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 더 미스트 (Over the Mist) – 4화 : 징조들이 날뛰는 밤
징조들이 날뛰는 밤
수마이 전투 신관은 이파리 하드투스 보안관이 당한 사고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지만, 동시에 기사 파린세가 당한 끔찍한 폭행에 대해 분 노했다. 우발적 사고에 대해 기사 파린세가 그런 방식으로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 수마이 전투 신관의 주장이었다. 그는 내 목을 원 했다. 집무실 벽에 걸어놓을 것이 별로 없나 보다.
하지만 수마이 전투 신관의 주장이 힘을 얻는 것에는 커다란 장애 가 두 가지나 있었다. 먼저 손상당한 그와 신전 기사단의 체면을 들 수 있다. 신전 기사단의 정예 기사가 일개 보안관보에게 그 이름만 듣고도 경기를 일으킬 만큼 두드려 맞은 것은 도저히 공론화할 수 없는 창피 한 사건이다. 이것은 과장 없는 사실인데, 실제로 기사 파린세는 몸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 때문에 황급히 신전 기사단 본부로 이송되어야 할 처지라고 한다.
두 번째 장애는 이파리 보안관에 대한 우리 시민들의 애정과 신뢰 였다. 나는 몬도 시장이 감히 수마이 전투 신관에게 ‘들어오지 않겠다 고 약속한 밤 시간에 왜 들어온 거냐?’라고 대들었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 놀랄 만한 소식이 뒤를 이었다. 잔파드로스 신관 은 수마이 전투 신관에게 찾아가 조금도 굽힘 없는 태도로 이렇게 말 했다 한다. 기사 파린세는 안개 때문에 이파리 보안관을 보지 못했다 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는 안개가 낀 시내에서 말을 전속력으로 달리는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반박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공박이다. 자칫하면 파린세가 의도적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수마이 전투 신관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별로 없었다. 그는 전적으로 파린세의 실수임을 인정하고 신전기 사를 상대로 폭력을 행사한 보안관보에 대해서는 사과를 받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하기로 했다. 나는 길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싹싹 빌게 만든 것은 좀 미안하다고 적어서 보내주었다. 내 목 대신 그 사과장을 집무실 벽에 걸어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파린세가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걸까? 그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조 금 더 필요했다. 하지만 결국 상황을 알게 되었다.
파린세가 그 밤중에 도시로 들어온 이유는 수색에 필요한 인원을 지원받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그들은 ‘자원한 시민들로 수색대를 보강 한 다음, 자원 수색대에 대한 식량 명목으로 급히 출발하느라 많이 가져오지 못한 자신들의 군량도 ‘지원받는다는 계획을 세운 것 같다. 오크와 트롤 등이 포함된 2000명의 병사들을 먹이기 위해선 하루에 밀 2.5톤이 필요하다. 여기에 기타 부식과 연료와 기사들이 타는 말의 먹 이까지 포함시키면 계산하기가 싫어질 정도다.
수마이 전투 신관과 링크 백작이 우리 도시로부터 필요한 만큼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시의 지배층을 강력하게 장악할 필요가 있다. 이 파리 보안관을 향해 말을 돌진시킨 기사 파린세의 행동은 방해가 될지 도 모르는 보안관을 잠시 무대 뒤로 퇴장시키고 동시에 시의 지배층에 대해 엄포를 주는 일석이조를 노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행동을 하라 는 명령을 받진 않았을 테니 그것은 파린세의 단독 행동이었을 것이다. 먼저 군에 몸담았던 선배로서 나는 파린세에게 정신이 제대로 박힌 군인이라면 시키는 일만 잘 해야 한다는 조언을(물론 내 두 손이 다 묶여 있어서 그 녀석을 도저히 죽일 수 없다는 전제 하에) 해주고 싶다. 영리하게 굴려 했던 덕분에 파린세는 경험할 거라 상상할 수도 없는 폭행을 당 했고, 결과적으로 자기 상관의 바람도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시장 은 기사단의 요청을 시민들에게 전달했지만, 어휘는 완전히 자의대로 선택했다.
“우리 보안관을 깔아뭉갠 기사단에서 개새끼 수색하는 일을 도와줄 사람을 찾는다는데, 관심 있는 사람?”
우리 시민들은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다.
나는 이파리 보안관의 침대 옆에 붙어 있었지만 그런 사정을 눈으 로 본 것처럼 짐작할 수 있었다. 보안관 관사 앞에 장사진이 늘어설 정 도로 많은 시민들이 병문안을 하기 위해 찾아왔던 탓이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관사 바깥 사정을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주로 내게 말을 건 까닭은 이파리 보안관이 말을 받아줄 상 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품에서 기절한 이후로 이파리 보안관은 깨어나지 않았다. 우리 도시에 하나밖에 없는 의사이자 수의사, 그리고 이발사인 노움 봇뜨리 는 이파리 보안관의 상태에 대해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한 사 람이 세 가지나 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제대로 하는 일이 하 나도 없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더 높지만 봇뜨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봇뜨리는 정말 솜씨 좋은 이발사다. 하지만 나머지 두 직업은 그저 그런 수준이다. 봇뜨리는 이파리 보안관이 입은 타박상과 골절은 어렵잖게 치료했지만, 의식을 회복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치료 법을 내놓지 못했다. 느닷없이 의사인 것처럼 말하기 시작한 안셀이 보 안관은 사흘 안에 눈을 뜬다고 말했을 때 나는 평생의 신조를 깨고 안 셀의 말을 믿을 뻔했다.
내방객들의 방문이 좀 뜸해진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자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누운 이파리 보안관을 바라보며 제국군 시절에 배웠던 것 중에 뭐 쓸만한 것이 없나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러고는 분노를 느꼈다. 병 사들에게 가르치는 야전 의학이라는 것은 당황한 병사들이 전우애를 발휘하다가 부상병을 죽이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내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파리 보안관의 숨소리에 끓는 소리 같은 것이 섞여 있지 않고 그 호흡에서 특별히 이상한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것 뿐이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것들은 모두 좋은 의미였다. 그러다가 내가 발견할 수 있는 이상 징후라면 못뜨리나 옆에 있는 소란다스 부인이 이미 발견하고 대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의자에서 일어났다. 소란다스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티르, 당신도 좀 쉬어야 해요. 한숨도 안 잤으니까. 보안관님은 내가 돌보겠어요.”
“그럼 좀 부탁하겠습니다. 저는 사무실에 있겠습니다.”
“집에 가서 쉬라니까 그러네.”
“사무실을 비워둘 수는 없지요. 괜찮습니다. 책상에 엎드려서 눈 좀 붙이면 됩니다. 멀리 가고 싶지도 않고요.”
소란다스 부인은 더 말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관사 에서 나와 사무실 건물로 돌아갔다.
의자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죽 뻗었다. 못 견딜 정도로 피로했지만, 그것은 몸의 피로가 아니었다. 정신이 몸 안쪽에서 몸을 마구 난타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벌떡 일어나서 어디로든 달려가고 싶은 기분을 억 눌러야 했다. 머리를 좀 쥐어뜯어 보았지만, 소득은 별로 없었다. 집중 할 것이 필요했다.
