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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 (Golem)


골렘

“우리가 봉착한 문제를 세 단어 내외로 말해 보겠나?”

“옴짝달싹 못 할 상황”

“진부해 턱없이 진부해.”

“이런 상황에서 기발하고도 진보적이며 상큼한 대답을 요구하시는 것은 가혹합니다.”

핸드레이크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나로서도 그의 기분을 맞춰주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어쨌든 옴짝달싹 못 할 상황인 것은 확실한데, 나는 그런 상황이 싫다.

핸드레이크는 다시 한번 눈앞의 그림자를 노려보며 (아마 열일곱 번째 아니면 열여덟 번째일 것이다) 턱의 상처를 긁적거렸다. 조금 전 자신의 성 질을 못 참아서 무턱대고 앞으로 걸어가다가 멋진 어퍼컷을 맞아서 생 긴 상처였다. 계속 그런 식으로 긁적거렸다가는 상처가 크게 덧날 거라 고 경고하기도 이젠 지쳤다. 그래서 나는 그의 상처가 패혈증으로 진전되어 버리라고 충심으로 기원드리기 시작했다.

내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야 없는 핸드레이크는 내 우울한 표정을 보고서는 다정하게 말했다.

“보라고, 솔로처, 전혀 걱정하지 마. 자넨 틀림없이 데이트에 나갈 수 있네. 확실하다고!”

“・・・・・사부님, 지금 데이트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사부님과 저는 가장 불명예스럽게 죽은 마법사의 인명록에 실 릴 가능성이 퍽 높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굶어 죽은 마법사라는 것은 아무래도 우스꽝스럽지 않습니까?”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냐 나는 그런 인명록에 실릴 수 있네. 하지만 자네는 마법사가 아니잖은가.”

“할 말이 없습니다.”

핸드레이크는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은근슬쩍 마법사인 척하지 말게. 나는 아직까지 자네를 마법사로 인정한 적 없네.”

말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문을 틀어막고 서 있는 그 림자를 노려보았다. 만들어낸 작자의 인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흉악 무 쌍하게 생긴 그 골렘을

사부님의 연구실 문은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니다. 연구실로 들어오는 재료에는 별의별 것이 다 있기 때문에 사부님은 그 문을 꽤 큼직하게 만들어두었다. 하지만 연구실의 문을 틀어막고 있는 골렘 때문에 지금 그 문은 몹시 작아 보였다. 어깨 위로 플라스크들을 죽 세우면 최소한 열 개는 세울 수 있을 것 같은 무지막지한 어깨, 궁성 임펠리아의 가장 큰 기둥과 유사한 팔, 조금 전 핸드레이크의 턱을 부숴놓을 뻔한 주먹 등은 도대체 피해자의 안위를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성격이 그대로 드 러난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의라는 것이 있다. 저 끔찍한 피조물이 구 사한 폭력의 첫 번째 피해자는 그 창조자가 되었으니까.

핸드레이크는 다시 턱을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이건 논리의 문제야, 논리라고. 하지만 모든 논리에는 빈틈이 있게 마련이네. 왜 그런지 아나?”

“왜 그렇습니까?”

“그 논리를 만들어내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원래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이야. 하하하!”

“별로 우습지 않습니다.”

핸드레이크는 뭐라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했지만 나는 이 가련한 마 법사를 위로해 주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 나이가 되도록 자기 성질을 못 참고 괴팍하게 군단 말인가. 나는 골렘 을 쳐다보기도 지쳐서, 이 연구실에 있는 단 하나의 창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화창했다. 오늘의 봄맞이 축제는 최고일 것 같다. 하지만 어 쩌면 오늘 축제에서는 가장 중요한 순서가 빠질지도 모르겠다. 시민들 은 모두 저녁 식사 시간 전의 불꽃놀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불꽃놀 이를 담당한 내가 이 수상쩍은 연구실에 갇혀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핸드레이크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 거지?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변명해 보기 시작했다. 나는 아는 것이라 고는 마나의 법칙밖에 없는 궁정 마법사의 제자다. 그런데 불꽃놀이를 담당하게 된 궁정 마법사의 제자에게 어느 상냥한 귀족 아가씨가 불꽃 놀이가 끝나고 나서 저녁 식사라도 함께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여 기까지는 일종의 기적이며 기분 좋은 행운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행운이 궁정마법사의 제자를 얼어붙게 만들었으 며 그는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그가 아는 유일한 조언자를 찾아온 것 이다.

한심하긴 어쩌자고 마법사에게 레이디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의 에 티켓 따위를 물어보러 왔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 외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내 인생 전반에 걸쳐 가르침이 필요할 때 찾곤 했던, 그러나 소득은 퍽 적었던 사람을 다시 찾아왔다. 그것이 오늘 오후에 일어난 이 비극적인 상황의 시작이었다.

내가 찾아왔을 때 핸드레이크는 무슨 실험에 성공한 모양인지 퍽이 나 기분 좋은 상태였다. 물론 아무리 제자에게라도 실험의 내용에 대 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기분 좋은 상태였다는 점은 분 명했다. 제기랄!

“여어! 솔로처! 이 좋은 날씨에 그런 얼굴을 하고 찾아온단 말인가?”

“죄송합니다만 지금 날씨에 대해서 한담을 나눌 기분이 아닙니다, 사부님.”

“왜?”

“조언을 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저, 그런데 좀…………..?”

“비밀?”

“예”

핸드레이크는 아주 기분이 좋았기에 제자를 위해 선심을 쓰고 싶은 생각마저 들고 말았음이 틀림없다. 그는 연구실 한편을 향해 가볍게 손 짓을 보냈다. 나는 그가 무엇을 향해 손짓하는지 몰랐으나 잠시 후어 두컴컴한 구석에서 들려온 쿵쿵거리는 소리에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 었다. 수백 킬로그램은 될 것 같은 몸무게를 강조하는 느릿한 걸음걸이 로 나타난 골렘은 핸드레이크 앞에서 멈춰 명령을 기다렸다.

“저 문을 막고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해.”

골렘은 알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묵묵히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핸드레이크의 명령이 떨어지자 골렘은 즉각 문으로 걸어갔다. 그 충성스러움은 핸드레이크를 다시 한번 뿌듯 한 즐거움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머릿속이 고 민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더듬거리는 어투는 핸드레이크를 약간 짜증 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잠자코 끝까지 들었고, 다 듣고 나서는 그다운 반응 을 보여주었다.

“우핫하하하! 데이트인 거냐?”

“그냥 저녁 식사입니다.”

“그럼 데이트로군. 핫하하! 저 사우스그레이드에서 자네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나는걸. 콧물을 마셔대고 있던 그 꼬마가 이젠 데이트 신청까지 받는 어엿한 청년이 되었군. 시간의 놀라움이여! 그 쾌속이 비 정하게까지 느껴지는구먼.”

