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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172화


“호~ 정말 깨끗하게 새겨졌잖아. 어디 좀 더 자세히 볼까?”

그 말을 시작으로 뒤쪽으로 물러서 있던 사람들이 다섯 개의 곡선 앞으로 몰려들었다. 하나하나 그림에 그려진 것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중 두 개. 그러니까 호연소와 스티브가 새겨 넣은 것만은 미세하지만 그 주위로 실 금이 가있었고, 나머지 세 개는 손으로 새겨도 이보다 못 할 정도로 그야말로 깨끗하게 새겨져 있어 누가 잘했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타카하라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세 사람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로 말을 던졌다.

“…. 누가 할 텐가? 자네들이 정하게.”

“그럼… 제일 먼저 내가 빠지지 두 사람이 정해요.”

그렇게 말하며 제일 먼저 브렌이 빠져 버렸다. 하라기에 하긴 했지만 직선적인 성격상 섬세하게 무언가를 하는 게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먼저 빠져버리는 브렌을 보면서 곧 바로 자신도 빠지려고 했으나 그보다 히카루가 검을 집어넣는 것이 더 빨랐다.

츠엉….

“저도 빠지죠. 저보단 저쪽 이드란 소년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 그럼…. 내가 해야 되는 건가?”

이드는 또냐는 식으로 머리를 긁적여 보였다.

“자, 그럼 정해졌으면 빨리 좀 처리해주겠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하던가 말일세.”

타카하라의 띠거운 제촉에 그를 쏘아봐 준 이드는 곧바로 돌아서 석문 앞으로 다가갔다. 석문에는 어느새 그려놓았는지 바닥에 그려져 있던 그림과 비슷한 그림이 하얀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밑으로 쿠라야미가 서 있는 것이 그가 정(精)으로 그려놓은 듯했다. 석문 가까이 다가간 이드는 일라이져로 석문의 강도를 확인해보고 그림을 따라 손을 휘둘러 본 후 석문에서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그럼 모두 뒤로 충분히 물러나 있어요.”

“충분히 물러났어. 빨리 하기나 해.”

제갈수현의 대답을 들은 이드는 언제 그렇게 피했냐는 듯 빙긋 웃으며 그를 돌아본 후 플라이 마법이라도 사용한 듯이 천정 가까이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이드의 몸이 올라가던 걸 멈췄다고 생각될 때 그 주위로 붉은 기운이 어리기 시작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붉은 선들이 이드와 석문 사이를 오가기 시작하며 마치 석문이 이드를 붙잡고 있는 듯한 묘한 모습을 만들어 냈다.

서걱… 사가각….

뒷 꼭지를 싸늘하게 식히는 섬뜩한 소리는 이드의 몸과 깍여진 돌 조각들이 떨어져 내린 후에도 일행들의 귓가를 잠시간 맴도는 듯했다. 이드가 모든 작업을 끝내자 피어오르는 먼지와 떨어져 내리는 돌 조각을 메른이 실프로 날려버리자 아까와는 다른 얼굴을 한 석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흰 선이 그려진 대로 한치의 어긋남 없이 깨끗하게 깎여진 석문. 그리고 그 사이로 비쳐 나오는 밝은 남색의 빛.

“좋아. 반응이 있다. 모두 물러서서 만약을 대비해라.”

“벌써 하고 있다구요. 대장.”

“이드님 어서 이리로…”

