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9권 15화 – 야반도주
야반도주
무림명가의 후손들인 옥대진 등이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있었겠는가. 더군다나 그들은 모두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라고 칭해지는 7룡4봉에까지 뽑히지 않았는가. 그런 그들이 맨날 남의 수발이나 들어야 하다니……. 그것도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교육받아 왔던 마교의 교주를 말이다.
저 앞에서 사이좋게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려가고 있는 묵향과 황룡무제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옥대진이 동료들에게 전음을 날렸다.
<아무래도 탈출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인 듯싶소.>
팽대성은 사납게 콧김을 뿜었다. 생각만 해도 분통이 터졌던 것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밤에 실행하는 것이 어떻겠소? 놈도 사람인 이상 밤에 잠을 자지 않겠소?>
<팽 소협의 말씀이 옳은 듯하오.>
옥대진은 분노를 감출 수 없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황룡무제도 교주 녀석과 뭔가 밀월관계가 있는 듯하오. 그렇지 않고서야 그놈이 그토록 오만방자를 떨고 있는데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않소? 이 일을 무림맹에 알려 철저히 시비를 가려야 할 것이오.>
그 말에 황보룡도 찬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옥 소협이 옥진호 대협께 말씀 잘해 주시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오? 불구대천의 원수인 마교도와…, 아니 마교 교주 놈과 그토록 친밀하게 술 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다니 말이오. 이건 틀림없이 뭔가가 있다고 보오.>
그들이 아무리 무림에서 최고의 후기지수라고 알려져 있었고, 또 자신들도 그렇다고 믿고 있었지만 단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화경이 넘어가는 인물들 중에는 다른 사람이 주고받는 전음을 도청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더군다나 현경에 달한 묵향이 그걸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묵향은 살기 찬 미소를 씨익 지으며 중얼거렸다.
“호오, 본좌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하지만 묵향과 함께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던 황룡무제는 갑자기 튀어나온 묵향의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그냥 양양성에서 패력검제 대협이 분투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을 뿐인데…….”
묵향은 슬며시 둘러댔다.
“아, 아닐세. 본좌가 잠시 딴 생각을 했다네. 미안하구먼. 그래, 자네는 어찌할 생각인가?”
“예, 일단은 무한에 포진하고 계시는 수라도제 대협과 행동을 함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양양성은 금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모양이던데 말입니다. 물론 저 혼 자라면 야밤에 간단히 들어갈 수 있겠지만, 딸린 식솔들이 많다 보니 그렇게는 할 수 없거든요.”
“그게 좋겠군.”
그런데 대화를 나누는 묵향의 표정이 너무나도 기분이 좋은 듯 싱글벙글이라 황룡무제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객잔의 2층 창문이 살며시 열리고 다섯 명의 인영이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그들은 창문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재빨리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안 그래도 어두운 밤에, 달빛마저 피하고 나자 그들의 모습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살며시 주위를 살핀 다음 마구간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곳에서 말을 타고 도망칠 요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때, 밤하늘을 꿰뚫고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침입자다!”
물론 묵향이 변성하여 낸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파장은 너무나도 컸다. 객잔에서 자고 있던 황룡문 무사들이 속옷 바람인 것을 개의치 않고 각자 무기를 든 채 모 두 다 후다닥 튀어나왔던 것이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데야 안 일어날 수가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어디냐?”
이리저리 손짓과 전음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들은 주위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젊은이들은 황당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대로 숨어 있어 봐야 조금 있으면 들통 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자니 저들은 자다가 황 급히 일어난 것이 역력한데, 자신들은 단정히 옷까지 입고 있는 데다가 각자 지니고 다니던 짐까지 다 들고 있지 않은가. 이것을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정말 난감하 기 그지없었다.
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황룡문 무사 둘이 그들을 발견했다.
“웬 놈들이냐?”
그들이 큰 소리를 치자, 곧바로 그곳을 향해 모든 황룡문 무사들이 달려왔다. 무사들이 그 일대에 쫙 깔려 포위망을 형성한 후에야, 그들을 지휘하고 있던 인물이 네 명의 무사를 대동한 채 침입자가 숨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가 뽑아 들고 있는 장검이 달빛을 받아 시퍼런 광택을 뿜고 있었다.
이때, 재빨리 옥대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희들입니다, 광 대협.”
그 말에 황룡문 무사들을 지휘하고 있던 인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옥 소협이 이곳에는 왜?”