핸드레이크는 감회 어린 눈길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수상쩍 은 물건들이 가득 매달려 있는 천장은 아무래도 바라보면서 시적 감흥 을 떠올릴 광경은 아니었기에 핸드레이크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사부님, 도대체 여자들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까?” 

“보편적인 이야깃거리들이 있지 않은가? 지나온 날들. 그래, 주로 추 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 같더군. 어전 회의나 각료 회 의가 아닌 바에야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 그렇잖은가?”

“그 정도는 저도 짐작합니다만, 제가 기억하는 과거라고는 사부님 명령 때문에 괴상망측한 재료들을 찾아 헤맨 이야기밖에 없는걸요. 아 무리 그래도 귀족가의 영양을 모셔놓고 바실리스크 눈알 모으던 이야 기나 오크 십이지장구하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 기억나는군. 그때 정말 황당했지. 오크는 십이지장이 없더라고.”

“……사부님이 해부를 이상하게 하신 겁니다.”

결국 핸드레이크와 나의 대화는 마법사와 그 제자의 대화 수준을 넘지 못했다. 격렬한 토론으로 전개된 우리들의 대화는 결국 오크에게 도 십이지장이 있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끝까 지 수긍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다시 몇 마리 잡아서 정확하게 해부해 보세나.”

“돌연변이를 붙잡지 않는 이상, 반드시 십이지장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많이 늦었군요. 아무래도 궁정 악단이나 가극단에 가서 물어보는 것이 낫겠습니다.”

핸드레이크는 잠시 대화의 맥락을 놓치고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그는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그보다 나은 방법이 있네. 나랑 같이 시내로 가세나. 펍(pub)에 가 서 물어보도록 하지.”

기발한 방법이었다. 심지어 나까지도 역시 사부님이라는 둥의 감탄 사를 내뱉고 말았으니까. 그러나 꽉 막힌 마법사와 그의 새파란 제자가 펍에 들어가서 ‘실례합니다만 레이디와의 우아한 교제 방법에 대해 가 르쳐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 해괴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 하면 우리는 펍에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방에서 나가지도 못 했다.

핸드레이크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문 쪽으로 다가섰을 때였다.

문을 막고 서 있던 골렘은 상당히 음침한 눈빛을 번득이며 위협적 으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순 식간에 사태를 알아차리고 말았다.

“사, 사부님! 안 됩니다!”

“뭐가 안 된다는 거냐?”

핸드레이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래서 하마터면 바이서스의 궁정마법사는 유명을 달리할 뻔했다. 내가 재빨리 그의 허리를 잡아채 었을 때 골렘은 이미 그의 두개골을 찌그러트리기에 충분한 속력으로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골렘의 팔은 아슬아슬하게 핸드레이크의 머리를 지나쳤고 나와 핸드레이크는 방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아이고, 허리야…….”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일어나려다가 손을 헛짚고 다시 엉덩방아 를 찧고 말았다. 핸드레이크가 나동그라진 자세 그대로 어이없어하며 골렘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느끼기는 하지 만 이해하지는 못하는 그 표정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웃고 말았다.

“하하하!”

내 웃음소리에 핸드레이크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뭐야?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이 도대체 뭐였냐?”

“클클・・・・・・ 골렘이 우리를 공격한 것입니다만.”

“그런데 넌 왜 나를 붙잡고 늘어진 거냐?”

아무래도 상태가 많이 좋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사부님의 그 높은 학식을 담은 뇌수가 이 방바닥에 흘렀을 테니까요.”

“뭐야? 어, 잠깐! 저 골렘이 나를 공격한 거야? 왜?”

나는 그제야 일어날 수 있었다. 핸드레이크는 내가 일어서는 모습을 보더니 따라 일어섰지만, 그 눈은 문 쪽에 그대로 선 채 우리들을 물끄 러미 바라보고 있는 골렘에게 못 박혀 있었다. 나 역시 골렘을 훔쳐보 며 흩어진 옷을 추스렸다.

“하하, 아무래도 아까 명령을 잘못 내리신 것 같습니다.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잖아요.”

“뭐? 어, 으어!”

핸드레이크는 그제야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도대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제기랄, 이봐! 명령 취소다. 비켜!”

나는 웃으면서 골렘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조금 후, 내 얼 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나는 의아스러워하는 눈으로, 꼼짝도 하지 않는 골렘과 역시 꼼짝도 하지 않고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핸드레이크를 번갈아 쳐다본 다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어떻게 된 거죠?”

핸드레이크는 내 질문을 무시하고 골렘에게 외쳤다.

“비켜!”

하지만 골렘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가슴속은 서서히 불안감에 젖어 들었다. 핸드레이크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골 렘을 쏘아보다가 말했다.

“이거 아무래도 불량품인가 본데……”

“예?”

핸드레이크는 무서운 눈으로 골렘을 쏘아보면서 몇 번이나 비키라 고, 혹은 명령을 취소한다는 식으로 외쳤다. 하지만 골렘은 무던하게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핸드레이크의 인내심은 바닥났다.

“제기랄, 할 수 없군. 좋아, 부숴버리지.”

슬슬 그런 상황이 싫어지기 시작하던 나 역시 아쉽다는 듯이 고개 를 끄덕였다. 핸드레이크는 침울한 표정으로 골렘을 바라보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워라”

그러곤 입을 굳게 다문 채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어깨를 편 채 골렘 을 노려보고 있는 바이서스의 궁정 마법사의 눈에서 불꽃이 번뜩였다. 하지만 골렘은 그의 운명도 깨닫지 못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 다. 그때 핸드레이크가 폭발에 대비해서 뒤로 물러나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핸드레이크가 말했다.

“부수자니까.”

“예, 그러시지요.”

“어서 부수게 솔로처.”

“예?”

“부수라니까. 아깝지만 별 도리가 없잖은가. 나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저, 저 사부님? 직접 파괴하시지요?”

“자네의 역량을 사부에게 보여줄 기회를 주겠네.”

“사부님………….., 저, 혹시 저와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계십니까?”

“자네, 설마?”

“저는 오늘 저녁에 사용할 불꽃놀이 때문에 다른 주문은 외워두지를 못했는데요.”

“아아, 그렇군. 나는 실험 때문에 외워둔 주문을 다 썼는데.”

“아아, 그러시군요.”

우리는 서로를 향해 히죽 웃어주었다. 그러나 잠시 후 우리들의 불안한 시선은 다시 골렘에게로 돌아갔다. 골렘은 여전히 심술궂게 문을 막고 서 있었다. 핸드레이크는 무서울 정도의 판단력으로 사태를 정리했다.

