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9권 7화 – 흑풍대의 분전과 오해

흑풍대의 분전과 오해

흑풍대는 최대한 빨리 이동하여 양양성 인근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곧장 금군과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금군의 수는 무려 30만에 달한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자들로 구성된 흑풍대라고 하더라도 그들을 상대로 정면 대결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관지는 금군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막사를 치고 금군의 동태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따로 정찰대 30개 조를 뽑아서 금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 었지만, 그 외에 무영문이나 비마대에서도 계속적인 정보가 흘러 들어왔기에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정보의 부족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관지는 과거 대송의 무장 출신이었기에 여러 세력과 연합한 합동 작전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이점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의 어림군들에게 전령을 보냈다. 자신이 무림의 강대한 문파들 중의 하나인 천마신교에서 보낸 지원군임을 밝히고, 상호 합동 작전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적의 정보 외에 아군의 정보도 충분히 입수함으로써 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세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흑풍대가 이곳에 도착한 지 1개월 정도가 흘렀을 때, 드디어 금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영문에서 금군 20만이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보내 왔고, 정찰대 또한 그렇게 보고해 왔습니다.”

관지는 지도를 세심히 살펴봤다. 이대로 이동해 봐야 아래쪽은 대별산맥(大別山脈)이 가로막고 있다. 그곳을 넘는다면 광활한 곡창지대가 펼쳐진다. 그리고 곡창 지대의 중심에는 호북성(湖北省)의 성도(省都) 무한(武漢)이 있었다. 무한은 한수와 장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놈들이 무한을 노리는 모양이군. 하기야, 무한만 점거할 수 있다면 장강을 도하渡河)하기도 한결 쉽겠지.”

무한은 교통의 중심지인 만큼 운송 사업이 발달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배들을 징발하여 장강을 건너기도 쉬울 것이다. 설혹 무한에 있는 배를 모조리 불태운다 하 더라도, 그곳에 살고 있는 조선공들을 끌어 모은다면 배를 건조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 말에 마화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틀림없습니다. 무한만 점령할 수 있다면 남양(陽) 방면으로 뚫린 관도를 통해 보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굳이 무리해서 양양성을 점령하지 않아도 되죠.” “그렇다면 선택은 두 가지군. 무한을 방어하느냐, 아니면 이제 10만으로 줄어든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놈들을 치느냐…….”

“먼저,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놈들을 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마화의 말에 관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양양성은 얼마든지 더 버틸 수 있겠지만, 무한은 다르다. 양양성을 포위한 적군을 격파할 수는 있겠지만, 그때쯤이면 아마도 무한을 잃게 될 거야. 그리고 언제 장 인걸이 거느린 대군이 남하해 올지 알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무한을 잃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뼈아픈 손실이 되겠지.”

이제 결정은 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마화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며 말했다.

“수하들에게 출동 준비를 하라 이르겠습니다.”

“무한 쪽에 있는 어림군에게도 기별을 넣어라. 금의 대군이 무한 쪽으로 남하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무영문에도 통고하여 그에 대비하도록! 여기를 최후의 저지선으로 잡으면 될 거야.”

마화는 관지가 지도에서 가리킨 지점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곳은 무한에서 북쪽으로 15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넓은 평원이었다. 서쪽으로는 탁 트인 평원 이었고, 동쪽으로는 야트막하기는 하지만 산들이 펼쳐져 있었다.

일반 병사들에 비해 기동력이 훨씬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흑풍대나 무림인들이 주축이 되어 방어전을 하는 데 있어서 결코 나쁜 지형이 아니었다. 무한은 양양성 처럼 요새화된 도시가 아니다. 그런 만큼 무한에서 시가전을 펼치는 것보다 이곳에서 전투를 벌이는 편이 훨씬 유리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그쪽으로 이동해서 그들과 합류해야겠군요.”

그 말에 관지는 빙긋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벌써부터 그쪽으로 갈 필요는 없지.”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거기 모여들 병력의 수야 뻔한 것 아니겠나? 고작해야 5만도 안 되겠지. 그 수로 20만의 병력과 정면 대결을 하자는 말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들이 지닌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여 적들을 친다. 마침 적들은 대별산맥으로 향하고 있다. 매복하기 딱 좋은 곳이지. 만약 그게 실패한다면 어쩔 수 없이 정면 대결을 해야겠지만, 그러면 피해가 막심할 거야. 안 그런가?”

그 말에 마화의 표정에는 얼핏 상관에 대한 존경의 빛이 떠올랐다. 관지에 대한 수하들의 신뢰는 바로 이것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최대한 수하들에게 피해가 없 도록 계획을 수립하는 것. 바로 이 점 때문에 수하들은 전장에서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되는 것이었다.

마화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수하들에게 그렇게 지시해 두겠습니다.”

양양성에서 이탈한 금군 20만은 하루 종일 강행군하여 80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다음 날도 80리 길을 행군했다. 목표인 무한까지의 거리는 약 5백 리. 무한을 방 어하고 있는 송군이 방어 준비를 갖출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그들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동할 필요성이 있었다. 거기에다가 송군은 지금 파멸 직전이었다. 겨우 양양성을 방어할 수 있을 뿐이 아닌가. 적의 기습을 받을 염려가 없으니 마음껏 강행군하고 있는 것이다.

이틀 동안 무려 160리 길을 걸어왔기에 병사들은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외곽에 보초병들을 세워 놓고 모두들 피곤에 지쳐 달콤한 꿈나라로 들어갔다.

두두두두두…….

땅바닥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질 정도다. 엄청난 규모의 기마 부대가 접근한다는 것을 눈치 챈 보초병들이 요란한 소리로 경종을 울려 댔다. 그 소리에 막사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던 병사들이 군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이때, 흑색 갑주를 두른 수천의 기마병들이 너도나도 손에 횃불을 하나씩 들고 들이닥쳤다. 하지만 자다가 놀라서 깬 금군 병사들에게 그 수는 수천이 아니라 수만 으로 보였을 게 틀림없다. 기마병들은 빠른 속도로 주위를 달려 다니며 우왕좌왕하는 금군 병사들을 마구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진 창검이 번뜩일 때마다 허 둥대던 금군 병사는 시체로 바뀌고 있었다.

금군의 몇몇 장수들이 말을 타고 상대와 대적하기 위해 달려 나갔지만, 오히려 시체의 수만 늘릴 뿐이었다.

“크아악!”

달려 나오던 금군 장수를 간단하게 창으로 찔러 죽여 버린 후, 마화는 소리쳤다.

“적이 혼란한 틈에 군량을 불살라라!”

적의 후위 부대에는 20만의 인마가 먹을 막대한 양의 군량이 있었다. 수천에 달하는 소가 끄는 수레에는 군량이 가득 적재되어 있었다. 흑풍대의 1차적 목표는 바 로 이 군량이었다. 배가 고픈 상황에서 어찌 군대가 싸울 수 있겠는가.