“사실 이렇게 떠나는 것이 예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마교 교주와 행보를 같이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껄끄러운 일이라서……. 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옥대진이 애걸했지만, 광 대협이라는 인물은 난처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 참. 일이 난감하게 되었군. 이렇게 떠날 요량이면 좀 더 조심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소란통에 문주님께서도 일어나셨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저쪽에서 마교 교주와 황룡무제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큰일은 아닙니다, 문주님.”
그냥 눈감아 주
황룡무제는 현장에 도착한 다음에 어떻게 된 일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리 어둠 속에 숨었다고 하지만, 그걸 못 알아볼 그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허어, 참.”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며 그는 묵향의 눈치를 살폈다. 과연 그가 가만히 있을까? 생각 같아서는 저 녀석들 보고 빨리 눈앞에서 꺼지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무래 도 묵향의 눈치를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묵향은 한껏 비웃음을 머금고 으르렁거렸다.
“호오, 이 녀석들 봐라. 그래, 본좌가 그렇게 싫었단 말이지?”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후기지수들은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싸가지 없는 것들. 같이 가고 싶지 않으면 그냥 떠나고 싶다고 말할 것이지, 슬그머니 야반도주를 해? 네놈들의 아버지는 무림에 나가 선배 들을 그렇게 대하라고 가르치더냐? 아무래도 본좌가 친히 교육 좀 시켜 줘야겠군.”
손을 걷어붙이고 묵향이 나서려고 하자, 황룡무제가 말렸다. 가만히 놔뒀다가는 그의 성격상 사고 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노야께서 나서실 필요까지 있으시겠습니까?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그 말에 묵향은 노성을 버럭 터뜨렸다.
“타이르기는 뭘 타일러! 본교에서는 아랫것들 교육을 이렇게 안 시키는데, 하여튼 정파라는 것들은 밖으로는 잘난 척 떠들면서, 도대체 후배 놈들 인성 교육을 어 떻게 시켜 놨기에 이따위로 처신하는지……. 쯧쯧, 무공을 익히기에 앞서 인간이 되어야 할 거 아냐! 인간이!”
그 말에 황룡무제의 안색이 노기로 붉게 물들었다. 어찌 인륜까지도 저버린다는 마교도에게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막무가내로 행동해서 온통 소란을 일으키는 저따위 인간에게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눈앞의 상대에게 그런 소리 떠들어 봐야 통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 문이다.
대신 황룡무제의 노여움은 저쪽에서 떨고 서 있는 다섯 명의 젊은이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놈들이 야반도주를 하는 바람에 마교 교주에게 저딴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닌가. 속마음 같아서는 반쯤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명문의 자제들인 만큼 그 배경이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황룡무제는 자신의 숙소로 걸어가며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노야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단 살인은 안 됩니다.”
“흐흐흐, 본좌도 그 정도는 알고 있으니 염려 말고 푹 자게나.”
음흉스런 웃음을 흘리며 대꾸하는 묵향이었다. 그런 다음 묵향은 구석에서 떨고 있는 다섯 젊은이들을 향해 이죽거렸다.
“자, 자네들은 본좌하고 얘기 좀 해 볼까? 왜 야반도주를 결심한 것인지 아주 궁금하구먼. 서로 간에 대화가 좀 필요할 것 같아.”
“크으윽! 변태 새끼.”
그 말에 팽대성은 화들짝 놀라 묵향의 눈치를 살피며 황보룡에게 전음을 날렸다.
<아서게! 저자가 들을까 겁나네.>
전음을 듣고 정신을 차린 황보룡은 저쪽에서 신음 소리를 흘리며 말 위에 간신히 앉아 있는 능비화와 당소진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봤다. 덩치 좋은 사내인 자신도 온 삭신이 쑤시는데, 그녀들의 상태는 더욱 비참할 것이 뻔했다.
<우리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어찌 여자를 그토록 무자비하게 두들겨 팰 수가 있다는 말이오? 역시 저놈은 사악한 마두답게 변태 중에서도 변태가 분명하오.>
그날 저녁.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들 중 다섯 명은 묵향에게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았다. 남자고 여자고 그런 면에서는 매우 공평하게 취급하는 묵향이었다. 하지만 황보룡의 생각은 달랐다. 덩치 큰 자를 좀 더 많이 때리고, 여자는 살살 때려야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였다.
팽대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반쯤은 포기한 듯 풀이 죽은 어조로 전음을 날렸다.
