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8권 14화 – 먼지 나게 한번 맞아 볼래?
먼지 나게 한번 맞아 볼래?
염왕대가 마교를 떠나 화산으로 이동할 때는 대파산맥을 빙 돌면서 야음을 틈타 적의 눈을 속여 가며 전진했었다. 하지만 일단 임무를 끝마치고 귀환하는 마당에 그 짓을 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꾸물거리다가 무림맹의 무사들에게 퇴로를 차단당하면 큰 곤욕을 치를 수도 있었다. 천진악이 거느리고 온 것은 겨우 5개 대뿐이 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수하들을 독려하여 진령산맥을 타고 최대한 빨리 귀환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천진악과 그가 거느리는 염왕대 고수들은 마교에 복귀하면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미 비마대를 통해 그들이 이룩한 전과가 마교 내에 널리 알려진 덕분이었 다.
“염왕대주 천진악 이하 염왕대 5개 대, 임무를 무사히 끝마치고 본교에 귀환했습니다.”
천진악의 보고를 받은 수석장로 수라혈신(修羅血神) 북궁(宮)의 안색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인명 피해는 없었는가?”
“일곱이 사망했고, 수십 명이 중경상을 당하기는 했지만 화산파라는 대적을 무너뜨린 것을 감안한다면 피해라고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크하하핫! 그것 참 통쾌한 소식이로군.”
여기까지 기분 좋게 말한 수석장로의 어조는 갑자기 이빨 갈리는 그것으로 급변했다. 아무래도 천진악이 뭔가 그의 기분을 나쁘게 만든 행동을 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큰 작전을 어떻게 수석장로인 나도 모르게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대가 노부를 상관으로 생각했다면, 떠나기 전에 단 한마디 언질이라도 줬어 야 하는 것 아닌가?”
북궁뇌가 언성을 높이며 질책할 만도 했다. 더군다나 그는 수석장로면서 내총관까지 겸하고 있지 않은가. 각 무력 단체를 총괄하는 장로들의 권한이 커지면서 내 총관의 권력이 축소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목상은 내총관이 총책임을 지게 되어 있었다.
북궁뇌의 눈치를 보면서 천진악은 난처하다는 듯 대꾸했다.
“아무래도 따지셔야 할 대상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수석장로님. 저는 화산 인근에 집결하라는 명령만 받고 교를 나섰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해 보니 화 산 인근에 비마대가 쫙 깔려서 화산파의 내부 정보를 전해 주더군요. 그것으로 봐서 아마도 군사나 비마대주께서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지 않겠습니까?” 천진악은 슬며시 군사에게로 팔밀이를 했고, 덕분에 수석장로의 노화를 한꺼번에 감당해야 할 입장에 놓인 군사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수석장로는 분노 어린 시선을 군사에게로 돌렸다.
“사실이오, 군사?”
군사는 수석장로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수석장로님. 그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어찌 수석장로님께 보고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염왕대를 보내라는 교주님의 명령을 받고, 비마대도 필요하 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비마대주께 협조 요청을 했을 뿐, 저도 설마 교주님께서 화산파를 멸문시키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수석장로의 시선을 받은 비마대주 홍진이 다급히 말했다.
“교주님께서는 염왕대와 합류한 이후에 화산을 치시겠다는 결심을 하셨습니다. 수하들에게 그 보고를 받았을 때는 이미 일이 끝난 후였습니다.”
화산파와 마교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가로막혀 있었다. 그렇기에 화산이 멸문당한 이후에야 교주가 화산을 치려고 한다는 보고가 홍진에게 도착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질책할 사람도 없었기에 수석장로는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젠장! 그렇다면 그 작전은 완전히 교주님께서 즉흥적으로 시행하신 작전이었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을 향한 노화는 거두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구먼. 이보게들, 다음부터는 뭔가 조그마한 낌새만 있어도 노부에게 연락 좀 해 주게. 알겠는가?”
“옛,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젠장, 그 망할 화산파가 끝장나는 통쾌한 순간에, 아무것도 모르고 본교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니……. 이런 빌어먹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수석장로님. 아마도 곧 그럴 기회가 오지 않겠습니까?”
비마대주 홍진의 말에 수석장로의 입은 한껏 벌어졌다.
“오오, 비마대주, 뭔가 새로운 정보가 있소?”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습니다. 하지만 무림맹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지 않습니까? 뭔가 복수를 하기 위해 움직이겠지요.”
