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 171화


“호오. 그렇다면 저도 그 말에 따라야지요. 알았어요.”

제갈수현을 통해 두 사람의 대화를 통역해 들은 이드와 라미아는 신기한 동물 본다는 양 빈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좋은 일도 아니고 나쁜 일만 그렇게 척척 알아맞출 수 있는 건가.

그렇게 잠시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던 이드는 저 앞에서 마법을 쏟아붙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라미아에게 맡겨두었던 쥬웰 익스플로시브를 건네주었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비록 크기가 작고 용도가 다양하진 않지만 그 파괴력 하나만은 알아주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실드로 주위를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뒤흔드는 폭발음이 지나간 전방 통로의 일정 부분은 암회색 석벽이 부셔져 그 검은 뱃속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곳에 설치되어 앞길을 막고 있던 함정 역시 깨끗이 날아가 버린 후였다.

“후~ 정말 굉장한 폭발이야.”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이 던젼 정말 튼튼한데, 그래. 이런 폭발이 있었는데도 돌 부스러기 하나 떨어지지 않는 걸 보면…. 후악… 뭐, 뭐야!!”

푸하아악…

무심코 뱉은 말이 씨가 된다고, 이드의 말에 맞장구 치던 쿠라야미는 천정의 돌 하나가 부셔짐과 동시에 쏟아지는 모래와 먼지를 혼자서만 뒤집어쓰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한 이 상황에 잠시 멍하니 쿠라야미를 바라보던 일행을 비롯한 세 사람은 어느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통로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웃음을 토해냈다.

“푸풋…. 푸…. 푸하하하하하….”

“아하하하… 정말… 걸작이다. 걸작…. 하하하하…”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쿠라야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에 쌓인 모래와 먼지를 떨어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만 웃으란 말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저기 히카루 대장 옆에서 제일 처음 웃음을 터트린 자신의 누나 때문이었다.

‘으…. 저건 정말 누나가 아니라… 웬수다. 웬수!’

잠시 후 웃음을 그친 이드가 물의 하급정령인 운디네를 소환해 쿠라야미에게 묻은 모래와 먼지를 씻어낸 후 일행들은 타카하라에게 동행을 요청해 던젼 안쪽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들과는 편치 않은 얼굴로 동행을 허락한 타카하라를 제외하고, 금세 일행들과 친해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타카하라 본인은 그런 모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일행들에 한참 앞서 빠르게 던젼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사이 빈은 메른과 두 명의 용병에게 타카하라와 이곳에 들어선 목적에 대해 물었으나 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사람들의 뒤를 라미아에게 한 팔을 내어준 채 뒤따르던 이드는 어느 순간 자신이 통로 전체를 막고 있는 거대한 석문 앞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래도 이곳이 목적지로 통하는 마지막 관문인 듯했다. 라미아에게 이끌려 멍하니 석문 앞까지 다가온 이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석문에 눈길을 주었다. 통로 한 부분에 설치된 문이 아니라 통로 그 자체를 막고 있는 석문이었기에 그 위용과 위압감은 실로 대단해 평범한 사람이라면 다가가는 것조차 꺼려질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문에 굵직굵직한 파도 문양이 꿈틀거리고 있으니… 투박하긴 하지만 정말 강한 느낌을 전해오는 것이 하나의 예술품을 보는 듯했다.

“호~ 대단한데…. 이런 문이 있는 걸 보면 여기가 던젼의 중심지 같은데…. 그렇담 정말 편하게 왔는걸. 실제로 우리가 거친 함정이라 봐야 하나도 없으니까 말이야.”

“고마워해라. 그게 다 우리가 먼저 함정을 부쉈 덕분이잖냐.”

그 큰 덩치로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며 석문 앞에선 저스틴과 브렌은 어느새 꽤나 친해진 듯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빈은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석문을 살피고 있는 제갈수현과 타카하라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두 사람 말대로라면…. 이 문에 뭔가 있어도 있겠군요?”

하지만 은근히 물어오는 그의 질문에 타카하라는 대답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한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겠지. 아니라면 그냥 튼튼한 문 하나 만들고 말지, 아니면 아예 문을 만들지 않는 방법도 있으니 말이요.”