“그럼, 우리들에게는 저 녀석을 파괴할 수단이 없다는 건가?”

오, 맙소사.

“마, 마법책 없습니까? 사부님, 이곳은 연구실이잖습니까. 마법책이

나 스크롤 같은 것 없습니까?”

“그런 건 서재에 있는데.”

“으어……, 그렇다면 저 골렘에게 타인을 배려할 줄 알고 떨어지는 낙엽에 눈물지을 줄 아는 따스한 마음씨가 생기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는 말씀입니까?”

핸드레이크는 곧장 반색을 했다.

“어라? 골렘에게 정서를 부여할 수도 있는가? 실험해 봤나? 어떤 스펠을 사용하면…”

“사부님!”

“응? 아, 미안. 흥분했나 봐.”

핸드레이크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다가 자기가 그때까지도 지팡이를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팡이를 옆으로 던져버린 핸드레이 크는 입을 꾹 다물고는 문을 막아선 신장 6큐빗짜리 살아 있는 돌덩어 리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비켜, 인마. 비켜라. 아까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하라는 그 명령은 취소다. 비키란 말이야!”

핸드레이크가 고래고래 고함지른 말들을 모조리 거론하는 것은 의미한 짓이 될 것이다. 그저 몹시 비교육적이며 반인륜적이고도 부도 덕한 말들을 쏟아냄에 있어 옆에서 듣고 있는 제자의 존재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만 말해 두자. 성질을 더 참지 못한 핸드레이 크는 내가 만류할 사이도 없이 불가해한 괴성을 지르며 골렘에게 무조 건적으로 돌격했고, 그래서 턱에 멋진 상처를 가지게 되었다. 뭐, 소득 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덕분에 골렘의 결심을 파악할 수 있었으 니까. 저 불량품 골렘은 단순한 위협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가문으로 다가설 경우 적극적인 파괴 행동도 불사하겠다는 결심인 것 이다.

“역시 내 작품이란 말이야. 상당한 상황 판단과 대처 능력이지 않은가?”

핸드레이크는 불만스러운 감정 속에서 애써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상당히 기분 나쁠 듯한 시선을 보내주었고, 핸드레이크는 기분 나빠 했다.

“제기랄! 사부를 보는 시선으로는 최하급이군. 자네 지금 사부의 실 수를 점잖게 비난하는 현명한 제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건 나나 자네 모두에게 어울리지 않아. 난 제자에게 비난받을 만큼 멍청한 사부도 아니고, 자넨 사부를 비난할 만큼 똑똑한 제자도 아니 라고!”

나는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

“이 불쾌한 상황을 시정함으로써 사부님의 주장을 증명해 주시겠습니까?”

“그래? 얼마든지! 자, 잘 보게!”

핸드레이크는 두 팔을 거칠게 휘두르면서 걸어갔다. 그가 멈춰선 곳 은 이 방에 단 하나밖에 없는 창문이었다. 자신의 연구를 보여주는 것 을 좋아하는 마법사는 없는지라, 거의 천장 가까운 곳에 붙어 있는 창 은 까마득하게 높았다. 핸드레이크는 그 창문 아래에 멈춰 서더니 고개 를 돌리고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하는가?”

“예?”

“어서 엎드리게.”

“자, 잠깐만요. 사부님. 그 작은 창문으로 어떻게 나가실 생각이십니까?”

“무슨 소린가? 누가 나간다고 그랬나 도와줄 사람을 부를 생각이 네.”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떫은 표정을 지으며 핸드레이크에게 엉 덩이를 들이댄 채로 몸을 숙였다. 핸드레이크는 놀라울 정도의 민첩함 으로 내 등에 올라탔고 그 순간 내 무릎은 내가 보기에도 안쓰러울 만 큼 휘청거렸다. 핸드레이크는 만스럽게 혀를 차며 말했다.

“운동 좀 하게, 운동 좀 마법사라고 해서 부부 생활까지 마나로 해결할 작정인가?”

“조금만 더 노력하시면 남의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끄응.”

“조금 낮은데. 어디 보자.”

핸드레이크는 헐떡거리고 뒤뚱거리는 등 별짓을 다 하고 나서야 간 신히 내 어깨 위에 무등을 타고 앉았다. 어깨가 내려앉을 지경이었지만 이 방법보다 더 나은 방법을 제시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비지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흘끗 고개를 돌려보니 골렘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운데, 이 창문으로는 우리가 나가지 못할 것을 추리할 수 있단 말이지? 불량품치고는 굉장한 판단 능력인걸. 핸드레이크는 창턱을 쥔 채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더니 고함을 지르

기 시작했다.

“어어어어이! 아무도 없나?”

“누가 있으면 대답 좀 하게.”

“만일 지금 듣고 있는 자가 벙어리라서 대답을 할 수 없다면 그냥 달려와서 얼굴을 보여줘도 좋아.”

“만일 지금 듣고 있는 자가 타인의 불행에 대해 골렘만큼의 동정심 도 가지고 있지 못해서 달려오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이놈아! 그 심보 좀 고쳐! 그런 심보를 가지고 바라보는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 으냐? 네놈을 개구리로 만든 다음, 선량한 왕자가 입맞춤해 줘야 인간 으로 돌아오는 저주를 걸어버리겠다!”

역시 우리 사부다. 어느 나라의 왕자가 개구리에게 입을 맞출지 심 히 궁금하다. 어쨌든 지금 핸드레이크는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욕설 과 협박을 심히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어깨 위에 성질머 리 고약한 궁정 마법사를 올려놓고 즐거워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 다. 게다가 나는 그가 잊은 사실 하나를 떠올리고 말았다.

“내려오십시오, 사부님.”

“자유에 대한 갈망을 잃는 것은 좋지 않은 증상일세, 솔로처.”

“사부님, 오늘은 봄맞이 축제입니다. 모두들 연회장이나 서커스, 무 도회장 등으로 달려갔을 거란 말입니다. 어쨌든 이 즐거운 축제일에 마 법사의 연구실 주위를 배회하고 있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다시 헐떡거리고 뒤뚱거리고 난 다음 바닥에 내려선 핸드레이크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나!”

별로 답해 주고 싶은 말도 떠오르지 않는지라 나는 어깨를 주무르 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하필이면 문 쪽을 향해 있는 의자인지라 문을 가로막고 선 골렘이 시야에 넘치도록 들어왔다.


대략 한 시간이 지났고, 나는 골렘에게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 쨌든 반쯤 미쳐버린 것 같은 마법사보다는 침묵의 미덕 속에 서 있는 골렘 쪽이 더 나의 애정을 자극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핸드레이크는 두 손을 마구 흔들며 고래고래 고함지르고 있었다.