“크흐흐흣, 그 버러지 같은 것들이 움직여 봤자지.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무림맹을 끝장내 버릴 것이야. 자, 모두들 축배를 들러 가세나. 노부가 좋은 술을 잔뜩 준 비해 놓으라고 일렀다네.”
그날 수석장로는 모든 장로와 통쾌하게 술을 마셨다. 오랜 세월 마교와 다툼을 벌여 왔던 숙적들 중의 하나가 사라졌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는가. 그는 다음에
는 꼭 자신이 앞장서서 정파 놈들을 쓸어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술잔을 들이켰다.
마교의 장로들은 거의 대부분 무림맹과의 일전을 원하고 있었다. 마교는 그 지닌바 힘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도 오랜 세월 숨죽이고 살아왔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 신들이 은퇴하기 전에 무림맹이 끝장나든지 아니면 마교가 멸망하든지 둘 중 하나의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림맹의 멸망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장로들의 움직임과는 달리 갑작스런 무림맹과의 충돌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화산파가 멸문당했다는 보고를 들은 천리독행은 너무나도 놀라 하마터면 숨이 끊어지는 줄 알았다. 중상을 당하고 몸져누워 있던 그에게 그 소식은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의원이 달려와서 침을 놓고, 환약을 먹이는 등 치료를 행한 후에야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화산파가 멸문당했다고 했느냐?”
“예, 부교주님.”
‘이런 망할! 도대체 교주는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무턱대고 전면전으로 나간다면 이쪽도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할 텐데…..
하지만 그가 수하에게 한 말은 생각과는 다른 말이었다. 왜냐하면 마교는 강자지존의 세계. 결코 수하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으으윽, 그래 교내의 반응은 어떻더냐?”
“지금 교내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입니다. 본교의 숙적들 중의 하나인 화산파를 멸문시켰으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젠장! 아냐, 상처가 쑤셔서 그러니까 네가 상관할 바 없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래, 장로들의 반응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하에게 천리독행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사실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상처의 통증 따위가 아니었 다. 마교의 미래가 한 미치광이 때문에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수석장로께서는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모든 장로를 모아 놓고 지금 거나하게 주연을 베푸시고 계십니다.”
“이런 빌어먹을! 장로들까지도 지금 본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른단 말인가? 그래, 초류빈! 그놈이라면 그래도 현실을 직시하고 있지 않을까? 아니야, 그놈 은 그런 것에는 처음부터 아무런 관심도 없는 놈이었지. 맞아! 흑풍대주라면 어느 정도 말이 통할지도 몰라. 본교의 미래에 대해 꽤나 깊게 생각했던 놈이니 말이 야.”
“흑풍대주에게 주연이 끝난 후 노부가 좀 보자고 한다고 전하거라.”
“옛.”
주연이 끝나고 찾아온 관지는 침상에 누워 있는 천리독행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속하를 찾으셨습니까, 부교주님?”
“노부가 몸이 불편하여 이 상태로 얘기하는 것을 이해하게.”
천리독행은 잠시 관지의 안색을 살피더니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자네는 이번 승리를 어떻게 보는가? 자네 또한 지존의 자리에 근접했던 사람, 결코 생각이 얕을 거라 여기지 않기에 묻는 것이네.”
관지로서는 상대가 이런 말을 꺼내는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간단하게 대꾸했다.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그 말에 천리독행은 씁쓸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허헛, 지금까지 노부와 자네는 서로 대립하며 다른 길을 걸어왔으니, 자네가 노부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겠지. 하지만 노부는 이것만은 자네에게 말하고 싶었 다네. 무림맹은 결코 약한 집단이 아니야. 서서히 압박하며 무림맹을 뒤에서 떠받치는 군소방파들을 하나씩 해체시켰어야 했어. 그러지 않은 상태에서 화산파를 치 는 것은 적을 더욱 단결시킬 뿐이야. 노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네. 이런 식으로 정면충돌을 일으켜 봐야 본교에게 유리할 것은 하나도 없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교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교도로서 해야 할 최선의 본분이라고 여기고 있습..
관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리독행이 분통이 터진다는 듯 외쳤다.
“이런 제기랄! 자네만은 이 노부의 마음을 알아줄 것으로 생각했거늘……. 가 보게! 아무래도 노부가 자네를 너무 높게 평가했었던 것 같군.”
