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메라 (Chimera)
키메라
“흐음, 솔로처, 저쪽 찬장에 보면 썩은 꿀이 있을 거야. 그걸 좀 가져 오게.”
“사부님. 물론 질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좀 여쭤봐야겠습니다. 키메라를 제조하는 데 썩은 꿀이 꼭들
어가야 하는 겁니까?”
“물론이지! 꼭 필요한 거야. 이건 완벽한 키메라라고.”
핸드레이크는 이런 당연한 사실도 모르느냐는 식으로 나를 쳐다보 았고, 그 눈빛은 내게 대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악 담을 중얼거리며 그 꿀병을 가져왔다. 내 동작에서 뭔가 미심쩍은 모 습을 발견한 핸드레이크는 터무니없이 과장되게 진지한 손짓을 하며 썩은 꿀을 솥 안에 부어 넣었고, 나는 그 모습에 가소로운 미소를 지었다.
썩은 꿀이지만 그래도 꿀이니만큼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야 정상이 겠지만, 솥 안에 먼저 들어갔던 재료들 때문에 냄새는 여전히 고약했 다. 그 먼저 들어간 재료에 대해서는 부디 묻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비 위가 남달리 강한 사람이라도 안색이 창백해질 목록이다. 재료를 투입 하는 과정에서 나는 두 번 졸도했다. 핸드레이크는 혼자서 실험할걸 어 쩌고 하며 투덜거렸지만, 재료들 중엔 혼자서 도저히 집어넣을 수 없는 것도 있었기에 내 도움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낡은 책장 이라든가 식물이 말라죽은 커다란 화분 등.
역시 내 생각대로 이건 봄 대청소임이 틀림없다.
완벽한 키메라의 제조 어쩌고는 연구실의 봄 대청소에 제자를 끌어 들이기 위해 대마법사가 생각해 낸, 그리고 실로 대마법사나 생각해 낼 법한 구실인 것이다. 다시 한번 핸드레이크의 명령에 따라 낑낑거리 며 깨진 모래시계를 솥 안으로 욱여넣은 다음 이 또한 대마법사가 생각해 낼 법한 쓰레기 처치법이다. 나의 사부가 솥 안의 용적을 얼마나 부풀려놓았는 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혹 다른 차원과 연결해 버린 건 아닐까?) 나는 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사부를 바라보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또 뭐 치울 것 없나 찾아보던 핸드레이크는 내 시선에 움찔하며 다시 메모를 참조하는 척했다.
“흠흠, 그러니까 다음으로 들어갈 재료는……………”
왜 바이서스의 위대한 궁정 마법사 핸드레이크가 마법 하인을 만 들어내지 않고 이렇게 제자를 괴롭히고 있냐고? 글쎄. 관점의 문제이 긴 하겠지만, 그래도 플라스크 한번 엎질러서 세상이 박살 나는 건 안타까운 노릇이지 않을까. 어쨌든 이곳은 핸드레이크의 연구실, 그러니 까 대륙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장소다. 망가진 가구 따위야 누가 치워도 상관없겠지만 맨드라고라의 뿌리라든가 독두꺼비 뿔, 그쉬룹의 흡혈초 등을 안전하게 다룰 수 있는 건 마법사뿐이다. 아니면 심술궂은 사부 때문에 아직까지 마법사로 인정받지 못한 수제자뿐이라고 할 수도 있 다. 내가 이 화창한 봄날에 대청소에나 매달려 있는 이유는, 게다가 내 사부의 가증스럽고 가소롭고 가식적인 연기까지 감수하는 이유는 바 로 거기에 있었다.
“흐음.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깨끗한 바닥이 꼭 필요 하네. 빗자루와 쓰레받기, 그리고 먼지떨이와 걸레를 가져오게나.”
……………어쩌면 감수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물론, 반드시, 결단코, 의심의 여지 없이, 그건 완벽한 키메라의 제작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겠지요?”
“당연하지. 그런데 왜 그렇게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말하는 건가?
이가 아픈가?”
나는 자기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책장도 의자도 화분도 썩은 꿀도 필요한데 깨끗한 바닥쯤이야. 나는 군말 없이 청소 도구들을 찾아들었 다. 물론 내 이성의 보다 비관적인 쪽, 그래서 더 현명한 쪽은 이 장대한 연극의 끝이, 청소가 끝난 연구실과 키메라의 제작이 지난한 일임을 인 정하는 핸드레이크의 장탄식일 것임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청소를 마치자마자 솥 안에서 웬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을 때 나의 경악은 필설로 형언할 수 없었다. 솥에서 머리를 내민 그것은 서로를 끌어안은 우리 둘을 발견하고는 품위 있게 말했다.
“나는 완벽한 키메라다!”
“서, 성공해 버렸다!”
핸드레이크의 이 외침은 내 추측을 뒷받침하는 것이었지만 그 당시 에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와 나는 깨끗이 청소된 바닥에 주저앉은 채 서로를 얼싸안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무런 반 응을 보이지 않자 그것은 솥 안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철퍽거리고 삐걱거리고 꿈틀거리고 심지어 줄줄 흘러내리기까지 했 지만, 어쨌든 그것은 솥 안에서 걸어 나와 우리들 앞에 섰다. 이상한 위 치에 달려 있는 비정상적인 형태의 팔이 우리를 향해 뻗어왔다. “네가 나를 만들었는가?”
“그, 그렇다. 나는 핸드레이크. 내가 너를,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너를 만들었다. 핸드레이크와 그의 제자 솔로처가 너를 만들었 다.”
공정함이라든가 정의라는 말을 뉘 집 강아지 이름쯤으로 알고 우습 게 여기는 핸드레이크지만 마법에 대해서만은 사실을 중요시한다. 아 니면 내 짐작대로 그는 이 괴상한 물체를 이미 실패작으로 판단하고 있 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마도 모든 사태가 종료된 뒤 나의 사 부는 내가 끼어들어서 실패했다고 우길 것이다.
그것은 우리 둘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물론 깨진 약사발과 도롱 뇽 박제가 우리 쪽을 향해 있는 것이 ‘바라본다’는 말에 해당하는 것 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잠시 후 그는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갑자기 말했다.
“나는 완벽한 키메라다.”
“흐음. 이건 재미있군.”
핸드레이크와 나는 서로 떨어져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약간 떨 어진 거리까지 물러나는 동안 그 ‘완벽한 키메라’는 우리를 바라볼 뿐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우리는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거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바라보았다. 핸드레이크의 경우엔 턱수염을 약간 잡아 당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게 꿈이 아닌가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 다. 갑자기 핸드레이크는 나를 휙 돌아보았다.
“솔로처, 재료 투입 순서를 다 기억하나?”
아아, 순진한 나의 사부여, 나는 내 사부에게 악의 넘치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사부님의 메모에 있지 않습니까?”
“음? 아, 물론 그렇지! 자네에게 가르쳐줄 필요가 있는지 알기 위해 서 물어본 거야. 자네가 다 기억하고 있다면 내가 따로 가르쳐줄 필요 는 없겠지? 어, 어때?”