보안관의 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책상 위에는 서류들이 어지럽 게 흩어져 있었다. 그것들을 좀 정리할까 하다가 문득 유품을 정리하 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진저리가 쳐졌다. 되도록 책상 위의 혼잡도 를 줄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나는 수도에서 온 공문들을 집어 들어 읽었다.
이파리 보안관은 겉봉에 지급이라고 적혀 있지 않은 공문들은 절대 로 당장 읽지 않으며, 따라서 이파리 보안관이 잊어버리기 전에 그것들 을 읽는 일은 내 소관이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난 내용들을 읽게 되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런 공문들은 대개 시시한 일이거나 우리 도시와 상 관없는 일, 혹은 양쪽 모두에 해당하는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보통 이다. 역병 발생이나 강도단 출현 같은 우리 시민들에게 정말 중요한 내 용을 담고 있는 편지에는 반드시 지급이라고 기재된다. 따라서 내가 그 것들을 읽는 일에는 오해나 착오 때문에 겉봉에 지급 표시를 하지 않 은 지급 편지를 찾아내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하지만 집중할 일이 필요했던 나는 평소 때와 달리 글자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잘못된 시도이거나 내 정신이 두 개로 나뉘어 있는 모양이다. 분명 히 집중해서 읽었지만 내 머리의 한구석은 자꾸만 망상을 자아내었다. 그것들을 쫓아내려고 하자 거꾸로 내게 달려들었다.
천사의 새끼들은 정말 흉조인 걸까?
끔찍한 일을 당하고 보니 그런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끝까지 그런 가능성을 부인했던 이파리 보안관은 달려드는 말에 치였다. 한편, 이파 리 보안관에 대한 파린세의 공격은 신전 기사단과 제도 기사단이 천사 의 새끼들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들은 그 새 끼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물의를 일으킬 가능성까지 감수할 작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조만간 다시 도시를 장악하려고 나설 지도 모른다. 분명히 군량 조달에 압박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된다면 도시와 두 기사단의 충돌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도대체 천사가 낳은 그것이 무엇일까? 저승사자가 수고양이의 습관 을 위반하게 만든 그것은, 이 한가로운 개척 도시까지 두 기사단을 불 러들인 그것은, 결과적으로 이파리 보안관이 혼수상태에 빠져들게 만 든 그것은 무엇일까? 이파리 보안관의 믿음은 옳지 않다. 그것은 결코 보통 강아지들이 아니다. 평범한 강아지들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는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뭔가가 잘못된 세상이다.
안 되겠다.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 나는 의식적으로 호흡을 느 리게 하려 애썼다. 그리고 다음 편지를 집어 들었다.
몇 초 후,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끼며 편지를 내려놓고 그 겉봉 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편지를 읽었다.
죄송합니다. 보안관님. 이 편지는 귀 도시의 잔파드로스 신관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야 하기에 보안관님 의 이름을 빌렸습니다. 잔파드로스 신관에게 전해 주길 부탁합니다. 여의치 않다면 보안관님이 읽고 그에게 전해 주셔도 좋습니다.
혼란이 사라지고 대신 흥미가 느껴졌다. 보안관이 읽어도 되는 편지라면 나 또한 읽어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곧장 일어나 신전으로 가는 대신 편지를 계속 읽었다.
친애하는 잔파드로스 보게.
이 서신이 얼마나 빨리 도착할지 모르겠지만, 조금 빨리 도착하더 라도 자네는 머지않아 상황을 알게 될 걸세. 그러니 나는 자네가 수 마이 전투 신관과 신전 기사단 200명, 그리고 링크 백작이 이끄는 제도 기사단 200명이 그곳으로 간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전 제 하에 말하겠네.
아마 그 소식에 놀라고 어이없어하고 있겠지. 미안하네. 그건 모두 내 불찰일세. 자네가 보내준 이야기가 하도 신기해서 떠들고 다닌 것 이 화근이었어. 하지만 사태가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 누가 짐작할 수 있었겠나?
친애하는 잔파드로스. 자네 기억력은 아직 뚜렷할 테니 자네의 스 승이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기억하고 있겠지. 난 왜 이런 사 태가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어. 고맙게도 내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 곤 하는 현명한 친구가 상황을 설명해 주었지. 그 친구의 이름은 밝 힐 수 없지만 나를 신뢰한다면 그 친구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하겠 네. 되도록이면 그 친구의 말을 그대로 옮기도록 애써보겠어. 아마 앞 으로 실명을 밝힐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될 거야. 답 답하겠지만 참아주게.
그곳에선 제도의 동정을 파악하기 쉽지 않겠지만, 요즘 제국 정치 계에선 어떤 고위 인물의 자질 시비가 크게 일어나고 있네. 편의상 그 를 갑이라고 부르겠네. 그리고 그 고위 인물에겐 막상막하의 실력을 갖춘 정적이 한 명 있는데, 그를 을이라고 부르겠어.
을은 모험에 가까운 시도 끝에 갑의 자질 문제를 시빗거리로 부각 시킬 수 있었어. 상황은 아주 미묘해 갑이 만약 자신의 자질을 입증 한다면 갑은 놀랄 만한 영향력을 획득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리고 을 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고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물러나게 될 거야. 하지만 갑이 자질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상황은 반대가 될 거야. 그리고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그 둘 중 하나뿐이야. 두 사람은 극한 적인 대립을 보이고 있고 따라서 극적인 타협 같은 것이 일어날 가능 성은 희박해.
대신전은, 그래. 언제나 지상의 정치에 대해서는 중립이지. 하지만 그것이 궤변이라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완전한 중립이라는 것은 불가능해. 대신전은 둘 중 한쪽을 지지하고 있어 수마이 전투 신관과 신전 기사단이 동원된 것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을 거야. 다시 갑의 아슬아슬한 위치에 대해 말하겠네. 을의 결사적인 공격 때문에 갑은 현재 아주 사소한 추문만으로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 는 상태일세. 하지만 갑은 놀라운 자기 절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주위에서 추문을 발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야. 그래서 모든 공 격 수단을 소모한 을은 초조해하고 있어.
그런 상황에서 내 이야기가 제도에 퍼진 거야.
무슨 말인지 짐작하겠나? 제발 웃지 말게. 나도 웃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군. 초조해진 을은 자네의 이야기를 마지막 반전의 기회로 삼 았어. 을은 만약 고양이와 개가 교미하여 낳은 새끼가 실제로 존재한 다면, 그것은 하늘이 갑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어!
나 또한 웃을 수 없었다. 웃기는커녕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제 사태 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분노 속에서 나머지 내용을 빠르 게 읽어 내려갔다.
그래. 수마이 전투 신관과 링산크 백작은 그 고양이와 개가 교미하 여 낳았다는 새끼를 먼저 확보하기 위해 각자 신전 기사단과 제도 기 사단을 이끌고 황급히 그곳으로 가고 있는 걸세. 그들 중 한쪽은 갑 의 지지 세력이고 다른 쪽은 을의 지지 세력이야. 이런 식으로 쓰는 것에 대해 나 자신이 화가 날 지경이니 읽는 자네는 참기 어렵겠지. 부디 큰 관용을 발휘해 주게. 오로지 자네와, 그리고 혹 이 서신을 읽 게 될지도 모르는 자네 도시의 보안관을 보호하기 위함일세.