뚜벅뚜벅 걸어 나가던 관지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슬쩍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
“물론 부교주님의 우려도 이해가 갑니다. 속하도 순간적이나마 그런 생각을 했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분을 부정한다면 지금까지 그분을 믿고 기 다린 그 오랜 시간들은 뭐가 되겠습니까? 한 번 믿었으니 끝까지 믿어 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속하가 너무 주제넘은 말씀을 올렸군요. 그럼 이 만 물러가겠습니다.”
관지가 물러가고 난 후 천리독행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한 번 믿었으니 끝까지 믿어 보겠다? 허어, 어쩌면 그게 최선의 선택인지도 모르겠군.”
묵향은 염왕대가 마교에 귀환한 후, 정확히 4일 후에 도착했다. 그의 귀환은 매우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왜 묵향이 남의 집에 들어가는 도둑놈처럼 살금살금 돌아 왔느냐? 그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묵향은 최대한 기척을 숨기며 숲 속으로 들어갔다. 과연 초류빈은 그곳에 있었다. 커다란 도를 끌어안고 나무에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잠을 자고 있는 건지 졸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확인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으흐흐, 초류빈 이놈! 내가 네놈을 가만히 놔둘 줄 알았느냐?”
잠시 졸고 있던 초류빈은 지옥에서 울려오는 듯한 울림에 흠칫 잠에서 깼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다리 두 개가 놓여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졸고 있었다고 하 지만 이렇게 가깝게 접근해 올 때까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초류빈은 그 다리의 임자가 누군지 알아 보기 위해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그는 봤다. 악귀처럼 미소 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묵향의 얼굴을.
도대체 그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분명히 그가 중원을 다 돌아보는 데 1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허걱! 교, 교, 교주님께서 여, 여기는 어쩐 일로…….”
묵향이 씨익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네 죄가 뭔지는 대충 아는 듯하구나.”
“죄, 죄라니요. 결코 저는 교주님께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어쭈? 이제는 발뺌까지? 너 먼지 나게 한번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냐?”
묵향의 얼굴을 보아하니 그냥 넘어갈 리는 없을 게 분명했다. 초류빈은 묵직한 도의 손잡이를 꽉 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손아귀에 꽉 차는 든든한 느낌이 초류빈의 떨림을 멎게 해 줬다.
“먼지 나게 맞다니요? 저도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이겁니다. 그런 식으로 애 취급하지 마십시오.”
그런 초류빈을 묵향은 가소로운 듯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호오, 그래? 놀라운 발전이군. 그렇다면 어떻게 취급해 주랴?”
“저는 천마신교의 부교주입니다. 그에 걸맞은 대우를 원합니다.”
“오랜만에 옳은 소리를 하는군. 좋다, 그럼 네가 부교주면 나는 뭐냐?”
갑자기 이 양반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지만 초류빈은 대답을 해야만 했다.
“교주님이시죠.”
“네놈이 나를 교주로 생각하고 그에 걸맞은 대접을 했냐?”
허걱, 이런 식으로 공격해 오다니. 교주의 머리가 갑자기 명석해지기라도 하셨나?
“무, 물론 도망친 것은 잘못한 짓입니다. 하지만 제 입장도 고려를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마교 부교주가 되었음이 세상에 밝혀진다면 초씨세가의 명성 에 똥칠을 하게 될….
순간 분노에 일그러진 묵향의 표정을 보며, 초류빈은 자신이 말을 잘못했음을 깨닫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뭣이? 네놈은 천마신교를 잡배들의 집합소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거지? 똥칠이 어쩌구 어째? 그냥 봐줄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이놈 정신 상태가 글러먹었……..”
그 순간 초류빈의 기습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왕에 반쯤 죽을 정도로 두들겨 맞을 거, 반항이라도 해 봐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공격이었다.
초류빈의 주먹이 묵향의 몸을 꿰뚫는 순간, 초류빈은 공격에 성공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의 주먹에는 그 어떤 감촉도 없었다. 그리고 간발의 차로 묵향의 신형이 사라지는 것을 봤다.
‘이형환위? 정말 놀랍군. 간발의 순간에 이형환위를 시전할 수 있을 줄이야.’