“따로 가르쳐주셔야겠습니다.”
그러자 핸드레이크는 벌컥 화를 내었다.
“이 얼간이 같으니! 내가 관찰력도 없는 제자에게 귀중한 지혜를 전 수해 줄 만큼 관대하다고 생각하나! 도대체 제 손으로 집어넣고도 뭘 어떻게 집어넣었는지를 기억 못 한다고? 좀 제대로 기억해 보란 말이 다!”
난 죄송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어 보임으로써 핸드레이크를 좌절시켰다. 핸드레이크는 이제 자신이 창조해 낸 키메라를 어떻게 창조했는지 모른다는 사실에 격분해야 할 것이다. 공부하느라 바쁜 제자를 가소롭 기 짝이 없는 구실을 들어 대청소에 동원한 벌이라면 이 정도가 딱 적 당한 것 같다. 나는 지극히 애정 어린 눈으로 그 키메라를 바라보았다. 그때 키메라가 우렁차게 외쳤다.
“창조자들이여!”
“음? 왜 그러나?”
“나는 완벽한 키메라다.”
잠시 기다리던 우리는 그 키메라가 더 이상 말하지 않을 작정이라 는 것을 깨닫고는 맥이 풀리고 말았다. 핸드레이크는 짜증스러워하며 말했다.
“지능이 높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것 같죠?”
“그래. 한 연구실 안에 바보는 하나면 충분한데 말이야. 둘은 좀 많지”
“사부님!”
핸드레이크는 히죽 웃더니 팔짱을 끼며 그 키메라를 바라보았다.
“그래, 완벽한 키메라여. 너는 무엇을 할 수 있지? 어, 혹시 네 탄생 과정을 기억하나?”
속 보이는 질문이었지만 나 또한 그것이 궁금했던지라 기대감 속에 키메라를 바라보았다. 키메라는 화분을 갸웃하여 흙과 자갈이 얼마쯤 쏟아지게 만들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나의 발생 이전을 기억하는 나라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어라? 의외로 근사한 말을 하는데.”
핸드레이크는 감탄했다. 결국 이 친구를 통해서도 이 친구의 제작 과정을 알 수는 없게 되었지만 우리는 이 미증유의 지성을 관찰하는 것에 이미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핸드레이크는 시원스럽게 말했다.
“좋아. 완벽한 키메라여, 내 두 번째 질문은 잘못됐다. 인정하겠어. 그럼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엇이지?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나?”
“나는 원할 수 있다.”
그렇다. 인정한다. 우리는 마법사와 제자이다. 그래서 나와 핸드레이 크는 이런 대답이 보통 사람들에게 야기할 만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우와앗! 들으셨습니까? 욕망할 수 있답니다, 사부님!”
“엄청나군! 욕망이란 세계 인식과 자기 인식이 모두 갖춰졌을 때, 또 한 거기에 미래라는 개념이 덧붙여졌을 때만 가능한 고등한 정신 활 동이지. 이거 장난이 아닌데? 좋았어. 완벽한 키메라, 너는 무엇을 원하 지?”
“나는 창조자들에게 원한다. 완벽한 짝을 만들어다오.”
키메라가 세 번째 팔에 달린 두 번째 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말하자 우리는 거의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졌다.
“짝! 종족 번식의 욕구일까요? 아니면 혹시 일자(者)의 고독? 사부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젠장, 이거 생각이 안 된다. 손끝이 다 떨리는데! 정말 멋지군. 짝이라고? 이것이 뭔가 중요한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에 내 수염을 걸어도 좋아!”
“맞습니다! 오오, 위대한 사부님. 그런데…………
나는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 완벽한 키메라를 바라보았다.
의별 잡동사니들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는 그 키메라를 바라보며 나 는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런데 저게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우리는 동시에 키메라의 사타구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리들이 바라본 방향은 서로 달랐다. 그 키메라는 다리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여러 개인 데다가 좌우 대칭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것이 한 걸음 움직였 을 때 우리는 다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다리가 아님을 깨달았 다. 내가 마음속으로 두 번째 팔이라고 이름 붙여 두었던 것이 다리처 럼 사용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아무리 보아도 갈비뼈가 아닐까 생각되는 부분까지 이동에 이용되는 것은 정말 골치 아픈 노릇이었다. 핸드레이크 또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듯했고, 그래서 우리는 시간 이 약간 지난 후에야 그것이 꽤 위협적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음 을 깨달았다.
“창조자들이여! 완벽한 짝을 만들라!”
위협적인? 그렇다. 왠지 그렇게 느껴진다. 나와 핸드레이크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조금 물러나며 다시 한번 그것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이 제 보니 그것은 높이가 7큐빗은 넘었고 넓이도 6큐빗은 충분히 되었다. 이빨이나 발톱, 뿔, 집게 따위야 당연히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위험해 보였다.
“창조자들이여!”
“어, 재촉하지 말라고, 친구. 자네 이야기는 분명히 들었으니까. 짝을 원한다고 했지?”
“그렇다.”
“왜 그걸 원하는 거지?”
“나는 완벽한 키메라다. 최초의 나는 너희들 창조자에 의해 만들어 졌지만, 이제부터는 나 스스로 만들 것이다. 따라서 나에겐 짝이 필요 하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종족 번식이군.”
핸드레이크는 두 팔을 약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자네와 같은 존재를 늘리고 싶다는 건가? 왜지?”
“완벽하니까. 세상엔 완벽한 존재가 필요하다. 따라서 나는 완벽한 짝과 더불어 완벽한 자손들을 만들고 또 만들어 그들로서 지상을 가득 채울 것이다.”
핸드레이크는 기막힌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 친구 지금 세계 정복을 말하고 있는 거야? 꿀범벅 된 양피지 뭉 치아래 덜그럭거리는 서랍과 튀어나온 탁자 다리에 엉긴 흡혈초 잎사 귀가 매력적인 친구들이 세상을 가득 채운다고?”
우리는 그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다음 순간 우리는 폭발적으로 웃 기 시작했다. 맙소사, 그 세상 한번 정말 볼만하겠다. 나는 허리를 꺾은 채 웃어댔고 핸드레이크는 아예 눈물을 줄줄 흘리며 벽에 기대섰다. 결 국 우리는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가 되었다. 이제야 정의를 내릴 수 있 게 되었지만 자칭 ‘완벽한 키메라’라는 저 친구는 아무리 잘 봐줘도 움 직이는 쓰레기 더미일 뿐이었다. 조금 전에 느꼈던 위협적인 느낌은 완 전히 사라졌다. 핸드레이크는 벽에 기댄 채 헐떡이며 말했다.
“아, 그런데 말이야. 완벽한 키메라여,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내 제자 의 견해 또한 나와 같은 듯한데, 자네 같은 존재의 번창은 아무리 생각 해도 풍경 화가의 악몽 이상은 아닐 것 같아.”
“완벽한 짝을 만들라!”
“이런 쇠고집을 봤나. 야, 이놈아. 사람이 점잖게 말하면 말을 들어 난 네 짝을 만들어주지 않겠어. 어쨌든 당장은 그래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아!”
