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9권 3화 – 아련한 기억
아련한 기억
밤하늘을 따라 멀리 퍼져 나가는 금음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슬프다고 설취(?)는 생각했다. 금을 타는 데 있어서 중원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사부가 들려주는 금음을 거의 매일 밤 듣다 보니 그녀의 귀도 금에 한해서는 매우 수준급으로 변해 있었다. 금음의 앞부분만 척 들어도 상대가 얼마나 금을 잘 타는지 파악 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묵향의 경우 만통음제의 금음만 들어도 그가 뭘 표현하는 것인지 단번에 알아 맞추지만, 아쉽게도 설취의 능력은 그 정도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곡조에 섞 인 대략적인 느낌을 통해 금을 타고 계시는 사부님의 마음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된 설취였다.
“아마도 마음이 복잡하신 모양이구나. 사숙이 보고 싶으신 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득 그녀를 부르는 사부의 중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취아야!”
“예, 사부님.”
그녀는 급히 사부님의 처소로 달려갔다.
만통음제는 금을 소중하게 갈무리해 넣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노부는 양양성에 가야만 하겠구나.”
워낙 뜬금없는 말씀이시라 설취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양양성에는 왜 가신다는 것인가?
“양양성에 말씀이십니까?”
“들리는 소문으로는 패력검제가 이끄는 제령문도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고 하더구나. 물론, 네게 함께 가자고 강요하지는 않겠다. 황실이 무림에 관여하지 않았듯, 무림도 황실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때, 설취보다도 먼저 그 제안에 우렁차게 답해 온 것은 그의 첫째 제자 냉파천이었다.
“저는 사부님을 따르겠습니다. 원칙이 어떻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 말에 만통음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너는 이곳에 남아 있거라.”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부님께서 사지로 떠나시겠다는데, 어떻게 대제자인 제가 이곳에서 발 뻗고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제발 그 말씀을 거둬 주십시오.”
만통음제는 빙긋 미소 지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네 마음은 고맙다만, 너는 노부의 대제자가 아니냐? 너는 무림에 무명(武名)을 휘날리기에 앞서서 문파의 대를 이어야만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을 자나 깨 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문파의 명맥이 노부의 대에서 끊겨서야 되겠느냐? 그렇기에 너는 이곳에 남아야만 한다.”
냉파천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물러났을 때, 설취가 나직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출발은 언제 하시겠습니까, 사부님?”
“준비도 좀 해야 할 테고…, 아무래도 2주쯤 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저는 그동안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오겠습니다. 오랫동안 가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없는 동안 화아를 아버지께 맡기려고 합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길이기에 그곳에 가 보겠다는 말일 것이다. 설취의 할아버지와 만통음제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묵향과 만통음제의 관계처럼 그 둘도 무공의 고하와는 상관없이 음악으로 맺어져서 친하게 지냈었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설취를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오냐, 그렇게 하도록 하거라. 조금 늦어지더라도 내 너를 기다리마.”
인자한 사부의 말에 설취는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다음 날 새벽 설취는 제자 송화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보통 사람이라면 다녀오는 데 2주일 가지고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먼 거리였다. 하지만 무공을 익 힌 그녀들에게 있어서 그 정도 거리를 오가는 데는 2주일이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관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름길을 따라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었 기에 자주 야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야외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매우 정취가 있다. 모닥불 위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는 토끼 고기를 바라보며, 옛날이야기라도 나누면 더욱 재미있다. 재 미난 추억이 곁들여진 구운 토끼 고기는 비록 소금 간밖에 안 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맛은 천하진미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일품이다.
“이렇게 토끼를 구워 먹는 것도 아주 오랜만이로구나.”
“예, 사부님.”
송화는 토끼 다리를 뜯어 먼저 사부에게 건넨 후, 자신도 다리 하나를 들고 소금에 살짝 찍어 먹으며 말했다.
“너무너무 맛있어요.”
어쩌면 이것이 제자와의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제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설취의 눈빛은 너무나도 따사로웠다.
“그래, 많이 먹거라. 할아버지를 따라가서 처음 사부님을 뵈었을 때가 어제 일인 듯 기억에 생생하구나. 사부님께서 환골탈태한 고수라는 사실을 몰랐었던 나는 할아버지께서 후배를 만나러 나들이하신 건 줄 알았었지.”