만약 갑을 지지하는 측이 그 동물을 확보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분 명히 알아볼 수 있는 강아지 같은 것으로 바꿔치기한 다음 잘못된 소문이라고 주장하겠지. 개와 고양이가 교미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 리를 믿느냐고 말하면서. 그러면 을은 대단히 멍청한 사람처럼 보이 겠지? 반대로 을의 지지 세력이 그 동물을 확보하면 갑은 하늘의 꾸 짖음을 받는 사람이 될 거야. 당장 모든 것을 잃게 되겠지.
결과적으로 갑과 을의 정치적 생명이 모두 자네 도시의 개가 낳았 다는 그 어린 동물들에게 달려 있게 된 셈일세. 우스우면서 슬픈 일 이야 나로서는 이런 해괴한 사태야말로 악마의 소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군. 내가 자네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지 못하고 이렇게 우회하여 보내는 까닭도 그 때문이야. 앞서 말했던 내 친구가 그 렇게 하라고 권고했어. 갑과 을의 지지자들 중 누군가가 내 편지를 훔 쳐볼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서신보호법의 엄중함을 잘 알고 있기에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까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나는 그의 권고를 따 르기로 했네.
친애하는 잔파드로스. 자네는 이제 상황을 알게 되었어. 누가 누구 의 편인지 모른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말이야. 자네는 어쩌면 동료 의 식에 입각하여 대신전의 편을 들고 싶은 충동을 느낄지도 모르지. 수 마이 전투 신관에게 그 동물을 내어주는 것이 순종의 미덕을 발휘하 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래서는 안 되네. 자네가 그러길 바란다면 나는 이런 편지를 쓰지 않았을 거야. 그렇다고 해서 링크 백작에게 그 동물을 내어주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야.
왜냐하면, 그 동물들은 진짜로 전조이기 때문일세.
자네의 생각이 맞았어. 고양이와 개가 교미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런 신비로운 일이 아무 의미 없이 일어나지는 않아. 분명히 의미가 있지. 하지만 그것을 설명하지는 않겠네. 나는 다만 자네에게 약간의 암시를 줄 수 있을 뿐이네. 자네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길.
그다음에는 내가 읽을 수 없는 이상한 글이 몇 줄 적혀 있었다. 분명 히 제국 문자였지만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많은 것을 알았기에 그 이상한 글을 해석하려 애쓰지는 않았다. 서명 은 ‘한때 자네의 스승이었으나 이제는 벗인 이가’라고 되어 있었다. 이 름을 밝히지 않은 것 또한 비밀주의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잔파드로 스 신관의 스승이었던 자가 누군지 알아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읽으면서 이미 느꼈던 거지만, 편지를 쓴 이는 좀 허술한 사람이다.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는 그 현명한 친구가 좀 더 분발해야 할 것 같다.
나는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파리 보 안관의 상태를 한 번 더 점검하고 소란다스 부인에게 잠시 밖으로 나가 겠다고 말한 다음 신전을 향해 걸었다. 이미 정오 무렵인데도 불구하고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시내 지리는 손바닥처럼 잘 알고 있기에 방 해가 되진 않았지만, 시야가 제한되는 것은 역시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며칠이 더 지나고 날씨가 훨씬 싸늘해져야 이 지긋지긋한 안개도 사라 질 것이다.
사무실에서 몇십 미터쯤 걸어갔을 때 내 앞쪽의 안개가 갑자기 트 롤로 바뀌었다.
제도 기사단의 기사 핏골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게 따라오라 는 손짓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나 또한 아무 질문 없이 그 뒤를 따라 갔다. 뒤쪽에서 나는 핏골의 허리 쪽을 살폈다. 내가 짐작했던 것처럼 핏골은 철편을 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철편은 내가 짐작했던 것 이상 이었다. 크기가 유달리 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좀 작은 편이었다. 핏 골의 힘과 팔 길이만으로도 충분히 치명적이기에 특별히 긴 것이 필요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엄청난 것은 철편의 모양이었다. 그 생김새의 흉 측함이란 어린 소녀가 휘둘러도 상대의 사지를 찢어내기에 충분할 정 도였다. 하지만 정말 어린 소녀가 저걸 휘두른다면 자기가 다칠 가능성 이 훨씬 높다. 철편은 다루기가 까다로운 무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런 모양을 채택했다면 철편 다루는 기술이 수준급 이상인 모양이다. 핏골이 멈춰 섰다.
주위를 둘러볼 필요도 없이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몸을 울 리게 하는 굉음 덕분에 윙켈의 대장간 근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좋 은 장소를 골랐군, 핏골.
이파리 하드투스 보안관이 혼수상태에 빠진 것에 이어 티르 스트라 이크 보안관보마저 실종되면 우리 도시는 치안 부재 상태에 빠지게 된 다. 시 지배층은 위축될 것이고 제도 기사단은 우리 도시의 치안을 대 행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그리고 실종된 티르 보안관보를 수색하기 위 한 수색대를 조직하고 식량을 지원받을 것이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 이기에 문답은 필요 없다. 그렇더라도 파린세가 호되게 당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공격이 있을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핏골은 자신이 파린세보다 더 강하다고 믿는 모양이다. 철편의 모양을 보건대 핏골이 정말 그렇게 믿고 있어도 탓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핏골은 허리에 찬 철편을 풀어내었다. 나 또한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대장간의 굉음을 의식하여 약간 크게 말했다.
“좋아. 덤벼.”
하지만 핏골은 곧장 덤비지 않았다. 대신 이상한 말을 꺼냈다.
“옛날에 주점에서 건방진 제국군 놈들과 시비가 붙은 일이 있었어.
하나씩 때려눕히는 중이었는데 그중 한 놈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라고.”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서 잠자코 들었다. 핏골이 계속 말했다.
“그 녀석이 말하길, 자기 군단의 검술 사범이 있으면 나를 순식간에 박살 냈을 거라나. 그래서 그놈한테 사범을 데려오라고 했지. 그러니 뭐 라고 했는지 알아? 사범은 군수품 빼돌리다가 처벌받고는 불명예제대 를 했다더군. 웃기는 이야기잖아?”
“웃기네.”
“그 녀석한테 차라리 아빠를 데려오라고 말해 줬지. 그런데 끝까지 자기 말이 사실이라는 거야. 그러고는 북쪽으로 갔으니 궁금하면 북쪽 에 가서 찾아보라고 악을 쓰더군. 이미 쓰러진 녀석들도 이구동성으로 그렇다고 말했어. 그래서 기회가 되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다음 때 려눕혔지.”
“그냥 확인해 두려고 묻는 건데, 네가 손봐줬다는 제국군이 제12군단 소속이었나?”
핏골은 맞다고 했다. 개 콧구멍으로 알던 과거의 제자들이 갑자기.
극진한 애정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잔파드로스 신관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외쳤다.
“이게 정말 당신 피가 아니라고요?”
나는 웃옷을 벗었다. 그리고 두 팔을 펼쳐 보였다.
