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7권 16화 – 뛰는 놈 나는 놈
뛰는 놈 나는 놈
“이런 젠장!”
온몸을 북북 긁어 대던 분타주는 도저히 못 참겠는지, 윗옷을 벗어들고 이를 잡기 시작했다. 한 놈 한 놈 잡아내어 손톱으로 꽉 눌러 툭 터트리면, 시뻘건 피가 손톱 을 적신다.
“에이, 씨팔! 많이도 처먹었군.”
한참 이 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는 분타주에게 거지 하나가 황급히 달려와서 말했다.
“또 당했답니다!”
분타주는 손톱 위에 올려놓은 이를 우악스럽게 바숴 버리며 버럭 화를 냈다.
“뭐? 이런 빌어먹을! 또 당했어? 상태는 어떻다던가?”
“둘 다 의원에 넘겼는데, 생명에는 지장이 없답니다.”
확실히 분타주의 몽둥이찜질이 효과가 크긴 컸던 모양이다. 모두들 정보를 누설하지 않기 위해 입을 굳게 다문 것까지는 좋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부작용이 뒤 따랐다. 상대방도 정보를 얻기 위해 악착같이 고문을 하다 보니, 그놈에게 걸린 모든 거지들이 그야말로 걸레쪽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떠그랄! 안 그래도 무영신마를 찾는 데 동원할 인원도 턱없이 부족하거늘, 이런 식으로 부상자가 속출하니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분타주는 윗옷을 내팽개쳐 버린 후 주위를 서성이며 생각에 잠겼다. 거지들 중의 하나가 옷을 주워 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까지 그놈에게 당한 형제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봤을 때, 그놈은 무영신마를 찾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마교에서 무영신마를 구출하기 위해 파견한 고수가 아닐까요?”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 멍청아. 그놈이 마교도가 아니라면 뭐겠냐?”
분타주가 신경질을 버럭 내자, 거지는 찔끔해서는 뒤로 물러섰다.
“천하의 개방을 감히 자신의 정보통쯤으로 생각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 이런 치욕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총타에 연락해라. 좀 더 많은 고 수를 파견해 달라고 말이다. 설혹 무영신마를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놈만은 기필코 찾아내어 척살해야 할 것이다.”
분타주는 거지들 중의 한 명에게 지시했다.
“너는 즉시 그놈에게 당한 형제들을 찾아가서 놈의 초상화를 만들어라.”
“옛.”
분타주의 지시를 받은 거지들은 각자 맡은 일을 행하러 사방으로 달려갔다.
한 시진쯤 후 초상화를 만들러갔던 중년 거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왔다. 그걸 본 분타주는 의아한 듯 물었다.
“자네 왜 그러나?”
“이거 한번 보십시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요?”
초상화를 건네받은 분타주는 초상화를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많이 봤을 수밖에 없지. 이거 그 흉악무도한 암흑마제의 초상화 아냐? 워낙 오랫동안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하지만, 본방 최고의 적인 마교의 대가리 얼굴도 기억 하지 못하고 있다니…, 쯧쯧. 그런데 왜 이 그림을 가져왔냐?”
분타주의 말을 들은 중년 거지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하게 바뀌었다.
분타주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너 안색이 갑자기 왜 그러냐?”
중년 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게 형제들을 괴롭히고 있는 그 괴한의 초상화입니다요.”
“헉!”
분타주의 얼굴도 창백하게 질렸다. 하지만 분타주는 잠시 후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그의 어조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서, 설마 아니겠지. 마교 교주나 되는 놈이 무슨 할 짓이 없어서 우리 같은 거지들을 족치고 있겠어?”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갈 수밖에 없는 것이, 마교 교주를 직접 목격한 개방도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개방도는 교주를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초상화를
보고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수많은 마교의 고수 중에서 알려진 자들의 얼굴이 초상화를 통해 개방도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저도 그렇게는 생각합니다만……. 타주님, 과거 본방은 무림맹의 부탁으로 몇 번인가 그를 감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본방의 형제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었 는지는 수많은 자료가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놈은 거지들을 괴롭히는 걸 즐기는 악취미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요.”
