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7권 8화 – 흑백 무림 회색 문파
흑백 무림 회색 문파
전선에 배치된 자를 제외한 대 송제국의 고위급 장군들이 모두 정군관(征軍官)에 집합했다. 정군관의 수장인 임청(淸) 원수가 작전 회의차 고위급 무장(武將)들 에게 소집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임청 원수는 며칠 전 추밀원(樞密院)으로부터 요를 격파하기 위한 새로운 작전을 하달받았던 것이다.
송의 군사 편제상으로 봤을 때, 추밀원이 군부를 대표하는 최고 기관이다. 하지만 추밀원의 경우 그 구성원이 전쟁과는 무관한 문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수립한 작전으로 전쟁을 벌이는 데는 다소 무리가 따랐다.
그렇기에 추밀원에서 대략적인 작전을 수립하여 정군관에 보내면, 정군관에 소속된 무관들이 세부적인 작전을 수립하게 되는 것이다. 즉, 추밀원이 세우는 것이 군의 전략(戰略)이라면, 정군관은 그에 따른 전술(戰術)을 구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국가 전체의 군을 지휘하고 통제할 권한인 통수권이 문관들의 집합체인 추밀원에 있었기에, 무관들의 집합체인 정군관은 일종의 보조 작전 기관일 뿐이었 다.
20여 년 전 대요전쟁이 참패로 끝난 이유도 송의 군사 편제가 가지는 모순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전에 익숙한 장군들에게 통수권을 주지 않고, 문관들이 통수권을 쥐고 있으므로 해서 군의 효율적인 운용이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20년 전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벌어진 요와의 대회전에서 패배한 송은 수많은 우수한 장군을 잃어야만 했다. 요 정벌을 단행했던 진길영 원수와 마룡 대장군 등 수많은 장군들이 이때 전사했다.
하지만 그런 참패를 당한 상태에서도 송이 멸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워낙 땅덩어리가 컸던 이유도 있었지만, 중앙원수부의 수장이었던 이창해 원수의 공로가 컸다. 그는 패퇴하던 송군을 재편성하여 요의 진격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래서 요는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연운16주를 집어삼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만 했다.
그런 뛰어난 명장도 세월에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창해 원수가 물러난 후 군권을 이어받은 것이 임청 원수다. 그는 진천왕의 반란을 제압한 일등 공신이었고, 그 공로로 원수로 승진, 현재는 정군관의 수장이 되어 있었다.
“제장들을 소집한 것은 요와의 전쟁 계획 수립 때문일세.”
“계획은 오래전에 세워 추밀원에 제출했지 않습니까?”
“아아, 그것 때문에 제장들을 소집한 것일세. 현재 수립된 작전은 방어적 성격으로 짜여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에 추밀원에서 좀 더 공격적인 계획이 내려왔기 에 제장들을 소집한 것일세.”
좀 더 공격적인 계획이라는 말에 장군들의 눈에 약간의 기대감이 떠오른 것을 보며 임청 원수가 말을 이었다.
“전에 제장들과 한번 토의했었던 사안이었는데, 바로 여진족을 끌어들이는 것 말일세.”
“하지만 그것은 여진족의 힘이 너무나도 미약하기에 포기한 작전이 아닙니까?”
“물론일세. 하지만 지금은 정세가 많이 바뀌었다네. 대족장 아구다의 세력이 요 근래에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는 말이지. 바로 그를 이용하자는 것이 이번 작전의 핵심이야. 요는 현재 본국과의 국경선에 60만 대병을 집결시켜 두고 있지 않나? 하지만 속국인 금이 요에 반기를 든다면, 어쩔 수 없이 요의 황제는 후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금을 정벌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 이 말이지. 요가 금을 정벌하는 데 신경 쓰고 있는 그 틈을 이용해서 뒤통수를 친다면 큰 피해 없이 연운16주를 되찾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요를 멸망시킬 수도 있을 거라는 것이 추밀원이 수립한 작전의 핵심일세.”