이드는 등 뒤에서 들리는 라미아의 목소리에 빠른 속도로 석문에서 떨어져 라미아 곁으로 가 섰다. 이드가 새겨놓은 곳을 따라 흐르던 남색의 빛은 점점 강해지며 석문 전체에 새겨진 파도 무늬를 따라 흘러들었다. 석문 전체로 퍼진 빛은 점점 그 세기를 더해 가더니 한 순간 절정에 이르러 일행들이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서서히 줄어드는 빛줄기와 함께 일행들의 앞으로 떡 하니 가로막고 있던 석문도 점점 희미해져 그 안쪽을 비추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거나 들려지거나 할 줄 알았던 모두는 이 생각지 못한 현상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이드는 석문 뒤로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문 뒤의 모습에 라미아와 함께 석문 가까이 다가갔다. 갑작스런 이 행동에 급히 제재하려던 빈 역시 더 이상의 문제는 없을 듯한 느낌에 그 뒤를 따랐다. 대신 이미 석문 앞으로 다가가 있는 타카하라는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드는 서서히 투명해져 가는 석문 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동전 정도의 굵기를 가진 원통형의 수정 수십 개가 허공에 매달려 샹들리에 역할을 하는 그 아래로 그와 같은 형태지만 빛을 발하지 않는 수정이 반원형으로 꽂혀 작은 울타리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 아이가 안을 수 있을 정도의 굵기에 이드의 허리까지 오는 정체 불명의 수정대(水晶臺)가 놓여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뒤로 백색 나신을 한 엘프 동상이 한 쪽 손을 쭉 뻗어 올리고 있는 것이 마치 화려한 신전의 여신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특히 그녀의 올려진 손 위에 떠 있는 은은한 황금빛 원추형 보석은 그런 분위기를 한층 더해 주었다. 단, 그 동상 뒤로 버티고 선 벽화(壁畵)만 아니라면 말이다. 도대체 언젯적 그림인지 무엇으로 그린진 모르겠지만 아직도 제 색깔을 자랑하고 있는 석화엔 수십, 수백의 인간들과 몬스터들이 그 앞에 서 있는 엘프를 향해 무릎 꿇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이드와 라미아가 정신없이 내부를 살피는 사이 남빛을 발하던 석문은 완전히 투명해져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 느낌에 앞으로 뻗은 이드의 손은 턱! 하고 막혔어야 할 석문이 있던 부분을 지나 허공을 휘저어 대고 있었다.

“호~ 정말 없어졌는걸.”

이드가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라미아와 함께 석실로 들어섰다. 두 사람이 아무 이상 없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 뒤를 이어 나머지 일행들이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이드가 들어설 때 같이 들어서 여신의 손 위에 올려진 보석을 바라보던 타카하라는 두리번거리는 일행들의 모습을 보며 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 그의 목소리는 퉁명스럽다 못해 딱딱 끊어지는 것이 사무적이기까지 했다.

“에플렉 대장. 내가 이곳을 발견한 만큼 저기 있는 보석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소 만…. 물론 반대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오.”

순간 웅성이던 모든 소리가 끊어지며 분위기가 백팔십도 바뀌어 냉기가 흘렀다. 원래 가디언들이 이곳에 들어온 이유가 믿음이 가지 않는 타카하라와 이곳에 있을 물건의 위험도 때문이었다. 헌데 타카하라에 대한 의심은 고사하고 물건의 용도도 알지 못한 지금 타카하라가 물건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주장이 정당한 것이기에 반대할 수도 없는 빈이었다.

“아……”

“뭐, 별다른 말씀이 없으신 걸 보니…. 긍정의 답으로 알아듣도록 하겠소. 그럼 나머지 이야기는 저 보석을 취한 후에 하도록 합시다. 플라이(fly)!!”

시동어와 함께 그 주위로 조용한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타카하라의 몸이 조용히 떠올라 보석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덕분에 일행들에게 보이지 않는 그의 눈에는 욕망과 희열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최고조에 달하며 보석이 그의 손에 쥐어졌을 때 타카하라는 눈앞이 온통 붉은 세상으로 변하는 느낌에 기겁하며 플라이 마법을 풀고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이, 이드…..?”

“이봐, 이게 무슨 짓이야!”

방금 전의 섬뜩함에 돌 바닥에 떨어진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정신없어 하던 타카하라는 급히 들려오는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다는 곳엔 은은한 붉은 빛을 머금은 일라이져를 들고 있는 이드와 라미아가 서있었다.

제갈수현은 이드의 갑작스런 난동에 정색을 하며 급히 타카하라의 앞을 가로막는 브렌을 바라보며 이드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옆에는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의 빈이 조용히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젠장, 어째서 안 좋은 예감은 이렇게 잘 맞아떨어지는 거야? 차라리 좋은 일이라면 남들에게 대접이라도 받지….’

하지만 지금은 신세 한탄보다는 상황처리가 더욱 급하기에 곧 자신의 주위를 드리우는 어둠을 지워 버린 빈은 급히 설명을 바란다는 눈으로 이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설명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도 행동 방향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후… 이드군, 지금 이 상황. 당연히 설명해 줄 수 있겠지?”