중년 거지의 말을 듣고 보니 분타주는 과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걱, 그것도 그렇구나. 아무래도 총타에 얼른 연락을 넣는 게 좋겠다.”
“옛”
중년 거지는 총타로 연락을 넣기 위해 달려 나갔다.
안휘성분타에 도착한 옥화무제는 인사를 받을 생각도 안 하고 분타주에게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졌다.
“현재 상황은?”
“예, 감시 대상은 두 시진 전에 패력검제 일행과 충돌했습니다. 상부의 지시대로 최대한 장거리에서 관찰했을 뿐이기에, 서로 간에 무슨 이유로 충돌했는지는 파 악할 수 없었습니다.”
“충돌한 이유야 뻔하겠죠. 멋도 모르고 그쪽에서 시비를 걸었겠지. 그건 그렇고, 몇 명이나 죽었죠?”
“일진검 대협이 중상을 입었을 뿐, 사망자는 없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옥화무제가 입을 열었다.
“일진검…, 초씨세가의 가주 말인가요?”
“예.”
“자세히 좀 말해 봐요.”
분타주는 정찰조의 보고를 토대로 자신이 아는 한 상세하게 옥화무제에게 상황의 전개를 설명했다. 최대한 멀리서 관찰한 것이었기에, 대략적인 겉핥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옥화무제는 만족했다.
“아주 잘되었군요. 그 정도로 끝낸 것을 보면 성격은 옛날 그대로인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가 왜 개방도들을 붙잡아서 고문하고 있는지 그걸 이해할 수가 없네요. 개방 쪽에 연락은 해 봤나요?”
“예.”
“그가 무슨 목적으로 개방도를 고문하고 있었던 거죠?”
“도무지 이해하기 힘듭니다만, 그는 무영신마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구요? 무영신마? 오호호홋!”
한동안 배꼽이 빠지게 웃음을 터뜨리던 옥화무제는 간신히 진정하고 중얼거렸다.
“정말 재미있는 정보였어요. 아마도 서로 간에 오해가 오해를 부른 모양이군요. 진짜 무영신마가 여기에 있었다면 벌써 누군가가 그를 발견했을 거예요. 처음부터 그는 여기에 없었다는 말이죠. 일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는군요. 자기 부하의 행방도 모르는 상관이 있을 수는 없죠. 그걸 보면, 그는 꽤 오랜 시간 마교와 연락을 끊고 있었다는…..”
분타주는 약간 놀란 듯 질문했다.
“그도 마교의 사람이었습니까?”
옥화무제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 그것까지는 알 필요 없어요. 그건 그렇고, 이왕에 이렇게 된 거, 그와 만나는 것이 좋겠군요. 그에게로 안내하세요.”
“옛.”
몇 시진 후, 분타주의 안내로 옥화무제 일행은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묵향을 만났다. 자신만만한 그의 얼굴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20여 년이 흘렀건만, 하나도 변한 게 없는 저 얼굴을 다시 보니 갑자기 짜증이 나는군. 아니! 오히려 더 젊어진 것 같잖아? 정말 그동안 어디 처박혀서 수련이라도 한 건가?”
하지만 그런 속마음과는 달리, 옥화무제는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교주님.”
“이게 누구신가. 아주 반갑구먼.”
필요할 때에 딱 나타난 것이다. 사실 거지새끼나 무영문 떨거지 찾아다니기도 귀찮은 노릇이었는데, 옥화무제가 나타난 것을 보면 뭔가 속셈이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묵향의 반응을 보고 아르티어스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는 사람이냐?”
“예.”
묵향의 대답에 아르티어스는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 지금까지 너를 안다던 녀석들과는 사뭇 반응이 다르군. 거~참, 이상한 일이네~! 혹시 옛날에 너하고 잠자리를 같이 했다던가 뭐 그런 여자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요.”