그 말에 악비(岳飛) 대장군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현재 어림군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북동원수부의 부원수들 중 한 명이었다. 북동원수부는 현재 요라는 가장 강력한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보유하고 있는 병력의 규모도 엄청났고, 또 가장 뛰어난 무장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악비 대장군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훗날 정군관의 수장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최고의 장군들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악비 대장군 은 추밀원에서 문관들이 탁상공론해서 만든 작전에서 뭐가 문제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원수, 그 작전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그 작전이 성공하려면 금이 요의 공격을 어느 정도 버텨 줘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금의 군사력이 요와 대적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요의 군사력은 강대합니다. 국경에 배치된 60만 외에도 전투에 능한 수많은 장정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소집하기만 해도 1 백만이 넘는 대군을 순식간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국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옛날, 진길영 원수가 요 정벌에 실패한 것도 그런 요의 저력을 살피는 데 등한시한 추밀원 의 결정 때문이 아닙니까? 진천왕의 반란이 아무리 위급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대요 정벌을 중단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요의 군대가 재편성될 수 있는 시 간적 여유를 줬고, 결과적으로 참패로 연결되었습니다. 척박한 대지에서 성장한 거란족의 특성상 각 부족의 모든 장정들이 전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 말에 임청원수는 빙긋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악비 대장군, 귀관의 말도 맞네. 하지만 거란족의 생활이 예전과 많이 바뀌었다는 점 또한 감안해야 할 걸세. 과거 거란족의 장정들은 척박한 대지에서 모진 고생 을 하며 커 온 악귀들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란 말이지. 그들이 저 풍요로운 연운16주를 차지한 지 벌써 20여 년이 흘렀다네. 거기에다가 본국에서 해마다 20만 냥 의 은에다가 30만 필의 비단을 주고 있지. 배에 기름기가 쌓이기 시작한 오랑캐 놈들이 예전처럼 강할 거라고 귀관은 생각하나?”
“죄송합니다, 원수. 그 점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임청원수는 자애로운 미소를 악비 대장군에게 보낸 후, 장군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금이 독립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면 요의 황제는 정벌군을 파병할 거요. 아마도 처음에는 10만 정도가 파병될 것이라고 본관은 추측하고 있소. 사실 그 정도 만 해도 금을 멸하기에 충분하니까 말이오. 하지만 요의 황제도 우리가 금을 도와줄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할 것이오. 바로 그 점을 노리면 승산은 있다고 보오.” 이번에는 중앙원수부의 뇌진(振) 원수가 이의를 제기했다.
“물론 본국에서 도와준다면 금은 요를 막아 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금이 요의 대군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닐 수 있도록 도우 려면 막대한 군수물자를 옮길 수 있는 보급로가 우선적으로 확보되어야만 합니다. 한두 명이 싸울 것도 아닌데, 그 많은 무기와 군량을 어떻게 금에다가 지원해 준 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 뇌 원수의 말도 옳다네. 본국과 금의 사이에는 요가 가로막고 있기에 육로로는 지원이 불가능하지. 하지만 해로를 이용한다면 가능하지 않겠나? 요가 요동 반도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기마민족일세. 황해의 제해권을 잡고 있는 것은 본국과 고려란 말이야. 안 그런가?”
그 말에 뇌진 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고려를 통해서 금을 지원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걸세. 금이 요의 황제가 파병한 정벌군을 격파해 버린다면, 요는 금을 완전히 끝장내버리기 위해 사생결단을 내려고 할 것 아닌가? 그들로서는 코앞에 강 대국 송이 있는데, 배후를 위험한 상태로 놔둘 수는 없을 테니 말일세. 그때를 이용해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다면 간단히 승리할 수 있을 거라고 보네.”
그제야 이해를 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뇌진 원수가 말했다.
“고려를 끌어들이는 것이 가장 큰 문제겠군요.”