물론 만들어줄 수도 없고 말이지. 핸드레이크의 말이 끝나자 자칭 완벽한 키메라는 입을 다문 채(물론 수사적인 표현일 뿐이다) 우리를 가만 히 내려다보았다. 깨진 약사발과 도롱뇽 박제가 좌우로 데굴거리는 모 습을 보니 무슨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말하지만, 마 법사와 그 제자였던 우리는 주위 상황을 살핀다거나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을 추측해 보는 대신 이 친구가 무슨 대답을 할지에 모든 관심을 기울였다.
약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 완벽한 키메라는 천천히 화분을 흔들었다.
“나에게 완벽한 짝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너희 창조자들에게 위해를 가하겠다.”
“우왓! 놀랍습니다, 사부님. 협박입니다. 믿을 수 없군요!”
“대단해! 그렇다면 저놈은 욕망의 달성 과정을 상정하고 거기에 자 신의 능력을 개입시킬 시점과 형태를 가정할 수 있다는 말이군. 엄청난 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키메라에게 어떻게 쳤을지 궁금하다. 어쨌든 우리가 키메라를 만족시키지 않았음은 분명 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키메라가 우리에게 화염을 뿜어대었을 리가 없 으니까.
우리는 기겁하며 좌우로 갈라졌고 키메라가 토해 낸 불줄기는 우리 둘 사이를 가로질러 뒤쪽의 탁자에 작렬했다. 화르르르! 열기를 이기지 못한 시험관들과 증류기들이 박살 나며 튀어 올랐고 놀랍게도 철제 절 굿공이가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울! 물 가져와, 솔로처!”
핸드레이크의 비명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주위를 살 피던 내 눈에 걸레가 담겨 있는 물통이 들어왔고 나는 냉큼 그것을 집 어 들어 탁자에 집어 던졌다. 파파파파! 수증기가 천장을 향해 치솟고 벌써 재가 되기 시작한 탁자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가까스 로 불기가 줄어들자 핸드레이크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어들 어 불길을 밟아대기 시작했다. 이곳은 불장난을 치기엔 너무 위험한 곳 이다.
신발이 타들어 가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은 노력 덕분에 불길은 사그라들었다. 옷에 붙은 불티들을 황급히 떨어낸 다음 핸드레이크는 격분한 얼굴로 키메라를 돌아보았다.
“네 녀석이 감히, 아…….”
나는 깜짝 놀라 핸드레이크를 쳐다보았다. 나의 사부는 칭찬은 자제 할지언정 폭언은 절대 자제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키메라를 돌아 본 나는 핸드레이크의 이 일탈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키메라의 상체, 결코 정확한 명칭이랄 수는 없지만, 그 상체에서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의 팔들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팔들의 형 태와 크기는 각양각색이었지만 그것들은 한결같이 뾰족하거나 날카롭 거나 섬뜩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제아무리 사교 생활을 즐기는 작자라 도 이 키메라와 악수할 것 같지는 않았다. 눈에 익은 것들도 많았다. 꾸 불텅꾸불텅, 키메라의 무릎에서 건들거리던 흡혈초들은 갑자기 뱀처럼 머리를 쳐들더니 꽥꽥거리며 피를 갈구하기 시작했고, 뿌지직뿌지직, 독두꺼비의 뿔들은 거대화의 물약과 섞이기라도 한 것인지 드래곤의 뿔만큼이나 거대해진 모습으로 어깨 쪽에서 튀어나왔다. 가장 끔찍했 던 것은 목 근처에서 튀어나온 맨드라고라의 뿌리들이었다. 얼씨구절씨 구.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그 뿌리들이 목걸이처럼 얽혀 키메라의 목을 감싸고 있는 모습은 그 키메라를 어떤 무시무시한 신의 우상과 비슷하 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제 키메라는 춤이라도 한번 추면 자연재해가 되고 말 모습으로 바뀌었다.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키메라는 서랍을 힘차게 덜그럭거리며 외쳤다.
“창조자들이여! 완벽한 짝을 만들라!”
봄 대청소가 세상을 박살 낼 만큼 위험하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믿어주기나 할까?
어쨌든 세상을 박살 내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은 과장이라 할 수 있 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바이서스의 국왕이 거처하는 궁성 임펠리아 내에 소재하는 연구실이며, 그 말은 바꿔 말해서 바이서스의 국왕 및 왕실의 중요 인물들이 저 자연 재해적 피조물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말이 된다. 그 사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저 키메라를 대함에 있어 진지 한 자세를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잠깐. 진정하라고, 진정해. 짝? 만들어주겠어. 그러니 뒤로 조금 물
러나 있어.”
키메라는 뜻밖에도 뒤로 순순히 물러났다. 아마도 뒤로 물러나는 동작이 짝의 제작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믿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 틈 을 타 핸드레이크에게 속삭였다.
“어쩌지요. 사부님?”
“뭐든 만드는 척하자.”
“그건 미봉책밖에 안 될 텐데요?”
“그럼 어떡하냐?”
“저 녀석을 부숴버리지요. 최소한 무력화시키는 방도를 생각해 보지요.”
핸드레이크는 기막힌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긴 창과 방패, 갑옷을 가져다주랴? 힘센 전투마도 필요하겠지? 아, 나팔은 내가 불어주지. 자네가 기사도에 그토록 경도되어 있는 줄은 내 미처 몰랐군.”
“그럼 어쩝니까? 어차피 짝을 만들어줄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만들 어줄 수 있다고 해도 저 친구나 저 친구의 자손들은 다과 시간의 주인 공이 되기엔 부족해 보이는데요.”
핸드레이크는 다시 키메라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쯔읍 대단히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작자가 아니라면 저 친구와의 교 류에서 즐거움을 느끼긴 어려울 거라는 데에는 동의하겠다. 하지만 금 외로움을 좀 과격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 빼고는 별다른 해도 끼 치고 있지 않으니……………”
난 불탄 실험 도구들을 돌아보았다. 별다른 해가 없다고?
“부수는 건 좀 천천히 고려해 보자. 게다가 저 친구를 상대하는 것 이 결코 쉬울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궁성 임펠리아 안에서 지나친 불 꽃놀이를 할 수는 없잖아. 일단 시간을 좀 끌어야겠군.”
“어떻게요?”
“내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이 이봐. 키메라!”
키메라는 즉각 대답했다.
“왜 부르는가, 창조자 핸드레이크여?”
“짝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니 묻겠다. 자네 남자인가, 여자인가?”
핸드레이크는 조금 전 내가 던졌던 질문을 그대로 키메라에게 했다.
그러자 키메라는 침묵한 채 우리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키 메라는 놀랍게도 약간 난처해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창조자들이여, 그대들이 나를 만들었다. 그런데 내 성별을 모른단 말인가?”
어쩐지 투입 순서를 다 기억하냐고 묻는 사부님의 말투와 비슷했다. 그래서 나는 저 키메라도 자신이 어떤 성별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 다. 핸드레이크는 신나는 기분을 최대한 감추며 말했다.