둘이 아웅다웅하는 것을 보며, 순간적으로 옥화무제의 안색은 묘하게 변했다. 묵향의 분위기가 뭔가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낀 탓이다.
‘누구지? 저자가 존대어를 쓸 인간이 과연 무림에 있었던가??
생각이야 어떠하든, 옥화무제는 의도한 대로 대화를 하기 위해 운을 띄웠다.
“오랫동안 출도를 하지 않으셔서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그동안 구석진 시골에서 좀이 쑤셨을 텐데 어떻게 참으셨어요?”
“이런이런, 만나자마자 시비를 걸다니……. 수련에 빠져 있다 보니 세월이 이렇게 흐른 줄도 몰랐군.”
묵향의 거짓말에 옥화무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이놈이 생사경이라도 깨달은 거야?”
“그건 그렇고, 마침 잘 만났어. 부하 한 놈을 찾고 있는데 말씀이야.”
옥화무제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무영신마 말씀이시군요.”
묵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바로 그 새끼지. 좀 알려 주지 않겠나?”
옥화무제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정보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겠죠? 무엇을 주실 수 있나요?”
상대의 태도에 묵향은 거칠게 콧바람을 뿜으며 투덜거렸다.
“흥! 오랜만에 보니 간덩이가 많이 커졌군. 감히 나를 상대로 거래할 생각을 하는 걸 보면……..
“호호호, 여태껏 그래 왔잖아요. 자, 대가를 주세요. 그럼 알려 드리죠.”
어떻게 보면 교태롭다고 할 정도로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옥화무제를 보고, 묵향은 퉁명스레 말했다.
“내가 새파란 젊은이도 아니고 그런 모습에 혹할 사람도 아닌데, 무슨 짓이야? 나잇값 좀 하라구. 다 늙은 할망구가 겉만 번지르르하다고, 참내.”
옥화무제의 뒤편에 서 있던 분타주와 호위 무사들의 이마에 굵은 힘줄들이 솟아오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감히 발작하지 못했다. 극심한 모욕을 당한 태 상문주도 가만히 있지 않은가. 상관의 명령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감히 앞으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속만 부글부글 끓이고 있을 뿐, 참을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옥화무제는 심사가 뒤틀린 듯 이죽거렸다.
“내 나이를 생각해서 존장의 예의를 갖추지도 않는 주제에 그딴 망발을 내뱉을 이유는 없잖아요? 나를 너무 젊게 보는 것 같아서 그러고 있었을 뿐이에요. 존장의 예의를 갖춰 준다면, 나도 현숙한 여선배로서의 모습을 보여 드리죠.”
“이런 망할! 좋다. 그걸 대가로 바라는 거냐?”
옥화무제는 새침한 어조로 대꾸했다. 존장의 예의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대가로 받는다는 말인가?
“농담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황금?”
“나도 많아요.”
“무공?”
“익힐 만큼 익혔어요.”
이윽고 묵향은 짜증스런 어조로 물었다.
“그럼 바라는 게 대체 뭐야?”
“협정서를 써 줘요. 천지문에 베푼 것과 똑같은 조건으로 말이에요.”
묵향의 눈이 슬쩍 가늘어지며 살기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젠장, 내가 그걸 써 주느니, 네년을 잡아 족치는 쪽을 택할 거라는 걸 잘 알 텐데?”
하지만 옥화무제는 그 정도 협박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홋홋! 댁의 말을 빌리면, 다 늙은 할망구가 세상에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을 거라고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는 거죠? 유서까지 써 놓고 왔으니 그런 협박을 해 봤
자, 당신이 원하는 답은 결코 얻지 못할 거예요. 당신에게는 지금 이렇게 말다툼하고 있을 시간이 없잖아요. 무영신마의 목숨에 대한 대가로 협정서 한 장이라면 아 주 좋은 조건이 아닌가요? 또 천지문에도 써 줬는데, 왜 본문에는 못 써 주겠다는 거죠?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묵향은 거칠게 콧바람을 내뿜으며 말했다.
