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8권 16화 – 나는 빨래나 하지
나는 빨래나 하지
장덕팔은 지금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정말이지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크고 넓은 저택, 창고 가득히 쌓인 쌀과 고 기들 그리고 향기로운 술과 재물들이 넉넉히 쌓여 있어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했었다. 그뿐인가. 50여 명에 달하는 수하는 용맹스럽기 그지없어서 그가 이 일대 의 패권을 주름잡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두목! 빨리 식사하셔야죠. 오늘 할 일도 많은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시는 겁니까?”
장덕팔은 우람한 근육에 수염까지 사방으로 뻗쳐 기골이 장대해 보였지만, 어쩐지 그의 모습은 풀이 죽어 보였다.
“밥 먹고 나서 할 일은 뭐냐?”
부두목은 우물거리던 음식을 삼킨 후 대답했다.
“빨래도 해야 하고, 그들이 묵는 숙소도 청소해야 하는데…, 두목께서는 어떤 걸 하시겠습니까?”
“야, 내가 이 나이에 그걸 꼭 해야겠냐? 한때 천령무적(天嶺無敵)이라고 불렸던 내가 말이다.”
“에이 두목, 말은 바로 하십쇼. 천령산에 우리 산채 말고 아무도 없었는데, 당연히 우리가 무적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크흐흐흑, 내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옛날 생각 해 봐야 뭐 합니까? 괜히 대들었다가 쥐어터지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다 잊으시라니까요.”
장덕팔은 문득 그놈들이 산채에 들이닥쳤던 때가 생각났다. 두목답게 호기롭게 나섰던 그는 상대가 슬쩍 휘두른 손짓에 거의 2장여를 날아가서 짱돌에 맞은 개구 리마냥 땅바닥에 패대기쳐져 비명도 못 지른 채 부들부들 떨었었다.
그때 장덕팔은 고통이 너무나도 심하면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순간 한기가 느껴지며 온몸이 부르르르 떨렸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나는 빨래나 하지. 부두목은 청소를 맡아라.”
물론 장덕팔이 직접 빨래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하들이 빨래하는 것을 감독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요는 빨래만 깨끗하게 해 놓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청소는 달랐다. 그 꼴도 보기 싫은 놈들을 다시 봐야 하니까.
부두목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잔뜩 풀이 죽어 대꾸했다.
“예.”
한편 장덕팔이 우거지상을 하고 앉아 있는 곳에서 30장(약 90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이곳 산채를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는 자들의 두목이 무료함에 지쳐 크게 하 품을 한 후 투덜거리고 있었다.
“허, 거참 이상하네. 약속한 3개월이 넘은 지가 언젠데, 이놈들은 왜 소식이 없는 거야. 도대체 싸우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에잇, 제기랄! 비마대에 연락은 해 봤느 냐?”
묵향의 짜증 어린 물음에 혈랑대주인 인도 동방뇌무 장로는 밖에 대고 외쳤다.
“여봐라!”
수하 한 명이 달려 들어와 부복했다.
“옛!”
“비마대에서 온 연락은 없었느냐?”
“아직 없었습니다, 대주!”
수하의 대답에 동방뇌무 장로는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알았다. 나가 보거라.”
“옛!”
묵향은 지도를 다시 한 번 자세히 훑어봤다.
묵향은 군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진 방어선을 구축했다. 물론 말이 방어선이지 실제로는 무림맹의 최종 집결지인 청해성으로 들어오는 무림맹의 집단들을 기습 공격하여 괴멸시키는 공격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청해성으로 들어가려면 사천성, 섬서성, 산서성을 거쳐야만 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깊은 산과 계곡이 많아 매복 공격을 가한 후, 도망치기에 적격이었다.
