 없이 창문의 두꺼운 커튼을 열어 젖혔다. 둘 다 태양빛을 차단하는 특수 화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고, 창은 분명 햇빛 잘 드는 남향이었다. 그러나 물론, 이 뱀프 커플에게는 아무런 위험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

「우후! 지금은 강렬한 태양빛이 작렬하는 정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출발한 한국의 얘기! 여기 이 미국, 보스톤은 이제야 밤이 깊어지기

시작했다는 말씀!」

훗, 그래. 요몽의 설명대로 여긴 한국보다 열 네 시간이나 시간차가 나는 미국의 보스턴이지. 그래서 내가 아까 이번 워프가 ‘시간 여행을 겸한다고 생각했었던 거고 말이야.

-대교. 이 저택에 대해서는 아직 못 들었지? 여긴 시그마와 산드라가 미국으로 이주해 온 이후, 가장 오래 함께 지냈던 곳이래. 대략 삼십년 정도는 살았었다나?

-아, 그래서 두 사람이 저렇게 고향에라도 돌아온 듯 기뻐하는군요.

「맞아요, 대교님. 저 뱀프 커플은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이곳을 떠나야 했었지만, 항상 이곳에서의 시간을 그리워했었데요. 몽몽 오빠가 이번

NWG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산드라의 의견을 청취해보니까, 여기가 최적지로 딱 나오지 뭐예요.」

요몽의 추가 설명을 듣는 사이, 뱀프 커플은 애정 넘치는 텔레파시를 주고받으며 밖으로 달려 나가 버렸다. 나와 대교는 한발 늦게, 열려진 문으로 나가 보았다.

“천주! 천모! 오랜만에 뵙습니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반갑게 인사를 하는 미녀 한 명. 그녀는 미국 내 어사조의 지휘관이자, 자룡대의 부대주, ‘페트라’였다. 이 아가씨와는 이곳 보스턴에서 헤어지고난 후로 직접 재회하는 건 처음이라서, 우리도 꽤 반가웠다.

「우히힛, 드디어 등장한 우리 몽몽 오빠의 애……

요몽이 ‘애인’이라는 표현을 끝까지 하지 못한 것은, 녀석의 눈앞 허공에 엄청난 숫자의 은빛 오랏줄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요몽, 이 건에 대해서는 말조심하는 게 좋겠다. 너 까닥하면 은빛 ‘미이라’나 ‘라바’가 되겠다.

「으~ 이건 명백히 언론 탄압이야! 몽몽 오빠! 주인님들의 알 권리는?」

몽몽은 아무런 대꾸도 없고, 모습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은빛 오랏줄은 계속 위협적으로 요몽 주위를 맴돌고 있어서, 요몽은 결국 얌전히 입을 다물고, 인상을 구기고만 있게 되었다.

-몽몽, 너무 그러지 마라. 너와 페트라 사이는 이미 다 뽀록났…

「주인님!」

짜식이, 주인님인 나한테까지 고함질이네?

-후후. 오라버니야 말로, 몽몽을 너무 놀리지 말아주세요. 소중한 첫사랑이거늘.

「대교니임.」

대교까지 편들어 주는 척하다가 결국 놀리는 편에 서자, 몽몽의 음성에 힘이 쪼옥~ 빠져있었다. 우리들간의 대화를 알리가 없는 페트라가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천주! 천주의 다음 목적지로부터의 연락입니다. 그곳의 주인이 십분 후, 복귀 예정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이곳 보스턴의 신생 뱀파이어, S행님의 러브 하우스이다. 그 주인장인 S행님이 해가 지자마자 출동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 ‘캔들 리’의 안전을 체크하고 돌아오고 있다는 얘기였다.

대략 이십여 분이 지난 후.

우리 일행은 S의 러브 하우스 내에 설치된 ‘임시 윈드 게이트’에 워프했다. 남의 집에 설치된 임시 게이트답게,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는 곳이었지만, 방문을 열고 나가는 나와 대교의 얼굴에는 어느 때보다 행복한 웃음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게, 유준.”

우릴 식사에 초대한 집의 주인장답게, 가장 먼저 우리 앞으로 나선 건 전직 사신(死神)이자 신생 뱀파이어 S였다. 그의 옆에는, 화이트

판타지아에서 그와 맺어진 여인네, ‘미스 카이’가 우아한 은빛 원피스 자태를 뽐내며 서있었다.

“후후. 언더 월드인지 뭔지 하는 격투장에서의 데이트가 꽤나 각별했었나 봅니다. 이제 아주 공식 커플이 되셨으니 말입니다.”

이 민폐 커플이 날 희생양 삼아서 생쇼를 하다가 맺어졌던 날의 상황을 상기시키자, S는 살짝 민망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미스 카이는 눈곱만치도 동요하지 않고, 특유의 뻔뻔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모두 진유준씨 덕분이었죠. 그날 밤, 어떤 분으로부터 제 목숨을 지켜주지 않았다면, 저는 이렇게 S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을 테니까요.” 사연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헷갈리겠지만, 그날 밤, 미스 카이를 쓱싹- 해버리려던 ‘어떤 분’과 ‘그녀의 S님’은 동일 인물이지. 그날의 상황을

생각하면, 아직도 ‘민폐 커플’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기는 한데, 하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지금은 그냥 순수하게 이 커플을 축하해 주고 싶군. 게다가… 저 폐쇄적인 녀석도 생각보다 미스 카이와 잘 지내고 있다니 말야.

내 시선은 어느 결에, 이 자리에서 가장 반가운 녀석에게로 향해 있었다.

“하이, 흑주!”

내가 인사를 건네며 한 손을 들어 보이자, 흑주도 슬며시 한 손을 마주 들어 보였다. 늘 그렇듯, 검은 전신 슈트에 검은 코트차림으로 어둠 그 자체처럼 말없이 서서 무표정인 녀석이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언제나 눈물 나게 반가운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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