“흥! 불공평 좋아하고 있네. 이왕에 이렇게 된 거…, 좋다! 무영신마가 죽기라도 하면, 우선 네년의 목을 비튼 후에 그 망할 놈의 무영문을 잿더미로 만들어 주마.” 이번의 협박은 약간 통했는지 옥화무제는 흠칫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코앞의 무영신마도 못 찾는 당신이, 지하 깊숙이 숨어 있는 본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영문은 정보 단체다 보니 그 총단의 위치는 철저히 비밀에 싸여 있었다. 게다가 저 영악한 옥화무제가 지하 깊숙이 숨으라고 지시까지 내려놓고 나왔다면 어떻 게 찾을 것인가?
한참을 망설이던 묵향은 결국 그녀의 조건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한 번 결정한 일은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그답게 옥화무제를 향해 외쳤다.
“이런 젠장! 좋다. 지필묵을 가져와.”
그러자 옥화무제의 뒤편에 얌전하게 서 있던 중년의 미부인이 지필묵을 건넸다. 묵향은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리며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의 필체는 성격을 반영 하듯 거칠었지만 힘이 넘쳤다.
1 : 이 협정서는 상대방이 해제를 원하거나 상대 문파의 수장(首長)이 바뀌기 전까지 유효하다.
2 :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 협정서를 위반해야 할 일이 발생하면 협정서 해제를 원하기 한 달 전에 상대방에게 통보해야 한다.
3 : 천마신교와 무영문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야 하며, 설혹 실수로 상대의 영역을 침범했다면 무력보다는 상호 토의를 통해 원만히 처리함을 원칙으로 한다.
4: 쌍방은 상대편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최대한 도와줄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찬찬히 협정서를 훑어보던 옥화무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악필인 듯하지만 그런대로 봐 줄 만은 하군요. 그런데 천지문하고 맺은 협정서하고는 내용이 많이 다른 것 같은데요?”
“지금 그런 거 따지게 생겼어? 헛소리 말고 서명이나 해!”
이것만 해도 어디냐 싶었는지 옥화무제는 망설이지 않고 서명했다.
모든 작업이 다 끝난 후, 각자에게는 종이쪽지 한 장씩이 남았다. 옥화무제가 협의서를 소중하게 접어서 품속에 갈무리하는 것을 보며, 묵향이 차가운 어조로 물었 다.
“자,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줬으니, 무영신마가 있는 곳을 가르쳐 줘야겠지?”
옥화무제는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지금 무영신마 장영길은 천마신교 내에 있어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에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여기에 있다고 해서 찾아 헤매고 있는데 말이야.”
그 말에 옥화무제는 품속을 뒤져 종이 한 장을 더 찾아내어 묵향에게 건네줬다. 묵향이 펼쳐 보니 초상화가 그려진 종이었다.
“눈에 익은 얼굴이죠?”
묵향은 떨떠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나로군.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지?”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척살 대상을 그린 초상화예요. 그들은 이자가 무영신마인줄 착각하고 있었던 거죠.”
“으드드득!”
묵향은 이빨을 갈며 외쳤다.
“이 망할년이!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나를 가지고 놀아? 협정서 따위 다 필요 없어. 오늘을 네년 제삿날로 만들어 주마.”
묵향이 으르렁거리며 막 출수하려는데, 차분하기 그지없는 여인의 목소리가 상큼하게 들려왔다.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정말 하나도 변하신 게 없는 것 같네요. 마치 20여 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요.”
묵향은 고개를 획 돌려 방금 말을 꺼낸 중년 부인을 바라봤다. 세월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빼앗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미를 더욱 완벽하게 보완해 주고 있었다. 얼 핏 보면 옥화무제와 약간 닮은 듯도 했다. 하지만 옥화무제가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20대가 가지는 청순한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데 비해, 그녀는 30대 후반의 완숙 미를 자아내고 있었다.
뭔가 추억을 그리는 듯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를 무시하고, 묵향은 날카로운 시선을 옥화무제에게로 던졌다.
