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8권 18화 – 묵향의 제안

묵향의 제안

족히 수만 명은 넘어 보이는 장정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오랑캐들을 향해 불안에 가득 찬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은 연경 주변에서 벌어진 대회전에서 패해 금군의 포로가 된 송군의 일부였다. 그들은 완전히 무장 해제 당한 채 상대의 자비만을 바라고 있는 상태였다.

그때 금군의 복장을 한 장수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도 그는 여진족처럼 보였지만 어디서 배웠는지 꽤 유창한 한어를 구사 하고 있었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대 금제국 황제를 칭송하고, 또 송나라의 무능함을 욕해 대던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자유를 줄 테니 10년 동안 금나라를 위해 병역에 종사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포로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제안임에 틀림없었다.

병역을 거부한다면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노예가 된다면 자신만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나중에 낳을 자식들까지 모두 노예의 삶을 살아갈 수밖 에 없게 되는 것이다. 자손 대대로 노예가 되느냐, 아니면 딱 10년만 금을 위해 병역에 종사한 후 풀려나느냐.

이런 식의 설득이 여기저기서 행해지고 있었다. 연경 근방에서 벌어진 대회전에서 포로가 된 송군의 장졸만 20만에 가까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포로들이 한참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그것을 몰래 바라보며 음흉스레 미소 짓고 서 있는 인물이 있었다. 이제 겨우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장수는 아름다운 수달피를 여기저기 덧붙여 만든 호화로운 갑주를 입고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여진족 가운데서도 꽤나 높은 지위를 지닌 자의 아들처럼 보였다.

“고민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병역을 선택하게 되겠지.”

놀랍게도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여진어가 아니라 아주 매끄러운 한어였다. 그것도 중원에서 태어나서 자란 인물만이 구사할 수 있는. 한동안 포로들을 바라보던 그는 다시금 중후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예가 되기를 원하는 놈들 가운데 무공을 익힌 놈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녀석들은 철저하게 가려내어 따로 모아 뒀다가 금광으로 보내라.”

주인이 더 무공을 지니고 있지 않은 한 무공을 익힌 노예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은 분명 기회를 봐서 은근슬쩍 도망치기 위해서라도 병역보다는 노예가 되려고 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따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 말에 뒤에 서 있던 장수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철저히 가려내겠사옵니다, 대원수님.”

수하 장수의 입에서 대원수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이 젊은 장수가 대원수라는 말인데, 그 젊은 나이에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아무리 현 황제인 아구 다가 뛰어난 인재를 중용한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한 벼락출세였다.

“휘하 장수들은 집합을 마쳤느냐?”

“예.”

대원수는 장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여진식 천막 안에 앉아 있던 여덟 명의 장군은 대원수가 들어오자 황급히 일어서서 군례를 올렸다. 대원수는 호피가 깔려 있는 의자에 앉은 후 근엄한 어조로 장군들에게 말했다.

“자, 제장도 앉게나.”

대원수는 장군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입을 열었다.

“3일 후, 요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출발할 것이다. 그런 만큼 각자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옛, 대원수님!”

요 근래 금군이 보여 준 전광석화 같은 군사 작전은 겉보기에는 매우 화려해 보였지만, 사실 금으로서는 엄청난 무리수를 둔 작전이었다. 모든 것이 잘 끝난 데다 가 전과(果)도 엄청난 것이었기에 모두들 눈치 채지 못했지만, 사실 어디 한 군데만 삐끗했어도 금은 탐스럽게 자라나던 새싹이 된서리 한 방에 시들어 버리듯 그 렇게 멸망할 수도 있었다.