“자의식! 이 상황의 기저에 작용하고 있는 것은 자의식의 문제야! 골 렘의 행동 원칙은 그 창조주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고 그것으로써 골렘 은 자신의 자의식을 획득할 수 있어. 그렇잖은가! 골렘과 인간의 자의 식 구현 방식이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시 없는 돌대가리지! 그럼! 돌대가리라고! 그런데 저 골렘은 창조주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그 창 조주를 구속하고 있어. 이것은 내재된 갈등 구조를 심각하게 드러내고 있단 말이야. 존재할 수 없는 형태의 자의식이 이 상황 기저에 나타나고 있고 그것이 전체 논리 구조를 훼손하고 있단 말이다. 내 말 알겠나,

솔로처?”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린 다음 주의 깊게 허공을 향해 휘저었다.

“훠이훠이”

“그게 뭔가?”

“아, 단어들이 너무 많이 떠돌아다녀서요.”

핸드레이크는 내팽개쳐둔 지팡이를 들어 올리더니 나를 박살 내려 고 들었고 나는 의자를 밀어붙이고 탁자를 뛰어넘어 도망치기 시작했 다. 6큐빗짜리 악의 덩어리를 관객 삼아 벌어진 쇼는, 어쨌든 별로 재 미는 없었을 것이다. 마법사와 그의 제자란 모름지기 육체적 활동에 있 어 많은 장애를 가지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5분도 지나지 않아 암암 리에 선포된 휴전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다시 골렘을 노려보기 시작했 다. 골렘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핸드레이크는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던 지팡이를 다시 한번 뱃심 좋 게 걷어차버렸다. 궁내부장이 보았다면 자지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저 지팡이는 국왕의 왕관과 마찬가지로 궁정 마법사의 표식이었다. 그지 팡이가 골렘의 다리에 맞고 튕겨났음에도 골렘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 을 바라보며 핸드레이크는 끔찍한 신음을 흘렸다.

“이허우허허허! 이것아! 왜 반응을 하지 않는 거야!”

“반응하라고 명령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이건 내가 꺼낸 말이 아니었다.

나와 핸드레이크는 서로를 바라본 다음, 다시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둘 다 입을 쩍 벌린 채 창문 위로 올라와 있는 얼 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올라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조금 전 나와 핸드 레이크가 자유에 대한 강인한 욕구를 배출해 내던 그 창문 위로 사람 얼굴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부연 설명하자면 약간의 짜증과 재미있어 하는 감정이 적절히 뒤섞인 얼굴이었다. 우리들은 잠시 이 사태에 적응 하지 못한 채 그 얼굴을 바라보았고, 우리들의 침묵이 길어지자 창문 으로 올라온 얼굴에서는 즐거움보다는 짜증 쪽이 더 진하게 번지기 시 작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핸드레이크가 먼저 기막힌 목소리로 그 점을 지적했다.

“아니, 어떻게 그 위로………….”

저 창문은 분명히 핸드레이크가 내 어깨에 올라타고서야 내다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다. 따라서 지금 밖에서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저런 식으로 서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창턱에 팔을 괴고 그 위에 귀여운 얼굴을 얹은 채 있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장 위에 섰어요.”

핸드레이크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튕기듯 일어났다.

“위, 위험합니다, 공주님! 빨리 내려가세요!”

“안 돼요! 어서! 어서 내려가요, 공주님!”

맙소사. 지금 창턱에 한쪽 팔을 괴고 다른 손으론 턱을 받친 채 심드 렁한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것은 세류델헨 국왕의 딸 헐스 루인 공주였다. 그러니까 그녀는 벽 가까이 말을 세운 다음 그 안장 위 에 올라서서는 저렇게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 시간이에요.”

공주님은 우리들의 필사적인 만류를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뜬금 없는 말을 했다. 핸드레이크 역시 공주님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낙마가 가져다줄 수 있는 다종다양한 재난에 대해 고래고래 외쳐대 고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한 시간이라니, 뭐가 말씀입니까?”

“궁정 마법사께서 저주를 걸겠다고 공언하신 지 한 시간이 지났다 고요. 오늘은 햇살이 너무 뜨거워요. 기다리고 있기가 참 고역스러웠어 요. 도대체 왜 안 거시는 거예요?”

핸드레이크는 입을 쩍 벌렸다. 그러고는 곧 분노한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아니, 그렇다면 공주께서는 우리들이 외친 고함을 들었단 말이오?”

헐스루인 공주의 동그란 눈이 더욱 커졌다.

“물론이죠. 들었으니까 기다린 거 아니겠어요?”

“기다리다니?”

“구하러 오지 않으면 저주를 걸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핸드레이크는 분명히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지나친 충격은 그의 사고를 정지시켰고 그의 혀를 묶어버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간신히 입을 열 수는 있었다.

“그러니까, 공주님의 말씀은 무엇이냐……………”

공주님은 방긋 웃었지만, 그 미소를 바라보는 나는 결코 유쾌하지는 않았다.

“저를 개구리로 만들어주세요. 그거, 왕자님이 입맞춤을 해주어야 저주가 풀리는 조건도 반드시 넣어서”

털썩. 고개를 돌려보니 핸드레이크는 의자에 몸을 던진 채 두 손으 로 이마 양쪽을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약간 유쾌해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헐스루인 공주는 항상 내게 그런 기분을 선사한다. 그래서 나는 잠시 나의 처지를 잊기로 했다. 의자 하나를 들 어 창문 쪽으로 등받이를 향한 뒤 나는 의자에 거꾸로 앉아서 공주의 얼굴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공주님은 사부님의 협박 내용이 마음에 드신 게로군요?” 

“그래요, 솔로처.”

“그래서 사부님과 제가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서도 구하지 않기로 마음먹으신 것이군요? 협박 조건이 도와주지 않는다면’이라니까 말이 죠?”

“예, 솔로처”

나는 고개를 돌려 입구를 막은 골렘을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문을 막은 또 하나의 골렘을 바라보았다. 여기 골렘이 하나 더 있었군. 말을 말로 이해해 버리는 핸드레이크의 입에 축복이 있을진저 그는 자신의 말에 의해 구속당하는군. 그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이 상황은 좀 더 극적이며 더욱 우스꽝스럽군. 그리고 좀 더 곤란하기도 하고.

“공주님, 어쩌자고 개구리가 되려는 생각을 하셨습니까?”

헐스루인 공주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저는 궁정마법사의 말을 듣자마자 참 좋은 일일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차분하게 따져보지는 못했군요. 하지만 개구리가 되는 것 은 좋을 거 같아요. 공부도 하지 않고, 갑갑한 옷도 입지 않고, 마음껏 수영을 즐길 수도 있겠군요. 오늘같이 따가운 봄 햇살 아래 이런 옷을 입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개구리가 되는 것은 상당 한 매력이 있어요.”

