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8권 9화 – 사형이 보고 싶구나
사형이 보고 싶구나
개봉 주위에는 수많은 무림의 문파가 난립해 있었다. 1백여 명이 넘는 식객을 갖춘 제법 규모가 큰 문파들의 수만 해도 1백여 개에 이른다. 게다가 3류 떨거지들이 세운 작은 문파들까지 모두 합하여 그 수를 알려 달라고 묻는다면, 개봉을 본거지로 삼고 있는 개방도들마저도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하루아침 에 망하는 문파도 많았고, 또 그만큼 새로 세워지는 문파도 많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알다시피 거대 문파 개방의 본거지는 개봉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개방이 지닌 특수성 때문이었다. 거지 들의 문파인 개방은 다른 여타 문파와 달리 주변의 상권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재물이 많은 개방은 더 이상 거지들의 문파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설혹 어떤 일을 해 준 대가로 많은 재물을 획득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개방에서는 그것을 빈민구제 같은 좋은 일에 쾌척해 버렸다. 그렇기에 힘은 미약한 개방이 정파의 한 기둥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방 외의 다른 문파들은 모두들 하나라도 더 많은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오늘도 피 튀기는 세력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것은 사파 계열의 제법 큰 방 파인 묵룡문(墨龍門)도 예외일 수 없었다.
쾅!
문을 부숴 버릴 듯 박차고 부문주가 뛰어 들어오자, 용이 그려진 검은 장포를 입고 있던 매섭게 생긴 사내는 깜짝 놀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흑사파 놈들의 침입이냐?”
사내는 오늘도 어딘가에서 싸움을 걸어온 것으로 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부문주의 반응은 평상시와 매우 틀렸다. 부문주는 도대체 뭘 봤는지 겁에 질려 반쯤 정신 이 나가 있었다.
“무, 문주님! 무, 무서운 고수가 침입했습니다.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빨리!”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무서운 고수라니? 본문의 고수들은 모두 뭐 하고 있다는 말이냐?”
“그, 그, 그게…….”
문주는 답답한지 커다란 손바닥을 들어 부문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이봐, 정신 좀 차리고 제대로 보고를 해 봐!”
“문주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도망치십쇼, 사갈대(蛇揭隊)조차 반각을 버티지 못하고…, 헉!”
부문주가 방금 자신이 들어왔던 문 쪽을 보고 경악성을 지르자, 문주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괴이한 몰골의 중년 사내가 흉악하기 그지없는 눈빛을 뿜어내며 서 있었다. 이마는 두툼한 머리띠로 휘휘 휘감았고, 입 또한 목도리를 이용해서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둘로도 가려지지 않는 부분으로 어디서 쥐어 터 졌는지 엉망진창인 몰골이 조금이지만 드러나 있었다.
중년 사내의 허리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값비싸 보이는 검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중년 사내는 구태여 이런 싸움에 자신의 애검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는 듯 묵 직해 보이는 몽둥이를 오른손에 쥐고 있었다. 시뻘건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중년 사내는 차가운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말씀이야.”
문주라 불린 사내는 얼른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묻고 있는 자가 자신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라는 것을 말이다. 이런 바닥에서 오래 살아 남으려면 무공보다 상대의 실력을 정확히 가늠할 수 있는 눈치가 필요한 법이다. 당연히 문주의 태도는 공손할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거짓말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슬그머니 들어 올린 피에 젖은 몽둥이가 그 뒤에 진행될 순서가 뭔지 그들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비록 묵향에게 손도 못 써 보고 무참하게 깨졌다고는 하지만, 냉파천의 무공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몽둥이 하나만으로 개봉 인근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사파 여덟 곳을 박살내며 정보를 끌어 모아, 새로이 건설 중인 마교 하남분타의 위치를 파악해냈다. 마교에서 묵룡문의 세력을 이용해 하남분타를 건설 중이었기에 묵룡문 문 주를 족치는 것만으로 그 귀중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곧장 하남분타로 쳐들어갔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황당한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신들이 올 줄 알기라도 한 듯 하남분타의 분타주가 친절하게 그 먹잇감의 위치를 술술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닌가.
“아, 안 그래도 오시면 얼른 말씀드리라고 하시더군요. 핫핫핫!”