금은 처음부터 요 황제를 참살하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 다행히 그것에 성공하자 대 제국 요는 구심점을 잃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서로가 대권을 이으려는 치 열한 권력 암투가 벌어진 것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금은 포로로 잡은 요의 병사들을 설득해 자신들의 전력으로 흡수하는 것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대 제국 요가 지닌 저력은 무시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하지만 금은 요의 잔당을 토벌하는 대신 남하하기로 결정한다. 송군이 갑자기 북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송은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연운16주를 탈환한 후 만리장성까지 진출하려 하고 있었다. 만약 그것을 방치한다면 틀림없이 송은 만리장성을 차지할 것이 분명했 고, 엄청난 높이와 폭을 지니고 있는 강력한 방어선이 송의 것이 된다면, 훗날 송과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매우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만 리장성이 지니는 방어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금은 요의 잔여 세력 소탕은 아예 포기하고 그대로 남하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요의 잔여 세력 규모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 세력을 통합할 만한 인재만 하나 있었어도 수십만의 정병을 끌어 모으는 것도 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금에게는 천만다행으로 그런 인재는 나타나지 않았고, 소규모 국지전만 여 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어쨌든 그런 우환거리를 뒤에 놔둔 채 남하를 결심한 금 황제의 배포도 배포였지만, 전군을 지휘하는 대원수의 능력을 믿지 못했다면 애당초 시작도 안 했을 작전 이었다. 북진하는 송군은 60만 대군이었다. 그들과 자웅을 겨루는 한판 대결을 위해 금군이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은 50만. 만약 여기서 패했다면 끝장이었을 것이 다.

하지만 대원수는 한참 연경을 공략하고 있던 송군을 기습적으로 공격, 결국 대승을 거두었다. 송군은 7일 밤낮으로 연경을 함락시키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던 상 태였기에 모두들 피곤에 지쳐 있었다. 그런 그들을 뒤에서 쳤으니 어쩌면 금의 승리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한 번의 대회전으로 송은 완전히 끝 장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40만을 이끌고 남하하여 개봉을 공략하기로 하고, 대원수는 남아서 송군 포로들을 금의 전력으로 흡수한 후 요의 잔당을 소탕하기로 작전을 짰 다. 요의 잔여 세력을 더 이상 그냥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금군의 최정예는 모두 대원수 휘하에 있었다. 그렇다 보니 황제가 거느린 병사의 수는 40만이나 되었지만 실상은 요의 투항병으로 구성된 오합지졸이나 다 름없었다. 그들을 이끌고 개봉을 함락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금 황제는 처음부터 개봉을 함락시킬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사실 현 재 점령한 땅덩어리만 해도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넓었기에 더 이상 점령지를 늘일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금 황제의 생각을 송의 조정이 알 리 없었다. 더군다나 송으로서는 그가 거느린 병력이 요의 투항병인지, 금의 정예인지도 알 수가 없지 않은가. 그 점 을 노려 40만이라는 숫자로 송의 조정과 황실을 위협하여 최대한 많은 이익을 뽑아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황제가 개봉으로 향한 지 7일 후, 대원수는 무려 30만에 달하는 대 병력을 지휘하여 요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북진하기 시작했다. 30만 중 거의 절반 이상 이 송군 포로라는 점이 약간의 걸림돌이기는 했지만, 대원수는 그런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송군 출신 포로들을 확실하게 다룰 자신이 있었던 것이 다.

그날도 조령과 내기 바둑 두기에 여념이 없었던 패력검제는 총관이 다가오자 의문의 시선을 던졌다. 총관은 고개를 조아리며 패력검제에게 말했다.

“문주님, 무영문의 옥화 봉공님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옥화 봉공님이? 이리 다오.”

“예.”

서신을 쭉 훑어본 패력검제는 이빨을 뿌드득 간 후 총관에게 말했다.

“사형께 연락을 드리거라. 노부는 양양성으로 간다고 말이다. 그러면 알아서 오시겠지.”

“예? 갑자기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부가 고향을 떠난 지 벌써 몇 년이 흘렀느냐. 그런데 점점 고향 땅에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은 사라지고, 오히려 지금 있는 곳에서마저 쫓겨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 지 않느냐. 이번에는 노부가 직접 나서서 한 팔 거들려고 한다.”

“예, 알겠습니다.”

“진팔에게도 전하거라. 혹여 노부를 따라 양양성에 갈 생각이 있느냐고 말이다.”

“예, 문주님.”