이드는 일행을 거슬려 하는 타카하라의 말투에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빈을 보며 그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퉁명하다 못해 튕겨나는 대답에 찔끔 해서는 더 이상 질문할 생각을 못하고 그 옆에서 석문을 만지작거리는 제갈수현에게로 슬쩍 피해 버렸다.

“그럼 문에 어떤 함정이 되어 있는 거죠?”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 지금 이러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좀 조용히 해주게.”

“네, 넵!”

“끙… 저 타카하라 씨가 무서운 모양이지? 네가 그렇게 슬금슬금 피하는 걸 보면 말이다.”

석문을 만지작거리던 제갈수현은 포기했다는 식으로 고개를 내 저으며 손을 때고 물러났다. 이드는 제갈수현의 그런 반응에 석문 쪽을 슬쩍 바라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뭐… 저런 식으로 나오면 말 걸기가 힘들지. 그런데…. 석문에 설치된 함정 찾기 포기한 거예요?”

“어…. 도대체가 알 수가 있어야지. 아무리 봐도 보통의 기관장치 같은 건 없어. 그렇다면 마법적으로 설치되었거나 함정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내가 손쓸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지. 이런 건 마법사에게 맡겨두는 게 좋아.”

이드는 그의 말에 석문 쪽을 바라보았다. 과연 석문 앞엔 타카하라와 빈, 그리고 쿠라야미 만이 서있을 뿐이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바로 옆에서 팔을 잡고 서있는 라미아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물었다.

‘라미아 네가 보기엔 어떤 거 같아? 저 석문 말이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자세히 살펴본 게 아니라서요. 하지만, 한 가지 아까부터 눈에 밟히는 건 있거든요.’

이드는 그녀의 빠른 대답에 슬쩍 라미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라미아 역시 처음부터 석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드님도 조금 신경 써서 보시면 아실 거예요. 저 석문을 장식하고 있는 파도 무늬. 이상하지만 저 주위로 미세한 마나가 머무는 게…. 꼭 완성되지 못한 마법수식이나 마법진의 변형형 같거든요.’

‘호오~, 그럼….’

‘네, 아마 저 마법진을 완성시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하지만 사람들이 눈치 채기도 어렵고 또 눈치 챈다고 해도 상당히 고급의 마법진이기 때문에 풀어내서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꽤나 걸릴 것 같아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을 들으며 반짝이는 눈으로 석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의외로 그 방법이 간단했다. 다만, 석문이 너무 커 저 뒤로 물러서지 않는 한 그 문양을 한눈에 다 집어넣지 못하고,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로 사람의 특징을 잘 이용한 장치인 것이다.

이드는 자신의 머리로도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하는 파도 무늬의 마법진의 모습에 라미아의 뒷머리를 쓱쓱 쓸어주며 슬쩍 웃어 보였다. 잘했다는 표시였다. 덕분에 라미아가 호호호 웃으며 안겨 왔지만 이번엔 피하거나 밀어내지 않았다. 요즘 들어 이렇게 안겨도 밀어내지 않는 이드였다. 더구나 이번엔 라미아가 석문의 비밀까지 알아냈으니 더더욱 밀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뭐, 덕분에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눈빛을 한두 번 받아보는 것이 아닌 이드는 라미아의 은빛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감아 쓰다듬으며 자신이 서 있는 곳 주위를 지나치듯 둘러보았다. 라미아와 함께 앉을 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라미아와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석문의 파도 무늬에 대해 알아내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기에 앉아서 기다리려는 생각이었다. 솔직히 말해줘도 나쁠 것은 없지만 빈에게 찍힌 저 타카하라란 사람의 눈길을 끌고 싶은 생각이 없는 두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그런 이드의 추측에 반대라도 하듯 세 명의 마법사들은 석문에 새겨진 파도 무늬의 비밀을 알아냈다. 비록 세 명의 마법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빠른 시간 내에 비밀을 푼 것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알아낸 것일 뿐 파도 무늬를 마법진으로 풀이하고 그 마법진을 해석해서 완성하기엔 아직 상당한 시간이 남아있기에 이드와 라미아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들은 느긋한 모양으로 주저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덕분에 괜한 심술이 난 쿠라야미가 투덜거린 긴 했지만 그의 누나인 마에하라 코우의 살기 뛴 미소에 손쉽게 진압되었다.