단번에 핵심을 집어내는 뇌진 원수를 보며 임청 원수는 믿음직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고려는 20여 년 전, 강감찬 장군이 주축이 되어 남하해 오는 요의 대군을 격파했다. 그때, 요가 입은 타격이 너무나도 컸기에 하마터면 그것이 요의 멸망으로까지 연결될 뻔했다. 그 이후로 요는 고려를 소 닭 보듯 아예 건드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고려는 땅덩어리가 작아서 뺏어 봐야 남는 것도 없는 데다가, 군사력은 영토의 크기에 비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력한 편이었다. 거기에다가 가장 큰 문제는 고려 의 지형이었다. 고려의 산세는 매우 험해서 평원에서의 기동전에 익숙한 거란족으로서는 공격해 들어가기가 아주 까다로웠다.
그 덕분에 고려와 요는 20여 년간이나 평화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인데, 고려가 사서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뇌 원수의 말이 맞네. 하지만 그것까지 우리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군. 금을 설득하는 것이나, 고려의 황제를 설득하는 것은 다 추밀원에서 알아서 할 테 니까 말일세. 하지만 일단 그 둘을 설득하는 데 성공만 한다면 일은 급작스러운 속도로 흘러가게 될 거야. 그때를 대비하여 준비는 어느 정도 해 둬야 하지 않겠나? 본관이 제장들을 소집한 것도 그 때문이라네. 자, 이제 그에 따른 세부적인 사항들을 의논해 보세나.”
문주가 기거하는 내전으로 중년 사내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바로 이 건장한 중년인이 남궁세가의 총관이었다.
“무림맹으로부터 긴급 전서(傳書)가 도착했습니다, 문주님.”
“긴급 전서라구요?”
문주는 중년인이 건넨 서신을 펼쳐서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원래 전서구를 통해 도착했을 때는 매우 얇고 작은 종이에 빽빽하게 암호문이 기록된 것이었다. 그것 을 해독하여 서신에 적어 놓은 것이다.
“드디어 마교가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까?”
남궁세가의 총관 남궁민은 가주의 사촌 형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가주이기는 하지만 존장의 예를 표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남궁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옥화 봉공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정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큰일이로군요. 아무래도 장로회를 소집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남궁세가는 네 명의 장로가 있었고, 중요한 사안의 경우 그들의 승인을 얻어야만 했다. 이렇게 장로원의 입김이 강한 것은 가주가 아직 젊기 때문이었다.
남궁청은 겨우 세 살에 가주직에 올랐다. 그렇지만 어린애가 가주직을 수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 이유로 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 그의 어머니가 가주 직을 대리했었다. 남궁청이 수련을 끝내고 연공실에서 나왔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여덟이었다. 그가 완전히 가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한 지 겨우 5년. 그렇 기에 그는 아직까지도 장로원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장로님들을 소집하실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마교의 움직임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없으니까요. 현 단계에서는 세가의 문인들에게, 바깥출입을 할 때 좀 더 주의하라는 당부만 하셔도 될 듯합니다.”
가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찬동을 표했다.
“그게 좋겠군요. 그리고 세력권 내에 혹시 수상한 점은 없는지 직접 좀 살펴 주세요.”
“알겠습니다, 가주.”
총관은 예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때, 가주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돌아서는 총관을 급히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예? 무슨 일이십니까?”
가주는 지금까지 그 문제에 대해 고심해 왔던 듯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길이가 데려온 그들 말씀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요?”
“글쎄요. 그건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천지문은 마교와 유일하게 협정을 맺은 문파인 데다가, 그들의 세력권은 낙양입니다. 그런데 어떻 게 여기서 어슬렁거릴 수 있습니까? 뭔가 꿍꿍이속이 없고서야 머나먼 이곳까지 그놈들이 흘러 들어올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 의문이 풀리지 않는 한 그놈들 을 절대로 놔 줘서는 안 됩니다.”
