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176화
라미아는 그렇게 말하며 거실 한쪽에 귀여운 모양의 전화와 함께 놓인 작은 안내책자를 바라보았다. 그 책의 표지엔 커다랗게 배의 사진과 함께 국내외 운항이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와이번 등의 비행형 몬스터 때문에 가디언의 임무시를 제외하고 운항하지 않는 비행기 때문에 국가 간의 운항에 거의 배가 사용되고 있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드와 라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촤아아아…. 쏴아아아아….
저 하늘 위에서 기세 등등하게 햇살을 내려 쬐는 태양의 열기를 시원하게 식혀버리는 하얀 포말과 시원한 파도소리. 바로 대형 여객선이 바다 위를 빠른 속도로 지나가며 일으키는 것이었다. 파아란 바다 위를 하얀색 일색의 여객선이 내달리는 모습은 마치 파란색 물에 하얀색 물감이 풀리는 듯한 모습을 연상케 했다. 이 한여름의 열기에 지쳐 헉헉대는 사람이라면 이 여객선에 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히 들 정도로 시원한 장면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부러워할 듯한 여객선의 선두. 약간의 소금기가 섞여 짭짤한 바다 내음이 가득 담긴 바람을 맞으며 반쯤 눈을 감은 소년이 배의 작은 기둥에 등을 대고 서 있었다. 어깨에서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푸른색의 리본으로 질끈 묶어 뒤로 넘긴 덕에 시원히 드러나 보이는 얼굴은 가늘고 섬세해 보여 중성적으로 보이지만 그 덕분에 더 아름다워 보이는 얼굴을 가진 소년은 한국을 떠나온 이드였다. 그리고 그런 이드의 가슴에 등을 기댄 채 편안히 저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은발의 소녀. 어찌 보면 아름답고 어찌 보면 닭살스런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그녀는 두 말할 것도 없는 라미아였다. 두 사람 모두 배 여행에 익숙해진 듯 찰랑이는 파도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배의 움직임에 편안히 몸을 실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롭고 편안해 보이는 장면과는 반대로 두 사람의 표정은 웬지 모를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게다가 그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 것으로 인한 듯 했다. 이미 이런 저런 전투를 거친 두 사람에게 육체적인 피로가 올 정도의 전투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전투가 있었다면 배에서 있었을 것인데 지금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배는 외관상으론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인간이라고 하기 힘든 두 사람에게 정신적인 피로를 느끼게 할 정도의 원인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그 원인은 얼마 되지 않아 그 모습을 들어냈다. 이드와 라미아를 향해 다가오는 소년. 이드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 소년은 붉은 빛이 도는 갈색머리에 그리 크지 않은 보통 키, 그리고 둥근 계란형의 얼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부감이 들지 않게 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소년의 두 눈은 나이에 맞지 않는 장난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더구나 소년이 입고 있는 옷은 그 또래의 평범한 옷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이 세계에서 처음 보는 황색의 안정된 색깔을 가진 풍성한 사제복이라서, 그의 모습과 어울려 상대방으로부터 경계심이란 감정을 가지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 이드와 라미아는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하나의 기척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최대한 몸을 등 뒤의 기둥으로 가리며 지금 다가오는 상대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인물이 아니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바람을 무시하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드와 라미아, 두 사람은 허탈한 표정으로 나직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드래곤을 앞에 두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기사의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하하하… 두 분 여기에 계셨군요. 그런데… 거기에 그렇게 있으니까 너무 보기 좋은데요. 정말 하늘이 정해준 인연 같은… 앗! 설마, 제가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가요? 그렇다면, 죄송해서 어쩌죠?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단지 선원에게서 들은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한 건데. 뭐, 이렇게 된 거니 어쩔 수 없으니까 들어보세요. 그 선원이요, 글쎄…..”