“흐음, 공부라니? 공주님이 언제 공부를 하셨다는 말입니까?” 

헐스루인 공주는 생긋 웃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그리고 개구리가 되면 날아다니는 음식을 먹게 되잖아요? 솔로처, 당신은 날아다니는 식기로 식사를 해본 적이 있나요?”

날아다니는 음식? 아아, 파리나 잠자리 등을 말하는 모양이군.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없습니다.”

“퍽 재미있을 거 같아요. 날아다니는 빵이나 날아다니는 수프 접시 같은 것이겠죠. 곤충은 무슨 맛일까요? 그리고 영원히 개구리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왕자님의 입맞춤만 받으면 다시 인간이 될 수도 있다고 했지요? 그럼 불만이 전혀 없네요.”

급기야 나는 피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헐스루인 공주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완전히 잊게 된 다.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그렇지 않았다.

“공주! 부탁이니 농담은 그만하고 어서 도와줄 사람들을 불러주시오!”

“저주 안 거실 거예요?”

“공주에게 저주를? 난 국왕의 검에 맞아 죽은 첫 번째 궁정마법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소.”

헐스루인 공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정을 말씀해 보세요. 정확하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도록.”

핸드레이크는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 설명 방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것은 그의 제자가 가져온 재난 이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소급하자면 이 모든 상 황은 내가 그에게 조언을 구하러 왔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이 상황의 본질은…….

“궁정 마법사가 말실수를 한 거로군요.”

오, 공주님 만세! 하하. 핸드레이크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 지만, 헐스루인 공주는 이미 그의 머리 너머로 골렘을 바라보고 있었 다. 골렘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기에 누군가 보았다면 석상으로 착 각하기 안성맞춤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를 석상으로 착각하는 친구가 있다면 사물이 눈에 보이는 대로의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교훈을 꽤 비싼 수업료를 치르며 얻게 될 것이다.

헐스루인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별로 재미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저 골렘은 궁정 마법사의 첫 번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두 번째 명령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군요. 너무 간단해서 시시하네요.” 

핸드레이크는 눈을 치켜떴다.

“예?”

“그렇잖은가요? 궁정 마법사는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라고 했죠. 그 ‘아무도’에는 궁정 마법사도 포함되었어요. 그러니까 골렘은 궁정 마법사도 공격하려 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궁정 마법사라는 존재 는 저 골렘에게 독특해요. 왜냐하면 궁정마법사는 저 골렘의 창조자 이며 절대명령권자니까.”

아니, 이럴 수가 헐스루인 공주가 핸드레이크처럼 말하는군. 그리고 나는 그 순간 한 가지 잊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헐스루인 공주가 아무 공부도 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를 가르칠 만 한 스승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핸드레이크가 궁정 마법사의 업무로 바쁘지만 않다면 그 녀를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스승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말하지만 내 가 보기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핸드레이크는 입을 쩍 벌 린 채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아!”

헐스루인 공주는 예쁘게 하품을 하더니 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예. 궁정 마법사는 그 ‘아무도’라는 단어를 이용해서 골렘에 대한 궁정 마법사의 절대 명령권을 상회하는 새로운 명령 체계를 만들어낸 것이지요. 인식 체계라고 할까요? 으음. 다음절어는 역시 사용하기가 싫네요. 어쨌든 궁정마법사가 그 명령을 내린 순간부터 궁정 마법사가 가진 절대 명령권은 취소, 아니, 취소되었다기보다는………….?

“격하되었군!”

“그런 것 같네요. 궁정 마법사의 위상이 격하된 이상, 당신이 내리는 명령은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앞서의 명령보다 높은 권위를 가질 수 없 게 된 것 같아요.”

딱! 박수를 친 핸드레이크는 의자 위로 기운차게 뛰어올랐다. 내가 당황해서 그를 말리려고 하기도 전에 핸드레이크는 헐스루인 공주와 눈높이를 맞추려 애쓰면서 이 자리를 일종의 지적인 분위기가 물씬 넘 치는 토론장으로 만들어보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안장 위에 올라선 공 주와 의자 위에 올라선 마법사의 대화가 내 눈에 얼마나 지적으로 보 였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맞아, 상당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오. 이것은 자의식의 문제가 아니 었군! 그러니까 골렘은 명령이라는 것이 명령권자에게 속해 있다는 것 을 무시하는 게로군. 아니, 무시가 아니라 모르고 있는 거야. 그래서 명 령을 명령권자보다 높은 수준으로 따르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된 거야. 맞았소!”

헐스루인 공주는 눈을 깜빡거리며 궁정 마법사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이제 저주를 걸어주실래요?”

“공주!”

“음. 아무래도 저주를 걸어주실 생각이 없으신가 보군요.”

“물론 그렇소!”

공주는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궁정 마법사께서는 앞으로 허언을 좀 줄이세요. 한 시간 동안 괜히 기다렸군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어요.”

“뭐라고요?”

헐스루인 공주는 그대로 창가에서 얼굴을 떼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고함을 빽 질렀다.

“아니, 어딜 가신단 말입니까, 공주님!”

헐스루인 공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 조금 있으면 해가 질 거예요. 그럼 불꽃놀이가 시작되겠지요. 가 서 옷을 갈아입고 좀 씻은 다음 아바마마와 함께 중앙 광장에 갈 생각 인데요.”

핸드레이크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하마 터면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용케 균형을 잡은 핸드레이크는 마치 단상 위의 장군이나 된 것처럼 기운차게 손을 뻗어 나를 가리켰다. 

“그 불꽃놀이는 저 친구가 담당했단 말이오. 솔로처가 나가지 못한

다면 오늘 저녁의 불꽃놀이고 뭐고 다 취소될 거요!”

헐스루인 공주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어쨌든 핸드레이크든 헐스루인 공주든 자신들의 위태위태한 상황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게 매우 감동을 주고 있었다.

“왜지요? 오셔서 불꽃놀이를 하세요. 많은 바이서스 임펠의 시민들 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불꽃놀이가 취소되면 실망들 할 거예요.”

핸드레이크는 다시 한번 위험한 회전을 시도했다. 저렇게 의자 위에 서 빙글빙글 돌다간 반드시 떨어지고 말 거야. 그의 손은 이제 문을 막 고선 골렘을 겨냥했다.

“우리 둘은 이 오후 동안 계속 알고 있었고, 공주도 조금 전에 알게 되었듯이 저 골렘이 막고 있잖소!”

헐스루인 공주는 이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들을 감금하고 있는 것은 당신들 자신이에요.”

핸드레이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그건 알고 있소. 그래, 내 실수였어. 하지만 실수라는 것은 원래……………..”