쓰러진 타카하라를 바라보고 있던 이드는 빈의 말에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와 함께 석실 내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모여들었다. 이드는 라미아에게 타카하라의 감시를 부탁하곤 빈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당연하죠. 하지만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제가 말하는 것 보단 직접 보시는 게 낳을 것 같네요.”

“뭘 보란 말인가?”

이드는 아리송해 하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슬쩍 벽화 쪽을 가리켜 보였다. 자신의 손짓에 타카하라를 제외한 모든 일행의 눈길이 벽화 쪽으로 돌아가자 나직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벽화에 있는 인간과 몬스터의 이마 부분을 잘 살펴보세요. 아마…. 이해가 가실 겁니다.”

그 말을 하며 이드 역시 한번 더 벽화를 바라보았다. 그림 속의 인간과 몬스터. 그들의 이마엔 하나같이 원추형의 노란색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여신의 손 위에 올려져 있던 보석과 같은 모양과 색깔이었다. 이 정도라면 아무리 눈치 없는 인간이라도 보석과 무릎 꿇고 있는 인간과 몬스터의 관계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리라.

“흐음… 타카하라씨. 다시 생각해보니, 그 보석이 위험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희에게 맡겨주시겠습니까?”

이렇게 말이다. 벽화에 모였던 빈과 일행의 시선이 몸을 일으킨 타카하라와 그의 손에 들려 이제 투명한 수정과도 같게 변해 버린 보석을 번갈아 보았다. 그렇다. 타카하라는 그 위험한 와중에도 마치 자신의 생명 줄인 양 보석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그는 일행들이 자신을 향해 곱지 못한 시선을 보내고 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의 눈에 어떤 흥분의 느낌마저 어려 있었다.

그런 타카하라의 눈빛을 눈치챈 이드는 왠지 모를 찝찝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후~ 에플렉 대장. 아까도 말했지만 이 보석의 소유권은 내게 있다오. 그보다 브렌, 자네는 어쩔 텐가. 용병으로 고용된 만큼 일이 끝날 때까지 나와 일할 텐가. 아니면 돌아설 텐가.”

이드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그의 말투에 브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땐 이미 브렌이 등을 돌려 타카하라와 대치상태에 들어간 후였다.

“미안하지만 계약파기요. 용병이긴 하지만 명색이 신관까지 끼어 있는 판에 나쁜 놈 편에 설 순 없지 않겠소? 내가 지금까지 읽은 소설이며 영화에서 악당이 잘되는 꼴을 본 적이 없거든. 괜히 그쪽에 붙었다 깨지는 것보다는 낮다고 보오. 게다가 아직 돈도 못 받은 상태에서 당신에게 붙었다가 당신이 깨지면 이래저래 손해란 말씀이오.”

“흥, 에라이 놈아! 이리저리 돌려 말해도 결국 돈 때문이란 얘기잖아.”

어느새 다가온 저스틴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심술 굳게 말했다. 하지만 내심 적이 되어 칼을 맞부딪치지 않게 되어 안심하고 있었다.

“자… 혼자서 우리와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오?”

하지만 타카하라는 여전히 여유였다. 안경태를 슬쩍 치켜올린 그가 말을 이었다.

“뭐, 맞는 말이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손안에 이 ‘종속의 인장’이 없을 때에나 해당하는 말, 지금처럼 내 손안에 이 물건이 들어온 상황에서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협박이자 경고일 뿐이오.”

“종속의 인장….??!!”

이드는 ‘종속의 인장’이란 단어를 머릿속에 올리고 빠르게 그레이드론의 지식창고를 뒤적여 보았다. 저 타카하라가 저리 여유로운 이유를 찾기 위해서였다. 왠지 이름과 벽화의 그림이 어울려 유쾌하지 못한 기능을 가진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쳇, 없다. 라미아…. 혹시…..”

이드가 라미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벌써 고개를 내젖고 있는 그녀였다.

“모르는 이름이예요. 이쪽 차원의 물건인 만큼 신과 관계되지 않은 물건 하나하나에 대해 알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사정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타카하라가 손에 든 ‘종속의 인장’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천천히 들어 올려진 ‘종속의 인장’의 인장이 일행들을 겨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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