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9권 13화 – 개방도의 작당모의

개방도의 작당모의

묵향은 관도를 따라 최대한 빨리 이동해서 한때 대 송제국의 수도였던 개봉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개봉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한때 호화찬란한 황궁이 들어 서 있던 곳은 모조리 불타 버려 이제는 폐허만이 남아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번화한 거리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허어, 놀라운 일이로구나. 천년의 영화를 자랑할 것만 같았던 중경(中京)이 이렇듯 폐허로 변해 버리다니…….”

묵향이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금군 병사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도성을 함락시켰으면 하다못해 몇 명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묵향이 이리 저리 주위를 둘러보며 가고 있을 때, 그의 눈에 개방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지금껏 여럿 봤었던 거지와 행색은 똑같았지만, 그 눈동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게슴츠레 살짝 눈을 감으며 나른한 듯 하품을 하고 있었지만, 살짝살짝 보이는 불 타는 듯 번쩍이는 그의 안광은 내가무공을 깊은 수준까지 익혔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묵향은 슬그머니 늙은 거지에게 다가가 동전푼을 던져 주며 질문을 던졌다.

“이보시오, 여기 있던 금군들은 다 어디 갔소?”

늙은 거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동전을 힐끗 바라본 후 나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낙양을 치기 위해 이동했습죠.”

“그런가? 이곳에는 한 명도 주둔시키지 않고?”

“폐허가 되어 버린 도성 따위 무슨 필요가 있다고 미련을 가지겠소? 모든 보물들을 약탈해서 연경으로 보내 버린 후, 낙양으로 갔습죠.”

딴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묵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양양성의 전투는 어떻게 되었소?”

“물론 아직도 열심히 싸우는 중입죠. 그런데 그런 것을 왜 저 같은 늙은 거지에게 물으시는 겁니까요? 그런 거는 아무나 잡고 물어보면 되는데…….” 묵향은 씨익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당신한테 물어보지 않으면 누구한테 물어보겠소? 여기 와서 처음 보는 개방도인데 말씀이야.”

그 말에 늙은 거지는 바짝 긴장한 눈치였다. 하지만 묵향은 그런 것은 개의치 않고 질문을 마저 던졌다.

“개봉에서 개방이 완전히 철수했나? 왜 이렇게 거지들이 안 보이지? 하나 찾는다고 한참을 돌아다녔잖아.”

“그, 그건 대답해 줄 수 없소.”

그 말에 묵향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대답해 주는 게 신상에 좋을 텐데?”

그 누가 있어서 자신이 개방도임을 뻔히 알면서 이토록 핍박을 가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분명 무림 최대의 방파라고 할 수 있는 개방쯤은 물로 봐야 가능한 일이 었다. 늙은 거지의 눈이 묵향의 얼굴에 자세히 머물렀다. 그 순간 그는 상대의 얼굴이 꽤나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거지의 뇌리에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수많은 거지들을 학대한 개방의 적!

“허억! 다, 당신은 서, 설마 암흑마제?”

뒤로 넘어갈 듯한 늙은 거지의 반응에 묵향은 약간 쑥스러운 듯 대꾸했다.

“본좌가 그렇게 유명했었나? 하기야 지금까지 때려잡은 개방도만 몇 명인지 기억도 안 나는군. 자네도 그 안에 포함되지 말고 그냥 실토하는 게 어때?”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이기는 했지만 거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그럴 수는 없소.”

“젠장,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너 일루 와 봐.”

묵향은 개방도의 멱살을 잡아 질질 끌고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끌려 들어가면서도 개방의 늙은 거지는 사력을 다해 반항했다. 물론 이미 점혈을 당한 상태라서 몸 으로 저항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의 입은 아직 살아 있었다.

“무림맹과 협정서를 주고받은 상태에서 이럴 수가 있소? 개방도를 건드린 것이 알려지면 무림맹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묵향은 늙은 거지의 말에 피식 웃으며 이죽거렸다.

“본좌가 언제 그런 거 겁내고 살았는 줄 알아? 그리고 협정까지 주고받은 상태에서 정보를 숨기는 것은 협정 위반 아닌 줄 알아? 서로가 피장파장이야. 알겠어?” “그, 그건 억지요.”

“억지인지 아닌지는 조금 지나보면 알 거야. 크흐흐흣.”

잠시 후 골목길 안에서는 사람 잡는 비명 소리가 구슬프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2각 정도가 흐른 후, 묵향은 손을 탈탈 털면서 골목 안에서 느긋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왔다.

“허엇 참. 처음부터 얘기해 줬으면 그런 꼴은 안 당했을 거 아냐? 멍청한 놈! 그래도 머리가 좀 돌아가는 놈이었다면 본좌가 누군지 알아챔과 동시에 몽땅 다 불었 을 텐데, 어찌 그리도 사서 매를 버는지 원…….”