군량을 실은 수레들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을 막기 위해 금군들이 발악을 했지만, 워낙 혼란스런 와중이라 집단적인 반격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소수의 반격쯤이야 흑풍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혀야 한다. 서둘러라!”

마화는 소리치며 말에 박차를 가해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의 뒤를 10여 기의 수하들이 뒤따라 달려갔다.

그날 밤, 금군은 지옥이 뭔지 경험해야만 했다. 수만이나 되는 적의 기마대가 새벽녘이 될 때까지 진 안을 휘젓고 다녔던 것이다.

투구를 멋진 깃털로 장식하고 있는 장수는 피로에 찌든 안색으로 막사 밖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금군 병사들이 여기저기에 쓰러진 시체들을 옮긴다고 부산하게 움 직이고 있었다.

“피해는 어떤가?”

그 질문에 그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무장들 중의 한 명이 대답했다.

“대단히 막심하옵니다, 원수. 특히 치중대(輜重隊)에서 수송하고 있던 군량을 모두 잃은 것이 가장 큰 피해이옵니다.”

원수는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직까지도 송에 그만한 정예 병력이 남아 있을 줄이야……. 놈들의 위치는 파악했느냐?”

“척후병들을 보냈지만 아직까지 연락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보내라. 적의 규모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옛.”

지시를 받은 무장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것을 바라보며 원수는 중얼거렸다.

“군량만 불태우고 뒤로 빠진 것을 보면 적의 수는 생각 밖으로 적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 말에 무장들 중 한 명이 대답했다.

“회군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원수. 지금 남은 군량으로는 얼마 버틸 수가 없사옵니다. 설혹 무한을 점령할 수는 있겠사오나, 식량도 없이 그곳에 어찌 주둔하 려고 하시옵니까?”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무장이 신경질을 버럭 내며 외쳤다.

“자네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원수, 지금 계절은 바야흐로 가을이 아니옵니까? 주위에서 거둬들일 수 있는 양도 꽤 될 것이옵니다. 병사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군량도 적은 양은 아니옵니다. 최소한 10일은 버틸 수 있사옵니다. 그동안 무한을 점령하면 문제될 것이 없사옵니다.”

그러자 그 의견에 동조한다는 듯 그 옆에 있던 무장 하나가 호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의 수가 적다면 계속 진격하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원수. 놈들이 야습을 가해 왔다고 하지만, 대비를 잘 갖춘다면 또다시 당할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잠시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군량을 잃은 것은 그만큼 뼈아픈 실책이었던 것이다. 그때 한 무장이 원수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원수께서 야습 한 번에 기가 꺾여서 후퇴했다는 것을 황제 폐하께서 아신다면 크게 노하실 것이옵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무장이 질책했다.

“자네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겐가! 영민하신 황제 폐하께옵서는 원수께서 후퇴하신 것을 이해하실 걸세.”

마침내 원수는 마음을 정한 듯 벌떡 일어서며 명령했다. 부하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물론 황제가 이해해 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분노하여 자신의 목을 벨 확률 또한 있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원수는 나중에 후퇴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시간을 좀 더 뒤로 미루기로 결심했다. 만약 후퇴를 하더라도 누구나가 다 인정할 수 있을 법한 때에 후퇴하면 모양새도 좋을 것이 아닌가.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 좋을 듯했다.

“막사 주위에 방책을 치고 기습에 대비해라. 오늘 하루는 여기서 푹 쉰 다음 내일부터 다시 진군한다.”

원수의 지시에 무장들은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옛.”

다음 날, 금군은 다시금 진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 이동하지도 않았을 때 3천 기 정도의 기마대가 앞을 가로막았다. 전신을 흑색 갑주로 감싼 기마병들 이었다. 바로 간밤에 자신들의 진영을 들쑤셔 놨던 그놈들.. 그들을 보자마자 금군 장수들 중 한 명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 나갔다. 그는 창을 휘두르며 상대방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그것을 본 상대편 기마무사들 중의 한 명이 안장에 매어 둔 활을 벗겨 들었다. 그 무사가 살을 메겨 발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것 만 봐도 그가 얼마나 궁술에 조예가 있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피우우우웅——!

대기를 찢을 듯한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끝났을 때, 퍼억하는 소리와 함께 달려 나가던 금군 장수가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즉사였다. 그의 시체에는 화살 한 대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것을 본 금군 진영이 술렁거렸다. 사실 이런 식으로 달려 나가면 맞싸워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던가. 그렇지 않고 곧장 화살을 날리다니 너무 나도 비열한 행위였다.

하지만 금군의 반응이 어떻든 흑색 갑주를 입은 무사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료가 금군 무사를 사살한 것이 마치 신호라도 된다는 듯 저마다 말 등에 매여 있던 활을 꺼내 들었다.

서로 간의 거리는 1백 장(약 3백 미터)이 넘었다. 활의 최대 사거리를 한참 벗어나는 그런 거리였다. 아마도 활을 준비한 채로 돌진하면서 쏘려는 것이 아닐까 하 고 예측한 금군 장수들은 창병들과 방패수들을 앞에 세우며 적의 돌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기마병들이 화살을 쏴 대기 시작했다. 활시위를 가득 당겨 발사한 화살은 하늘을 꿰뚫을 듯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금에 비해 뛰어난 장인들을 보유한 송의 활은 사거리가 훨씬 길다. 하지만 길다고 해봐야 유효사거리 1백 보, 지금처럼 최대사거리로 쏜다면 250보를 넘기기 힘들 다. 그렇지만 금의 장수들은 모르고 있었다. 상대방이 사용하는 것이 송의 활이 아니라 저 이름 높은 고려의 활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동이(東夷)라고도 불릴 만큼 활에 능한 고려인들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강력한 활을 만들어 냈다. 정교하게 제작된 만큼 습기에 매우 약한 것이 흠이었지만, 그 엄 청난 사거리를 생각한다면 그 정도 약점은 약점도 아니었다. 고려의 활은 송의 활에 비해 무려 1.5배가 넘는 사거리를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그 활을 사용하는 자들은 무공이 뛰어난 흑풍대의 고수들이었다. 똑같은 활을 사용한다고 해도 훨씬 더 멀리 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들에게 고려의 활까지 주 었다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다름없는 효과를 발휘했다.

저 앞 땅바닥에 꽂힐 거라고 예상했던 화살들이 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금군 진영에 우박처럼 쏟아졌다.

“으아악!”

갖가지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신을 차린 인물들은 등에 지고 있던 방패를 꺼내어 막았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화살을 피해 뒤로 도망친다고 정신이 없었다. “모두들 당황하지 마라. 방패수들은 앞으로! 위에서 떨어지는 화살을 막아라!”

몇몇 장수들이 뛰어다니며 혼란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장수에게 창검을 겨누는 자들마저 있을 정도였 다.

전위가 혼란의 극에 달해 있을 때, 후위에서 대기 중이던 기마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전위 부대를 지휘하던 장수가 앞에서 활을 쏴 대는 적들을 쫓아 내기 위해 기마병을 투입한 모양이다.