“괜찮지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다른 사람 피입니다.”
잔파드로스 신관은 내 몸을 꼼꼼하게 살피고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 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내게 양동이를 밀었다. 내가 몸을 씻는 것을 보던 잔파드로스 신관은 갑자기 생각난 듯 공포에 질려 말했다.
“잠깐만요! 그럼 이 피를 흘린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란 말입니 “까?”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함부로 시험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곱씹고 있겠지요.”
내 설명은 잔파드로스 신관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하긴 내 설명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윙켈의 대장간 근처에 쓰러 져 있을 핏골은 왜 자기가 트롤인가 하는 존재론적인 의문에 빠져 있 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핏골은 파린세보다 월등히 강했기에 나는 사정 을 봐주면서 싸울 수 없었다. 고맙게도 상대는 막강한 재생력을 가진 트롤이었고, 그래서 나는 치명적인 공격을 마음껏 퍼부었다. 핏골의 자 부심을 위해 말해 두겠는데 율피트가 최근에 만들었다가 건성으로 메 운 허방다리의 위치를 내가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면 승부가 그렇게 일 방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잔파드로스 신관에게 분명히 누군가가 피를 흘리긴 했지만 아 무도 죽지는 않았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다고 다짐했다. 내가 맹세까지 하자 잔파드로스 신관은 그제야 조금 안도하며 내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벗어놓은 웃옷에서 편지를 꺼내어 신관에게 건 넸다.
잔파드로스 신관이 편지를 읽는 동안 나는 몸을 닦고 신관이 빌려준 옷을 갈아입었다. 내겐 좀 작았지만, 그럭저럭 입을 만했다. 편지를
다 읽은 신관은 잠시 머리가 어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충분히 내용을 반추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 질문했다.
“그런데 그 마지막의 이상한 문구는 뭡니까?”
“예? 아, 이거요? 아마 오크 경전어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읽을 줄 모릅니다.”
“신관님도 읽을 수 없다면 왜 그걸 쓴 거죠?”
잔파드로스 신관의 얼굴에 겨우 웃음기가 돌아왔다. 그는 내 얼굴 을 피하며 말했다.
“스승님은 학식이 깊으시고 현명한 분입니다만, 세심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아닙니다. 그분은 아마 제가 오크라고 착각하고 계신 듯합니 다.”
나는 잔파드로스 신관의 스승이라는 자가 오크 경전어도 읽고 쓸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인지, 아니면 자기 제자가 무슨 종족인지 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그것도 신관이 될 리 없는 오크라고 착각 할 정도로 멍청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잔파드로스 신관이 말했다. 이파리 보안관님이 깨시면 여쭤볼 수 있겠지요. 지금 어떠신지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잔파드로스 신관은 나를 위로하고 이파리 보안관이 곧 깨어날 거라 말한 다음 빨리 화제를 바꿨다. “어쨌거나 사정을 대충 알게 되어 다행입니다. 두 기사단이 여기로 온 것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군요. 저들의 어리석음에 슬픔을 참을 수 없군요. 이토록 분명한 악의 징조 앞에서 어찌 선을 키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업을 쌓다니……”
“죄송합니다만 신관님. 제 말부터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시간이 없어서요.”
“아, 네. 무슨 말이지요?”
“신관님, 선과 악의 문제는 제 장기가 아닙니다. 신관님께서 개탄스 러워 하시는 악업을 하나 더 쌓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속물인 제 가 중대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이렇습니다. 저는 저들이 빨리 여기를 떠 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체류가 길어지면 저들은 우리에게 행 패를 부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니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내놓고 필요한 인력도 내놓으라고 할 거라고요.”
“제국 정부에 항의하면..”
“그럴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요. 하지만 폐하의 정부에 대한 영향력은 저쪽이 훨씬 클 겁니다. 빌미를 만들어 내거나 책략을 부리는 것 또한 저쪽이 우리보다 훨씬 잘하는 일이고 또 우리보다 훨 씬 냉정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이 다 빠질 정도로 고생하게 될 겁니다. 차라리 저쪽이 원하는 것을 빨리 찾아서 떠나는 쪽이 좋습니 다. 그래서 저는 천사의 새끼들이 빨리 붙잡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 습니다. 제도 기사단이든 신전 기사단이든 그걸 손에 넣는 즉시 제도 로 돌아갈 겁니다. 그런데, 그 편지 때문에 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바뀌었지요?”
“신관님의 은사님께서는 그 새끼들이 진짜 징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잔파드로스 신관은 허둥지둥 편지를 들어 올려 다시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렇다면 그것들은 제도로 가선 안 됩니다.”
“예?”
“모르시겠습니까? 천사의 새끼들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일을 겪어야 했는지. 도시는 적대적인 두 기사단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파리 보안관 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파린세는 폭행을 당했으며, 누군가는 제가 뒤 집어쓴 피를 잔뜩 흘렸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것들이 제도로 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잔파드로스 신관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나는 그의 손에 들린 편 지를 가리켰다.
“만일 그것들이 제도로 가게 된다면 우리 도시에서 일으킨 사건들 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불행을 일으키게 될 겁니다. 이건 막연한 추측 이 아닙니다. 편지에서도 밝혀졌듯 강력한 권력자 두 명이 그것들을 간 절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갑과 을 중 어느 쪽 손에 그것이 들어가든 다 른 쪽은 자포자기하게 되어 정면충돌을 개시할 겁니다. 어쨌든 그들은 각자 신전 기사단과 제도 기사단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람 들이고 그런 자들이 정면충돌을 일으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폭 주할 겁니다. 그래서 신관님의 은사님께서는 수마이 전투 신관에게도, 링크 백작에게도 그걸 넘겨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겁니다. 예, 그것들은 제도로 가선 안 됩니다.”
잔파드로스 신관은 곧 기절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는 대신 신관은 입을 열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 말은 스승님께서……”
“예. 그분께서는 그 새끼들을 죽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어떻게 그런단 말입니까? 지금 밖에서 2000명의 병사들이 그것들을 찾고 있습니다만 아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예?”
“저는 저승사자와 천사, 그리고 그 새끼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 습니다. 그것들은 제도 기사단 진지에 있습니다.”
잔파드로스 신관은 나를 미친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나는 핏골이 마지막에 들려주었던 말을 어떻게 바꿔 말할지 잠깐 고민했다.
“그것들을 찾았다고?”
“그래. 고양이는 찾지 못했지만, 개와 새끼 네 마리는 찾았지.”
“이미 찾았는데 왜 나한테 온 거야? 나를 공격한 건 우리 도시를 장악하기 위한 것 아니었어?”
핏골은 쿨럭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짐작해도 당연한 일이지만, 아니야. 새끼들을 찾았으니 우리는 곧 떠날 작정이었어. 하지만 네가 마음에 걸렸어. 파린세를 그렇게 만든 녀석이 불명예제대를 했다는 그 검술 사범이라는 것은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난 널 찾아보겠다고 약속했거든.”