“아, 물론 우리들이 자네를 만들긴 했지만, 자네의 짝까지 만들 생각 은 하지 않았거든. 그래서 자네의 성별을 특별히 고려해 두지 않았어. 그러니 자네가 우리들을 위해 좀 알려줘야겠는데.”
이런 웃기는 대화는 봄 대청소 중인 마법사의 연구실에서나 들어 볼 수 있을 것이리라. 난처해 하던 키메라는 마침내 온몸을 떨기 시작 했다.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종이가 찢어지고 구멍 난 냄비가 웅장한 소 리를 내며 울리기를 수분, 마침내 키메라는 포기한 듯한 몸짓을 해보 였다.
“나는 내 성별을 모른다.”
“뭐라고! 맙소사, 이런 낭패가 있나! 그럼 우리가 자네 짝을 만들어 줄 수 없잖은가!”
핸드레이크는 경악에 차서 외쳤고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키메라의 어깨너머 상인방을 쏘아보았다. 키메라는 좌절한 듯 바닥에 주저앉더 니 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내 성별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짝을 만들 수 없는 것인가?”
“으음. 일단은 그렇군. 하지만 좌절하지 말게. 뭔가 방법이 있겠지. 시험해 보고 연구해 볼 수 있을 거야. 이건 그저 시간의 문제야.”
“시험하고 연구하라!”
“뭐? 아, 그래……. 솔로처?”
“제발 이럴 때만 부르시지 말아 주세요, 사부님. 저도 좋은 방법이 안 떠오릅니다.”
“흐으음, 어디 보자. 이 친구는 세상을 정복하겠다고 말했어. 그건 남성의 특징이지 않을까?”
“하지만 말입니다. 이 키메라가 말하는 것은 기치창검을 높이 들고 황야를 달리는 따위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손들로 세상을 가득 채우 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성 본능 아닐까요?”
오크들이라도 저런 모습을 자애로운 어머니상으로 받아들이긴 어 려워할 테지만 말이야. 하지만 핸드레이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성 본능은 자손을 낳고 기르고 싶어 하는 것이지 무조건 싸질러 서 세상을 꽉꽉 채우겠다는 식은 아닐 텐데, 오히려 그런 건 남성적인 욕구에 가까운 것 아니냐?”
“싸지르다니요. 좋은 말 쓰세요. 여기엔 태어난 지 10분도 안 되는 순진한 아기가 있습니다.”
나는 그 순진한 아기가 화염을 토하고 공성추만큼이나 거대한 독뿔 로 무장한 7큐빗짜리 신생아라는 사실은 무시했다.
“사부님의 말씀도 맞긴 합니다만, 이 친구는 후손을 낳기 위한 목적으로 짝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남성들은 모두 잘 알고 있지만 남자는 후손보다는 여자 자체 가 목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자는 자기 자신이 아기를 낳지 않기 때 문에 후손에 대한 관념이 희박하지요. 따라서 남자는 후손을 얻기 위 해 여자를 찾기보다는 여자를 얻기 위해 여자를 찾습니다.”
“그럼 여자는 자손을 얻기 위해서 남자를 찾는다는 말인가? 뭐, 자 네 말대로 여자들이 아기를 가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귀찮고 지저분 하고 독선적인 남자를 참아주는 게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어. 하지 만…….”
불안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 10분도 되지 않아 나의 불 안은 사실로 드러났다. 우주의 모든 선한 의지가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둘 있는데 첫 번째는 핸드레이크의 성격이고 두 번 째는 그 수제자의 성격이다. 제자의 지성을 간단히 오크 수준으로 깎 아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타고난 스승인 핸드레이크와, 그 핸드레이크 의 복장을 간단히 뒤집어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타고난 그의 제자인 나, 솔로처는 원래의 목적을 깨끗이 망각한 채 이 키메라가 남자냐 여 자냐를 놓고 백열하는 설전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위대 한 마법사와 청출어람이 기대되는 그의 제자가 벌일 법한 토론은 절대 로 아니었다.
“남자야, 남자! 가슴이 없잖아!”
“여자예요, 여자! 그게 없잖아요!”
…..후학들이 우리들의 토론을 알게 될까 두렵다. 멍한 표정으로 (의인화가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다) 우리들을 바라보던 키메라는 몇 번이 나 조심스럽게 끼어들려고 했지만,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우리들 의 살벌하기까지 한 요구에 그만 포기하고는 의기소침해진 채 물러나 있었다. 어쨌든 우리가 그런 소동을 일으키고 있었기에 방문자는 높은 목소리로 두 번이나 외쳐야 했다.
“솔로처! 제발 내 말 좀 들어줘요!”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우리는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지 모르지만 닥치고 꺼져!’라고 외치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 목소 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연구실로 들어선 자는 이미 활달한 걸음걸이 로 우리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 사람과 우리들 사이에는 저 최신식, 미증유, 성별 미상의 자연재해가 온갖 흉측한 부속 기관을 흔들거리며 앉아 있었다. 우리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으악! 공주님!”
“헐스루인 공주인데요. 으악 공주가 아니라.”
헐스루인 공주는 태평하게 자신을 소개한 다음 내처 걸어왔다. 키메 라의 곁을 지나던 공주는 옆을 흘끔 쳐다보고는 “안녕하세요. 좋은 날 씨죠?” 하더니 다시 우리에게로 걸어왔다. 그러곤 경악 때문에 숨 쉬는 것도 잠시 방기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말했다.
“여기 있었군요, 솔로처 부탁할 것이 좀 있어서 찾아왔어요.”
“공주님, 여기는 위험, 아니,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저게 보이면, 그러니까 공주님은, 어, 일단은 피하고 봐야, 그러니까 공주님!”
핸드레이크는 당황하여 말도 안 되는 말을 쏟아놓았지만, 그것은 공 주를 즐겁게 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헐스루인 공주는 얼굴을 활짝 펴며 말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것입니까?”
“스무고개 놀이가 아닙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실례하지요, 솔로처. 이미 말했듯이 부탁이 좀 있는데요. 헤트로이처의 『신에게로의 사색적 산책』 가지고 있지요? 좀 빌려주시겠어요?”
“읽어보시려고요?”
“아뇨. 두께가 딱 맞을 것 같아서.”
“…..과자 상자입니까?”
“사탕 병.”
“시녀에게 허락받지 않고서는 빌려드릴 수 없겠군요. 그리고 제 생각 에도 책은 읽으라고 있는 거지 의자 위에 놓고 발판으로 쓰는 건 아니 라고 여겨……”
“그럼 크라이제의 문명 비평이라도 좋아요. 47쪽 더 두꺼우니까.”
나는 웃으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열다섯 살에 아직 키가 3큐빗이 될까 말까 하고 단 것에 꼼짝 못 하지만 그게 헐스루인 공주의 모든 면 은 아니다.
“말을 실수했군요. 이 궁성 내에 있는 책은 쪽 수까지도 다 알고 있 으시니, 영특하신 공주님으로선 당연히 발판 이외엔 책을 사용할 일이 없으시겠군요.”
헐스루인 공주는 생긋 웃었다. 그때 공주의 등 뒤에서 화산 폭발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자는 영리한가?”