“자자… 수다 그만 떨고 이쪽으로 와 주겠나? 이제 자네들 차례인 것 같으니까 말이야.”

세 사람의 마법사가 허리를 굽힌 지 두 시간 여 만에 빈이 굳은 허리를 펴며 일행들을 불렀다. 특히 빈의 피곤한 얼굴 위로 떠오른 고통스런 표정과 함께 그의 허리에서 울려 퍼지는 오묘한 뼈 부셔지는 소리에 여지까지 앉아 놀던 일행들은 미안한 마음에 급히 다가왔다. 이드를 비롯한 놀던 사람들이 다가오자 쿠라야미가 바닥에 그려진 직선과 곡선의 그림과 석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혹시 나이트 가디언 분들 중에 여기 있는 그림을 조금도 틀리지 않게 저 석문에 그려 넣으실 수 있는 사람 없어요? 단, 주위로 금이 가서도 안 되고 깊이 역시 저기 새겨진 파도 무늬와 똑같아야 됩니다.”

그의 말에 이드를 비롯한 검기와 강기를 사용할 수 있는 나이트 가디언들이 그림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 그림은 석문의 그림 위로 그 석문을 가로지르는 직선과 파도 무늬 사이를 노니는 곡선….

그림의 내용을 본 몇 사람은 손을 내저으며 뒤로 물어서 버렸다.

“노, 무조건 때려 부수는 거라면 몰라도 저런 건 자신 없어.”

“나도 마찬가지. 이 녀석처럼 단순한 건 아니지만…. 아까의 조건을 충족시킬 자신은 없어.”

“뭐야? 누가 단순해?”

“아아… 둘 다 시끄럽게 하지 마. 나도 포기. 자신 없어.”

그런 식으로 한 사람 두 사람 빠지고 난 후 결국 그림 주위로 남게 된 건 다섯 명이었다. 롱 소드를 사용하는 스티브와 홍색 절편의 호연소, 미려한 곡선이 살아있는 두 개의 일본도를 가진 히카루와 두툼하고 둔해 해이는 검에 맞지 않게 날카로운 검기를 사용하는 브렌, 그리고 이드의 다섯이었다. 그 다섯 명의 모습에 타카하라가 여전히 퉁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실력 있는 사람이 꽤 되는 군. 하지만 필요한 건 한 명뿐이네. 그러면 이 중 가장 실력이 좋은 사람을 골라야겠지? 각자 그림에 있는 곡선을 하나씩 골라서 저 석문의 깊이와 비슷하게 새겨보게. 저쪽 통로 벽에다 말이야.”

그의 말투에 방금 전까지 좋던 분위기가 팍 가라앉는 느낌을 받은 다섯 사람들이었지만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기에 각자 그려야 할 곡선을 하나씩 확인한 후 뒤쪽 통로 벽 앞에 넓게 늘어서며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드 역시 일라이져의 은빛 검신을 꺼내 들었다. 그 유려한 검선에 이드의 양옆으로 서 있던 브렌과 호연소가 자신들의 기를 가다듬을 생각도 않고 탄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곧 일라이져의 검신 위로 어리는 발그스름한 기운에 자신들 역시 내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한 순간.

서걱… 사가각…. 휭… 후웅….

쿠콰콰쾅…. 콰콰쾅……

누가 신호를 준 것도 아니건만 다섯 사람의 손은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그와 함께 일라이져의 발그스름하게 물든 검신도 난화십이식의 구결을 따라 유려하게 움직였다. 무언가를 세는 작업이기에 막강하기보다는 섬세한 난화십이식을 응용한 이드였다.

“소환 실프. 모래와 먼지를 날려보내라.”

많지는 않지만 벽에서 떨어진 돌이 바닥에 나뒹굴며 일어나는 뿌연 먼지에 메른은 그 먼지가 자신들에게 미치기 전에 실프를 불러 그 것들을 반대쪽 통로로 날려 버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벽엔 마치 손으로 새겨 넣은 것과 같은 다섯 줄기의 곡선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