개방의 늙은 거지를 족친 결과 묵향은 자신이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들을 모두 다 알아낼 수 있었다. 그 개방도는 제법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듯, 상당 히 깊은 수준의 정보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는 형님을 만나러 가는 일만 남았군.”

묵향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만통음제의 대제자인 냉파천이 기거하는 장원으로 찾아갔다. 고색창연한 장원의 겉모습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묵향은 만통음 제를 만난다는 기쁨에 들떠 대문을 두들겼다.

“무슨 일이십니까요?”

문을 열던 하인은 묵향의 얼굴을 보자마자 바짝 얼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묵향이 이곳에 와서 행패를 부린 것을 그 하인이 기억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인을 개 패듯 패 놓은 자는 그때 처음 봤으니까 말이다.

“허억!”

기겁하는 하인에게 묵향은 말을 건넸다.

“자네 주인에게로 안내하게.”

“예? 예.”

엄청난 무공을 소유한 냉파천을 박살 내 놓은 상대니, 하인이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하인은 순순히 냉파천에게로 그를 안내했다.

냉파천은 묵향이 왔음을 알고는 황급히 달려 나왔다. 그의 얼굴은 당혹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대는 사숙이기에 앞서 마교 교주니까 말이다.

“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사숙.”

한참 후에 냉파천은 마지못해 사숙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소행이 괘씸하기는 했지만 묵향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좋은 일로 찾아와서 두들겨 패 버릴 수는 없 는 노릇이니 말이다.

“형님을 만나려고 찾아왔다네. 어디에 계신가?”

“사부님께서는 양양성 쪽으로 출발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패력검제 대협과 합류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벌써 떠나 버렸다고? 에잉…, 한발 늦어 버렸군.”

더 이상 냉파천에게 볼일은 없어진 셈이다. 묵향은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서서 몇 발자국 걸어가는 듯하더니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다시 되돌아왔다.

“이봐, 사질.”

“예?”

묵향은 냉파천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너 말이야. 앞으로 호칭 똑바로 안 하면 죽여 버릴 줄 알아. 알겠어?”

그 말에 냉파천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재빨리 대답했다.

“옛”

그 말을 끝으로 묵향은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개봉성 외곽에는 수많은 거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 있다. 거지들의 거처가 그렇듯 그곳에 있는 건물들은 하나같이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이곳이 북 개방의 총타였다. 개방도의 숫자가 워낙 많았기에 개방은 효율적인 방도들의 통제를 위해 편의상 남, 북개방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모두들 한식구임에는 변함이 없 었다.

요즘 개방도들은 매우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엄청난 수의 금군이 몰려와 개봉을 약탈하고 지나간 지 채 몇 달 지나지도 않았다. 개방의 고수들도 황군들과 함 께 그때 방어전을 펼쳤었기에 매우 피해가 컸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후, 뒤처리할 일도 엄청나게 많았다. 그런 곳에 개방도들이 발 벗고 나서서 돕고 있었기에 묵 향의 눈에 개방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묵향이 유유히 개봉성을 벗어나고 있을 때, 개방의 늙은 거지들이 건물들 중의 한곳에 모여 한창 회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놈을 계속 놔둘 겁니까?”

늙은 거지의 말에 또 다른 거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거지도 다른 거지와 같이 누더기를 입고 있었지만, 허리 에 개방의 방주를 상징하는 아홉 개의 매듭이 지어져 있는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파풍개(風)의 용태는 어떻소?”

방주의 질문에 다른 거지가 재빨리 대답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모양입니다. 머리도 식힐 겸, 구걸도 할 겸, 볕을 쪼인다고 나갔던 그가 너무 오랫동안 오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긴 제자 하나가 그를 찾아 나서지 않았었다면 시체 하나 치울 뻔했습니다.”

파풍개는 6결제자였다. 그런 만큼 그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 또한 대단한 것이었고, 그 덕분에 그가 사라진 것도 빨리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소행도 그놈이 벌인 것이 확실하오?”

방주의 질문에 여기 있는 거지들 중에서 가장 살이 뒤룩뒤룩 찐 자가 노기를 참기 어렵다는 듯 다급히 대답했다. 바로 먹는 거라면 사죽을 못 쓰는 비육걸개(肥肉 乞) 장로였다.

“방주님, 그건 안 봐도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놈이 아니라면 어떤 간 큰 놈이 감히 본방의 제자를 걸레 짜듯 쥐어짠단 말씀이십니까??”

이때, 옆에 앉아 있던 거지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허어, 참. 그거 알 수가 없는 노릇이네. 분명 마교에도 정보조직이 있거늘, 왜 궁금한 일이 있기만 하면 무조건 주위에 있는 개방도를 찾아 족치는지 이해를 할 수 가 없구려.”

그 말에 비육걸개 장로는 투실투실한 뺨에 감춰진 작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유야 뻔하지 않소? 그놈은 본방의 방도들을 족치는 것에 재미 붙인 것이 틀림없소. 그놈 손에 걸레가 된 제자만 벌써 5백 명을 넘어섰소이다.”