설취는 송화에게 자주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해서 말했었다. 그렇게 엄청난 무공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모든 이들에게서 대협이라며 칭송을 들었을 정도로 그는 명망 있는 고수였다. 거기에다가 지금 그분의 산소에 가는 길이다 보니 자연 할아버지와의 추억담이 그들의 대화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송화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사조님께서는 그때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셨나요?”
설취는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란다. 화경의 고수는 주안술을 익힐 필요도 없이 몸이 무공을 펼치기에 최적의 상태로 환골탈태하거든.”
그러자 송화는 뭘 생각했는지 까르르 웃었다.
“호호, 저도 처음 사조님을 뵈었을 때는 정말 당황했거든요. 얼굴은 젊은 동안인데 수염을 길게 기르셔서 말이죠. 그때도 그러셨어요?”
그러자 설취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때 사부님께서는 수염을 기르시지 않으셨었지. 수염을 깎으신 사부님의 모습은 정말 젊게 보였거든. 할아버지께서 사부님을 소개하시며 앞으로 사부로 모시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나는 싫다고 막 떼를 썼었지. 너무 젊어서 왠지 오빠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사부라고 부르기는 싫었거든. 그런 내 모습을 보신 사부님께 서는 도저히 위엄이 안 선다고 하시면서 그때부터 수염을 기르기 시작하셨단다.”
만통음제의 칠흑처럼 긴 수염을 떠올린 송화는 킥킥거리며 웃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동안의 모습에 긴 수염은 도저히 안 어울렸기 때문이다. “킥킥, 사조님께서 수염을 기르신 게 다 이유가 있었군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많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젊은 외모를 하고 계시니 너무 어색하게만 느껴 “져요.”
설취는 살짝 미소 지은 후 말했다.
“아마도 그건 화경의 고수를 만나는 모든 이들이 가지게 되는 감정일 게다. 뭔가 부자연스러운 것을 대하는 듯한 느낌, 거기에다가 질투심이 서로 반반씩 섞인 것 이겠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사제 간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원래 설취는 할아버지 산소에 들른 다음, 그 인근에 있는 아버지의 장원에 들를 예정이었다. 그곳에 송화를 맡겨 놓고 돌아가, 양양성으로 떠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제자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 보니, 설취는 될 수 있으면 많은 것을 제자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 그리고 그녀가 원했던 모든 것들……. 어쩌면 이번에 자신이 목숨을 잃더라도, 제자에 의해서 그 모든 것들이 구현 되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교교한 달빛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설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 이야기를 받아 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송화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질문은 설취를 당혹스럽 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부님께서는 왜 결혼을 안 하세요?”
제자의 갑작스런 당돌한 질문에 설취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씁쓸함과 당혹스러움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내가 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 그러니까 사부님을 만나기 전이었단다. 내가 할아버지와 함께 무림에 처음 나갔을 때였지. 그때, 어떤 무인을 만난 적이 있었단 다.”
꿈을 꾸는 듯 과거를 회상하는 사부의 안색을 살피며 송화는 그 사람이 사부의 결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직감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예에? 그 사람이 누군데요?”
송화의 두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너무나도 고고하게만 느껴졌던 사부의 과거를 들을 기회가 온 것이다. 흥미가 동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설취는 쑥스 러운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몰라.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단편적으로 떠오를 뿐이지. 그는 그 당시 악명을 떨치던 무뢰배들을 순식간에 제압해 버린 사람이었지.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그렇게 강하다는 것을 나는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었거든. 그래서 매우 놀랐던 것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단다. 사실 그가 검을 쓰는 모습을 나는 보지도 못했 지만, 나중에 그 흔적만은 볼 수 있었지. 할아버지께서는 그 흔적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그가 엄청난 고수였다고 나한테 말해 줬지. 할아버지보다도 훨씬 더 강한…….?”
“그래서요?”
호기심 어린 제자의 눈동자를 보며, 설취는 미소 지었다.
“그래서요는 무슨. 어찌되었건 그 일이 있는 후부터 만나는 남자들은 모두 다 그와 비교가 되는 거야.”
사실 워낙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 사람에 대한 거의 모든 기억이 희미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받았던 몇 가지 특정적인 기억만은 남아, 그것이 그녀가 남성을 보는 기준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우와! 그래서 아직까지……. 참, 그 사람이 누구예요? 사부님께 그 정도 인상을 남겼다면 지금쯤 무림에 명망 있는 대협으로 위명을 떨치고 계시지 않을까요? 어 쩌면 아직도 결혼하지 않고 계실 수도 있잖아요?”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단호한 사부의 말에 송화는 눈빛을 빛내며 되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세요?”