지금 묵향은 마교 최고의 정예인 혈랑대, 수라마참대, 천랑대를 거느리고 매복 공격을 지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수석장로가 지휘하는 수라마참대는 섬서성을 근거지로 삼아, 그 일대에서 이동하는 무림맹의 고수들이 있다면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때, 산서성도 그들 의 활동 범위 안에 포함되었다. 사실 수라마참대만으로 2개 성을 맡는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있었다. 산서성의 일부를 요가 차지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요의 군대와 송의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곳이라서 다수의 무림인이 병장기를 휴대하고 이동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초류빈 부교주가 지휘하는 천랑대(狼隊)는 사천성을 근거지로 삼아 사천성 일대에서 이동하는 무림인들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묵향이 마교 최고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혈랑대를 거느리고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혹시 수라마참대나 천랑대 단독으로는 건드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무림인이 이동할 때 지원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문제는 이상하게도 대규모로 이동하는 무림인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문파 단위로 이동한다고 해도 최소한 수천씩은 움직여야 하는데 말이다.
“거참, 이상한 일이네. 혹시 본교가 노리고 있는 줄 알고 한 놈씩 개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되잖아. 어떤 미친놈이 위험이 예 상되는 지점을 단독으로 통과하겠느냔 말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동방뇌무 장로가 슬그머니 참견했다.
“혹시 본교에서 매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집결 장소를 바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묵향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꾸했다.
“글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
그때 밖에서 흑녹색 무복을 입은 무사가 들어오며 말했다.
“비마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초조해하던 동방뇌무 장로의 안색이 환해졌다.
“오오, 드디어 왔군. 들여보내라.”
비마대 소속 무사는 들어오자마자 납죽 엎드려 오체투지하며 예를 오렸다.
“교주님을 뵈옵니다!”
묵향은 무사가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졌다. 지금 자신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 그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냐, 그래 어디로 침입하고 있느냐?”
“예?”
“놈들이 어디로 침입하고 있느냐니까.”
비마대 무사는 교주의 질문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사실 그는 적의 침입로를 알려 주기 위해 파견된 전령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그게 아니오라 속하는 군사께서…, 본교로 돌아오시라고 전하라는 군사님의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습니다.”
“돌아오라고? 젠장, 이거 어느 장단에 맞춰 줘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이봐, 공식 명령서는 가지고 있겠지?”
“예!”
그는 재빨리 품속을 뒤져 밀봉된 서신 한 장을 꺼내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묵향은 그 서신을 획 낚아챈 후 밀봉을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몇 번을 읽어 봐도 진짜 로 군사가 보낸 명령서가 확실했다.
“이런 젠장!”
묵향은 서신을 옆에 앉아 있던 인도 동방뇌무 장로에게 획 건네며 외쳤다.
“본교로 돌아가자.”
순간, 장덕팔은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지금…, 떠나신다고 하셨습니까?”
“오냐. 본좌가 떠난다는 데 있어서 무슨 불만 사항이라도 있냐?”
그 말에 장덕팔은 화들짝 놀라며 변명을 늘어놨다.
“아, 아닙니다. 소인이 무슨 불만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저희 같은 미천한 것들을 찾아주신 것만 해도 영광이었습죠.”
“그렇게 생각했었다니 다행이구먼.”
“그런데 어찌 소인을 부르셨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요?”
덩치에 안 어울리게 애교스럽게 질문을 던지는 장덕팔을 보며 묵향은 씁쓸한 듯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혹시 계획이 변경되어 본좌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니 청소 깨끗이 해놓고 기다리거라. 그리고 술도 좀 더 구해 놓고 말이야. 며칠 안 마셨는데 벌써 술이 다 떨어 지다니…, 쯧쯧.”
며칠 안 마시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거의 한 달 가까이 이곳에서 민폐를 끼쳐놓고 말이다. 하지만 힘없는 자의 설움이 아닌가. 장덕팔은 한껏 미소 띤 얼굴로 대답 했다. 지키지도 않을 약속인데, 입으로 인심 좀 써두면 어떻겠는가.
“물론입니다. 다녀오실 동안 깨끗이 청소해 놓고, 수하들을 보내 술도 대량으로 구입해 두겠습니다. 혹시 그 외에 또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없다. 그럼 잘 있거라. 다음에 보자.”
상대가 그 무지막지한 공포스러운 기운을 뿜고 있는 부하들과 함께 사라지자마자, 장덕팔은 소리 높여 만세를 외쳐 불렀다. 그런 장덕팔에게 부두목이 다가와서 말했다.
“술은 얼마나 사 오라고 시킬깝쇼, 두목?”