기마병들이 달려 나오자 화살의 목표는 곧장 보병에서 기마병 쪽으로 돌려졌다. 말과 사람이 화살에 맞아 뒹구는 가운데, 금의 기마병들은 미친 듯 말을 몰아 서로 간의 거리를 좁혀 갔다.

“하앗! 이랴!”

달리는 말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금의 기마병들은 칼을 뽑아 들었다. 이제 곧이어 놈들과 싸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흑색 갑주의 기마대는 금군 기마병들이 접근 해 오자 재빨리 말고삐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놈들을 추격해라.”

“다시는 화살을 못 쏘도록 끝장을 내버려랏!”

곧이어 흑색 갑주의 기마대와 금군 기마병들 사이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금군 기마병의 수는 1만 2천. 겨우 3천 기밖에 되지 않는 흑색 갑주의 기마대 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아군 기마병들을 응원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들에게 무 자비한 화살을 퍼붓던 상대가 저렇듯 죽자 살자 도망치는 모습을 보니 속이 후련했던 것이다.

“전군 전투 준비!”

마화의 명령에 따라 숲 속에 매복하고 있던 흑풍대원들은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취향에 따라 장검이나 장도를 쓰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말 등에 비끄러 매 뒀던 긴자루가 붙은 참마도(斬馬刀)나 장창을 꺼내 들었다.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매복하고 있던 그들 앞쪽으로 관지가 지휘하는 부대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리고 분노에 찬 함성을 질러 대는 금군 기마병들이 그 뒤를 바짝 붙어 쫓아갔다.

그와 동시에 마화가 창을 번쩍 들며 외쳤다.

“돌격!”

마화의 뒤에 서 있던 6천 기의 인마가 그 명령에 따라 매복하고 있던 장소에서 벗어나 대지를 박차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산길을 따라 앞뒤에서 포위당한 금군 기마병들은 어디로도 도망칠 데가 없었다. 용맹스럽게 저항했지만, 이미 그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앞뒤에서 그들을 포 위한 자들이 누군가. 바로 마교가 자랑하는 흑풍대다. 흑풍대를 구성하고 있는 무사들의 무공은 과거 변방의 이민족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찬황흑풍단보다 더 했 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포위당했으니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피해는?”

부대장인 마화의 짤막한 물음에 각 대의 대장들이 피해 상황을 보고했다. 치열한 난전이 벌어진 상황이었기에 아무리 흑풍대라 해도 피해가 없을 수는 없었다. 물 론 부상자들의 대부분은 격전의 와중에 쓰러지는 말과 함께 넘어져 구르다가 상처를 입은 자들이었다.

마화가 천인대장들의 보고를 받고 있는 동안 관지는 주인을 잃고 돌아다니고 있는 말들을 붙잡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 수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1백여 명 정도입니다만 크게 다친 자는 없습니다.”

“자, 철수한다.”

그날 저녁 또다시 흑색 갑주를 걸친 3천기의 기마대가 자신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금군 진영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저들을 격파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1만 2 천기의 기마병들이 전멸당했다는 것을 그들도 소문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상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등에 지고 있던 방패를 꺼내어 앞을 가리는 자들도 있었고, 방패를 지니고 있지 않은 자들은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금군의 장수들은 큰 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하며 진형을 짜는 데 여념이 없었다.

흑색 갑주의 기마대는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더니 1백 장 정도 거리에서 딱 멈춰 섰다. 그리고 그때, 그들 중 한 명이 활을 꺼내 들었다. 활을 꺼내 드는 것과 살을 메기는 것은 거의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병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공포스러운 파공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피우우우웅——!

퍼억!

군사들을 독려하고 있던 금군 장수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안 봐도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병사들은 더욱 공포에 떨기 시작했 다. 이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갑주를 걸친 무장을 해치운 것이다. 갑옷을 꿰뚫을 정도라면 나무에 가죽을 덧씌운 방패 따위는 있으나 마나가 아닌가. 그것에 생각이 미치자 방패를 들고 있던 병사들은 하나 둘씩 뒤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기 시작했지만 장수들은 그들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상대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병사들이 아닌 바로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몇몇 장수가 말을 몰아 슬금슬금 뒤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입으로는 병사들을 독려하는 척하면서 말이다.

화살은 쉬지 않고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화살이 대기를 가르는 공포스러운 소리가 끝났을 때, 어김없이 한 명의 시체가 남는 것이다.

이때, 아직까지 가만히 있던 다른 흑색 갑주의 기마대가 앞으로 조금 더 전진해 나오며 화살을 쏴 대기 시작했다. 이미 상대의 방패수들은 화살을 막을 형편이 아 니었기에 그들이 쏜 화살의 좋은 먹잇감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금군은 몰랐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고려 활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 먼 거리에서 갑주를 꿰뚫을 정도로 강력한 화살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은 3천의 기마병들 중에서 관지 단 한 명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엄청난 수를 지닌 금군이 앞으로 밀어붙일 생각은 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하자 그것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병사들의 머릿속이 공포라는 감정으로 꽉 차 버리면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공포는 옆에 있는 병사들에게 전염되는 것이다.

6만이 넘는 금군의 전군(軍)이 겨우 3천 기의 기마병에 밀려 뒤로 도망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그 공포감은 뒤로뒤로 전염되며 중군(中軍)까지도 뒤로 도 망치기 시작했다. 3천 기의 기마대는 그들의 뒤를 여유롭게 쫓아가며 화살을 퍼붓고 있었다. 금군 장수들은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거느리는 병사들에 밀 려 우왕좌왕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상대가 기마병이 아니라면 돌진해서 해치울 가능성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마병이 아닌가. 이쪽 보병들이 돌격해 들어간다면 슬쩍 뒤로 내뺀 다음 다시 활을 쏠 게 뻔했다.

“도저히 저들을 상대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이 병사들의 뇌리에 자리 잡고 있는 한, 극에 달한 병사들의 혼란을 수습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무엇들 하는 것이냐? 놈들은 겨우 3천이 아니냐!”

갑주에 호화로운 장식을 달고 있는 금군 원수는 입에 거품을 물며 주위에 서 있는 장수들에게 호령했지만, 그들이라고 딱히 방법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병사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일단 어느 정도 후퇴하셔야 할 듯하옵니다, 원수.”

“만약 이 상태로 적과 싸운다면 도무지 어떻게 손을 써 볼 방법이 없사옵니다.”

부하 장수들의 무기력한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원수는 노성을 터뜨렸다.

“이, 멍청한 놈들! 당장 쇠뇌를..

여기까지 말한 원수는 황급히 말을 끊었다. 쇠뇌 부대를 모두 양양성에 두고 온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한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요새 도시가 아니다. 무한을 공략하는 데 쇠뇌가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없어도 상관없었다. 20만씩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하는 데 쇠뇌쯤 없으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싶어 놔두고 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천추의 한이 될 줄이야…….

“기, 기마병들을 내보내라!”