설취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동자공(童子功)을 익히고 있었거든.”
동자공이라는 말에 송화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녀도 동자공이 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 정말이세요?”
“내가 왜 네게 거짓말을 하겠니. 그때 내가 동자공이 어떤 무공인지 모르고 할아버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단다. 할아버지는 아주 난처해하시며 나중에 자연히 알 게 된다고 하셨지. 사실 동자공이 뭔지 나중에 알았을 때, 왜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난처해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지. 어쩌면 그 때문에 그 사람이 더욱 기억에 남았 는지도 몰라. 지금도 동자공이라는 말을 들으면 할아버지께 질문을 던져 난처하게 만들던 때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리는걸.”
“서로 결혼은 할 수 없더라도, 왕래를 가질 수는 있잖아요. 혹시, 그 후에 그분과 만난 적은 있으세요?”
“아니,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사부님을 만나고, 또 너를 만나고…, 이리저리 바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그의 이름까지도 잊어버리고 말았구 나. 아주 독특한 이름이었는데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수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으니…….?
“그런데, 그분의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셨어요?”
제자가 매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설취는 기억나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꽤 오랜 시간 동행했었는데도 할아버지조차 그의 진정한 실력을 알지 못했어. 엄청난 실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거든. 그리고 사건의 발단은 누군가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벌어진 것이었어. 무림의 명숙이셨던 할아버지도 건드리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으니 아주 강한 자들이었 지. 그런 만큼 그 상황에서 나섰다면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무참하게 모두 죽여 버린 것을 보면 일단 칼을 뽑으면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야. 그런 멋있는 남자는 흔한 게 아니거든.”
가만히 듣고 있던 송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사부의 설명에 매우 근접하는 인물이 한 명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듣고 보니 묵향 사숙조 어르신하고 비슷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네요. 사숙조 어르신 성격이 좀 그렇잖아요?”
그 말에 설취는 발끈했다. 제자의 천진난만한 추측이었지만, 그녀의 오랜 추억을 박살 내는 그런 말이었기 때문이다.
“뭐? 어떻게 그런 사람하고 비교를 할 수 있다는 말이냐?”
사부가 노화를 터뜨리자, 송화는 찔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기에 사부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이 생각한 바를 설명했다.
“사실 나중에 사숙조께서 천마신교 교주라고 밝히시지 않았다면 몰랐을 정도로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안 하시잖아요. 또 여행하면서 저한테 아주 잘해 주셨거 든요. 그리고 보통 사람들에게 당신께서 강자라고 해서 일부러 시비 걸지도 않으시고 말이에요. 하지만 사숙조 어르신과 싸워서 살아남은 사람이 전무하다는 소문 을 들은 걸 보면 칼만 뽑으면 정말 무자비하신 모양이던데요. 사숙조 어르신께서 사숙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세요. 한 차원 높은 경지에 대해 상세하 게 설명까지 해 주시는 자상함을 보이시다가 한 번 틀리니까 사숙님을 무참하게…..
그때 일이 생각나는지 송화는 두려움에 가볍게 몸을 떨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때, 제자의 말을 들으며 설취의 뇌리 저편에 묻혀 있던 한 토막의 기억이 갑작스럽게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길동무를 함께 하자며 의향을 묻자, 그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좋지요. 저는 묵향(墨香)이라 합니다.」
설취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 그래. 이제 기억이 나, 그때 그 이름을 듣고 참 특이하고 멋있기는 하지만 무인의 이름은 아니라고 생각했었지.”
그토록 오랜 세월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건만 기억나지 않았던 그 이름이 왜 지금에서야 갑작스럽게 떠올랐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 이름이 자신이 그토록 끔찍하 게 생각하고 있던 마교 교주 묵향일 줄이야.
설취는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이 그일 리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동명이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설취는 머릿 속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마교의 교주, 암흑마제, 악마들의 지배자, 온갖 추잡스런 마공들을 통해 절대의 경지에 들어간 악마. 이 모든 것이 동일한 사람을 지칭 하는 말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자신이 그리워하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설취는 혼란스러운 심정에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것을 본 송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사, 사부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한참 머리를 흔들며 괴로워하던 설취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이때, 그녀의 눈과 송화의 눈이 마주쳤다. 제자의 맑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설취는 화 들짝 놀랬다. 깨끗한 제자의 눈을 보자 마치, 제자가 자신의 속마음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황급히 송화의 시선을 피하며 설취는 얼버 무리듯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설취의 표정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사부가 자신의 말에 그토록 충격을 받을 줄 몰랐기에 송화는 한껏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 죄했다.