“아니요. 저는 그것을 말한 것이 아니에요, 궁정마법사. 그리고 솔로 처, 골렘은 솔로처가 중앙 광장으로 오는 것을 막고 있지 않아요. 늑장 그만 부리고 어서 오세요. 시민들이 기다려요.”

핸드레이크는 공주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 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헐스루인 공주가 그녀를 가르칠 만큼 똑똑한 스승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명민한 그 머리를 이용해서 우리들의 문제 를 해결할 근사한 방법을 알아낸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재빨 리 창가로 다가서며 말했다. 헐스루인 공주는 이미 창문 아래로 모습 을 감췄기에 나는 창문을 향해 고함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 헐스루인 공주님! 우리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여길 나가면 됩니까?”

창문 저쪽에서 멀어져 가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솔로처, 나에게 질문하고 있어요?”

멀어지는 것 같다.

“예? 아, 예.”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를 원하고?”

왠지 더 멀어졌는걸?

“예? 아, 예.”

“그럼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상당히 멀다.

“예? 아, 예.”

“벽을 사이에 두고…….”

잘 안 들린다.

이런 귀결은 예상하지 못했다. 또다시 ‘예? 아, 예’ 하고 말하는 대신 나는 어이가 없어 핸드레이크를 바라보았고 핸드레이크 역시 기막힌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더 젊었기에 행동도 더 빨랐다. 나는 재빨 리 핸드레이크에게 등을 들이대며 급박하게 고함질렀다.

“사부님! 어서 올라오십시오. 공주님이 가려고 합니다. 그 전에 물어봐야 됩니다!”

“뭐야? 이런!”

내 급박함이 약간 과했나 보다. 핸드레이크는 놀랍게도 의자에서 곧 장 뛰어올라 내 등에 업히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핸드레이크가 그렇게 큰 실수를 한 것은 아니었다. 오른손의 경우, 실수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왼손은 내 등에 닿지 못했고 따라서 핸드레이크 는 내 등에 올라타지 못했다. 다시 한번 핸드레이크와 나는 매우 불쾌 한 방법으로 중력의 존재를 증명하게 되었다.

핸드레이크는 나를 깔아뭉갠 채 이런 늙은이 하나 똑바로 받아내지 못해서 나동그라지게 만드냐고 고래고래 고함질렀다. 하지만 나는 그 의 고함소리보다는 헐스루인 공주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사부님! 어서, 어서 내려와요! 공주님이…………!”

그제야 핸드레이크는 욕설을 멈추고 내 위에서 비켰다. 하지만 의자 위로 올라간 핸드레이크는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면서 내려왔다.

“공주는 가버렸어.”

“아아, 맙소사.”

“이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야! 그녀에게는 인정이라는 것이 없단 말인가? 국왕 전하께 상주드려 봐야 될 문제로군. 공주가 우리에게 행한 행동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몰인정뿐이야! 내 이 점을 기필 코…….”

“왜 갔을까요?”

“응?”

핸드레이크는 내가 제시한 의문에 버거워했다. 아마도 대답이 어려 워서 그런 것보다는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시무룩하게 의자를 끌어당긴 다음 그 위에 앉아서는 팔짱을 끼고 핸드레이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핸드레이크는 내가 그를 매 우 불쌍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격분했다.

“이 배은망덕한 녀석아! 너는 오늘 오후에 상당히 여러 번 그 시선 을 구사했는데, 난 그 시선이 달갑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용할 수도 없 어!”

그 외에도 무슨 말들을 많이 했지만 나는 이미 그에겐 거의 신경 쓰 지 않고 있었다. 헐스루인 공주는 몰인정한 성격이 아니다. 그녀는 우 리들이 틀림없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며(이 점은 조금 의심스럽 다. 그녀가 과연 우리 둘의 지적 수준을 신뢰했을까?) 충분한 도움도 줬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이 점은 미련 없이 떠나버린 그녀의 행동을 보건대 신뢰할 수 있다.).

“당신들을 감금하고 있는 것은 당신들 자신이에요.”

핸드레이크는 갑자기 굵은 눈썹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나는 계속해서 헐스루인 공주가 했던 말을 되풀이해 보았다. 

“골렘은 솔로처가 중앙 광장으로 오는 것을 막고 있지 않아요.”

“솔로처, 나에게 질문하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를 원하고?”

“그럼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벽을 사이에 두고…………, 이 뒷부분은 뭐지?”

핸드레이크는 이제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거창한 동작으로 손을 들어 올리더니 내 이마에 얹었다. 영문을 모른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나를 향해 핸드레이크는 따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네, 진심이 아니었어. 솔로처, 나는 한 번도 자네를 배은망덕 한 녀석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네. 난, 그러니까 너무 흥분해서 한 말일 뿐일세. 아아, 잊어주게. 가련한 솔로처………….”

“저를 충격받아서 횡설수설하는 놈으로 만드시려는 거지요?” 

“응.”

“사부님!”

아무래도 내 성격의 상당 부분은 핸드레이크에게서 그 기원을 찾아 볼 수 있음이 확실하다. 나는 핸드레이크를 향해 두 팔을 벌려 보이며 고함질렀다.

“헐스루인 공주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내버려 두고 갔을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미 우리를 도왔던 것이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했던 말 중에 우리를 도울 말이 섞여 있을 것이 틀림없어요. 그 말을 찾아야 됩 니다! 아시겠습니까? 콜록콜록!”

“자네 기관지가 시원찮다는 것은 확실히 알아차렸네.”

“우허허허!”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내 말을 모기 우는 소리나 오크 하품하는 소 리보다는 더 높은 위상을 가진 말로 받아들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탁 자에 대충 걸터앉더니 골렘을 쏘아보며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네의 의견은 합당해. 헐스루인 공주의 지혜가 비상하다는 것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될 문제지. 게다가 그녀는 우리들에 비하면 객관

적인 입장이라는 이점도 가지고 있어. 분명히 뭔가를 알아차렸을 수 있지.”

“그럼요!……그런데 그게 뭘까요?”

“나는 알았네!”

핸드레이크는 탁자에서 뛰어오르며 외쳤다. 나도 모르게 덩달아 의 자에서 튕기듯 일어나서 그를 바라보았다. 핸드레이크의 눈에서는 예 지의 빛이 넘쳐흘렀다. 그 자랑스러움이 넘치는 얼굴을 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맙소사, 그는 역시 나의 사부였던 것이다.

핸드레이크는 골렘을 향해 돌아서더니 두 팔을 힘 있게 들어올리며 외쳤다.

“네 속에서 격하된 나의 위상을 격상시켜랏! 앞서 내린 명령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그래…………. 그가 내 사부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래서 나는 불행한 것이다. 으윽.

골렘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핸드레이크는 크게 당혹스러워하며 나 를 돌아보았다. 그의 사랑스러운 제자인 나는 그의 말을 보다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꿔서 들려줄 정도의 친절은 가지고 있었다.