<허어, 그럼 어쩌겠소? 때리는데, 맞아야지.>
<왜 그리 나약한 말씀을 하시는 게요? 팽소협의 덩치가 아깝소이다.>
그 말에 팽대성은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어젯밤의 악몽이 떠올랐던 것이다. 어젯저녁 자랑스러운 팽가의 후예가 어찌 마두의 주먹을 맞고 신음을 흘리겠느냐고 저항했고, 묵향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를 반쯤 죽여 놨던 것이다.
그런 그를 향해 측은한 시선을 보내며, 황보룡은 복수를 다짐했다.
<젠장, 이 복수는 언젠가 꼭 하고야 말겠소. 두고들 보시오.>
옆에서 황보룡과 팽대성이 전음을 나누고 있을 때, 옥대진과 능비화도 자기들끼리 전음을 주고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가께서는 좋은 방법이 없으신가요?>
능비화의 전음에 옥대진은 난색을 표했다.
<나라고 딱히 좋은 방법이 있을 리가 없지 않소? 어젯밤 그 난리를 피웠는데, 아무래도 슬그머니 도망치는 것은 어려울 듯하오.>
능비화는 앞에서 가고 있는 묵향을 살펴보며 전음을 날렸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을까요? 저 흉악무도한 자가 가가까지 해칠까 봐 너무 두려워요.>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오. 주위에 황룡무제와 그 문도들이 있소. 그자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대놓고 그런 만행을 저지를 수는 없을 거요.>
<하지만 화산에서의 일을 생각해 보세요.>
<아아, 능매(凌妹)는 그가 화산파를 멸문시킨 것 때문에 걱정하는 모양인데,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니까. 어젯밤 일을 생각해 보시오. 능매가 화산파라는 것을 그 놈도 분명 알고 있었소. 소개를 해 줬으니 말이오. 하지만 딱히 능매에게만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니지 않소?>
<그 말이 아니에요. 장문인께서 저자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무림맹에 알린 후, 화산파가 멸문당했어요. 아아, 그때 장문인께서 마교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무 림맹에 알리지 않았어야 했어요. 가가가 그 사실을 무림맹에 알렸다는 것을 저자가 눈치 챈다면 가가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잖아요.>
능비화의 전음을 듣고서야 옥대진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그렇다. 거기까지는 그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그럴 수도 있겠구려. 그럼 어찌하면 좋을까…….>
한동안 식은땀까지 흘려 대며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옥대진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동료 모두에게 전음을 날렸다.
<이보시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소.>
옥대진의 전음에 모두들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생각인데 그러시오?>
<멀지 않은 곳에 무당파가 있지 않소? 그리로 갑시다. 거기에서 도움을 청하면 되지 않겠소?>
그 말에 모두의 안색이 활짝 밝아졌다. 무당파라면 현 무림맹주인 태극검황(太極劍皇)을 배출한 검의 명문이 아닌가. 그곳이라면 마교 교주도 제멋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가장 좋을 것 같소.>
<누가 황룡무제 어르신께 그 말을 전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옥대진이 제안하자, 황보룡이 자신 있게 나섰다.
<내가 가겠소.>
묵향은 지금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전음성을 도청하는 재미에 흠뻑 취해 있다가 옥대진과 능비화가 나누는 전음을 듣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 말이 아니에요. 장문인께서 저자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무림맹에 알린 후, 화산파가 멸문당했어요. 아아, 그때 장문인께서 마교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무 림맹에 알리지 않았어야 했어요. 가가가 그 사실을 무림맹에 알렸다는 것을 저자가 눈치 챈다면 가가를 가만히 둘 리가 없잖아요.>
이 전음을 들은 후 묵향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사제가 그 모양이 되도록 만들어 놓은 원흉들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성질 같았으면 곧장 뒤로 달려가 저 연놈 들을 단숨에 때려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 그렇게 싱겁게 죽이면 안 된다.
저것들 때문에 사제는 모진 고초를 겪었다. 만약 아르티어스가 없었다면 불구의 몸으로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사제가 그런 꼴을 당하도록 만든 연놈들에게 간 단하게 죽음을 선물해? 그건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다음부터 묵향은 저것들을 어떻게 말려 죽일 것인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방법들이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그리고 묵향이 그러고 있는 동안에 황보룡 과 황룡무제는 말을 끝내고 무당파를 향해 방향을 잡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황룡무제는 무당파와 상당히 친분이 있었다. 특히 무당파의 전대 장문인과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그렇기에 무당파에 들렀다가 가자는 황보룡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