헐스루인 공주는 감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는 겨우 유쾌 해지던 기분이 싹 사라지는 것, 그리고 피가 식는 듯한 기분이 엄습하 는 것을 느꼈다. 핸드레이크는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아무래 도 자신의 지팡이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봄 대청소와 조금 전 키메라의 난동, 그리고 우리들의 소동 때문에 그 지팡이는 어디로 갔는 지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헐스루인 공주는 키메라에게 말했다.
“나 말인가요? 글쎄요. 영리하다는 것도 약간은 상대적인 개념이니 까 당신이 판단해야 할 문제인 것 같군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지요?”
“나는 완벽한 키메라다!”
핸드레이크는 신음을 토했다.
“나는 저 말이 지겨워지기 시작했어.”
나 역시 사부님의 말에 동감했다. 하지만 헐스루인 공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키메라는 보통 생물체들이 합성되어 만들어지는 거라고 알고 있었 는데 당신은 그렇지가 않군요. 그런데 내가 영리한지 알고 싶어 하는 이유는 뭐죠?”
“그대가 영리하다면 말하라. 나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물론 남자지!”
“여자입니다! 말할 것도 없어요!”
헐스루인 공주와 키메라는 잠시 침묵한 채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보 았다. 우리들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이자 헐스루인 공주 는 귀엽게 한숨을 내쉬고는 키메라를 돌아보았다.
“물어볼 사람들에게 물어봐야지요. 그런데 왜 그걸 알고 싶어 하지요?”
키메라는 장엄한 태도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마법의 힘이 이토록 완벽한 존재를 지상에 출현하게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니, 왜냐하면 이 지상엔 더욱 많은 완벽한 존재가 필요함이라. 따라서 나 완벽한 키메라는 완벽한 짝을 얻 어 완벽한 키메라들을 더욱더 많이 만들 것이다. 짝 될 이의 성별을 결 정하기 위하여 나 완벽한 키메라는 자신의 성별을 알아야 할지니라.” 키메라의 설명이 끝나자 우리는 박수라도 쳐야 하는 것 아닌가 하 는 강박 관념을 느꼈다. 하지만 헐스루인 공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 며 말했다.
“당신 남자군요. 여자를 만들어달라고 하세요.”
공주는 너무 당연해서 강조할 필요도 못 느끼겠다는 듯이 말했고 그래서 키메라와 핸드레이크, 나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 중 가장 먼저 공주가 야기한 최면에서 빠져나온 건 나의 사부였다.
“자, 잠깐, 공주,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오?”
핸드레이크의 외침에 나와 키메라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공주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말하는 것 들어보면 알 수 있잖아요.”
“음? 저 친구의 정복욕 때문에? 세상을 자기 후손으로 가득 채우겠다는 야망 때문에?”
“자기 후손이 자신을 꼭 닮을 거라는 가엾은 믿음 때문에 남자가 틀림없어요.”
마법사와 그의 제자와 그들의 우발적 피조물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 정을 공유했다. 공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비록 천재의 고질병, 즉 책 두세 권을 쌓으면 된 다고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이 보았던 모든 책들 중 가장 적합한 두께 를 가진 책의 소유자를 찾아오는 희한함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헐스루인 공주는 천재임이 분명하다.
핸드레이크는 양쪽 관자놀이를 짚으며 말했다.
“공주, 자녀는 당연히 부모를 닮는 것 아니오?”
“물론 개가 고양이를 낳지야 않지요. 하지만 강아지가 자신과 똑같 이 근사한 수염을 가질 거라고 믿는다면 그건 수캐가 틀림없어요. 그리 고 자기 후손이 자신처럼 완벽할 것이라고 믿는 이 키메라도 틀림없 이 남자이실 테고.”
피조물과 창조자는 다시 곤혹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잠 시 방관자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헐스루인 공주는 나 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런데 빌려주시겠어요?”
“예? 아, 그러시죠. 그건 제 방에 있습니다. 가져다드리지요.”
“아뇨, 내가 찾을게요. 고마워요.”
그리고 헐스루인 공주는 연구실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뭔 가를 놓친 듯한 기분을 느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 만 완벽한 키메라는 우리들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인지 단번에 알아 차렸다.
“헐스루인 공주여, 잠시만!”
헐스루인 공주는 입구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키메라는 열정적으로 외쳤다.
“남자는 그렇다 치고, 그럼 여자는 무엇인가?”
“예?”
“공주는 내가 남자일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자를 구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창조자들을 도무지 신뢰할 수 없으니………….”
우리는 우리의 피조물에 의해 지성을 격하 당하고 있으면서도 한마 디도 할 수 없어서 슬펐다.
“공주에게 묻겠노라. 여자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공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쪽을 흘끔 돌아보았다.
“그건 남자가 맞춰야 할 문제인 것 같은데요?”
키메라와 핸드레이크는 공주의 시선을 따라 모두 나를 돌아보았다.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았던 나는 최대한 애매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고 당연하게도 그 표정은 키메라와 핸드레이크 모두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 그들은 황급히 입구 쪽을 돌아보았지만, 헐스루인 공주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이 왠지 버림받은 기분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키메라가 우르릉거리며 말했다.
“다행히 나의 성별이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여자를 만들라!”
핸드레이크는 조금 전 무시당한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하! 너의 창조자이지만 너에게 별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우리들은 여자가 뭔지 도통 모르겠다, 키메라.”
“헐스루인 공주는 남자가 여자를 알 거라고 말했다!”
“공주의 말에 의하면 너도 남자잖아!”
키메라는 침묵했다. 잠시 후 그(이제는 이렇게 불러도 될 것 같다)는 약
간 처량하게 말했다.
“그런데 여자란 뭐냐?”
핸드레이크는 천천히 의자를 당겨 앉았고 나는 빈 물통을 뒤집어 그 위에 걸터앉았다. 우리들의 동작을 바라보던 키메라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함께 고민해 보자고?”
나와 핸드레이크는 동시에 히죽 웃었고 그러자 키메라는 끙끙거리 며 바닥에 앉았다. 위대한 마법사와 천재적인 제자와 자연재해에 필적 할 만한 키메라가 더불어 고민하기엔 형편없이 어울리지 않는 문제였 지만, 분명 남학교 기숙사의 밤이나 외로운 청년들의 술자리에서나 어 울릴 법한 문제라는 점은 분명했지만, 태도만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 했다.
도대체 여자란 무엇인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은 취소해야 될 것 같다. 다시 생각해 보니 우 리들이 하고 있는 고민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모든 수컷 된 자의 고민인 것이다. 여자가 과연 무엇인지를 말하기 위해 애쓰다가 절망해 버린 철학자(상)는 몇 명이며 미쳐버린 마법사(송)는 또 몇 명이 더냐. 그리고 내가 알기론 아직까지 남자들 중에 그걸 제대로 정의해 낸 자는 없다. 어쨌든 저 신화시대 때부터 내려온 전설적인 질문 ‘저렇 게 여자 맘을 모를까?’가 마침내 해결되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 다. 오죽했으면 나의 사부, 그러니까 저 까무러칠 정도로 위대한 핸드레 이크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을까.