금군 원수는 지금까지 뛰어난 업적을 쌓아온 역전의 맹장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군 붕괴로 연결 되면 안 된다. 붕괴는 곧, 패망으로 직결된다. 20만이 3천 기에 박살나는 말도 안 되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옛!”

이미 전군(前軍)을 지원하던 기마병 1만 2천을 잃은 상태다. 그렇기에 기마병은 중군에서 보유하고 있는 1만 5천이 전부였다. 병사들의 혼란을 막는 데 주력하고 있던 기마병들은 원수의 명령에 따라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원래 기마병의 역할이라는 것이 최전선에서 적진을 돌파하는 것과 후퇴하는 과정에서 가장 뒤에 남 아 후방을 엄호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금군 기마병들이 돌진해 오자, 흑색 갑주의 기마대는 슬쩍 뒤로 후퇴했다. 저들의 매복에 걸려 아군 기마병 1만 2천이 박살이 났음을 뻔히 알고 있는 금군 기마병 들이 그들을 뒤따라 깊숙이 쫓아올 리 없다. 서로 간의 거리가 적당하게 벌어지면 곧장 흑색 갑주의 기마대는 화살을 날렸다. 한 번에 수백 대가 넘는 화살이 날아오 는 것이다. 금군 기마병들의 피해가 없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죽고 말이 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그렇다고 저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갈 수도 없었다. 어디에 또 다른 패거리를 숨겨 놓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 해동원된 적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 밀고 당기기를 하다 보니 금군 기마병들의 피해는 가랑비에 옷 젖듯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기마병들을 지휘하던 금군 장수는 부하들에게 퇴각 명 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적들에게 계속 휘둘리다 보면 더욱 피해만 늘어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군 기마병이 시간을 끌고 있는 동안 보병대는 한시름 돌릴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다시금 전열을 회복하고, 방책을 세워 흑색 갑주의 기마대의 난입에 대비할 수 있었다. 금군은 기마병들의 막대한 피해를 등에 업고 전군 붕괴로 이어지는 패퇴를 막을 수 있었다. 대 요제국을 멸망시키고, 또 대 송제국의 주력 부대를 멸한 것도 다 이런 금군 장수들의 뛰어난 실력이 밑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날 밤, 금군은 적의 난입에 대비해 철저하게 준비했다. 보초의 수를 평상시의 열 배로 늘이고, 주위에서 나무를 잘라다가 막사 주위에 수많은 방책들을 만들었 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어, 모든 병사들에게 갑옷을 입은 채 잠을 자라는 명령을 내려놨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금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엉망하고도 진창이었다. 모두들 갑옷을 입고 잠을 잤기에 온몸이 찌뿌둥했다. 거기에다가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 른다는 긴장감에 깊게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그래서 수면 부족으로 머릿속도 멍한 상태였다. 병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적들의 공포스러움에 대해 쑤군거리고 있었고,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적과 싸울 수가 있다는 말인가.

“퇴각해야만 하옵니다, 원수.”

아직까지도 원수는 주저주저하며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20만이나 되는 병력을 가지고 무한을 공격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3만이 넘는 병력만 잃고 후퇴한다면 잘 못하면 자신의 목이 날아갈 우려가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적과 싸움다운 싸움이라도 해 봤으면 모르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병사들은 적과 접전을 벌이지도 못한 상황이 아닌가.

휘하에 있는 많은 장수들이 후퇴를 건의하고 있을 때, 정찰 나갔던 병사들의 일부가 돌아왔다. 그들의 보고를 받은 장수는 분노에 가득한 얼굴로 원수에게 보고했 다.

“적군의 규모를 파악해 냈사옵니다, 원수!”

그 말에 원수는 다급히 질문을 던졌다. 일단 적의 규모를 알아야 후퇴할 것인지, 아니면 진격할 것인지 결정을 내릴 수 있으니 말이다. 만약 적의 규모가 이쪽과 대 등한 것이라면, 그런 강대한 적을 상대로 후퇴했다고 해도 자신에게 큰 책임이 돌아올 가능성은 없지 않겠는가.

“그래, 어느 정도 규모라고 하더냐?”

관지의 명령으로 적의 척후병들을 눈에 띄는 대로 없애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일부가 흑풍대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겨우 1만 정도의 기마병들이라고 하옵니다.”

그 말에 원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기마병만 1만이란 말이냐? 혹시 보병대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니고?”

“주위를 샅샅이 뒤지라고 명령했사옵니다. 이 인근에 송군 보병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하옵니다.”

그 말에 원수는 분기탱천해서 으르렁거렸다.

“아니 그렇다면 겨우 기마병 1만 기에게 지금껏 조롱을 당하고 있었단 말이냐? 이런 씹어 먹을 녀석들! 내 그놈들의 간뎅이가 얼마나 큰지 필히 배를 갈라 볼 것이야.”

무림맹에 모인 장로들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무영문에서 방금 전해져 온 한 통의 전서 때문이었다.

“크으윽! 공수개 장로. 이것이 사실이오이까?”

공수개 장로는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노부가 알아 본 바로는 유감스럽게도 사실이오.”

“허어, 참. 마교 놈들이 초전부터 적잖은 전과를 거두고 있다는데, 본맹에서 끌어 모은 무사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이오?”

그들의 안색이 어두운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무림맹은 황실과 민초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금제국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하고, 무림동도들을 향해 오랑캐와의 전쟁에 참가해 달라는 격문을 돌렸었다. 그 때문에 수많은 무림인들이 분연히 일어서서 전쟁터로 달려갔다. 그들은 지금 세 방향에서 송군과 협력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양양성으로 달려간 무리들은 패력검제의 지휘 하에 양양성에서 분전 중이었다. 그리고 수전에 능숙한 인물들은 회하에 주둔 중인 수군과 합류하여 금군 이 도하 작전을 감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그리고 남은 인물들은 모두 수라도제를 중심으로 무한에 집결 중이었다.

물론, 전쟁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것도 정파 쪽이었고, 양양성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양양성에서 수십만의 금군과 상대로 분전하고 있다고 해도, 양양성에서의 전투주체는 악비 대장군이 이끄는 송군이었다. 다급히 그쪽으로 달려간 소수의 무림인들이 협조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교 놈들이 단독으로 작전을 감행하여 20만의 금군과 격전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20만을 상대로 1만으로 덤빈 그놈들이 씨몰살을 당했다 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만, 적잖은 전과를 올리고 있다고 하니 배가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수개 장로는 자신이 아는 대로 대답했다.

“그놈들이 괘씸하게도 수라도제 대협에게는 무한 인근에서 방어전을 전개하자고 해 놓고, 자기들끼리만 앞에 나서서 싸운 모양입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격앙에 찬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이런, 망할 놈들을 봤나. 맹주님, 이건 놈들이 무한 방어전의 전공을 자기들이 독차지하기 위해 잔대가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맞습니다. 뒤늦게 수라도제 대협이 이끄는 세력이 합류한다고 하더라도, 세인들은 처음부터 승리를 거두며 자신들의 힘을 과시한 마교를 기억하게 되지 않겠습 니까? 마교가 다 이겨 놓은 싸움에 무림맹은 그저 들러리를 섰다고 뒤에서 쑤군거릴 게 분명합니다.”