“감옥 속의 죄수가 간수에게 말합니다. ‘이봐, 간수. 내가 감옥 문을 열라고 말하면 예, 하고 대답할 정도로 나를 존경해 주게.”

“응?”

“이해 안 되십니까? 이건 어떻습니까. 전장에서 병사가 적군에게 말합니다. ‘이봐, 적군. 내 검에 몸을 집어 던지라고 말하면 몸을 집어 던질 만큼 생에 대한 의욕을 잃어주게’ 다른 예가 더 필요하시다면………….” 

“이해했으니 그만하게!”

핸드레이크는 애써 나를 외면하면서 고함질렀다. 나는 히죽 웃을 수 있어 행복했지만, 곧 풀죽은 모습으로 골렘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헐 스루인 공주의 말 속에서 해답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과연 내가 찾아 낼 수는 있을까? 내가 찾지 못한다면 핸드레이크가 찾아낼 수는……. 관두자.

‘당신들을 감금하고 있는 것은 당신들 자신이에요’

‘골렘은 솔로처가 중앙 광장으로 오는 것을 막고 있지 않아요’

‘솔로처, 나에게 질문하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를 원하고?’

‘그럼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벽을 사이에 두고…………?

저 마지막 말의 뒷부분은 무엇일까. 혹시 그 뒷부분이야말로 헐스루 인 공주가 가련한 우리들을 구제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던져준 암시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 점은 조금 의심스럽다. 사실 공주가 떠나가면서 했던 모든 말들은 우리들의 상황을 말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벽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우리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 상황.

‘벽을 사이에 두고’

‘당신들을 감금하고 있는 것은 당신들 자신이에요’

“알았습니다!”

나는 의자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미심쩍은 시선을 보낼 뿐 반가운 어투로 알아차렸단 말인가? 역시 자네는 나의 제자로군! 아아, 자랑스럽네’ 기타 등등의 말을 외치지는 않았다.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핸드레이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갇혀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외치려는 거지?”

“예!”

“그럴 줄 알았어. 싱거운 녀석.”

“아니, 아니요! 사부님, 제발 저에게 신뢰감 좀 나눠주시고 양쪽 귀중 할 일이 없는 귀를 저를 위해 열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핸드레이크는 피식거리더니 거창한 동작으로 내게 오른쪽 귀를 들이대었다.

“말해 보게. 신뢰감은 좀 보류하겠네.”

“좋습니다. 헐스루인 공주는 우리들이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젠장, 알았네, 알았어! 그래. 나는 스스로의 실수로 자신을 궁지에 빠트린 대표적인 예로 역사서에 길이길이 남겠구먼. 알았다고! 한 번만 더 ‘모든 것이 사부님 때문입니다.’ 하는 식의 말을 꺼내면……”

나는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아니, 그걸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을 그대로 생각해 보시란 말입니다. 공주님은 그 말을 사부님의 실수에 대한 은유로서 말한 것 이 아닙니다. 공주님이 우리에게 전달하려 하시는 내용은 그 말 그대로 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가두고 있다고요!”

핸드레이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그 말 그대로라면…., 그래, 자네 말대로 우리는 스 스로를 가두고 있다는 말인데, 그렇지는 않잖은가? 자네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모든 궁리를 짜내고 있네. 나는 스스로를 일부러 이곳에 가두고 있지는 않단 말일세.”

“일부러 가두고 있습니다. 틀림없어요.”

“설명해 보게. 박수나 호통, 혹은 비웃음은 그 설명을 들은 다음을 위해 아껴두겠네.”

“예, 설명하지요.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가 공주님 과 이야기하던 상황 말입니다. 공주님은 그 상황에서 이미 우리들의 문 제를 해결할 방법을 보셨지만, 우리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주 님은 떠나가시면서도 계속해서 그것을 반복하셨습니다. 그 상황에 대 해 생각해 보라고 주의를 환기시킨 거죠.”

핸드레이크는 내 말을 듣자 창문과 의자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다시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공주님과 우리들이 말을 나눈 상황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었지요?”

“공주님께서는 안장에 올라가시고 나는 저 의자에 올라가서…………”

“제발, 사부님! 그게 아닙니다. 우리들은 분명히 공주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 벽을 사이에 두고서!”

나는 맹렬한 동작으로 팔을 휘둘러 벽을 가리켰다. 핸드레이크는 그 벽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요?”

핸드레이크는 다시 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는 나를 바라보 았다. 계속해서 설명해 보라는 의미라고 짐작한 나는 열성적으로 말했다.

“보십시오, 사부님, 우리는 공주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안에 있 는 우리들과 밖에 있는 공주님이 왜 그렇지요? 말을 나누는 것에는 안 팎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 은 거리일 뿐이지 둘 사이에 존재하는 벽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공주님과 우리들이 말을 나눈 그 상황에서 우리와 공주님은 같은 공간에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지요?”

“뭐라고?”

“공간! 공간 말입니다. 저 벽이 태곳적부터 저기 있었습니까? 영원불 변한 우주의 진리로써 저 벽이 공간을 구획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 지 않습니다! 공간은 그대로의 공간일 뿐이고 저 벽은 그냥 서 있는 벽 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주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요. 저 벽이 적극적으로 우리들의 대화를 가로막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나 우 리의 의식 속에서, 우리는 벽의 존재 때문에 안팎의 공간을 마치 다른 두 개의 공간인 것처럼 생각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입니 다 마치 내 모습’이라고 말할 때 나의 신체뿐만 아니라 내가 걸치고 있 는 옷, 신고 있는 신발, 걸고 있는 장신구까지 모조리 합쳐서 ‘나’라고 생각하며 말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다른 사람이 입거나 신거나 걸치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아닙니까?”

핸드레이크는 점점 솔깃한 표정이 되어가면서 점점 심각한 자세를 취했다. 나는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저 벽을 이 안쪽으로 5큐빗 정도 당겨서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 지요. 그렇다면 안이 좁아지고 밖이 넓어지는 겁니까? 우리 의식 속에 서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공간이 변화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공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지만, 그저 우리의 의식이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와, 비네.’ 하면서요.”

“그렇군,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런데?”

“저 골렘이 우리처럼 안팎을 생각할까요?”

“응?”