그다음에 핏골은 무사의 호승심이니 승부사의 혼이니 어쩌고 하는 쓸데없이 화려한 내용을 암시하는 잡담을 늘어놓았지만 정확하게 뭐 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 친구를 내버려 두고 떠났기 때문이다. 핏 골이 낭패감을 느꼈다 해도 할 수 없다. 나는 자신이 개인인지 집단의 구성원인지 구분하지도 못하는 얼간이와 오랫동안 이야기 나누는 취 미는 없다.
나는 결국 제도 기사단에서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특별히 틀린 표현도 아니다. 잔파드로스 신관이 조금 더 교활했다면 그 소식을 알 려줄 경우 새끼들을 합법적인 소유자인 미레일 요란하스에게 돌려주어 야 하므로 제도 기사단이 그 소식을 알려줄 리가 없다는 것을 짐작했 겠지만, 잔파드로스 신관은 그저 이렇게 말했다.
“제도 기사단이 그것들을 찾았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오후부터 철수 준비를 할 테고 늦어도 내일이면 출발하겠지요. 어쩌면 신전 기사단은 제도 기사단을 뒤따라가다가 기 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마……”
“애초부터 제도 기사단이든 신전 기사단이든 상대와 마찰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왜 그렇게 많은 병력을 보냈겠습니까? 그들 은 처음부터 충돌을 각오하고 온 겁니다. 그것도 전부 그 새끼들이 조장한 일입니다.”
“막아야 하는군요!”
“예?”
잔파드로스 신관은 벌떡 일어나서 주먹을 움켜쥐고 외쳤다.
“그것들이 제도로 가서는 안 되는군요!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그것 들은 절대로 가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미레일과 요란하스 씨를 데리고 제도 기사단을 방문하겠습니다. 그 새끼들을 낳은 천사가 미레일의 개니까 그 새끼들도 당연히 미레일의 것입니다. 돌려달라고 해야겠습니다!”
“내줄 리가 없습니다. 신관님. 그들은 자기들이 새끼들을 찾았다는 것도 부정할 텐데요.”
“예? 당신한테는 말했다고 했잖습니까?”
이런 젠장
“저는 좀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알아낸 겁니다. 공식적으로 요청하 면 그들은 부정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대를 수색하게 해줄 리도 없지요.”
“그렇다면 수마이 전투 신관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어떨까요?”
“무의미합니다. 수마이 전투 신관도 다른 기사단의 영내를 수색할 권한은 없습니다. 명백한 증거가 없이는 누구도 그런 일을 할 수 없습 니다. 혹 그런 증거가 있다 해도 수마이 전투 신관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전투 신관님 자신도 그 새끼들을 원할 테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도 기사단 전체를 상대로 싸우지 않고서야 그 진지 안쪽에 있는 그것들을 어떻게…”
자포자기조로 말하던 잔파드로스 신관은 문득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잔파드로스 신관은 내게 달려들 듯한 동작으로 외쳤다.
“티르!”
나는 그에게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신관님, 불운을 부르는 그것들을 제도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요? 도대체 어쩌겠다는 의미입니까?”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신관님께는 다른 것을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제 계획이 성공하면 저는 이 도시를 떠나야 합니다. 아마 다시 는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잔파드로스 신관은 자신의 무력함에 화가 난다는 얼굴로 내 말을 반복했다.
“영영 떠난다고요?”
“예. 모든 사태가 종료된 뒤에도 사람들에겐 제가 들려드렸던 이야 기를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하지만 보안관님이 깨어나면 그분께만 조 용히 들려주십시오. 그분은 자기 조수가 왜 사라졌는지 아셔야 하니까 요.”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잔파드로스 신관은 멍한 얼굴로 내 모습 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내가 묵례하고 몸을 돌리자 황급하게 외쳤다. “잠깐만요! 티르. 정말로 혼자서 제도 기사단을 습격할 작정입니까?”
나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런 일을 벌이기엔 제 박자 관념이 부족합니다.”
“예?”
“박자 말입니다. 음악가가 한 명 필요하겠군요.”
묘지에는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묘비에 부딪히는 포근한 소음뿐 주위는 고요하다. 나는 정돈이 잘 된 무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는 키 큰 남자를 바라보았다.
케이토 수준급의 연주가이자 작곡가이며, 약간 수줍어하는 경향이 있지만 부드러운 사교술을 가지고 있는 남자다. 누구든 이웃에 두고 싶 어 하는 타입으로 나 또한 그런 평가에 동의한다. 물론 케이토에게도 단점은 있지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좋은 이웃은 구하기 힘든 법이고 세상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케 이토가 가지고 있는 단점은 내 주위 3미터 이내에만 접근시키지 않으 면 해결할 수 있는, 그야말로 사소한 문제다. 그래서 나는 케이토에게서 4미터 떨어진 곳에서 말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케이토는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무덤을 바라보 던 케이토는 불현듯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묘비에 맺힌 물방울들을 조심 스럽게 닦아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놀랄 정도의 감정 이입이 일어났다. 칼날이 내 목을 쓰다듬는 것 같았다.
조언하기 좋아하는 참견꾼은 많지만, 내가 보안관 조수가 되기로 했을 때 그 직업이 자기가 죽인 여자의 무덤 앞에서 그 약혼자와 이야기 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말해 준 사람은 없었다.
다시 한번 묘비를 닦아낸 케이토는 손을 털어 물방울을 뿌렸다. 그 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꽂아 넣은 케이토는 똑 바로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하다가, 별생각 없이 그러 는 것처럼 손을 바지에 닦았다. 미끄러운 손바닥 때문에 필요할 때 칼 자루를 놓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케이토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내 손은 다시 비에 젖었다. 낭패였다. 또 손을 닦을 수는 없었다. 소리 없 는 안개비 속에서 내 뜨거운 입김이 소란스럽게 까불거렸다.
케이토가 말했다.
“끝나고 술 한 잔 사게. 티르.”
“그러지.”
목이 메어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왔고, 그래서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했다.
“초니의 주점에서 살 수는 없겠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디서 살 수 있을지 나도 모르겠어.”
“그건 걱정 마.”
케이토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찾아갈 테니까.”
죽을 때까지 외로울 일은 없겠군. 성공한 인생이야. 나는 케이토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위한 행동은 아니다. 케이토 또한 그런 착각은 하지 않았다. 케이토는 자신의 왼손에서 은빛 팔찌 하나를 풀어서 내 게 건넸다.
사람들은 위어울프가 은팔찌를 풀면 변신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위어울프들이 양쪽 팔 모두에, 즉 두 개의 은팔찌를 끼는 이유 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 또한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위 어울프 친구를 사귀게 되지 않았다면 그것에 대해 고민하진 않았을 것 이다.
두 개의 은팔찌를 모두 차고 있을 때 위어울프들은 안전하다. 당신 이 카드 속임수를 쓴다고 해서 당신의 머리를 날려버리지는 않을 거라 는 의미다. 그리고 두 개의 은팔찌를 모두 풀면 그들은 야수로 변한다. 그들이 당신의 머리를 날리기 위해선 단지 당신이 머리를 가지고 있기 만 하면 된다. 하지만 하나의 팔찌만 차고 있을 때 그들은 조금 미묘한 상태가 된다. 두 개의 팔찌에 비해 하나의 팔찌는 절반의 억제력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며, 그 억제력을 넘어서는 동기를 자신에게 부여할 때 위어울프들은 하나의 은팔찌를 찬 상태에서도 변신할 수 있다. 이때 그 들의 상태를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목적의식을 가진 야수가 된다.