총관의 말에 가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본가를 정탐하기 위해 온 놈들이라면 용서할 수가 없죠. 하지만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마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그놈들이 마교와 내통을 하고 있다면 조만간 꼬리가 밟히겠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마냥 잡아 둘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일단 며칠만 더 그들을 관찰해 본 후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바로 이때 요란하게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종소리를 듣자 그들은 경악감을 감추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종은 비상시에만 울리게 되어 있는 종이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경비 무사 한 명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옛, 후원에 감금해 놨던 그놈들이 탈출했습니다.”
“탈출했다고?”
“옛!”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들여야 한다.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척살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결코 증거를 남겨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옛!”
경비 무사가 달려간 후, 총관은 가주에게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창궁18수(蒼窒十八手)를 출동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창궁18수라면 남궁세가 내에서 네 번째로 강한 무력 단체였다. 하지만 가주가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단체들 중에는 그것이 가장 강했다. 나머지는 장로원의 승인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흐음…….”
가주는 한동안 생각하더니 중얼거렸다.
“겨우 다섯 놈을 잡아들이는 데, 창궁18수까지 동원할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노파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최악의 사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탈출에 성공한다면 본가의 위신은 땅바닥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그들이 마교도와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를 잡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하십시오.”
총관의 말에 가주는 이윽고 결단을 내렸는지 총관에게 지시했다.
“좋습니다. 창궁18수의 동원을 허가하겠습니다. 기필코 그들을 모조리 잡아들이세요.”
“옛, 가주님.”
“헉헉헉.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는 진팔. 그의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곳곳에 난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 옷에 배어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 여기저기에 얼룩진 피 의 대부분은 그의 것이 아니라 남궁세가 무사들의 것이었다.
마냥 남궁세가에 갇혀 있을 수 없었던 진팔은 탈출을 생각했다. 다섯 중에서 한 명만 탈출에 성공해도, 정파를 표방하고 있는 남궁세가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건드 릴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탈출한 한 명이 남궁세가가 사람들을 무단으로 억류했다는 사실을 퍼뜨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팔은 혼자 탈출하려 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놈의 조령이라는 계집이 문제였다. 함께 탈출하겠다고 떼를 써 댔던 것이다. 물론 조령이 탈출에 참가한다면 그녀의 부하들 또한 함께 할 것은 당연한 이 치였다.
진팔이 앞장서서 길을 열고, 그 뒤를 무사 한 명이 받쳤다. 그리고 얼굴에 흉터가 있는 무사는 제일 뒤에서 따라오며 후방을 맡았다. 아무래도 그가 가장 믿을 만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팔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일행을 둘러봤다. 조령은 별로 큰 상처가 없는 듯했다. 아마도 두 무사가 철저하게 보호한 모양이다. 그에 비해서 시녀는 별로 상 태가 좋지 못했다. 탈출하는 도중에 남궁세가의 무사가 던진 암기에 맞았던 것이다. 진팔은 얼굴에 흉터가 있는 무사에게 투박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상처를 치료할 줄 아시오?”
무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팔은 시녀를 엎어 놓고 힘을 주어 등에 깊숙이 박혀 있는 암기를 끄집어냈다. 그런 다음 주머니에서 금창약 등을 꺼 내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의학 지식이라고 해 봐야 아주 간단한 것들뿐이었다.
“젠장, 내가 이럴 것 같아서 그냥 남아 있으라고 했는데…….?
상처 치료를 끝낸 후, 진팔은 조령에게 고개를 돌리며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몸은 괜찮나?”
조령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꿈꾸던 무림이라는 것의 참모습이 뭔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야기로 들었을 때야 낭만적이고 멋이 있었을지 모 르겠지만, 그건 충분한 실력을 갖춘 자의 얘기다. 햇병아리들에게 있어서 무림은 결코 녹록한 놀이터가 될 수 없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치열한 전장으로 다가 서는 것이다.
“자, 이제 출발하자. 이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우리들이 탈출한 이상, 그들은 우리를 억류했던 사실을 숨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추격해 올 거야.”