“수라도제 대협에게 최대한 빨리 이동하여 마교도들과 연합세력을 구축하라고 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쪽의 수가 월등하게 많은 만큼 승리를 거뒀을 때, 본 맹의 위상이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무당파 출신인 청호진인(淸湖眞人)의 말이었다. 무림맹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로 봤을 때, 그의 의견이 맹주파의 전체적인 의견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말에 옥진호 장로가 정면으로 대치되는 발언을 했다. 마교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물론, 옥청학 전대맹주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행방불 명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옥화무제가 봉공직을 차지하며 맹주의 신물 빙백수룡검을 내놨을 때, 전대맹주가 마교의 내전에 휘말려 죽음을 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교와의 합작은 찬성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개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럴듯한 변명 거리를 생각해서 말했다.

“청호 장로님의 의견도 일리가 있소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금군을 앞에 두고 해묵은 감정싸움이라도 벌이게 된다면 일이 난감해지지 않겠소이까? 어쩌면 마교 쪽 에서도 그것을 걱정하여 단독 행동을 결심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사실 지금까지 철천지원수로 지내온 마교와 연합 전선을 펼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일 것이다.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청호진인도 고개를 주억거리 며 말했다.

“수라도제 어르신에게 아랫사람들을 잘 통제해 달라고 부탁드린다면 되지 않겠소이까?”

그러자 옥진호 장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원수처럼 싸우다가, 오늘 갑자기 친해질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이까? 물과 불처럼 절대로 융합될 리가 없소이다.”

그건 옥진호 장로의 개인적인 감정이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의 모든 장로들의 생각도 비슷할 것이다.

“그도 그렇기는 하오만. 어찌되었건 마교 놈들이 더 이상 전공을 독점하도록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연합 전선을 펼치지 못하더라도 수라도제 대협에 게 전서를 띄워 금군과 싸우도록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오.”

“꼭 그럴 필요가 있겠소이까? 무한 방어는 마교 놈들보고 하라고 하고, 수라도제 대협에게는 양양성으로 향하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소? 지금 양양성은 무한 쪽으 로 20만이 빠져 나가 10만의 금군밖에 없지 않소. 거기다가 양양성 내에 주둔하고 있는 송군과 패력검제 대협의 도움까지 기대할 수 있소이다. 20만의 금군과 싸우 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실익이 클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하오.”

상당수의 장로들이 옥진호 장로의 의견에 동의를 표시했다. 사실 마교와 연합하느니 단독으로 싸워 대승을 거두는 쪽이 확실히 이익일 것이다. 그것도 금군을 격 파한다는 것 외에 양양성을 구했다는 덤까지 챙길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 아닌가.

그러자 청호진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잘못하면 옥진호 장로의 의견대로 일이 처리될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옥진호 장로의 의견도 상당히 일리가 있소. 그러나 그 의견은 본맹이 왜 금군과 싸우고 있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망각하고 있는 것 같소. 물론 양양성을 포위한 금군을 친다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그러다 무한이 함락당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소?”

옥진호 장로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들이 예상외로 잘 버틸 수도 있지 않소이까? 그놈들은 지금 자기들만의 힘으로 싸우고 있소.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소? 또, 설혹 일이 잘못되어 무

한이 함락된다고 하더라도, 수라도제 대협보고 양양성을 구한 후 밑으로 남하하여 그들을 치라고 할 수도 있지 않소이까?”

“허어, 참. 바로 코앞에 적이 있는데, 그토록 멀리 돌아서 양양성을 포위한 무리를 치고, 또다시 돌아올 이유가 없지 않소이까?”

그 둘이 자신이 세운 작전의 정당성에 대해 설토하고 있을 때, 맹주가 손을 들었다. 그것을 보고 그 둘은 설전을 그만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장로들의 의견 은 필요 없다는 맹주의 의사였으니까 말이다.

“두 분 장로님들의 의견이 다 타당한 것 같소. 그렇기에 노부가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이 결정을 수라도제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보오. 그가 직접 상황 을 판단하고, 어느 쪽이 더 옳은지 결정하라고 하시오.”

무한 외곽에는 지금 수많은 막사들이 들어서 있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송군에서 사용하는 군용 막사처럼 생겼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각 문파에 서 파견한 무림인들이었다. 그들은 모두들 송군과 함께 무한 방어를 위해 주둔하고 있는 형국이었기에 송군에서 무림인들의 편의를 위해 보유하고 있던 막사를 지 원해 준 것이다.

무영문의 지시대로 그들은 이곳에서 금군이 남하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하해 오는 금군의 병력은 무려 20만. 숫자만 들어도 기가 죽을 정도였다. 아무리 이 곳에 3만에 달하는 무림의 고수들이 모여 있다고 하지만, 20만의 금군을 상대하는 것에 엄두가 안 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송군에서도 무한 방어를 위해 병력을 보내 주겠다는 통보가 오긴 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막사라든지 식량 따위의 물자만 조금 지원되 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통합 작전을 벌일 것이라고 통보받은 마교도들 또한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허어, 이 일이 어찌 된 일일꼬? 설마 20만의 금군을 우리들의 힘만으로 막아야만 한다는 것인가?”

아무리 수라도제가 화경에 이르는 고수라고 하지만 그 엄청난 숫자 앞에서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곳에 모인 무림인의 수도 엄청난 것이 었다. 각 문파에서 차출된 고수 3만이 집결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 중에서 그 누구도 중무장한 병사들을 상대로 집단전을 벌여 본 사람이 없다는 데 있 었다. 아무리 병졸들의 무술 실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들은 나름대로 수많은 세대를 거쳐 오며 발전시킨 효과적인 살상법을 가지고 있었다. 활, 각종 쇠뇌, 투석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수라도제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쪽은 경험이 전무하다. 하지만 개개인의 무술 실력은 금군보다 뛰어나다. 그렇다면 정면 대결보다는 기습을 가하는 편이 피해를 줄일 수 있겠지. 낮보다는 밤. 적들이 도착하는 바로 그날 밤을 노릴 수밖에 없는가?”

이때, 무사 한 명이 뛰어난 경신술로 달려와 포권하며 외쳤다.

“무림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어디 보자.”

무사는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어 수라도제에게 건넸다. 서신을 읽고 있던 수라도제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부가 지금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인 가? 아니면 무림맹의 늙은이들이 미친 것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무림맹의 통보로는 현재 일단의 마교 세력이 남하해 오는 금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무림맹의 입장에서 봤을 때, 마교 놈들이 겁 없이 날뛰다가 몽땅 다 뒈져버렸으면 기분이 상쾌했겠지만 문제는 그들이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데 있었다.

20만의 금군을 상대로 겨우 1만 남짓한 마교도들이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무림맹이 끌어 모은 정파의 세력은 무한 인근에 집결해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는데 말이다.