물론 그런 상태에서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언젠가 하나의 팔찌 를 찬 상태에서 변신했던 케이토는 나를 죽일 뻔했다. 그 이야기는 다 른 기회에 할 수 있을 테지만, 내가 살아난 것은 그때 다른 팔찌가 내 게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해 두겠다. 두 개의 은팔찌에는 위어울프 를 변신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효과 이외에 또 다른 흥미로운 효과가 있다. 한 쌍의 팔찌를 나눠 가진 두 착용자는 서로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내가 케이토의 은팔찌를 차자마자 비탄에 빠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미리 대비하지 않았다면 나는 죽은 약혼자에 대한 추억 때문에 아 무 일도 못 하게 되었을 것이다. 혼란 속에서 나는 가까스로 그것이 내 약혼자가 아니라 케이토의 약혼자인 지데이며 지데를 죽인 것은 바로 나 자신임을 일깨웠다.
내가 침착함을 되찾자 케이토 또한 눈에 띄게 침착해졌다. 그리고 케이토는 그런 자신의 상태에 달갑잖은 기색을 보였다. 이해하기 어렵 다고 느낄 필요는 없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동 시에 혐오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데의 약혼자인 케이토와 지 데의 살해자인 내가 그 순간 똑같이 느끼는 감정은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당연히 나 또한 그런 내적 갈등이 달갑잖았다. 케이토와 나 는 동시에 (당연히 동시일 수밖에 없다.) 다른 생각을 하기로 결심했다. 공 유되는 것은 감정이고 사고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먼저 말했다. “필요한 물건을 하나 챙겨와야겠어.”
케이토는 그것이 뭐냐고 묻지는 않았다.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이 도시를 사랑하는군, 티르.”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바보짓이다. 그래서 나는 듣기에 는 더 바보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질문을 했다.
“내가 그래?”
“그래. 내게 이 도시는 지데가 묻혀 있는 도시일 뿐이고, 또 자네가 있는 도시일 뿐이지. 하지만 지금 나는 다른 눈으로 이 도시를 보게 되는군. 이 느낌은 아마 자네에게서 온 것이겠지.”
“지긋지긋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케이토는 희미한 미소로 대답했다. 우리는 자신에게 보내는 것 같은 인사를 나누고서 헤어졌다.
필요한 물건은 요란하스 저택의 헛간에 있었다. 자물쇠도 채워두지 않는 그 헛간에서 물건 하나 꺼내오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마 음속으로 요란하스 씨에게 감사한 다음 그것을 품속에 챙겨 넣고 도시 밖으로 걸어 나왔다.
빗줄기가 몸을 간지럽혔다. 꿈틀거리는 짙은 안개와 빗줄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어림하던 것보다 훨씬 긴 거리를 걷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도 기사단의 병사들은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다. 제도 기사단은 이미 철수 준비를 시작한 모양이다. 하지만 신전 기사단의 불쌍한 병사들은 여전히 수색 작업에 혹사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열의를 찾기 어려 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아무리 봐도 수색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행태를 보이는 병사들도 많았다. 그들에게 이런 악천후 속에서 새끼 동물들을 찾아다니라고 명령한 지휘관들도 병사들이 명령을 완전무결하게 수행 하리라는 환상은 품지 않았을 것이다.
작전 중이긴 했지만, 신전 기사단의 병사들은 내게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는 않았다.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병사라 해도 내가 고양이나 개의 첩자일 거라 의심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제도 기사단 진지 쪽으로 다가가자 엄격한 검문이 시작되었다. 안으로 좀 들어가야겠다 는 내 요청에 대해 경비병들은 자신의 기억력을 과시해 보였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신전 기사단 쪽에 새끼들의 소재를 알려주지 않기 위해 제 도 기사단은 엄중한 경계를 펴고 있는 듯했다.
나는 뒤로 물러나 안개 속에 몸을 감추고 잠시 새끼들이 어디에 있 을지 생각해 보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링크 백작의 천막이다. 그런데 그 천막이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었 다. 기병과 보병이 독립되어 있는 제국군과 달리 제도 기사단의 기사들 이 보병이라 할 수 있는 자신들의 종자들과 많이 떨어져 있을 것 같지 는 않았다. 그리고 제도 기사단이 내 편의를 위해 제국군의 진지 건설 법을 베끼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난감했다.
결국 상식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중앙에 링크 백작의 천 막이 있을 거라 가정하기로 했다. 진지 중앙이라면 어느 방향으로 잠입 하든 거리는 비슷하다. 나는 경계가 허술한 방향이 어느 쪽일지 생각 해 보았다. 대강 계획을 세우고 일어서자 빗발이 조금 굵어져 있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안개는 수십 년간의 애착처럼 짙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네펜지스 강에 도착했을 때 먼 곳에서, 땅이 트림한 것이 아니 라면 천둥소리임이 분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칼을 등 뒤로 옮겨 매고서 강물 속에 허리를 담갔다.
나는 수양버들의 가지와 강둑의 관목들이 던지는 그림자 사이로 움 직였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채 열 걸음도 걷기 전에 다리가 얼어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빗줄기의 충돌로 수면은 들끓었고 꼼꼼한 풍경화 가도 놓치기 쉬운 수초들이 놀랄 만큼의 존재감으로 내게 다가왔다. 무엇인지 모를 것이 근처의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것도 느껴졌다.
군수품 하나 제대로 빼돌리지 못해 불명예제대를 한 전력에서 알 수 있듯 내게 도둑의 재능은 없다. 용감한 도둑이라면 엄중하게 경계하 는 1000명의 병사들을 뚫고 들어가 목표물을 훔쳐내면서 고양감을 느 낄지도 모르지만, 그 차갑고 지저분한 강물을 헤치며 내가 느끼는 것 은 의기소침해지는 기분뿐이었다. 좌절해 버리고 싶은 그 순간 내게 기 원하지 않은 자신감이 느껴졌다. 고마워, 케이토, 새로 얻은 활력 속에 서 나는 계획을 검토했다.
그 새끼들은 그냥 사라져서는 안 된다. 죽었다는 것이 확실하게 증 명되지 않으면 두 기사단은 다시 수색을 시작할 것이다. 그렇지만 시체 는 남겨둘 수 없다. 그 별스럽게 생긴 새끼들은 시체 상태가 되어도 쓸 모가 있을 것이다. 이런 복잡한 조건 하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품속을 뒤져 자루가 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되도록 많은 목격자들이 보는 가운데 그 새끼들을 자루에 넣어 강물 에 집어 던진다는 것이 내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보다 더 확실한 방 법도 있겠지만 가장 빠르게 해치울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이었다.
그 시도가 성공할 경우 내가 모아놓은 목격자들은 그대로 공격자로 바뀌게 될 것이다. 몸을 빼내기 쉽지 않을 것이고 그럴 생각도 없다. 성 공한 후엔 칼을 버리고 투항할 계획이니까 그들이 나에게 어떤 죄목을 적용할지 궁금하다. 개양이 살해라는 죄목이면 안셀을 즐겁게 할 수 있을 텐데.