조령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며 따지듯 말했다.
“남궁세가라면 명문 정파가 아닌가요? 그런데 왜 그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거죠?”
“내가 말했잖아. 무림이라는 게 다 그렇다고 말이야.”
“그럼, 그들이 왜 정파라고 불리는 거죠?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요!”
진팔은 초조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어디서 남궁세가의 추격자가 튀어나와도 당연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빨리 출발하지. 가면서 얘기할 수도 있잖아.”
그 말에 조령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자 얼굴에 흉터가 있는 무사가 슬쩍 턱짓을 하니, 다른 무사가 시녀를 등에 업었다. 준비가 갖추어지자 그들은 다시 전 력을 다해 경공술을 전개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경공술이 가장 떨어지는 것은 조령이었다. 그리고 무사, 얼굴에 흉터가 있는 무사는 그들 중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났다.
진팔은 달려가며 조령에게 말했다.
“내가 여태껏 경험한 바에 의하면, 정파라는 것들은 대부분 겉으로는 광명정대한 척하면서도 뒤로는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이더군. 특히 문파의 이익이 관계된 것이 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지.”
조령은 이해가 간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던졌다.
“아아, 그럼 진 형은 사파이신 모양이죠? 정파를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시는 것을 보면 말이에요.”
그 말에 진팔은 좀 더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그의 말투로 보면 뭔가 지독한 원한이라도 있는 듯했다.
“사파라는 놈들은 아예 대놓고 나쁜 짓을 하는 쓰레기들이야. 특히 그중에서 가장 질이 나쁜 놈들이 마교 놈들이구.”
조령은 진팔의 출신이 아리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파도 욕하고, 사파도 욕한다면 과연 어디에 적을 두고 있다는 거지? 조령은 무림인들만큼 패를 나누기를 좋 아하는 족속은 없다고 들었었다. 흑 아니면 백인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회색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한참을 달린 후, 그들은 다시금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신경 써서 살펴봐도 추격하는 남궁세가의 무리들이 없었다. 남궁세가에서 탈출하던 초기만 해도 수많은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벌떼처럼 덤벼들었다. 그 와중에 탈출에 성공한 것은 진팔의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조령이 거느리고 있는 두 무사의 능력이 진팔 의 예상보다 월등히 뛰어난 덕분이었다.
“휴우…, 운 좋게 따돌리는 데 성공한 것 같소. 여기서 쉬면서 몸을 추스릅시다.”
진팔과 흉터가 있는 무사가 주위를 경비하는 가운데, 조령과 다른 무사는 운기조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냥 쉬고 있는 것보다 그쪽이 훨씬 회복 속도가 빠르기 때 문이었다.
한식경쯤 흘렀을까? 거의 인기척을 내지 않으며 한 명의 남궁세가의 무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풀숲을 이리저리 살피며 흔적을 찾고 있었다. 진팔은 그가 지 니고 있는 검의 수실이 붉은색이라는 것을 보자마자 시선을 재빨리 그의 옷깃으로 돌렸다. 그의 옷깃에는 독특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진팔은 무의식중에 욕지 거리를 내뱉은 후 흉터가 있는 무사에게 살그머니 말했다.
“빨리 달아날 준비를 하시오. 맞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오.”
조령 등이 운기조식에서 깨어나자마자 그들은 전속력으로 경공술을 전개하여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에서는 날카로운 장소성(長嘯聲)이 울려 퍼지고 있었 다. 휘파람 소리에는 상당한 내력이 실려 있었기에 그 소리는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진팔은 달리는 와중에 흉터 있는 무사에게 말했다.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오.”
“젊던데…, 저자가 그렇게 강하오? 휘파람에 실린 내력으로 봐서 나와 비슷한 것 같은데?”
“저자 혼자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저들은 혼자서 움직이지 않소. 당금 무림에서 창궁18수의 공격을 당해 낼 수 있는 고수는 그리 흔치 않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