이때,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던 조령은 패력검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저, 바둑은 이제 안 두실 거예요?”

“아무래도 지금은 양양성으로 가는 것이 급할 듯싶으니, 그곳에 가서 다시 두도록 하지.”

“예, 그러죠 뭐. 안 그래도 한 집도 살릴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러면서 조령은 흰색으로 점철되어 있는 바둑판을 향해 절망적인 시선을 보냈다.

패력검제는 제령문의 무사 50여 명을 이끌고 양양성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가 움직이게 된 것도 다 옥화무제가 그에게 보낸 서신에 자극을 받은 탓이다. 이렇게 그녀의 뜻에 따라 양양성을 향해 떠난 무림인의 수는 결코 적지 않았다.

총관이 집무실로 들어오자 옥화무제는 곧장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 준 금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으니 그건 어 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금에 대한 조사는 얼마나 진행 중인가요?”

“예, 상당 부분 진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사하던 중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옥화무제는 본능적으로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기뻐하며 다급히 말했다.

“좋은 것을 찾아낸 모양이군요. 말해 보세요.”

“예, 속하가 찾아낸 인물은 완옌 렌지에라는 인물입니다.”

옥화무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군요.”

“예, 그렇게 밖으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라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번 요금전쟁과 송금전쟁을 치르며 갑작스럽게 전면에 등장한 인물입니다. 요금전 쟁을 통틀어 가장 혁혁한 전과를 세운 인물로, 요 황제를 참살한 공로로 대원수의 칭호까지 받았답니다. 금 황제 아구다가 직접 완옌이라는 성을 하사했을 정도로 그를 신뢰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요?”

“문제는 그가 지닌 세력이 황제와 거의 동등한 수준이라는 겁니다.”

옥화무제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 산에 호랑이가 둘이 있을 수 없듯, 한 나라에 최고 권력을 지닌 인물이 둘씩이나 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럴 리가…….”

“물론 약간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소문이 나돌 정도로 그의 세력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와 황제를 이간질시킨다면 어떻 겠습니까?”

총관의 말에 옥화무제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재미있는 제안이군요. 그래, 대원수는 지금 어디에 있죠?”

“요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30만 대병을 거느리고 북진 중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옥화무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건 더 재미있는 정보군요. 그 둘이 가까이 있을 때는 의심나는 것이 있다면 서로 대화해서 풀 수가 있겠지만, 대화가 끊어지면 의심이 의심을 낳게 되어 있죠. 슬슬 이간질을 시작해 보세요.”

“예, 태상문주님. 그건 그렇고, 사실 속하가 찾아뵌 것은 동관으로부터 전서가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동관으로부터? 무슨 일인가요?”

“예, 채경 재상이 지금 탄핵받고 있는데, 아무래도 현재 자신의 힘으로는 그를 구해 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태상문주님의 도움을 구한다는 내용이었습니 다.”

아마도 구법당 쪽에서 패전의 책임을 물어 채경 재상을 탄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재상을 탄핵하다니, 언제부터 구법당의 힘이 그렇게까지 커진 건가요?”

“과거 금과의 동맹을 표면적이기는 하지만 구법당 쪽에서 행했지 않습니까? 금의 세력이 커지니 자연히 그들을 등에 업은 구법당의 세력도 커질 것은 당연한 이치 가 아니겠습니까?”

총관의 말에 옥화무제는 골치가 아픈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혹시나 작전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하여 슬며시 구법당을 앞세운 것인데, 오히려 그것이 최악의 패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이제는 채경까지……. 그를 잃는다면 기껏 세워 놓은 천도 계획까지 물거품이 될 거에요. 최대한 여러 통로를 이용해서 그의 구명 운동을 전개해 보세요.”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태상문주님.”

총관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황제도 새로 바뀌었다. 그런 만큼 황제를 등에 업고 깝죽거리던 환관 동관도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나 마찬가 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임청 원수는 전사해 버렸고, 이제는 재상 채경까지……. 이제 그녀가 동원할 수 있는 힘 있는 세도가들은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동관을 통해서 혹시 황제를 배알할 수 있을까요? 새로 바뀐 황제만 조종할 수 있다면 어쩌면.”