“사부님, 제가 너무 경솔한 말씀을 드려서, 사부님의 아픈 기억을 건드렸나 봐요.”
설취는 왠지 콧잔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그녀는 애써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자에게 말했다.
“그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어쨌거나 너도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거라. 겸손하며 약자를 보호할 줄 알고 또, 꼭 손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망설 이지 않아야 한다. 언제나 손을 쓰기 전에 세 번을 생각하거라. 그렇다면 결코 틀림이 없을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설취는 다음에 묵향 사숙을 만나면 반드시 예전에 자신을 만난 적이 있었느냐고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이때, 뭔가 엄청난 기운이 자신들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고 있음을 뒤늦게 눈치 챈 설취는 재빨리 송화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그런 다음 검을 뽑아 들었다. 워낙 늦게 눈치를 채서 그런지 벌써 침입자는 그녀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후였다.
모습을 드러낸 침입자는 무림인이 아니라 승려들이었다. 어둠을 뚫고 나타난 20여 명의 승려들은 어디선가 치열한 격전이라도 벌인 듯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하 지만 설취는 승려들의 옷차림이 아니라 이마에 찍힌 계인(印)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마에 계인을 찍는 곳은 소림사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소림승들이 란 말인가?
상대가 소림승이건 아니건 간에 일단 적의는 없어 보였다. 설취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이쪽도 적의가 없음을 표시했지만, 그래도 상대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는 않았다. 그것을 보고 승려들 중의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아미타불, 소승은 광료(廣了)라 하오. 시주들의 휴식을 방해한 것 같아 죄송하구려.”
설취로서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광료라는 법명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들이 가짜가 아닌 진짜 소림승이라고 가정한다면 광자 배가 가지는 배분의 위치는 대단히 높은 것이었다. 현재 소림의 장문인이 대(大)자 배이고, 그를 떠받치는 원로들이 덕(德)자 배, 실질적인 행동을 하는 승려들 중에 서 가장 높은 배분이 그다음인 광(廣)자 배인 것이다.
상대가 통성명을 하고 나왔기에 설취 또한 마주포권하며 대답했다.
“유운비화 설취라 합니다.”
그 말에 광료는 함빡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오, 유운비화 시주셨구려. 말씀은 몇 번 들은 듯하구려.”
설취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선사께서는 소림에서 나오셨습니까?”
그 말에 광료선사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예, 그러하오이다. 그건 그렇고 시주께 말을 건 것은 이곳에 얼마나 계셨었는지. 또, 계시면서 혹시 무슨 이상한 일을 겪었다든지, 혹은 이상한 기척을 느낀 적은 없는지 하는 것을 묻기 위함이외다.”
아마도 광료선사는 이곳에 피워 놓은 모닥불을 보고 달려온 모양이다. 그 말에 설취는 저으기 안심하며 대답했다. 일단 상대는 누가 뭐라 해도 공명정대하기로 이 름난 소림 승려니까 말이다.
“이 아이는 제 제자 송화라고 합니다. 저희들은 지금 어딘가 다녀올 곳이 있어서 그곳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저녁나절쯤 이곳에 도착하여 밤을 보내고 있던 중 이었지요. 여기 있으면서 지금까지 이상한 기척을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소이까? 협조해 주셔서 감사하오이다. 그럼 갈 길이 바빠서 이만…….”
승려들은 누군가를 추적하던 중이었던 듯 그 말을 끝으로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승려들의 고절한 경신술에 송화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말했다.
“소림이 무림의 태두라고 해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까 그게 아니네요, 사부님.”
설취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림의 힘은 위대하단다. 다만, 그들이 지닌 힘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겉으로 약하게 보인다고 해서 다 약한 게 아니거든.”
“그런데 소림사에서 저토록 잡으러 다니는 사람이 누굴까요?”
“글쎄다. 광자 배분의 승려가 나섰을 정도라면 대단한 인물일 텐데…, 별로 짚이는 사람이 없구나.”
소림승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는 설취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과연 소림승들이 누구와 싸우고 있었던 것일까? 지금까지 소림은 될 수 있 으면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딱히 의심이 갈 만한 단체나 대상이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