무림맹 수뇌부로서는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교는 적극적으로 참전하고 있는 데 비해서, 무림맹은 눈치나 보면서 몸을 사리고 있다고 세인들이 판단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렇기에 그들은 수라도제에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가장 옳다고 여기는 것을 시행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북상하여 마교도들과 합류하여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남하하는 금군을 막든지, 아니면 남하하는 금군은 마교도들에게 맡기고 양양성으로 직행하여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금군과 싸우라는 것이다.

수라도제는 무사에게 지시했다.

“모든 문파의 수장들을 소집하거라.”

“옛.”

무사가 달려가는 것을 보며 수라도제는 감탄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어, 참. 겨우 1만으로 20만을 상대할 배짱을 지닌 인물이 마교에는 있었다는 말인가? 참으로 마교가 지닌 저력은 무섭구나.”

장내에 쳐진 막사들 중 가장 큰 막사 안에서는 지금 한창 작전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교와 통합 작전을 벌일 것인지, 아니면 단독 작전을 감행하여 양양성으 로 향할 것인지, 서로가 일장일단이 있다 보니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한참을 고심하던 수라도제는 이윽고 마음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서로가 일장일단이 있는 작전이외다. 효율적인 면으로만 따진다면 통합 작전을 벌이는 것이 최선의 길이오. 하지만 지금까지 원수처럼 지내 왔던 마교도들과 통 합작전을 벌인다면 제대로 될 리가 없다는 불안도 있소. 그렇다면 오히려 단독으로 양양성으로 직행하는 쪽이 훨씬 좋을 듯도 하오.”

그러자 각 문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해댔기에 장내는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그렇기에 수라도제는 손을 들어 그들을 조용하게 만든 후 입을 열 었다.

“아무래도 이 일은 마교를 이끄는 자와 만나 본 연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오. 통합 작전을 벌일 만한 재목이라면 통합 작전을 벌이고, 만약 그럴 만한 재 목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단독 행동을 하는 것으로 합시다.”

그 말에 종리세가의 가주 종리영우와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기가 찬성하자,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모두들 수라도제의 의견을 따르기로 의견 일치를 봤다. 무공이나 세력, 또 연륜으로 봤을 때 수라도제를 앞서가는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었기에 대부분의 경우 그의 의견대로 실행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종리세가와 제갈세가가 그의 편을 드는데, 그 누가 그의 의견에 반대를 할 수 있겠는가.

수라도제가 서문세가의 노신들을 불러 짐을 꾸리라고 지시하고 있는데, 경비무사 한 명이 달려 들어와 보고했다.

“천지문에서 파견한 문도들이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수라도제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천지문에서?”

“예.”

그 말에 수라도제와 함께 있던 서문세가의 노신들의 인상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천지문이라면 강호에서도 유명한 박쥐들의 문파가 아닌가. 유일하게 마교와 협정 을 맺은 문파. 그런 그들이었기에 낙양이 금에 함락되어 피난을 떠난 처지가 되었지만 그 누구 하나 그들을 동정하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이 지원군을 보내 온 것이다.

“이런 몰염치한 것들을 봤나. 태상가주님, 그놈들을 내쳐야만 합니다.”

서문세가 노신들의 의견이 이와 같을진대, 다른 문파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라도제는 잠시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을 돌려보내야 하나? 아니면 함께 싸워야 하나. 하지만 지금 싸워야 할 상대는 마교가 아니었다. 그런 만큼 그들을 의심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지금은 단 한 명의 무인이 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정해진 것이 아닐까.

수라도제는 침착한 어조로 서문세가의 노신들을 향해 말했다.

“노부가 자네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 우리들은 마교와 싸우는 것이 아니지 않소? 지금 금이라는 오랑캐를 앞에 두고 서로 간에 해묵은 감정으로 대립해서는 아무것도 안 되지 않겠소? 모두들 표정 관리를 좀 해 주셨으면 좋겠소.”

태상가주의 말에 노신들은 일단 분노를 억눌렀다. 하지만 아직 그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음을 느꼈기에 수라도제는 덧붙여 말했다.

“그놈들도 다 쓸 데가 있지 않겠소? 미끼로 써먹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소모품으로 쓸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러니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라오.”

그 말에 노신들의 안색은 확연히 밝아졌다. 과연 그렇게 써먹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사실, 상황에 따라 어떤 문파, 혹은 어떤 고수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 어야 할 때도 있다. 서로가 다 아는 처지에서 사지로 가기를 권하기도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그때 그들을 이용한다면 일석이조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과연 태상가주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수라도제는 경비무사에게 말했다.

“그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예, 제가 그곳으로 뫼시겠습니다.”

“허어, 천지문도들이 이곳에는 무슨 일일꼬?”

“그러게 말이외다. 낙양의 쓰레기들을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경비 무사에게 안내를 받아 한곳에 자리를 잡고 대기하고 있는 천지문도들을 향해 여기저기서 비방하는 소리들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래도 그들은 묵묵하게 대기했다. 자신들과 합류하라는 허락이 떨어질 것인지, 아니면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질 것인지, 조금 있으면 밝혀질 것이다. 그때까지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기 다리고 있는 것이다.

짙은 푸른색의 날렵한 경장 차림의 그들은 하나같이 4척은 됨직한 두툼한 거도(巨刀)를 등에 지고 있었다. 도의 손잡이에 天地(천지)라는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자신들이 천지문 소속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때, 황색 경장 차림을 한 중년 사내 하나가 앞으로 쓱 나서며 천지문도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본인은 하북팽가(河北彭家)의 팽조(彭早)라는 사람이외다.”

팽조가 자기소개를 하자 천지문도들 중에서 한 명이 나와 정중하게 포권하며 말했다. 그녀는 간편한 경장으로 맵시있게 차려입은 중년 여인이었는데, 무공으로 단련된 늘씬한 체형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거기에다가 미모 또한 상당한 수준이 아닌가. 물론 젊은 것들과 같은 풋풋한 맛은 없었지만, 중년의 여인 이 지니고 있는 완숙함이 그 부분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가녀린 체형에 이지적으로 반짝이는 눈동자. 지혜로운 여성이라는 생각은 들어도 전혀 강함과는 거 리가 멀었다.

“소녀는 천지문도들을 이끌고 있는 소연(蘇衍)이라고 합니다. 철혈권(鐵拳) 대협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슬쩍 시비를 걸기 위해 말을 건 것이었는데, 계집이 튀어나와 자기가 천지문도들의 수장이라고 소개를 하니 철혈권 팽조로서는 입맛이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계 집을 상대로 시비를 걸어 봐야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은 것이다. 물론 강호에서 호젓하게 둘이 만난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 놔도 상관없겠지만, 이곳은 사람들의 이목 이 많은 장소다. 조금만 심하게 괴롭혀도 잘못하면 변태 소리를 들을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곳은 그대들 같은 인면수심의 무리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곳이다. 그러니 그만 물러가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 말에 소연은 다소곳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것이 무림맹의 결정입니까?”