“뭐, 뭣이? 내가 왜 그놈들이 처먹을 술을 사야 한단 말이냐!”
“그래도 그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술이 없으면 두목을 가만두지 않을 텐데요.”
“허걱! 그, 그렇구나.”
순간 장덕팔은 짐을 싸서 딴 곳으로 이사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묵향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마교 총타에 도착했다. 기록적인 속도로 총타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거느리고 있던 집단이 마교 최강의 무력 단체인 혈랑대 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혼자 앞서 달려가고 싶었지만, 혹시 뭔가 엉뚱한 계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하들과 함께 온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교주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군사?”
묵향은 질문을 던지며 단상에 마련되어 있는 호화로운 태사의에 앉았다.
“예, 무림맹의 본교 총공격이 취소되었기에 일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뭐?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겐가? 화산파를 박살 내놨는데, 그놈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잖아. 혹시 잘못된 정보를 획득하고 놈들의 손에 놀아나 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 물론 속하도 그 점을 고려하여 치밀하게 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그게 거짓 정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정보를 획득했기에 그렇게 단정할 수 있단 말이냐?”
“예, 사실 본교는 얼마 전까지 정사대전이라는 압력 때문에 모든 정보력을 정파의 움직임을 좇는 데 투입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요와 금에서 일어나고 있었 던 변괴를 알아차리는 것이 늦은 것이죠.”
그 말에 묵향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변괴라고? 자세히 말해 보게.”
“예, 중원의 동북방에 거란족이 세운 대 제국 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 위쪽에 여진족이 금이라는 제국을 세웠죠. 이 둘이 얼마 전에 격전을 벌인 모양인데, 놀 랍게도 금이 대승을 거뒀다는 것입니다.”
묵향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꾸했다.
“그런데 변방 오랑캐들이 치고받은 거하고 무림맹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금이 요의 세력을 급속히 흡수하며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다음 요금전쟁 속에서 어부지리를 챙기기 위해 북진하고 있던 임청 원수의 60만 대군을 격파하 고 급속도로 남하, 지금 개봉을 포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묵향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뭣이?”
“오랑캐들이 황하(黃河)를 도하하는 것조차 막지 못했을 정도니 황실이 초전에 입은 피해가 얼마나 막심한 것인지 추측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전화 가 개봉에 임박해 버린 상태니, 개봉을 본거지로 하고 있는 개방이 딴 데 신경 쓸 틈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소림사도 그렇게 멀지 않은 위치에 있으니 몸을 사리며 그곳에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 것이죠. 뿐만 아니라 황실에서는 무림맹에 나라가 오랑캐의 발굽에 짓밟히는 것을 막아 달라는 칙령까지 내린 모양입 니다.”
묵향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큭큭큭, 일이 아주 재미있게 되어 버렸군. 이 기회에 세력을 몰아 무림맹을 끝장내 버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되겠어.”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태가 좀 심상치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예, 교주님. 아무리 오랑캐라는 족속들이 힘에 잘 굴복하여 힘 있는 자들에게 빌붙는다고는 하지만, 금이 요를 흡수한 속도는 상식을 뛰어넘은 것이었습니다. 처 음 아구다라는 대족장이 금을 건국했을 때, 그의 휘하에는 10만 남짓한 병력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런 전력으로 대 제국 요를 일격에 멸망 시켜 버린 것입니다. 또 순식간에 요의 세력을 대거 흡수하여 북진하는 어림군의 주력을 괴멸시켜 버렸습니다.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엄청난 대군이 어림군을 덮 쳤다고 합니다. 그걸 보면 최소한 어림군에 맞먹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두 달 사이에 이민족 무장들을 복속시켜 자신들의 수하로 부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기에 홍진 대주님께 좀 더 철저히 조사해 달라고 부탁해 두었습니다.”
“조사 결과는 언제쯤 나오겠나?”
“길게 잡아도 한 달 이내에는 끝날 것입니다.”
“좋아. 그건 그렇고, 며칠 내로 수라마참대와 천랑대가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모두 돌아오면 연회라도 거나하게 베풀어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도록 하라.”
“예, 명대로 시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