하지만 그런다고 물러설 초류빈이 아니었다. 초류빈도 화경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다.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던 그의 몸이 그 자세에서 불가사의한 속도로 튕겨 나 오며, 순식간에 묵향에게 따라붙었다. 순간, 초류빈의 손에 들린 거대한 도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쾌속한 움직임을 보이며 강기를 뿜어냈다. 아무래도 교 주는 자신이 이런 식의 기습 공격을 감히 가해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간신히 방어하며 정신없이 뒤로 밀리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며 초류빈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디어 나한테도 기회가 온 거야. 흐흐흣, 저 인간만 없앨 수 있다면 나는 자유라구!’
마교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초류빈은 무림최고수의 반열에서 대우받으며 평생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마교에 얽매여 있다 보니 자신이 화경을 깨달았 다는 사실 자체를 외부에 숨기고 있었지만, 마교만 벗어난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지 않겠는가. 그 생각을 하자 거도를 쥐고 있는 초류빈의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초류빈은 더욱 공격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거도가 휩쓸고 지나가자 그 강기의 여파로 아름드리나무들이 쓰러졌고, 땅바닥이 파이며 흙먼지가 짙게 피어올랐 다. 하지만 눈앞이 보이지 않는 것쯤에 방해를 받을 초류빈이 아니었다.
언제 교주가 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가해 올지 알 수가 없어. 그러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승기를 잡고 있는 이때 저놈을 확실하게 끝장내야 해. 이렇게 살다가 죽을 수는 없잖아.”
초류빈은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들을 연속적으로 펼쳐 나가고 있었다. 원래 이런 식으로 무작정 공격하는 것은 자멸하는 길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20여 초식도 전개하지 않았는데도, 무리한 공력 소모로 인해 기혈이 들끓어 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 출 수가 없었다. 상대가 간신히 공격을 피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가.
교주는 그야말로 간신히 초류빈의 공격을 피해 내고 있었다. 어떤 때는 피하는 것이 늦어 강기의 여파가 상대의 몸에 직접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물론 그 정도로 교주의 막강한 호신강기를 뚫지는 못하겠지만, 거의 간발의 차로 목숨을 건진 거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그의 옷은 순식간에 넝마 조각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피하 기에 급급했으면 당황해서 미처 검을 뽑을 여유도 없을 정도가 아닌가.
‘이이익, 기회는 이때야! 조금만 더 하면 아예 보내 버릴 수 있어. 제발 한 방만 맞아라.’
그런데 이게 1백 여 초식 이상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초류빈은 자신이 지금 속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상대 의 처참한 몰골이 그의 생각을 가로막고 있었다. 꼭 한 방만 제대로 치면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한 방이 안 들어가는 것이다. 미치고 환장할 일이 아닌가.
“헥헥헥!”
자신의 모든 공력을 투입해서 연속 공격을 쉴 새 없이 퍼부어 대던 초류빈은 이제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에는 힘이 빠져 거도를 간신히 들고 서 있을 뿐이었다. 하 지만 그 많은 공격을 당한 상대는 아직도 생생하지 않은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이제 힘이 다 빠졌냐?”
묵향은 악마처럼 눈빛을 빛내며 초류빈에게 이죽거렸다.
“오랜만에 재미있었다. 그건 그렇고 명령 불복종에다가 본좌에게 하극상까지 시도했으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끄으윽! 여, 역시…….”
아마도 그 뒤에 이어질 말은 ‘속았구나’였을 것이다. 뭐 어찌 되었건 그 이후, 초류빈이 기거하던 숲에서는 뭐를 때려잡는지 북치는 듯한 타격음과 돼지 멱따는 듯 한 비명 소리가 밤새도록 울려 퍼졌다.
묵향이 돌아오자 마교의 모든 고수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화산파라는 거목을 뿌리째 뽑아 버리는, 역대 교주들 중에서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그가 돌아오 자마자 단번에 해치웠으니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묵향은 마교에 귀환한 후, 장로급 이상의 수뇌부를 소집했다.
“그래, 무림맹의 동태는 어떠하던가, 군사?”
“예, 무림맹은 전면전을 선포한 후 동조자들을 모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속하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무림에 적을 두고 있는 웬만한 문파에는 다 격문을 돌 렸다고 합니다.”
“호오, 그래? 정공(正攻)으로 들어오시겠다 이거군. 그래, 각 문파에서 호응은 좀 있다고 하던가?”