냉파천으로서는 분타주의 말에 의심을 가질 것이 당연했다. 비록 하급 분타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교의 분타가 아닌가. 당연히 먹잇감의 위치를 불지 않기 위해 반 항을 할 테고, 자신은 마음껏 그동안 쌓인 울분을 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미소 띤 얼굴로 사근사근하게 말해 주다 니……..
이건 분명 뭔가 음모가 있다고 판단한 냉파천은 더욱 힘 있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제야 몇몇 마졸이 반항했지만, 냉파천이 휘두른 몽둥이의 얼룩 색깔을 좀 더 붉게 만드는 데 일조했을 뿐이다. 만약 처음부터 적이라 생각하고 힘을 모아 반항을 했다면 그래도 좀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아직 분타의 틀이 갖춰지지 않은 때였기에 임시 분타주도 무공보다는 건설과 토목 쪽으로 뛰어난 인물이 선정되어 반항을 한다 해도 무리는 있었지만 말이 다.
지엄하신 교주의 명을 받들어 최소한의 방비도 하지 않고 손님을 맞아들이며 위치까지 말해 주었거늘 몽둥이찜질에 머리통이 터진 분타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그로서는 묵향이 말한 자가 이자가 아닌 아르티어스였다는 걸 알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참회동은 화산의 중턱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동굴이었다. 문규를 어지럽힌 제자가 있다면 이곳에서 며칠 혹은 몇 달 홀로 참회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곤 했다. 물론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른 문도는 거의 없었기에 참회동은 언제나 비어 있다시피 했다.
지금 참회동안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껏 이곳으로 참회하러 온 문도들이 그랬듯 동굴 밖으로 슬그머니 나와 검법 수련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 다. 그는 마냥 동굴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참회동은 얕은 동굴이었기에 낮이라면 조금 어둡기는 해도 앞을 보는 데 크게 지장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약한 빛에 의지해 현천검제는 손목의 힘줄이 잘려 쓸모 없이 덜렁거리는 살덩어리로 변한 자신의 손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쿨럭! 이것이 내 손이란 말인가?”
게다가 발은 또 어떤가. 발목의 힘줄을 잘라 버려 아예 걷지도 못하게 만들어 놨다.
“아아, 너무나도 허무하구나. 소위 명문정파라고 말하는 것들이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이렇게 악독할 수가 있단 말인가. 설혹 철천지원수라도 이렇게 가혹한 형 벌을 내리지는 못할 텐데 말이야. 후~, 그때 그냥 도망을 쳤으면…….”
거기까지 말한 현천검제는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야, 화산의 장문인이었던 내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그들이 악독하게 굴었다손 치더라도, 그건 몇몇 짐승 같은 놈들이 한 짓이지 화산 파가 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갑자기 기침이 터져 나오는지 한참 동안 현천검제는 격렬하게 기침을 해 댔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손에는 시커멓게 죽은피가 한 움큼이나 뱉어져 있었다. 단전이 파괴될 때 입은 내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허어,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원망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구나. 그리고 이 꼴을 하고 더 이상 살면 무엇 하리. 차라리 자결을 하는 것이 사부님들을 욕보이지 않는 길이 되지 않겠는가.”
그때 시커먼 핏물 사이로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패기가 넘치는 사내. 그리 잘생긴 얼굴이 아님에도 그와 함께 있으면 진정한 사내란 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던 사내. 어느덧 현천검제의 두 눈가에는 축축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현천검제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허허헛, 그러고 보니 사형이 보고 싶구나. 서로가 가는 길이 달랐음에도 그는 나를 대할 때 언제나 진심이었지.”
물론이었다. 현천검제가 생각해도 묵향 사형의 행동에는 가식이 없었다. 사실 그처럼 엄청난 무공을 지니고 있고, 또 막강한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다면 굳이 남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만약 마음에 안 드는 인물이 있다면 그냥 목을 따 버리든지, 그것도 귀찮으면 안 보면 그만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 삶 전체가 허무한 것은 아니로군. 훌륭하신 두 분의 사부님을 만날 수 있었고, 또 멋진 사형이 있으니 말이야.”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회색 장포를 입은 중년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굵은 쇠사슬에 묶여 있는 현천검제의 모습을 한동안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바로 공천 장로였다. 공천 장로는 자신이 어제 가져다 놓은 밥덩이의 표면이 바짝 말라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자 빈정거리듯 입을 열었다.
