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162화
그리고 그 덕분에 천화와 이태영은 두 사람이 사용해야 할 침상을 혼자 차지하고서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웅성웅성….. 시끌시끌…..
“으으음…… 아침부터…. 아하암~ 뭐가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제법 크게 만들어진 창으로 들어온 신선한 아침 햇살 덕분에 비몽사몽간의 몽롱한 기분에 젖어 있던 천화는 문 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웅성임에 몸을 있는 대로 뒤틀고 눈을 비비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무림을 돌아다니던 시절의 침상에서 잠을 청한 덕분인지 평소의 천화답지 않게 조금 늦잠을 자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일어난 다른 사람들의 내용 모를 웅성임에 잠을 깬 것이었다.
침상에서 내려선 천화는 다시 한번 사지를 쭉 펴며 밤새 굳었던 몸을 풀고는 입고 있던 매끈한 잠옷을 벗어 던지고 어제 잠자리에 들기 전 벗어 두었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사실 이런 임무엔 별로 필요도 없는 잠옷이지만 연영이 밖으로 나다닐수록 제대로 해 입어야 된다며 챙겨준 것이었다.
“그런데 왜 라미아하고 한 벌로 맞춰서 산 건지…. 참, 다른 녀석들이 알면 또 놀려댈 텐데… 조심해야 되겠다.”
천화는 집에서 잠자기 전 라미아가 입고 돌아다니는 자신이 벗어놓은 잠옷과 거의 똑같은 형태의 잠옷을 떠올렸다.
롯데월드에 놀러가던 날 두 사람의 옷이 비슷한 것으로 놀려댄 아이들이다. 아마 그 사실까지 알게 되면 더 했으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천화는 이리저리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문을 열었다.
그런 천화의 눈에 이리저리 돌아다니거나 한두 명씩 모여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거의가 텐트에서 잠든 사람들로, 얇은 텐트 지붕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 덕분에 늦잠을 자고 싶어도 자지 못하고 자동적으로 일어난 사람들이었다.
천화는 그런 모습을 잠시 보다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제 밤 이곳으로 안내되는 도중 평평한 돌이 깔려진 우물과 수도꼭지를 본 기억에 그곳에서 세수를 할 생각이었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과연 그런 천화의 짐작이 맞았는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앞쪽으로 세 개의 수도꼭지가 일정 거리를 두고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천화의 짐작이 모두 들어맞은 것은 아닌 듯했는데, 세 개의 수도꼭지 중 라마승의 차림을 한 승려가 사용하는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두 개는 주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수도꼭지 대신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에 서 있는 것은…..
“쩝, 왠지 그럴 것 같더라…..”
천화는 버릇처럼 머리를 긁적이며 라미아와 신우영 등 한국에서 파견된 가디언 중 네 명의 여성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바로 그 네 명, 특히 그중 라미아가 수도 주변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던 것이었다.
“어머? 이제 일어났어요? 그런데 웬일로 천화님이 늦잠을 다 주무시네요.”
“어? 어제는 고마웠어….”
“굿 모닝….”
“네, 오랜만에 익숙한 침상에서 잠을 잔 덕분인지 편하게 잘 잤거든요.”
천화는 그 네 사람의 인사에 가볍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부러움을 가득 담고 주위에서 몰려드는 시선에 괜히 대답했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는 천화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꼭 부담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자랑할 거리는 되지 못하지만 라미아 덕분에 이런 시선에 제법 익숙한 천화였다.
“그런데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천화는 주위에 정체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정체되어 있는 문제점은 빨리빨리 해결해야 이곳도 한산해지고, 그래야지 자신도 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뭐 하긴요. 씻고 있죠. 천화님도 씻으세요. 물이 엄청 시원하고 깨끗해서 기분 좋아요.”
“하지만 머리카락이 아직 젖어 있는 걸 보니까 다 씻은 것 같은데….? 다른 세 사람도 그렇고….”
과연 세 사람 모두 촉촉히 젖은 머리카락에 뽀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평소보다 많은 시선을 모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긴 하지만 여기가 시원해서 기분이 좋아서요. 머리라도 다 말리고 가려고 언니들하고 이야기하는 중이죠. 그러지 말고 천화님도 빨리 씻으세요…. 어? 수건은….. 뭐, 제께 있으니까 빨리 씻어요.”
“…. 하아…. 그래, 그래….”
천화는 자신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빨리 씻으라고 성화인 라미아의 모습에 한숨을 푹푹 내쉬며 주인 없는 두 개의 수도꼭지 중 하나를 붙잡았다.
정말 저런 라미아의 모습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천화였다.
물론 귀여운 점도 있긴 하지만…. 검일 때는 상당히 빠릿빠릿했는데…. 왠지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혹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천화였다.