“요즘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바람둥이는 누구냐? 그 친구에게 물어 봐야겠다.”
“글쎄요. 바람둥이는 여자를 모르니까 계속 찾아 헤매는 거라고 생 각됩니다. 오히려 가장 모르는 것 아닐까요?”
“흐음,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알았다! 그럼 우리는 수도에서 가장 여자를 모르는 자를 찾으면 되겠구나!”
“그런 논리에는 찬성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굳이 그러고 싶으시다면 그런 자는 모두 셋이며 다 여기에 모여 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핸드레이크는 으르렁거렸지만 내 말에 동의했다. 우리 두 사람이 침 묵하자 키메라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 창조자들이여.”
우리들이 돌아보자 키메라는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
“헐스루인 공주는 후손이 자신을 닮을 거라고 믿는 존재가 남자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뒤집어볼 때, 후손이 자신과 다를 거라고 믿는 존 재가 여자이지 않을까?”
핸드레이크는 무릎을 딱 쳤다. 하지만 나름대로 헐스루인 공주를 안다고 믿는 나는 그 의견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좋은 발상이긴 한데, 안타깝게도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그 렇게 뒤집으면 되는 것이라면 공주님은 ‘뒤집어보라’고 말씀하셨을 겁
니다. ‘남자가 맞춰야 할 문제’라고 하시지 않고요.”
핸드레이크는 조금 전보다 더 사나운 얼굴로 말했다.
“당당히 반대 의사를 밝히는 자가 참된 친구라지만, 자네가 따박따 박 우리들의 가설을 박살 내는 꼴에는 왜 이다지도 정 붙이기 어려운 지 모르겠다, 솔로처. 그럼 네 생각엔 여자란 무엇이냐?”
“글쎄요. 확실한 것은 우리들이 그걸 맞출 수 있을 거라는 것뿐이군 요.”
“음? 어째서?”
“조금 전과 같은 논리로서, 만약 그게 우리들이 죽었다 깨도 알 수 없는 것이라면 공주님은……”
“그냥 말해 줬을 거란 말이지? 젠장, 퍽도 도움이 되는군.”
투덜거리긴 했지만, 핸드레이크는 위안을 얻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심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말을 끝맺지 못한 것은 핸드레이크가 끼어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죽었다 깨도 키메라를 또 만들 수 없다.
저 키메라는 실수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따라서 여자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하더라도 레이디 키메라의 제작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이 상하게 변질되어 있지만 이 토론의 원래 목적은 바로 시간을 끄는 것이 었다. 속으로 혀를 차며, 나는 즉각 여자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 워버린 다음 저 키메라를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 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격심한 고민에 빠져 있는 것과 상관없이 창조 자와 피조물은 신나게 토론을 계속했다.
여성: 수태, 출산, 탐미, 직관, 허영, 억척, 낭만, 냉혹, 우아, 약하다, 섬 세하다, 느리다, 아름답다, 자주 울고 자주 웃는다, 속마음과 반대로 행 동한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게 말한다. 남자가 하는 일을 단 한 마디로 무가치한 일로 만들 수 있다. 남자가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을 기 어코 하게 만드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으아아! 유피넬과 헬카네스에게 맹세코 그들은 우리 남자들을 미치게 만들려고 창조된 존재들임이 틀림없다!
…..저들의 저 가엾기까지 한 여성관은 나를 내 고민 속에 침잠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늙은 내 사부와 알려주기 전까지 는 자기가 남자라는 것도 모르던 저 키메라가 저렇게 죽이 맞아서 여 자를 두려워하는 모습은 내 눈에 신비하게까지 보였다. 혹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공포는 선험적인 것일까? 어쨌든 그들의 황당한 대화는 뜻밖에 도 재미있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필요 없어! 이봐, 키메라. 나처럼 독신으로 살라고!”
“그렇다! 창조자 핸드레이크여, 그대가 존경스럽다. 그 위대한 결정 과 실행력에 탄복한다!”
“독신은 구질구질하다느니 하는 말 다 엉터리야. 그건 틀림없이 여 자들이 하는 말일걸? 자기들이 가지고 놀 장난감이 하나 줄었다는 것 에 화가 나서 하는 말일 거라고!”
“옳다! 놀랍다! 참으로 그러하다!”
나는 그들의 여성관을 좀 개선할까 하는 마음을 재빨리 억눌렀다. 결코 건전한 방식이라곤 할 수 없지만 내 고민이 해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 키메라가 독신남이 되길 원한다면, 핸드레이크 와 나는 제작할 수도 없는 레이디 키메라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러나 개선했어야 했다. 옳지 못한 과정은 옳지 못한 결말만을 부 른다. 하지만 키메라가 당당하게 외칠 때까지도 나는 이 소동이 끝나고 있음에 안도하고 있었다.
“나의 목표를 바꾸리라!”
핸드레이크는 신나게 대답했다.
“그래! 독신으로 살아버리라고!”
“물론 나는 그럴 것이다. 그 전에 내가 해야 할 다른 목표가 있다.”
“어떤 목표인가?”
“창조자 핸드레이크여, 나의 사명을 뚜렷이 해준 그대의 일깨움에 감사한다. 나는 이제부터 세상의 모든 여성을 제거하겠다! 마지막 여 신, 마지막 여자, 마지막 암컷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멈추지 않으리라!”
매우 애처로운 침묵이 연구실을 가득 채웠다.
백과사전에 필적할 만한 나의 사부의 실수 목록에서도 이번의 실수 는 꽤 여러 쪽을 차지할 수 있는 거대한 실수일 것이다. 저 키메라의 선 언이 사실로 이루어진다면 ‘그저 봄 대청소를 했을 뿐’이라는 변명만 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변명할 말이 있기나 할까? 끔찍하기까지 한 적막 속에서 나의 사부 역시 그의 실수를 깨닫 는 듯했다. 핸드레이크는 비명을 질렀다.
“그건 안 돼!”
“어째서 안 된다는 것인가?”
“그건 살인이야!”
“아니다. 이것은 전쟁이다. 남성과 여성의 전쟁! 창조자들이여, 이 위대한 최후의 전쟁에 동참하라!”
나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야, 이 멍청한 자식아! 오른손이 왼손과 싸운다더냐! 왼발이 오른 발과 전쟁하는 거 봤냐! 여성과 남성은 하나야! 그 둘이 서로 싸운다 는 것은, 어, 뭐 싸울 수야 있지만, 실제로 허구한 날 서로를 오해하며 싸우지만, 서로를 전멸시키기 위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말도 안 돼!” 키메라는 내 강경한 태도에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창조자 솔로처, 그대는 오랫동안 배워 익힌 관습과 굳어진 타성 때 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대에게 동참을 부 탁하는 것은 과도한 요구일 것 같군. 그대를 납득시키기 위해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만, 나는 결과로 보여주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키메라는 몸을 돌렸다. 물론 다른 생명체들이 취하는 그런 방식은 아니었다. 뒤쪽을 향하도록 몸이 재배치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 합할 것 같다. 어쨌든 우리들에게서 몸을 돌린 것은 확실했다.