반 시간쯤 후에 나는 제도 기사단 진지의 배수구를 발견했다. 육안으로 발견한 것은 아니다. 일몰은 아직 멀었지만, 안개와 비 때문에 주 위는 캄캄했다. 나는 소리에 집중했고 진지에 고인 빗물이 빠져나오는 소리 덕분에 배수구를 찾을 수 있었다. 가파른 강둑을 따라 흘러내려 오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나는 목책 안쪽 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물이끼와 진흙 때문에 피부는 미끈거렸고 견딜 수 없이 추웠다. 나 는 가까이 있는 수양버들 근처로 힘겹게 걸어가 몸을 숨겼다. 다시 천 둥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들었던 것보다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이런 날 야외에서 움직이는 것은 바보짓이겠지만 진지 내부는 뜻밖에 소란 스러웠다. 여기저기서 욕지거리가 섞인 고함이 들려왔고 횃불 같은 것 이 분주하게 뛰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질퍽거리는 발소리와 무거운 수 레바퀴가 움직이는 소리도 들려왔다. 링크 백작은 병사들 중 누군가 가벼락을 맞는 한이 있어도 철수 준비를 오늘 내에 끝장낼 결심인 것 같았다.
그 혼란과 어둠이라면 바로 옆을 지나가는 침입자의 존재도 알아차 리기 어려울 것 같았다. 주위를 적당히 둘러보다가 적당한 물통 하나 를 발견했다. 빗물이 가득 차 있는 물통을 비운 다음 어깨에 얹었다. 그 리고 어느 기사의 불운한 종자쯤으로 보이길 기대하며 진지 한가운데 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빈 물통은 무겁진 않았지만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빗줄기가 통을 때 릴 때마다 밀착해 있는 귀로 고스란히 진동음이 전달되어 왔다. 고맙 게도 진지 중앙까지 접근하는 동안 내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어느 것이 링크 백작의 천막일지 고민해 보았다.
대략 다섯 개 정도의 후보가 눈에 들어왔다. 진지의 가장 가운데 있 는 천막은 지나치게 큰 것이 아무래도 지휘 본부용으로 쓰이는 것 같 았다. 내가 고른 다섯 개의 천막은 그 큰 천막 주위를 에워싸듯 배치되 어 있는 천막들 중 가장 화려한 것들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오가지 않 는 통로를 골라 물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통과 천 막 사이에 몸을 숨겼다.
등에 찼던 칼을 풀어 왼손에 들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나는 웃기는 추억들을 떠올렸다.
케이토와 한 약속은 그런 것이었다. 지금 저 바깥 어느 어둠 속에 숨 어 있을 케이토는 갑자기 즐거운 기분이 들면 변신하기로 되어 있다. 그 리고 진지를 두른 목책에 공격을 퍼부을 것이다. 비록 케이토가 한쪽 은팔찌를 낀 채 변신하겠지만 군대와 위어울프를 충돌시키는 위험한 모험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고, 따라서 케이토의 통제는 내가 맡기로 되어 있다. 즉 나는 소란을 틈타 천사와 그 새끼들을 찾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심리 상태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갑자기 가슴이 뛰고 분노가 치밀면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임무는 아 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중압감 때문인지 강물을 따라 걷다가 유 머 감각을 흘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낭패였다. 섣불리 이 추억 저 추억을 시험해 볼 수도 없었다. 내가 감 정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케이토를 변신하게 한다면 케이토가 제도 기사단과 충돌을 일으킬 때 내가 그를 제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기억의 이 페이지 저 페이지를 마구 들쳐보는 대 신 우선 내 심리를 안정시키려 애썼다.
부분적으로는 성공했고, 부분적으로는 실패했다. 성공한 것은 피로 감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실패는 갑자기 옆에 있는 천막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나는 당혹과 혼란 속에서 옆에 있는 천막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 때문에 소득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귀를 가져갔다. 그러 자 천막 안쪽에서 굉장한 소란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천막 안에 서 격투가 일어났거나, 혹은 새 직업을 막 떠올린 안셀이 천막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높은가를 따지려 했을 때 갑 자기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귀를 대고 있던 천막 천이 갑자기 움직이더니 무엇인가가 천막의 천 을 밀어 올리며 기어 나왔다. 그 일이 일어난 곳은 내게서 1미터도 떨어 지지 않은 곳이었고 그래서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새끼 한 마리를 입에 문 천사였다. 천사 또한 내 모습을 발견했다.
천사도 나만큼 놀란 것 같았다. 그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반사적으 로 반대 방향으로 훌쩍 뛰었다. 땅에 내려섰을 때 천사는 내 쪽으로 머 리를 향하고 있었다. 잠깐 동안 천사와 나는 서로의 눈을 지그시 들여 다보며 상대의 속마음을 읽으려 애썼다…………. 헛소리다. 어둠과 비 때문 에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천사의 윤곽뿐이었다. 천사 또한 냄새 쪽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빗소리와 엄청난 소란에도 불구하고 천사의 호흡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때 내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천막의 장막이 젖혀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천사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빗줄기 사이 로 맹렬하게 달려갔다. 어디서 분노의 외침이 들려왔다.
“붙잡아! 그 녀석을 붙잡아!”
링크 백작의 목소리였다. 뭔가 행동에 돌입해야 했고, 그래서 나 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뒤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다가왔을 때 나는 아무 방향이나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시, 시커먼 것이………”
“봤나!”
“눈에서 불이…………?
고맙게도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내 뒤에서 다가오던 발소리는 곧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사라졌다.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되었을 때 나는 냉큼 일어났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그 순간에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나는 도시 쪽을 돌아 보았다. 케이토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거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 났나? 하지만 조금 더 기다려보아도 분노나 다급함 같은 그럴듯한 감정 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잘못되었다는, 큰 실수가 저질러지고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케이토에게 맡겨두 기로 하고 나는 침착해지기로 애썼다.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사라졌다. 그리고 침착해진 덕분에 나는 천사가 한 마리의 새끼를 물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아직 세 마리의 새끼가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조금 전 장막 열어젖히는 소리가 났던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 에는 천막의 입구가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려다가, 조금 전 내게 질문했 던 사람이 링산크 백작이 아님을 상기했다. 그렇다면 백작은 아직 천막 안에 있을 것이다. 세 마리의 새끼가 남아 있을 테니 그곳을 지키는 것 이 당연하다. 안에 있는 백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입 구를 가리고 있던 장막이 움직였다. 나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장막 을 후려갈겼다.
주먹에 묵직한 충격이 왔다. 뒤이어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장막을 들어 올리고 천막 안쪽으로 돌입했다. 그리고 쓰러 져 있는 링크 백작을 뛰어넘었다.