“흥! 죽고 싶은 모양이지?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내가 도와줄 수 있겠지만 대사형께서 한사코 반대하시니 말이야. 제길, 네놈의 목을 내 손으로 직접 잘라 버리고 싶 었는데 말이지. 뭐, 좋아. 네놈이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한껏 비비 꼬여 있는 상대의 말투에 울컥한 현천검제는 분노를 터뜨렸다.
“공천 장로! 노부가 그대에게 섭섭하게 대한 적이 없었거늘, 나한테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뭣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수없이 많은 동문들 앞에서 나를 망신 준 것을 네놈은 벌써 잊었단 말이냐?”
“노부가 언제 그대를 망신 줬다는 말이냐?”
“크흐흐흣, 전대 장문인의 직계 제자도 아닌 놈이 직계 제자를 능가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되고도 남음이 있다. 사부님의 제자들 중에서 노부가 가장 실력이 뛰어났어. 대사형이 있었지만, 무공만은 내가 제일 나았기에 장문인직도 꿈이 아니었지. 그런데 버러지 같은 네놈이…, 네놈이 내 꿈을 모두 망쳐놓았단 말 이닷!”
공천 장로는 아직도 그때가 생각나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노기에 가득 찬 어조로 말했다.
“사부님의 생신 때 있었던 검술 시합에서 당한 치욕적인 패배를 내 어찌 잊을 수가 있단 말이냐. 네놈의 실력이 그 정도쯤 되는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최선을 다했 을 거다. 하지만 네놈은 내가 너를 봐준다고 살살 공격하는 틈을 이용해서 급습을 가해 왔지. 결과는 강한 상대를 깔보다가 오히려 손도 못 써 보고 패배한 것으로 사부님께선 이해하셨지. 젠장, 그때부터 나는 사부님의 눈 밖에 나 버렸단 말이다. 그게 다 너 때문이야. 알아?”
“승패(勝敗)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 했느니, 고작 비무에 한 번 패했다고 노부에게 악심을 품었다는 말인가?”
현천검제의 말에 공천은 입에 거품을 물 듯 악을 써 댔다.
“고작 그거라고? 네놈은 나를 어쩌다가 한 번 패했다고 상대를 질투하는 그런 한심한 놈인 줄 아느냐? 겨우 한두 번의 패배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상대보다 더 욱 열심히 검을 갈고닦으면 언젠가는 상대를 초월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어. 왜냐구? 그건 네놈이 더 잘 알지 않느냐. 같은 조건이라면 내가 말도 안 한다. 너만 어디서 엄청난 검술을 배웠지 않느냐. 나도 그 검술을 배웠다면 네놈한테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또, 내가 장문인이 되었다 면 너보다도 더 화산파를 잘 이끌어 나갈 능력도 있었고 말이야. 그런데 왜 네놈이 그 모든 것을 다 차지했느냔 말이다.”
한동안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씩씩거리던 공천 장로는 이윽고 냉정을 회복했는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좋다, 앞으로 네놈에게는 물만 주겠다. 밥을 얻어먹고 싶다면 네가 배운 그 검술을 나한테 가르쳐 줘야 할 거다. 크흐흐흣, 만약 그걸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물만 처먹다가 뒈지게 될 테니 말이야.”
공천 장로는 물병을 새것으로 갈아 준 다음, 밥덩이는 현천검제에게 주지 않고 약이라도 올리듯 천천히 발로 짓이겼다.
두 덩이의 밥을 모두 짓이겨 버린 공천 장로는 한껏 비웃음을 날리며 현천검제를 노려보더니 돌아가 버렸다.
공천장로가 돌아간 후, 현천검제는 천천히 기어서 지금까지 먹지 않아 바짝 말라비틀어진 밥덩이 네 개가 놓여 있는 곳으로 갔다. 발목의 힘줄이 잘려나간 그의 몸으로는 도저히 걸어서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냐,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누가 오래 버티는지 두고 보자.”
현천검제는 밥덩이 하나를 쓸모없어진 손으로 간신히 집어 올린 후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