“누구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옥화무제가 대꾸했다.
“제 손녀, 영인이죠. 과거 몇 달 잡아놓고 감상했을 텐데, 잊어버렸어요? 천마신교의 교주께서, 손녀 앞에서 할머니를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으시겠죠?”
묵향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정말 몇 대 쥐어 패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젠장, 예나 지금이나 잔머리 하나는 못 당하겠군. 하지만 손녀딸로 방패를 삼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물론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이게 저를 지켜 주겠죠.”
옥화무제는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품속에 들어 있는 협정서를 토닥거렸다.
옥화무제는 묵향 일행이 사라진 후 분타주에게 명령했다.
“무림맹에 전갈을 넣으세요. 현재, 무림맹에서 쫓고 있는 무영신마는 하남성을 향해 빠른 속도로 북상하고 있다고 말이에요.”
“예? 왜 그런 거짓 정보를……?”
옥화무제는 그것도 빨리빨리 눈치 채지 못하는 분타주에게 짜증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현재 무림맹에 그자의 위치를 알려 준다고 해서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준비로는 결코 그를 잡을 수 없어요. 겨우 이따위 준비로 마교의 지존을 잡을 수 있 다면 오래전에 그는 죽었겠죠.”
이제야 상대가 누군지 눈치 챈 분타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옥화무제는 분타주가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 알겠어요? 저 정도 인원으로 그에게 덤빈다는 것은 피해만 자초하는 일이라구요.”
분타주도 이제야 이해가 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무림맹에서 발동시킨 천라지망은 극마의 수준에 못 미치는 마교의 장로급 정도를 척살하기 위해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 천라지망으로 어찌 화경급 고수를 잡 을 수 있겠는가? 아니, 상대는 화경의 고수를 격패시켰으니, 그보다 더한 실력자라고 봐야 했다.
“얼른 무림맹에 전갈을 넣겠습니다.”
허둥지둥 달려가는 분타주의 뒷모습을 보며, 옥화무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쯧쯧, 저런 놈이 분타주라니. 한심하군.’
본타에 돌아간 후 분타주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그녀였다.
옥화무제 일행과 멀어진 후, 아르티어스는 혼자서 키득거리고 있는 묵향을 향해 짜증스런 어조로 투덜거렸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뭐가 재미있는지 혼자 키득거리고 있던 묵향은 미소를 머금은 채 반문했다.
“뭐가요?”
“아까 그 계집하고 뭐 하는 짓이냐고.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화를 냈다가, 또 손녀가 옆에 있다고 참아 줬다가……. 그냥 처음부터 붙잡아서 쥐어 패면 끝날 일 을 가지고. 그것도 안 되면 내가 있잖냐? 그냥 기억을 읽어 버리면 순식간에 끝났을 텐데.
“아, 그거요? 낫살이나 먹어 가지고 하는 짓이 귀엽잖아요. 얘기해 보면 재미도 있고…….
묵향의 대답에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기야, 너 진짜로 성질나면 언제 그런 거 따지는 녀석이었냐?”
“그렇게 하면 재미없죠. 강호를 아무리 떠돌아도 그녀만큼 재미있는 대화 상대를 만나기도 힘들거든요. 그녀의 의도대로 적당히 화도 내 주는 척하면서.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그런 종잇조각에 서명을 한다는 건 좀…….”
“그 계집은 자기가 득을 봤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아니죠. 정보 수집은 무영문이 으뜸이니까, 대부분 저쪽의 도움을 받을 일이 많거든요. 또, 서로의 영역을 침 범했을 때 어떻게 해 준다는 그런 조항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조항이죠. 오히려 무영문의 행동에 제약만 줄 뿐이에요. 왜냐하면 본교와 달리 무영문은 모든 게 비 밀에 싸여 있는데, 그런 소리를 이쪽에 한다는 자체가 이 근처에 본문의 근거지가 있소’하고 알려 주는 것이나 다름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