나는 칼을 뽑아 들고 링산크 백작을 살폈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링크 백작은 아무런 대비도 못 한 상태에서 공 격을 당한 사람답게 ‘범인은 장막’이라는 메시지 하나 남겨두지 못한 채 기절해 있었다. 적어도 몇 분 동안은 깨어나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재빨리 새끼들을 찾았다.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자물쇠 고리가 달린 상자가 있었다. 고리에는 자물쇠 대신 걸쇠가 끼워져 있었다. 링크 백작은 새끼를 가둬두고 천 막을 나오려다가 봉변을 당한 모양이다. 걸쇠를 빼고 뚜껑을 열어보자 역시 세 마리의 새끼가 보였다.
나는 자루를 꺼내어 새끼들을 옮겨 담았다. 뚜껑을 닫은 다음 나는 걸쇠까지 다시 꽂아두었다. 그리고 일이 잘되고 있는 건지 악화되고 있는 건지 고민하며 천막을 나왔다. 결론은 얻을 수 없었지만 무엇을 해 야 할지는 분명했다. 나는 천사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한동안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날이 밝았다면 혹 천사의 발자국을 찾아보려는 시도를 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비와 어둠, 그리고 소란스럽게 오가는 사람들 때문에 엘프 추적자라도 천사의 자취를 찾 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천사가 방향을 바꾸지 않았기를 애원하며 계속 한쪽 방향으로 내달렸다. 그때 엄청난 섬광이 일어났다. 벼락이 가까운 곳에 떨어진 모양이다. 그 빛 속에서 나는 반가우면서 도 동시에 가슴이 철렁해지는 광경을 보았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몸을 밀착시킨 채 몰려 서 있었다. 그들은 목책 앞쪽에 반원형으로 서 있었고 뭔가 소란스럽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둬두고 있는 것이 무엇일지는 짐작할 수 있었지만, 눈으로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 그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자들이 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몇 병사들이 수레를 끌고 와 사람들 뒤편에 세우고는 그 위에 뛰어올랐다. 여러 번 생각할 것 없이 나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아 넣었지만 한 손엔 여전히 자루가 남아 있어 수 레 위로 뛰어오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고맙게도 먼저 올라갔던 병사 들 중 하나가 손을 내밀어 나를 붙잡아 올려주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애쓰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갑작스럽게 일행이 된 우 리들은 사람들의 머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조명을 위해 횃불 몇 개를 던져두었기 때문에 그 안쪽은 밝았다. 그리하여 나는 천사가 목책을 등진 채 서 있는 모습을 똑똑하게 보았다. 입에는 여전히 새끼를 문 채 천사는 이쪽저쪽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비 때문에 횃불이 꺼질 것 같자 병사들은 다시 몇 개의 횃불을 집어 던졌다. 천사는 날아오는 횃불에 놀라 펄쩍펄쩍 뛰었다. 그 모습을 보 자 병사들 사이에서 잔인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병사들은 그 외의 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종자들인 것 같았고 명령을 내려줄 상급자가 없는 것 같았다. 그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 볼 수 없을까 생각해 봤지만, 갑자기 그들에게 다가가서 상급자인 척해 봐 야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또다시 만사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눈앞의 광 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지만 나는 케이토에 대해 걱정했다. 케이토는 어쩌면 이 안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한 소란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그를 불러들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 는 순식간에 적대적으로 바뀔 수 있는 자들 사이에 숨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케이토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은 감정뿐, 위치 같은 정보는 전할 수 없다. 케이토가 엉뚱한 곳에서 소란을 부리기 시작한다면 그에게도 나에게도 도움 될 것이 하나도 없다. 나는 다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 썼다.
그때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수레 위에 있던 다른 자들과 함께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돌아보았다. 말에 탄 기사 몇 명이 이 곳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선두에 있던 기사가 외쳤다.
“그곳에 있나?”
병사들은 요란하게 긍정의 대답을 외쳤다. 기사가 다시 외쳤다.
“좋아! 그대로 있어!”
달려온 기사들은 병사들의 뒤편에 말을 세웠다. 말에 타고 있기 때 문에 그들도 나처럼 천사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천사가 완전 히 포위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기사가 다시 외쳤다.
“그놈을 붙잡아!”
병사들 사이에서 잠깐 동요가 일어나더니 체격이 좋은 병사 몇 명 이 반원형의 공터 안으로 들어섰다. 천사는 이 도전에 당당하게 응했 다. 새끼를 땅에 내려놓고는 사람들을 향해 무섭게 짖어댄 것이다. 조심 스럽게 다가서던 병사들은 움찔하며 멈춰 섰다. 상당히 난폭해 보이는 오크 한 명은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단검을 천사 쪽으로 내밀고는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산 채로 잡아야 됩니까?”
기사들은 이 질문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도 천사를 어떻게 처리 해야 되는지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이 부하들의 질문에 지체 없이 대답할 수 있는 숙련된 기사가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런 상 황은 그들에게 익숙한 전투와는 지나치게 다른 것이었고, 그래서 빠 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기사들 사이에서 논의가 오 갔다.
“골치 아프군. 어미는 필요 없잖아? 새끼만 있으면 되는 거 아냐?”
“하지만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려면 어미가 있어야 할 텐데.”
“아. 그런 문제가 있군.”
“그리고 저걸 낳은 것이 개라는 것도 밝혀야 하고.”
“그런데 백작님은 왜 안 오시는 거야? 이봐 백작님 천막으로 가서 좀 모셔와.”
기사들은 행동 방침을 결정한 것 같았다. 그들 중 한 명이 백작의 천 막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남아 있던 기사들은 병사들에게 산 채로 붙잡으라고 명령했다. 단검을 뽑아 들었던 오크는 투덜거리며 그것을 다시 칼집에 꽂아 넣고 외쳤다.
“어이! 누구 망토나 담요 같은 것 좀 가져와”
바깥쪽에 있던 병사들 중 일부가 재빨리 주변의 천막들로 달려갔 다. 나는 어떻게든 즐거운 생각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곧 링크 백작 이 기절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것이고 천사 또한 붙잡힐 것이다. 그 전 에 천사의 곁에 놓여 있는 새끼를 내 손에 넣어야 했다. 세 마리를 제거 한다 해도 한 마리가 남아 있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 따라서 케이토의 조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불과 5미터 남짓 떨어져 있는 그 새끼에게 손 을 뻗을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 뿐 도무지 즐거운 기분이 들지 않 았다. 홧김에 목책 위쪽을 쳐다보았다. 바로 저 뒤편에 케이토가 있는 데…………….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목책 위쪽엔 희푸르게 빛나는 두 개의 눈이 있었다. 잠깐 동안 케이토가 내 사정을 눈치채고 변신하여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눈 주위에 묻은 물 기를 닦아내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목책 위를 살폈다.
비에 흠뻑 젖은 저승사자가 그곳에 있었다.
저승사자는 당장이라도 뛰어내릴 태세였다. 천사와 그 새끼들을 구 하려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 녀석이 뛰어내린다 해서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 있는 자들은 저승사자의 포효에 질겁 하여 도망치는 우리 시민들이 아니라 거친 병사들이다.
그때 세 번째로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전의 두 번보다 훨씬 강하 게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케 이토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그것은 나 자신의 느낌이었다.
순간 굉음과 함께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번개가 마침내 우리들의 머리 바로 위까지 도달한 모양이다. 나는 잔영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포착했다. 그 생각은 나를 즐겁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