“저 골렘이 과연 우리들처럼 안과 밖을 구분하고, 세상이 마치 우 리들을 위해 쪼개어지고 구분될 수 있는 무엇인 것처럼 뻔뻔하게 믿 을 수 있을까요? 그냥 존재하는 시간에 날짜를 붙여서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뭔가 애달픈 날이라도 되며 한 해의 시작일이 굉장히 축하할 날 인 것처럼 믿을 수 있는 그 오만함이 있을까요? 천만에요! 골렘은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도대체 한 해의 마지막 날과 그다음 날이 뭐 가 다르답니까? 그날은 해가 두 개 뜨기라도 한단 말인가요? 전혀 그렇 지 않습니다. 그 둘은 똑같습니다! 그저 인간 스스로가 거기에 날짜라 는 것을 붙여놓고서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붙여둔 날짜에 감정을 좌지 우지 당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안의 공간과 저 밖의 공간이 뭐가 다 르다는 말입니까? 그저 우리가 벽을 세워두었다는 것일 뿐, 이 안과 저 밖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공간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안 그럴지 몰라도 저 골렘에게는 똑같은 공간일 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가두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되는 겁니다!”

핸드레이크는 벌떡 일어섰다. 워낙 급격한 동작인지라 의자가 뒤로 나동그라질 정도였지만 핸드레이크는 괘념치 않은 채 외쳤다.

“자네는 역시 내 제자일세!”

‘으윽. 좀 늦군’

“훌륭하네, 훌륭해! 자네의 말이 옳아 그렇군!”

핸드레이크는 열정적으로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헐스루인 공주님이 가르쳐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훌륭하다는 것일세! 나는 자네가 헐스루인 공주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거라고는 절대로……”

“사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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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레이크는 딱 소리 나게 박수를 치며 말했다.

“으핫하하하. 좋아,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하군.”

어라, 간단하다고? 설마 여기서 우리는 골렘에게 존재와 인식에 대 한 것을 가르치기 시작해야 될 테고, 그것은 매우 지난하며 어려운 작 업이 될 텐데?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핸드레이크를 바라보았다.

“사부님? 그러니까…………….”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골렘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그의 뒤를 따랐다.

골렘은 우리들이 나눈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듣지 못한 것인지 무표정하게(사실 표정을 지을 근육과 피부라는 것이 없기도 하지만) 서 있었다.

핸드레이크는 히죽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자, 시작하지.”

“예? 뭘 말입니까?”

핸드레이크는 이제 약 30분 전까지 골렘에게 보내고 있던 시선을 나 에게 보내오기 시작했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핸드레이크는 기가 막 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는 자네를 마법사로 인정할 수 없단 말일세! 스스로의 힘으로 해답을 다 찾아내고서는 답안지에 적을 줄을 몰라서 낙방하는 학생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정말 못 참겠군. 어디 가서 누구 제자냐고 물어보면 절대로 내 제자라고는 대답하지 말게!”

“제가 사부님의 제자인 것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부님 께서는 저의 사부님이므로 저를 지도하실 의무가 있지 않으십니까. 지 도해 주시지요.”

핸드레이크는 어처구니없어하며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왔다. 피하려고 했지만, 핸드레이크의 손은 너무 빨랐고 나는 그에게 귀를 붙잡히고 말았다. 아이고, 내 귀!

“으아아아!”

“시끄러워! 입 닥치고 내 말 잘 들어.”

핸드레이크는 그대로 내 귀로 입을 가져와서는 뭐라고 속삭이기 시 작했다. 귀가 당겨지는 바람에 눈앞으로 온갖 아름다운 빛이 떠다님과 동시에 격심한 통증에 발가락이 곤두설 지경이었는지라 나는 핸드레이크의 속삭임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러나 핸드레이크는 두 번 반복했고 두 번째 말했을 때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뭐라고요?”

“그대로 말하게. 어서! 꼭 걸음마까지 가르쳐줘야 걷는단 말인가? 오호, 핸드레이크여. 너는 지지리도 제자 복이 없구나. 하긴 오죽 못났 으면 데이트 방법을 물어보러 사부를 찾아왔을까. 어서 말햇!”

그리고 핸드레이크는 몸을 돌려 골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이 모욕에 그럴듯한 항변의 말을 외쳐줄까 했지만, 그는 완강한 태도로 등 을 들이댄 채 내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의 명령대로 고함을 질렀다.

“사부님! 앞으로 20큐빗만 걸어가십시오!”

그리고 핸드레이크는 골렘을 지나쳐 밖으로 걸어갔다.

밖으로 걸어갔다? 말을 잘못했군. 골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핸드레이크는 20큐빗 이동했을 뿐이지 안팎으로 움직인 것은 아 니다. 즉 ‘드나든’ 것이 아니다! 나는 단숨에 이해했고, 그래서 펄쩍 뛰 어오르며 괴성을 질렀다.

“우으으아!”

잠시 후, 나는 ‘솔로처, 앞으로 20큐빗만 걸어오게’라는 사부님의 명 령으로 앞으로 20큐빗을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는 핸드 레이크의 연구실을 나와 골렘의 등을 바라보고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나와 핸드레이크는 서로 얼싸안은 채 빙글빙글 돌며 음정도 맞지 않는 노래를 불러댔다. 다행히도 봄맞이 축제일이므로 누군가가 우리를 바라보며 ‘미친 마법사와 그만큼 미친 제자로 판단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들은 기쁨이 가셨다기보다는 너무 돌아서 어지러웠기 때 문에 그 짓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핸드레이크는 골렘의 등을 바라보다가 나를 향해 말했다.

“하하. 멋진 오후였네 후, 후. 자넨 이제부터 부지런히 중앙 광장으로 달려가야겠지?”

“예. 헉헉, 그렇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저 골렘을 처리하고, 헥. 뒤따라 오시겠습니까?”

“응? 천만에. 나는 저 골렘을 그대로 둘 생각이네.”

“예? 아니, 뭣 때문에…………….”

핸드레이크는 허리를 쭉 펴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자네의 말에 감동했네, 솔로처. 그리고 그 감동을 다른 모든 이들에게 전해 주고 싶네.”

“그럼 저대로 놔두겠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이네! 세상이 우리 마음대로 자르고 나누고 구분할 수 있는 것 이 아니라는 것을, 오로지 우리 의식 속에서만 그렇게 나눌 수 있을 뿐 이지 우리가 세상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되 새기게 하기 위해, 앞으로 이곳을 드나드는 모든 이들이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드나들게끔 할 생각이네.”

핸드레이크는 단호하고도 무게 있는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훗날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핸드레이크의 생각을 칭송하며 박수를 쳐버린 것이다. 핸드레이크는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핸드레이크의 연구실을 드나드는 모든 이들은 세 상에 대한 겸허함을 배우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국경선을 긋든 벽을 세우든 그것은 우리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지 세상을 구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겨야 했다. 그리고 나는 나 혼자서만 짐작하는 사실에 대해 고민하며 밤마다 잠 못 이루며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핸드레이크가 심술 때문에, 즉 자기 두개골이 찌그러질 뻔한 일을 다른 사람도 겪어야 된다는 심술에서 그런 결정을 내렸을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판단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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