“무림맹에 물어볼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자네 같은 쓰레기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악취 때문에 코를 못 들겠으니 꺼져 달라는 말일세. 본인의 말을 알 아듣겠는가?”

쓰레기라는 말까지 하며 천지문을 격하시켰지만 소연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무림맹에서 돌린 격문에는 천지문은 필요 없다는 구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출발하기 전에 이곳에 모인 문파들을 가장 연배가 높으신 수라도제 대협께 서 이끄신다고 들었습니다. 철혈검 대협께서 하신 말씀이 수라도제 대협의 의견을 반영하고 계시는 것인가요?”

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하북팽가처럼 작은 문파의 문도 따위가 자신들의 거취를 결정할 권한은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팽조는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의 말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요와 금에 이르는 오랑캐들이 연경을 점령한 덕분에 고향을 잃어버리고 타향살 이를 하고 있는 하북팽가의 고수가 듣기에는 머리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팽조의 귀에 그녀의 말은 하북팽가를 아주 업신여기는 것으로 들렸던 것이 다.

팽조는 슬쩍 고개를 돌려 저쪽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 노인이 바로 팽조의 사부였다. 무림명숙인 사부는 자신이 직접 시비 걸기가 뭣했기에 그 제자에게 그들을 망신주고 오라 시킨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잘못하면 사부님께 누를 끼 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팽조는 조금 억지를 부려 보기로 했다.

“계집이기에 조용히 말로 하려 했거늘,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구나. 너는 내가 누군 줄 알고 그토록 오만방자한 것이냐?”

“하북팽가의 여덟 분 장로들 중의 한 분이신 혼원패권(混元覇拳) 팽선(彭) 대협의 제자 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멍청한 것! 나를 잘 알고 있으면서 그따위 말대답을 해 대다니!”

그와 동시에 팽조의 손이 쾌속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팽조의 움직임에 맞춰 소연도 함께 움직였다. 그녀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의 손을 잡은 것이다.

“어쭈? 천지문의 잡것이 감히 반항을 해?”

처음에는 무례한 계집의 뺨을 한 대 치는 것으로 징계를 가하고 끝낼 속셈으로 움직인 것이었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슬며시 화가 치미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손에 내력을 뿜어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3성에서부터 시작한 공력을 5성으로 끌어올렸는데도 불구하고 계집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 었다.

‘이런 망할 년을 봤나! 매끈한 얼굴을 봐서 다른 사람들에게 표 나지 않도록 5성의 공력만 사용해 줬거늘, 아직도 물러서지 않다니.’

드디어 팽조의 머리 뚜껑이 활짝 열려 버렸다. 팽조는 상대에게 가하는 공력을 점차 가중시키기 시작했다. 내력이 8성에 이르자 팽조의 장포가 서서히 부풀어 오 르기 시작했다. 그때쯤 팽조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내력 대결을 펼치는 도중에 그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점점 더 내공의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잠시 후 모든 공력을 다 뿜어내기 시작한 팽조의 안색은 점차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이마에는 핏줄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상대의 표정 에는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제서야 팽조는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후회하기에는 너무나도 늦은 상황이었다.

“셋 하면 공력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세요. 그렇지 않으면 크게 다칠 수도 있습니다, 철혈권 대협.”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는 팽조에게는 구원이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의 공력이 딸린다고 갑자기 멈출 수도 없었다. 순식간에 상대의 기가 자신의 몸으로 타고 들어 와 오장육부를 바스러뜨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그녀가 한 제안을 먼저 할 수도 없었다. 그건 바로 항복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나, 둘, 셋!”

팽조는 손을 떼자마자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거칠게 숨을 헐떡거렸다. 누가 봐도 자신의 패배가 분명했다. 저 가냘픈 계집의 내공이 저토록 막강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꼬리를 말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사문과 사부의 명예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젠장! 다시 한 번 해 보자.”

팽조가 나서려는 순간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는 사람이 있었다. 팽조가 뒤돌아보니 자신을 잡고 있는 것은 그의 사부였다. 사부는 엄한 눈으로 팽조를 흘겨본 후 중얼거렸다.

“미숙한 녀석!”

팽조는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뒤로 물러서서 운기조식이나 하거라.”

팽선은 앞으로 쓱 나서며 날카로운 어조로 소연을 질책했다.

“감히 하북팽가를 업신여기다니.”

“소녀가 무엇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혼원패권 대협. 수라도제 대협께서도 같은 의견을 지니고 계시냐고 물은 것이 그토록 큰 실례였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물러나라고 했으면 물러날 것이지, 그것에 토를 단 것이 죄이니라. 얄팍한 한 수를 익혔다고 기고만장해서 감히 본가에 대들다니, 그 죄를 알렸다?” “바른 소리를 한 것이 죄가 된다는 말은 혼원패권 대협께 처음 듣습니다.”

“아이야, 네 입을 원망하거라.”

그 순간, 팽선의 외호가 왜 혼원패권인지 주위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실감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그의 손에서 펼쳐진 극성의 혼원벽력장(混元霹靂掌)은 너무나 도 패도적인 기운을 물씬 뿜어내고 있었다. 그 권풍의 기세가 너무나도 강했기에 주위에서 구경하던 자들도 황급히 방어 자세를 갖춰 살을 찢는 권풍의 위력을 막기 에 급급할 따름이었던 것이다.

“이거 어쩌면 전력을 다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팽선은 긴장감 때문에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제법 한가락 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빨리 끝내기 위해 체면불구하고 기습에 가까운 공격을 가 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거대한 도 때문이었다. 그녀의 도가 완만하게 움직이는 순간, 불꽃과 함께 뇌성이 터지며 팽선의 공세를 짓눌러 버렸던 것이다. 그렇다. 막은 것도 아니고 팽선의 힘보다 더욱 막강한 힘으로 짓눌러 버린 것이다.

그 순간 계집이라고 약간 얕잡아 보던 팽선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계집이 보여 줄 수 있는 힘과 파괴력이 아니었다. 무거운 무기만을 잡고 수십 년 동안 고련한 사내들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반응. 중도(重刀)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한 대처였던 것이다.

“계집이면 계집답게 연검이나 휘두를 것이지, 젠장!’

수라도제가 천지문도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왔을 때는 팽선과 소연의 대결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권풍과 도기가 흩날리고, 그 둘을 사이에 두고 광풍이 일 고 있었다.

수라도제는 그곳에서 두 눈을 반짝이며 관전에 열중하고 있는 무당파의 장로를 발견하고 급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처음 파견된 무당파의 고수들은 지금 양양성에 서 싸우고 있지만, 그다음 대규모로 파견된 고수들은 금군 때문에 양양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곳에 와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수라도제는 다급히 질문을 던졌지만, 장로는 흥미롭다는 듯 장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혼원패권이 천지문의 아이를 상대로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는 중이지요. 물론 시비는 혼원패권이 먼저 걸었지만… 노부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택 한 것 같소이다.”