“물론입니다, 교주님. 본교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잠잠했었기에, 본교의 무서움을 모르는 수많은 문파가 거기에 동참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때, 수석장로가 끼어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교주님,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중원을 휩쓸 준비는 이미 끝났습니다. 놈들에게 자신들의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나 보여 줘야만 합니다.”
“수석장로의 용맹은 익히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수석장로를 치하한 후, 묵향은 홍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비마대주, 놈들이 언제쯤 공격을 가해 올 것인지에 대한 정보는 입수했나?”
“물론입니다, 교주님. 3개월 후에 총공격을 가해 올 것입니다.”
“그래, 수고했군.”
묵향은 이번에는 군사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질문을 던졌다.
“군사가 생각한 대응책이 있다면 한번 들어 보세.”
“아무래도 무림맹은 정파의 연합체입니다. 본교처럼 정예 무사들을 항시 보유하고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일단 격문을 돌려 동참할 고수들을 모집할 것입니다. 그 런 다음 청해성까지 이동한 후, 그곳에서 집결된 세력을 정비하여 본교에 대한 공격을 감행해 올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런 만큼, 그들의 세력이 집결되기 전에 각개 격파해 나간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흠, 군사의 말에 일리가 있군.”
“예, 무림맹이 보유하고 있는 정예 무사는 겨우 5천이 넘습니다. 그리고 8파1방, 5대세가가 그들이 지닌 모든 힘을 쥐어짠다고 해도 5만이 채 되지 않을 겁니다. 그 외 나머지는 숫자만 차지할 뿐 그리 위협적인 전력이 아닙니다.”
군사는 커다란 지도를 가져다가 탁자 위에 펼쳐 놓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무림맹이 본교를 공격했을 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 집결지까지는 각자 행동했습니다. 소림사의 세력은 소림사대로 이동했고, 무당의 세력은 무당대로……..”
군사는 지도를 짚으면서 몇몇 문파가 이동한 경로들을 그려 보인 후 말을 이었다.
“놈들이 청해성에 완전히 집결을 완료했을 때는 최소 10만 이상의 엄청난 규모의 세력을 보유하게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 최대의 약점 입니다. 강력한 세력을 지닌 몇몇 문파만을 청해성에 도착하기 전에 포착하여 괴멸시켜 버린다면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묵향은 잠시 지도를 바라본 후 장로들을 쭉 훑어보며 말했다.
“그 외에 또 다른 의견은 없는가?”
아무도 의견을 말하지 않았기에 묵향은 군사의 계획대로 작전을 시행할 것임을 밝혔다.
“좋다, 자네의 작전대로 수행하기로 하지. 군사는 장로들과 상의하여 세부적인 작전 계획을 수립한 뒤 본좌에게 제출하라.”
“옛, 교주님!”
회의가 끝난 후 모두들 밖으로 나갈 때 묵향이 군사를 불러 세웠다.
“군사는 잠깐 나 좀 보세.”
“예, 무슨 일이십니까, 교주님? 이번 작전에 대해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딴 일일세. 왜국과의 무역 준비는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가?”
“옛, 아주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잘만 된다면 2개월 후에 무역선을 출발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묵향으로서도 의외였다. 그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배를 건조하는 데 최소한 9개월 이상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어떻게…….”
“물론 그렇게 보고 드렸었습니다. 그것도 본교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수군 전선(戰船)이 아니겠습니까? 새것으로 건조하려면 보통 사용되는 무역선에 비해 2개월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운 좋게도 수군 전선 3척을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오, 그래? 상태는 어떻던가?”
“꽤 상태가 좋기에 조금만 손을 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사실 요 근래에 북방이 어수선하다 보니 수군 진영에서 병사들을 뽑아내어 국경선으로 보내고 있습니 다. 대대적으로 수군을 감축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 보니 꽤 쓸 만한 배들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잘되었구먼.”
“예, 무역할 상품들이 준비되는 대로 출발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게. 참, 관지에게 빠릿한 놈으로 1천 정도 준비시키라고 해.”
군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그들을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왜국에 보낼 거야.”
그 말에 군사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 이제 곧 정사대전이 벌어질 판인데, 1천의 정예를 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여기는 본좌가 있으니 어떻게든 처리해 나갈 수 있어. 1천의 정예를 왜국에 보내는 것은 더욱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자 함이야. 그들을 보내 후지와라 영주가 그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도록 도와주면, 대영주로 성장한 그는 본좌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게야. 안 그런가?”
“교주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명대로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