총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마 힘들 것입니다, 태상문주님. 이번 작전 실패로 인해 태상문주님에 대한 상황제의 총애가 끝났음을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더 이상 황실과 끈을 연결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쨌든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서 그의 구명 운동을 전개해 보세요. 구법당 쪽 사람들과도 접촉을 해 보고 말이에요.”

“예,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소식이 더 있습니다.”

“뭔가요?”

“마교에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이 소식만은 옥화무제가 예상할 수 있는 범주를 크게 벗어났던 모양이다. 그녀는 깜짝 놀란 듯 뾰족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마교에서요?”

“예, 그가 태상문주님을 만나 뵙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옥화무제의 안색은 심각하게 바뀌었다. 그 녀석이 자신을 만나자고 할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만약 무림맹의 고수들이 쳐들어간다고 할 때 만나자고 했다 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마교를 건드릴 자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옥화무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리송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죠?”

옥화무제의 질문에 묵향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아, 얼굴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그러는 것은 실례지. 아무튼 얼굴을 보니 잘 지내는 모양이군.”

“이게 잘 지내는 사람 얼굴로 보여요?”

안 그래도 황실이 절단 난 것 때문에 울화가 치밀어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는 옥화무제에게 그런 말을 했으니 좋은 대답이 돌아갈 리가 없었다.

“허허, 물론 사업상 난관이야 많겠지만 그걸 대놓고 남에게 말하는 것도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나? 잘 안 되도 잘되는 척, 잘되면 더 잘되는 척, 그래야 살아남지.”

이 인간이 정말! 마교 교주면 교주답게 놀아야지. 지가 무슨 사업가도 아니고. 연배도 자기보다 낮은 인간이 무공 좀 세다고 이토록 오만방자하다니.

순간 옥화무제는 약이 바짝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이 사업을 해온 지 수십 년. 그녀의 얼굴 표정은 저 두꺼운 철판마냥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호호, 그래 무슨 일로 본녀를 찾으셨나요? 저는 그게 가장 궁금하군요.”

“한 가지 의뢰를 하고자 하는데 말이야…….”

그러면서 묵향은 옥화무제의 눈치를 슬쩍 봤다. 물론 상대의 의뢰가 뭔지 매우 궁금한 옥화무제였다. 막 말해 줄 것 같아서 기대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 상대의 말이 딴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참, 그러고 보니 요즘 금나라 때문에 난리가 났다면서? 저 시골 변방에 사는 우리들은 요 근래에야 그걸 들었지. 아주 재미있었어.”

뭔가 상대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옥화무제는 약간 퉁명스레 대꾸했다.

“재미도 있었겠군요.”

“본의 아니게 금나라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누가 목숨을 건졌는지 그게 빠져 있었다. 알아서 상상하라는 말이었다. 물론 묵향이 한 말은 매복 공격에서 벗어난 ‘정파’를 이르는 것이었겠지만, 옥화무제는 그 것을 ‘마교’로 오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당시 겉으로 드러난 전개로 봤을 때 마교가 절대 약세였기 때문이다.

“그렇겠죠. 하지만 공격은 없었으니 서로 간에 좋았던 것 아닌가요?”

“뭐, 썩 좋았다고는 볼 수 없지. 그건 그렇고, 변방의 소국인 금의 약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하군. 무림 최고의 정보통이 생각하는 시국론이 아주 듣고 싶었거든.”

“지금 그거 물어보려고 바쁜 사람을 부른 거예요?”

발끈하는 옥화무제를 향해 묵향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아니지.”

“그렇다면 뭐예요?”

“금에서 한 인물에 대해 조사를 좀 해 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어떤 사람이죠?”

뾰로통해 있는 듯 겉모습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관심은 온통 묵향의 다음 말에 가 있었다. 과연 이 엉뚱한 인간이 관심을 보이는 인물은 누구일까? 궁금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을 여기까지 부른 것으로 보아 아주 중요한 인물일 것임에 틀림없을 테니 말이다.