바짝 마른거지가 고개를 흔들며 반박했다.

“내 생각은 좀 다르오. 그자는 대부분의 경우 수하들을 거느리지 않고 단독 행동을 즐기고 있소.”

그 말에 다른 거지들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맞아요. 그렇다는 보고는 몇 번 받았소이다.”

바짝 마른거지는 자신의 허리에 매달린 호로병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한잔하고는 싶은데, 회의 중이라서 못 마시다 보니 술이 가득 든 호로병이 나 매만지는 것이다.

“상상을 해 보시오. 자신이 아주 뛰어난 고수라고 말이오. 그리고 부하들과 떨어져서 혼자 다니고 있소. 그러다가 덜컥 궁금한 일이 생긴단 말이오. 그때 당신네들 같으면 연락을 넣어 수하들을 불러들인 다음 그것을 물어보는 것이 빠르겠소? 아니면 널리고 널린 본방의 제자를 찾아 족치는 것이 빠르겠소?”

그 말에 모든 장로들은 놀라운 발견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만약 자신이 강자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 편이 훨씬 편리하면서도 빠르니까. 사실, 그 자처럼 개방이 지닌 힘을 아예 물로 보는 자들이 생각해 낼 법한 방법이었다. 수틀린다고 화산파도 하루아침에 멸문시키는 놈인데 힘없는 거지 한둘 족치는 것쯤이 야 뭐 그리 큰일이겠는가.

“허어, 그렇다고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만은 없지 않소이까?”

“취선개장로. 그런 것까지 생각해 봤을 정도라면, 그 해결책도 생각해 두신 것이 있겠구려.”

취선개는 주위를 쭉 둘러본 다음 말했다.

“그자는 현경과 맞먹는다는 탈마의 고수가 아니겠소? 무슨 짓을 해도 본방의 능력으로는 그놈을 없앨 수 없소. 본방의 식솔이 30만이나 된다고 하지만, 결정적으 로 고수다운 고수가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소. 그놈이 물어보는 것은 뭐든지 아는 한도 내에서 친절히 가르쳐 주는 것 말이오.”

그 말에 비육걸개 장로가 노성을 터뜨렸다.

“그건 말도 안 되오! 본방도 엄연히 정파의 기둥이란 말이오. 마교 교주 놈의 궁금증을 채워 줬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면 무슨 소리를 듣겠소이까?”

취선개 장로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킁! 정파의 기둥이 부상자를 줄여 줍니까? 마교가 본격적으로 본방을 치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마교 교주 혼자서 궁금한 거 몇 가지 물어보다가 생겨난 다툼이 오. 처음부터 붙잡아 고문을 한 것도 아니고, 좋은 말로 질문을 던지다가 이쪽에서 불지 않으니 고문을 가하는 형식이오. 일이 끝난 후 증거 인멸을 위해 본방의 제 자들을 죽이지도 않았소. 그런 사실을 가지고 그자를 처치하자고 무림공론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소? 젠장! 오히려 본방의 능력이 형편없음을 전 무림에 떠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취선개의 지적에 다른 장로들은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그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그놈을 응징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에다가 지금은 무림맹과 마교가 협정까지 맺고 금과 공동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상황이오. 그 누구도 그가 거지 몇 족쳤다고 마교와 싸우려고 하지는 않을 거란 말이오.”

“그건 취선개 장로의 의견이 전적으로 옳소이다.”

“놈을 못 잡을 바에는 차라리 부상자라도 줄이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니겠소? 거기에다가 그렇게 하면 한 가지 부수적인 이익도 있소. 파풍개에게는 안된 일이 었지만, 그가 당함으로 인해 우리들은 그놈이 개봉에 왔음을 알았소. 그리고 그가 뭘 궁금하게 여겼는지도 파풍개를 통해 알 수 있었소. 그걸 역으로 이용하면 매우 그럴듯한 정보가 되지 않겠소이까?”

개방 방주도 그럴듯하다고 느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호오, 그건 취선개 장로의 말이 백번 옳은 듯하오.”

취선개는 호로병을 한 번 더 쓰다듬은 후 말했다.

“친절하게 놈에게 정보를 제공하면 놈은 본방의 방도들을 이용하는 데 재미를 붙일 수밖에 없을 거요. 최소한 과거보다는 더 자주 본방을 애용하게 되겠지요. 놈

의 위치, 그리고 놈이 원하는 정보, 이 두 가지를 파악하면서 계속 놈의 행방을 추적하다 보면 어쩌면 기가 막힌 기회를 잡게 될지도 모른다 이겁니다. 그때는 무림 맹이나 다른 문파의 손을 빌려서 복수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개방 방주는 취선개의 마지막 말에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좋은 생각이오. 그대로 시행하도록 합시다.”

이 회의가 끝났을 때쯤에 묵향은 자신도 모르게 천하에서 가장 방대한 정보 조직을 공짜로 거느리게 되었다. 물론 그게 나중에 화가 될지 복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