핸드레이크와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사부님, 저를 마법사로 인정하시겠습니까?”
“읍읍읍읍읍!”
“아, 인정하신다고요? 감사합니다.”
“으음!”
“뭘요. 모두 스승님께서 잘 이끌어주신 덕분입니다.”
“으읍!”
모든 이들이 알고 있듯이 성공의 비결은 기회의 포착에 있다. 나는 사부의 입이 틀어막혀 있는 상황을 십분 즐기기로 결심했고, 그런 나 의 결정은 핸드레이크를 반미치광이로 만들었다. 하지만 키메라의 가 슴 위쪽에 거미줄로 결박당해 있는 핸드레이크는 나를 제지할 어떤 수 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흡혈초 넝쿨로 키메라의 세 번째 다리 에 꽁꽁 묶여 있는 나 또한 쾌적한 상태라고 말하긴 어려웠지만
우리들의 돌격에 대한 키메라의 첫 번째 대응은 놀랍게도 굵은 거미 줄을 쏘아대는 것이었다. 저 우발적 창조물의 형태나 행동 양식에 대해 어떤 종류의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공격을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역사가를 열광시키고 음유시인들을 환호하게 할 온갖 재난을 구사할 수 있는 핸드레이크지만, 거미줄로 입이 틀어막히자 어떤 주문도 사용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사부의 모습을 본 나는 황급히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 만 나 또한 주문을 욀 수는 없었는데, 어느새 뒤로 돌아온 흡혈초가 내 엉덩이를 콱 깨물었기 때문이다. 내 주문은 대단히 그로테스크한 비명으로 중단되었고 키메라는 엉덩이를 움켜쥔 채 팔짝팔짝 뛰는 나 를 간단히 억류했다. 핸드레이크와 달리 키메라는 내 입을 자유롭게 내 버려 두었지만, 주문 비슷한 것을 욀 때마다 엉덩이 쪽으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 통증이 엄습하는 상황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부를 격분시키는 장난에 심취해 있는 까닭은 사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곧 사부를 가엾게 여기게 되었고, 그래서 만약 입이 자유로웠다면 사부가 반드시 했을 말을 대신 꺼냈다.
“야, 이…….”
박애주의자를 살인마로 만들고도 남을 폭언.
“….같은 녀석아! 우리를 이렇게 묶어놓고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냐!”
핸드레이크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한 것을 보며 나는 그의 제자인 자신을 동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키메라는 내 욕설을 가볍게 무시 했다.
“그대들에게 직접 보여주겠다, 창조자들이여, 그대들은 이 위대한 최후의 전쟁, 모든 전쟁들의 최종 목적인 전쟁의 관찰자가 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남자든 여자든 둘 중 하나가 없어지면 세상은 상당히 한적해지고 말 거라는 것을 추측하지 못하냐? 더 이상 의 자손이 없단 말이다! 멸망이라고!”
“안심하라, 창조자 솔로처여, 그대들은 여자 없이 나를 창조했다. 내 과업이 끝나고 나서 그대들의 재주를 이어받을 키메라를 제작하라.”
나는 키메라의 창조가 저주스러운 실수였을 뿐 절대로 재현 가능한 기술은 아니라고 외치려 했지만, 그 순간 키메라가 몸을 움직였기에 말 을 꺼낼 수 없다. 키메라는 움직여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다리 몇 개 를 더 만들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것이 만행인 까닭은, 다리들 중 몇 개는 도무지 이동에 이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만들었냐고 묻 고 싶어지는 그 다리들 중엔 불행히도 내가 묶여 있던 세 번째 다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묶여 있던 다리는 땅을 딛는 대신 허공에서 제 멋대로 움직였고 나는 위액이 목구멍으로 쇄도하는 것을 느꼈다. 구토 를 억누를 수 있는 순간순간마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내가 말한 내용 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않지만 무조건 이 키메라를 때려 부숴라, 매달 려 있는 인질들은 신경 쓰지 말고 어쩌고 하는 꽤 감동적인 내용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평안이 찾아들었다. 나는 내가 기절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기절했다면 저 목소리가 들려올 리가 없다.
“솔로처? 사탕 먹겠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꽤 바빠 보이는군요?”
내 시야 속의 세상은 아직까지도 빙글빙글 돌고 있었지만 나는 그 회전 속에서 가까스로 헐스루인 공주의 모습을 포착했다. 공주는 왼손으로 아마도 나의 협조하에 취득한 전리품이 분명한 유리병을 가슴에 안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뭐라고 더 말하려 했지만 내가 먼저 외쳤다.
“공주님! 달아나세요!”
“왜?”
“여자니까!”
나로선 미칠 지경이었지만 공주는 달아나는 대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솔로처, 방금 말한 내용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것은 아니죠?”
“이 키메라가 여자를 다 죽이기로 결심했단 말입니다!”
“아아. 그럼 설득력 있어요.”
저 위쪽에 묶여 있던 내 사부는 목이 졸린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었 다. 그때 키메라가 선심 쓰듯이 말했다.
“헐스루인 공주, 나의 성별을 일깨워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그대는 해치지 않겠다. 그리고 원한다면 내 창조자들과 더불어 나의 전쟁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겨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물론 지극히 근시안적인 안심이긴 했 지만 헐스루인 공주는 고개를 갸웃하며 키메라에게 말했다.
“전쟁? 무슨 전쟁이지요?”
“남성과 여성의 전쟁이다. 나는 지상의 모든 여성을 소멸시키겠노라. 마지막 여신, 마지막 여자, 마지막 암컷까지 모두 제거하겠다!”
이 세계의 시한부 사망 판정에 대해 헐스루인 공주는 예상키 어려운 반응을 보였다.
“케이크가 없어지겠군요.”
“뭐?”
나와 키메라가 동시에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핸드레이크 또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 내용은 대충 우리와 같 으리라 짐작되는 소리를 내었다. 헐스루인 공주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암소가 없으면 우유도 없고, 암탉이 없으면 달걀도 없으니까.”
“그, 그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우유와 달걀이 꼭 필요하다면 나의 창조자들이 그것을 생산할 키메라를 만들 것이다. 아니, 케이크를 생산하는 키메라를 만드는 것이 더 낫겠군.”
나는 이 감당키 어려운 신뢰감에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 끔찍하게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키메라는 천천히 화분을 숙여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뜻인가?”
“우린 그저 봄 대청소를 했을 뿐이야. 내 사부가 사용한 마법은 온 갖 잡동사니가 다 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솥 안의 용적을 부풀려 놓은 것뿐이라고. 그것도 대단하긴 하지만 우린 결코 너를 만들려고 했 던 건 아니야! 넌 그냥 만들어진 것이고 우리는 그게 어떻게 이루어진 건지 몰라!”
핸드레이크는 아마도 알고 있었냐?’는 말을 한 듯하다. 내 귀에 들린 건 “우으읍?”이라는 소리뿐이었지만.
출생의 비밀을 들은 키메라는 잠시 침묵한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다리에 묶여 있던 나는 그가 경련하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었다. 곧 키메라는 노성을 외쳤다.