“금에 대해 어느 정도 조사해 봤을 테니 이름 정도는 들어 봤을 거야. 대원수 완옌 렌지에 바로 이 인물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다 줬으면 좋겠어.”

“시킬 일은 그것뿐인가요?”

“물론 아니지. 사실 진짜 부탁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고…, 어쨌든 당신이 무림맹의 3대 봉공 중 한 명이니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해서 한 가지 부탁을 하려고.”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름이 아니라 이게 진짜였던 것이다.

옥화무제는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자, 빨리빨리 토해 내라고, 이 단순무식한 놈아!

“뭔데 그래요?”

“정파와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싶은데 말이야, 공동의 적은 금나라로 하고 말이지.”

옥화무제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저 인간이 원래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중증일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연합이라고요?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불구대천의 원수끼리 연합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 보라구요!”

묵향은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그건 그거고 이거는 이거지. 우리들도 송의 충성스런 신하들인데, 황실과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바쳐 충성을 다할 생각이 없는 줄 알아?”

“물론 없다는 거 다 알아 이놈아!’

하지만 옥화무제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 상대의 기분을 망치지는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마교가 한 손을 보태 주기만 해도 금을 아작 내는 것은 한결 수월 해질 것이 아닌가.

“무림맹도 요즘 금 때문에 정신이 없을 테고, 그런 상황에서 본좌가 뒤통수를 까지 않고 있는 것만 해도 많이 봐주고 있는 거라구. 안 그래?”

그건 옳은 말이었다.

“물론 여기에 찬성하지 않을 바보들도 많을 테니 한 가지 덧붙이기로 하지. 만약 무림맹과의 연합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본좌는 금에다가 똑같은 제안을 할 거야. 바로 그 완옌 렌지에라는 인물에게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옥화무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파 무림은 씨가 마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무 놀란 탓일까. 옥화무제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 게 뾰족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당신, 제정신이에요?”

하지만 묵향은 아주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물론 아주 멀쩡해. 좋은 대답 기다리지. 참, 완옌 렌지에에 대한 부탁 잊어버리지 말라구. 장차 우리 쪽의 중요한 고객이 될지도 모르는 인물인데, 어떤 녀석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협상이 편할 거 아닌가? 크흐흐흣.”

비웃음을 날리며 사라지는 묵향의 뒷모습을 옥화무제는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만약 묵향이 그 렌지에라는 놈과 협약을 맺는다면, 송제국과 무림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일지도 모른다.

“저런 썩어빠진 놈! 오랑캐한테 빌붙으려 하다니…….”

현재 송의 정규군은 거의 괴멸당한 상태나 다름없었다. 일부 살아남은 장졸들과 현지의 향방군 그리고 그녀의 부탁을 받은 무림인들이 뒤섞여 새로운 방어선을 서 서히 구축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소수기는 하지만 막강한 힘을 지닌 마교가 금에 동참한다면, 그 방어선은 순식간에 붕괴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수적으로도 밀리는 판국에, 질에서까지도 밀리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옥화무제가 몰랐던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묵향이 그 누구보다도 금의 멸망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장인걸이 만약 금의 요직에 앉 아 있다면 마교의 힘만으로 그를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금이라는 엄청난 세력이 그의 뒤를 받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놈의 보호막이라고 할 수 있는 금이 무너진다면? 그놈을 철저하게 뭉개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한 가지를 모르고 있으니, 옥화무제로서는 묵향이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머리를 아무리 쥐어짜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교로서는 그냥 가만히만 있어 도 정파의 세력이 갉혀 들어가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상태다. 그런데 왜 굳이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정파와 손을 잡아가면서까지 금과 싸우려고 하는 것일까?

묵향의 말대로 황실에 대한 충성? 지나가던 개가 들어도 비웃을 소리다. 마교도가 황실에 대한 충성을 운운하다니. 그렇다면 뭘까?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옥화무제는 오랫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느라 자리에서 일어설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