더구나… 그런 라미아 곁에 있는 세 사람은 또 뭐란 말인가. 천화는 그렇게 생각하며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 속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과연 저 깊은 우물 속의 물이라 그런지 시원하고 깨끗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천화는 보지 못했다. 라미아를 포함한 네 명의 여성이 상당히 재밌어 하는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말이다.
잠시 후 깨끗하게 씻은 천화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라미아가 건네는 수건으로 머리가 머금은 물기를 시원하게 털어 냈다.
비록 라미아가 앞서 사용한 것이라 조금 축축하긴 했지만 천화가 사용하기엔 충분했다.
물기를 털어 낸 천화와 네 사람은 텐트들이 진을 치고 있는 장원의 정원으로 향했다.
그곳에 나머지 한국의 가디언들과 커다란 임시 식탁이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그런 일행들을 향해 먼저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인형이 있었는데, 바로 어제 밤 일행들을 이곳 장원으로 안내한 메른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가 인사를 건네고픈 라미아나 천화는 전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메른은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완전히 물기가 가시지 않은 천화의 뒷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내는 라미아와 천화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메른의 말을 듣던 천화는 곧 눈썹을 슬쩍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 블랙퍼스트. 텬화…… 전화, 페스트…..”
자신의 이름을 이상하고 요상하게 자기 마음대로 발음하는 메른의 발음 때문이었다.
차라리 이름을 부르지 않던가 한 가지 발음만으로 불러줘도 좋으련만…. 저렇게 마음대로 발음하니, 천화로서는 상당히 듣기 거북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의 뒤쪽에서 킥킥거리고 있는 네 명의 여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말이다.
“메른, 메른….. 내 이름은 텬화나 전화가 아니라 천화라구요. 자 따라 해봐요. 천! 화!”
마치 막 말을 시작할 아기를 가르치는 듯한 천화의 모습에 메른은 별 거부감 없이 따라 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현재 부르고 있는 상대의 이름이 이상하게 발음된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 툔! 화!……”
태어날 때부터 써온 언어의 차이로 발음이 되지 않는 것을 어쩌겠는가.
“….. 다시, 천천히…. 천. 화.”
“…. 전. 화…..”
“처어언…. 화아아….”
“…. 텨어언….. 화아아….”
“키키킥….”
“쿠쿠쿡….”
“호호홋…. 천화님, 그냥 포기하세요. 도저히 안 될 것 같은데….”
자신의 이름과는 비슷하게도 발음이 되지 않는 메른의 극악한 발음에 잠시 굳어 있던 천화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따끈따끈한 기운이 머리 위로 솟아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열을 식히기 위한 수단으로 메른으로 하여금 뒤쪽에 있는 네 명의 이름을 말하게 했다.
“라미아, 세이아, 가브에, 씬우영……”
“이봐요.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뒤에 있는 사람들 이름은 잘만 말하면서 왜 내 이름만 안 되는 건데….. 다시 해봐요. 천화!!!!!”
메른이 네 명의 이름을 거의 정확히 발음하자 뒤쪽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고, 그에 따라 더욱 뜨거운 기운이 오르는 느낌에 다시 메른을 재촉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나였다. 천화는 그런 메른의 모습에 땅아 꺼져버려라 하는 식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힘없이 말을 내뱉었다.
“후아아아…… 그냥….. 이드라고… 불러요. 이드.”
그런 천화의 말에 메른이 몇 번 그 이름을 되뇌던 메른이 빙긋 웃으며 몇 마디 했는데, 그걸 세이아가 바로 통역해 주었다.
그 통역에 천화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앞서 가는 메른의 뒤를 따라 식탁을 향했다.
“처음의 그 발음하기 곤란한 이름보다는 이 이름이 훨씬 낫다는데? 앞으로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게 편하겠다는 걸….”
“하아……”
“에이…. 뭘, 그래요. 천화님. 이드란 이름도 꽤나 익숙한 이름이잖아요. 또 둘 다 천화님을 가리키는 말이구요. 이왕 저런 말을 들은 김에 이드란 이름을 사용하는 게 어때요?”
신우영은 어느새 천화의 곁에 붙어 말하는 라미아의 모습에 지나가는 식으로 물었다.
“그런데, 이드라니? 갑자기 무슨 이름이야?”
“에? 에…. 그러니까… 그냥 이름이예요. 어릴 때 만들었던 이름….. 어릴 때 제 이름이 천화님과 달라서 그 것과 비슷한 이름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게 이드란 이름이예요. 어릴 때 얼마간 사용하던 거요. 참, 언니도 이제 천화라고 부르지 말고 이드라고 부르세요.”
라미아는 신우영의 말에 순간 막히는 말문에 잠시 우물거리다 급히 대답했다.
그러면서 평소에 이런저런 상황에 잘도 둘러대는 천화가 새삼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이드라… 부르기 편한데…. 뭐, 그 결정은 다음에 하고 빨리 가서 밥 먹자. 어제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그냥 잤더니 배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