그 의견에는 수라도제도 동감이었다. 무시무시한 권법의 소유자인 팽선을 상대로 웬 중년 여인이 분전하고 있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팽선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중년 여인이 일부러 조금씩 양보해 주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할 수라도제가 아니었다.

“허헛, 참. 일이 고약하게 되어 버렸소이다. 함께 싸워야 할 동도들이 싸움질을 벌이다니, 그것도 일문의 장로라는 자가 앞장서서 말이오.”

그 말에 무당파의 장로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외다. 하지만 조금 있으면 끝날 듯도 하오. 슬슬 혼원패권이 밀어붙이고 있지 않소? 천하의 혼원패권을 상대로 2백여 초식을 버텼다면 저 아이의 실 력도 보통은 넘는 게지요.”

남들에게 멸시받는 천지문도를 상대로, 그것도 이름도 없는 여자를 상대로 2백여 초식이나 싸워야 했다면 그의 명성에 흠이 갈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무 당파의 장로는 지금 그녀가 일부러 상대의 체면을 봐서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까지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수라도제가 파악한 그녀의 실력은 대 단한 것이었다.

‘허참, 실력만큼이나 마음 씀씀이도 곱구먼.’

하지만 감탄만 하고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면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된다. 물론 승자는 팽선이겠지만, 후에 저 아이가 봐줘서 승 리했음을 그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또 그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결코 뒷맛은 깨끗하지 못할 것이다.

수라도제의 몸이 스르르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몸은 한참 대결 중인 두 고수 사이에 서 있었다. 과연 화경에 다다른 고수라는 위명에 걸맞은 뛰어난 신법 이었다. 워낙 갑작스럽게 수라도제가 등장한 것이었기에, 대결에 몰두해 있던 팽선과 소연은 미처 쏘아 낸 공격을 회수할 여유조차 확보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소연이 쏘아 낸 공력을 회수하려는 순간 그녀의 귀에 부드러운 전음성이 들려왔다.

<무리해서 공력을 회수하려고 하지 마라. 몸만 상할 뿐이다.>

그 순간 소연은 목소리의 주인공, 즉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믿기로 했다. 얼핏 봤을 때 그리 고강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때 그가 사용한 신법만으로도 그는 최강자의 대열에 서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양쪽에서 짓쳐들어오는 공격을 수라도제는 간단하게 막아 냈다. 물론 그것은 그 광경을 옆에서 구경한 사람들의 생각이었고, 수라도제 자신은 이를 꽉 깨물어야만 했다. 격전을 벌이는 둘은 모두 다 엄청난 고수들이었다. 그런 만큼 수라도제가 아무리 화경에 든 고수라고 하지만 쉽게 막아 낼 성질의 공격은 아니었다.

수라도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빠른 것은 눈의 착시 현상 때문에 오히려 느린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법이다. 그렇 기에 주위에 서 있는 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수라도제가 발휘한 최고의 한 수를 견식하는 영광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퍽!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진 후, 장내는 정리되었다. 자신이 가한 혼신의 공격을 수라도제가 간단히 막아 내버리자 팽선은 씁쓸한 듯 입맛을 다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자신의 체면이 달린 문제였기에 계집아이를 빨리 제압하기 위해 상당히 무리를 했던 탓이다.

“수라도제 대협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시오?”

“허허, 이 사람. 한 팔 더하겠다고 온 동지를 상대로 드잡이질을 하다니, 정신이 있는 겐가? 아무래도 저 아이가 다칠 것 같아서 노부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네.”

팽선은 수라도제가 한 뒷말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자신의 체면을 지켜 주지 않았는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여아가 거도를 들고 다니기에 그냥 장난 좀 쳐 본 것뿐이오.”

말을 마친 팽선은 자신의 일이 끝났다는 듯 천천히 장내를 벗어났다. 그동안 수라도제는 소연을 향해 전음을 날리고 있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신경을 써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수라도제 대협.>

<허허헛, 노부를 알아보다니 영광이로세.>

<아닙니다. 수라도제 대협의 한 수를 견식할 수 있어 소녀가 더 영광이었습니다.>

소연의 전음에 수라도제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자신이 사용한 한 수를 완전히는 파악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아차렸다는 말이 아닌가. 자신이 예 상한 것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고수가 분명했다. 참으로 무림은 와호잠룡(臥虎潛龍)의 세상이라고 생각해 보는 수라도제였다.

“천지문에서 왔다고 했는가?”

상대가 전음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소연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노부의 소개가 늦었구먼. 노부는 서문길제라고 한다네.”

“예, 소녀는 천지문도를 이끌고 수라도제 대협을 도우라는 문주님의 명을 받들고 온 소연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라도제는 주위를 둘러봤다. 저쪽에 소연과 비슷한 차림새를 하고 있는 사내들이 보였다. 그 수는 5백여 명. 서문세가라는 거대 세가를 이끌고 있는 수라도제의 시각에서 봤을 때, 적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숫자였지만 그것이 천지문의 전체 문도수를 따져 본 경우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허어, 5백씩이나? 천지문의 규모를 생각했을 때 적지 않은 출혈을 각오한 모양이구먼. 그것도 저렇게 뛰어난 고수를 앞세우다니.

수라도제는 아직까지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소연을 아래위로 자세히 한 번 더 훑어봤다. 이건 웬만한 명문 대파의 장로급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여고수. 거기에다가 그를 더욱 기분 좋게 한 것은 그런 여고수가 거대한 도를 등에 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도(刀)를 숭상하는 그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소연은 평상시에 가벼운 도를 애용했지만, 전쟁터에 나가는 것인 만큼 전투용의 중도를 가져온 것이었다.

천지문은 작은 문파였다. 그런 문파에서 이토록 뛰어난 여고수를 키워 냈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녀를 아낌없이 전장에 투입한 점은 더욱 놀라운 일 이었다. 사실, 생사를 기약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그녀가 덜컥 죽어 버린다면 그 피해는 얼마나 크겠는가. 그것만 봐도 천지문이 이번 양양성 전투에 어느 정도의 각 오로 임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노부와 차나 한잔하지 않겠는가?”

“영광입니다, 수라도제 대협.”

소연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후 수라도제를 따라갔다.

수라도제 대협과 담소를 나누며 장내를 빠져 나가는 소연의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서 있던 천풍검 곡추는 입이 바싹 타는 듯 혀로 입술을 축였다. 방금 전에 벌어진 비무를 봤을 때, 결국에 가서는 소연이라는 천지문의 고수가 팽선에게 패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하북의 범 같은 고수인 팽선을 상대로 저 정도나 버틸 수 있다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곡추 자신도 분노에 가득 찬 팽선을 상대로 1백 초식 이상은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것만 봐도 그녀의 실력은 이미 증명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어~, 진팔에 이어서 이번에는 소연이라는 여고수의 등장인가? 정말 천지문은 가볍게 볼 문파가 아니로구나.”

진팔을 억류하려고 했었던 남궁세가주의 결정은 정말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내린 치명적인 실수였다고 생각하는 곡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