“아니다!”
“맞아!”
“아니다, 아니다! 그대들의 말은 거짓이다! 나는 여성을 전멸시키기 위해 태어났다. 그대 창조자들이 아무리 부인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결 단코 진실이다! 나를 기만하지 말라!”
“절대로 사실….., 흐어어억!”
흡혈초가 다시 내 엉덩이를 무참하게 깨물었다. 누구 이 키메라에게 토론 중 상대방의 둔부를 공격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라는 것을 가르쳐줄 사람 좀 없나.
“그런 조잡한 허무주의로 나를 기만하지 말라! 나는 위대한 사명을 띠고 태어난 존재다! 아무 의미 없이 태어나는 존재라는 것은 없다!”
키메라는 연구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목소리로 외쳤다. 헐스루 인 공주는 머리를 내두르며 말했다.
“아, 좋아요. 아, 위대한 사명? 그런데 그 사명은?”
“말하지 않았는가!”
“여성을 다 처치하겠다?”
“그렇다!”
헐스루인 공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른손을 병 안으로 집어넣어 사탕 하나를 꺼내었다. 그러곤 그것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그 무관심한 동작은 놀랍게도 우리의 주의를 잡고 놓아주지 않 았다. 키메라마저도 약간 당혹한 어조로 말했다.
“뭐 더 말할 것은 없는가? 어, 나의 전쟁을 관찰하겠는가?”
헐스루인 공주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키메라를 비난하듯 바라보았 다. 입속에 무엇인가가 있는 상태에서 말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눈 빛이었다. 나와 핸드레이크와 키메라는 왠지 모를 초조감을 느끼며 공 주가 사탕을 다 녹여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상당히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공주는 마침내 사탕을 다 녹였 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공주의 오른손이 다시 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키메라는 비명을 질 렀다.
“그만해! 더 할 말이 없다면 난 여성들을 처치하러 가겠다!”
공주는 엄지와 검지로 쥐고 있던 사탕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곤 그것을 도로 병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키메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가기 전에 내 말 듣고 가요.”
“무슨 말이지?”
“너 계집애야”
키메라는 굉음을 내며 무너져내렸다.
내가 묶여 있던 다리가 갑자기 그 몸체와 분리되며 옆으로 쓰러졌다. 하필이면 혹사당하던 엉덩이부터 바닥에 쓰러지는 바람에 나는 꽥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눈을 깜빡여 눈물을 짜낸 다음 주위를 둘러보자 나보다 더 불쌍한 지경에 빠져 있는 사부를 볼 수 있었다. 키 메라의 가슴 쪽에 묶여 있던 핸드레이크는 약 7큐빗 높이에서 낡은 책 장의 3분의 1과 구부러진 삼각대의 2분의 1과 함께 동반 낙하했던 것 이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의 머리 위로 키메라의 몸에서 부서져나간 파 편들이 정체 모를 액체들과 함께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부와 나 를 묶고 있던 거미줄과 넝쿨은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묶인 채 온몸으로 키메라의 파편을 맞았다. 이 가공할 진눈깨비가 그치고 나자 우린 구겨지고 후줄근해지고 푹 젖은 데다가 냄새까지 나는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헐스루인 공주는 코를 감싸 쥐었다.
“휴, 냄새가 지독해요.”
“공주님, 어떻게? 아니, 어, 일단 감사를 표시해야겠군요. 감사합니다.”
헐스루인 공주는 생긋 웃었다. 나는 엉덩이 쪽이 되도록 바닥에 닿 지 않도록 몸을 비틀며 질문했다.
“그런데 아까는 남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조금 전엔 여자라고요?”
“그렇게 말했지요.”
“그럼 저 불쌍한 친구는……………”
나는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키메라의 파편은 광범 위한 범위에 걸쳐 퍼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충 아무 곳이나 바라본 다음에 말을 이었다.
“남자인 겁니까, 여자인 겁니까?”
헐스루인 공주는 놀란 얼굴이었다.
“몰라요, 솔로처?”
“모르겠는데요.”
“그럼 수수께끼로 내볼까요?”
“예? 자, 잠깐! 사탕 병에 손 뻗지 마세요!”
공주는 어깨를 으쓱이며 병에서 손을 도로 꺼내었다. 그러곤 갑자기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문제. 걸어 다니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닌 다리가 달려 있고 계집애 란 말을 들을 바에는 자살해 버리는 것이 뭐죠?”
나는 공주의 암시를 깨닫고는 얼굴을 확 붉혔다. 공주는 자신의 말 이 너무 야하다는 듯이 몸을 흔들며 말했다.
“좀 고상하게 질문할까요? 자신의 후손이 자신의 기준에 딱 맞아야 한다고 믿고, 여자가 자신의 기준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 된다고 믿고, 자신의 출생이 자신의 기준에 딱 맞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이유에서야 한다고 믿고,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볼 때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을 발전시키기보다 자기 기준에 맞을 때까지 상대방을 파괴 하는 게 뭐죠?”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공주를 바라보았다. 공주는 작게 낄낄거리더 니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녀가 넝쿨을 풀어주려는 줄 알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공주는 그러는 대신 사탕 병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 다. 그러곤 사탕 하나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달콤해요.”
나는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먹었다. 공주는 기특하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더니 곧 몸을 돌렸다. 나는 그녀의 몸짓에서 그녀가 그대로 밖으로 걸어 나가려는 것을 깨달았다. 사탕을 통째로 삼키느라 숨이 막 힐 뻔했지만, 가까스로 나는 외쳤다.
“고, 공주님! 우릴 풀어주셔야지요!”
“왑!”
잡동사니들 아래에 깔려 있던 핸드레이크도 나와 같은 내용의 말로 짐작되는 소리를 꽥꽥 내질렀다. 멈춰선 공주는 우리를 살짝 돌아보고 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상을 파멸시킬 뻔한 두 분에게 그 정도 벌은 있어야지요.”
“예? 하, 하지만……”
“그리고 헤트로이처의 책을 빌려준 솔로처 그대는 특히 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 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공주는 이미 사라져버린 후였다. 나는 어이 없는 표정으로 나의 사부를 돌아보았다.
“사부님, 도움을 준 이유로 벌을 받아야 한다니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러나 사부는 퍽 한심하다는 듯한, 자세히 보니 비웃음도 좀 담겨 있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졌고 그런 나를 보던 사부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곧 사부는 자신의 옆 에 쓰러져 있는 책장을 발견하곤 턱으로 그것을 가리켜 보였다.
책장 책? 두꺼운 책. 얇은 책 두세 권…………….
똑똑한 헐스루인 공주가 책 두세 권을 쌓으면 된다는 생각을 못 할리가 없다.
나는 ‘아아’ 하는 소리를 냈고 핸드레이크는 그런 나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 동감했다. 하지만 사부의 웃음에 동감하 는 것과 별개로 그 괴이한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했 다. 그래서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진지하게 말했다.
“사부님, 아까 저를 마법사라고 인정하셨지요?”
“꾸으으읍!”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