상당히 빠른 말솜씨였다. 이드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말 지겹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들의 대답은 거의 듣지도 않고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저 수다. 아무리 듣지 않는 척 외면해도 굽히지 않고 떠들어대는 저 수다는 정말 참기 힘든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할 말이 많기에 저렇게 떠들어대는지. 저러다 입술이 부르트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저렇게 수다스런 인간이 어떻게 안식과 평안과 약속을 수호하는 신인 리포제투스의 대사제가 될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설마 신인 리포제투스께서 자신을 제일 처음 받들게 될 대사제를 고를 때 잠시 졸기라도 하셨단 말인가.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쩌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드였다.
자신의 이름을 제이나노라고 밝힌 저 사제와 만난 것은 배가 홍콩에 잠시 정박했을 때였다. 그때 홍콩에서 승선한 제이나노가 때마침 갑판에 나와 홍콩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건넨 것이었다. 자신의 말로는 말을 걸어봐야겠다는 필이 왔다나?
하여간 그 첫 만남을 시작으로 제이나노가 거의 일방적으로 두 사람을 따라다녔던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한 일행인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끊이지 않는 수다를 입에 달고서.
덕분에 달리 도망갈 곳이 없는 두 사람은 꼼짝없이 그에게 붙잡혀 그 수다를 들어야 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한 차례 정신 공격을 당한 듯한 피로감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호~ 오…. 영국에 도착하기까지 앞으로 이틀. 저 수다를 이틀이나 더 겪어야 하다니… 이드님, 우리 그냥 저 사람 기절 시켜버리죠. 아니면 그냥 마법으로 재워 버리던가. 저 정말 미칠 것 같아요.’
포옥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가슴속을 두드리는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별 말 없이 그녀의 머리를 쓸어줄 뿐이었다. 정말 자신도 그랬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어떻게 된 것이 목적지가 영국인 것까지 같아서 이렇게 골치를 썩히는지.
하지만 앞으로 이틀 아니, 정확히 하루하고 반나절만 더 인내하고 견디면 벗어날 수 있다.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당장에 슬립 마법이라도 걸어버릴 기세의 라미아를 달래며 제이나노를 돌아보았다. 아직 이야기가 다 끝나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드는 거기에 상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제이나노와의 대화를 위한 특별한 방법이었다. 이렇게 짜르고 들지 않고 그의 말이 멈추길 기다리다간 언제 자신의 말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네이나노. 그 이야기는 벌써 들었던 거거든. 그러니까 듣지 못했던 걸로….”
어차피 멈출 수 없는 수다. 새로운 이야기라도 듣자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내뱉은 이드의 말이었다.
하지만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났을 때, 이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제이나노의 혼혈과 수혈을 목표로 뻗어 나가는 손을 간신히 겨우겨우 내려놓았다. 그런 이드와 라미아 앞에서는 생글거리는 얼굴의 제이나노가 큼직한 배낭을 매고 서 있었다.
“저기…. 그, 그게 무슨 말이야? 가, 같이 가겠다니? 혹시 내가 잘못 들은 말 아니야?”
이드는 확인을 바라는 심정으로 말했다. 배에서 내리는 순간 한시라도 빨리 그와 떨어지고 싶었던 이드와 라미아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와 작별 인사를 하려고 했었다. 헌데 황당하게도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이드와 라미아에게 같이 행동할 수 있도록 동행을 요청한 것이다.
“아니요. 그 말 대로예요. 제가 저번에 말했다 시피 제가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이유가 세상에 리포제투스님의 존재와 가르침을 알리기 위해서잖아요. 다시 말하면 뚜렷한 목적지가 있지 않다는 거죠. 그런 상황 중에 저는 홍콩에 있었고, 갑작스런 예감에 영국행 배에 올랐지요. 그리고 거기서 여러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정말 느낌이….. 그래서….”
이드는 다시금 목적을 잊고 길게길게 늘어지는 제이나노의 수다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이번에도 필이 왔다는 거겠지. 그 짐작과 함께 이드의 얼굴 위로 강한 거부감이 확연히 떠올랐다. 뿐만 아니었다. 그 옆에 있던 라미아는 간절한 목소리로 제이나노를 기절시키고 도망갈 것을 요청해 왔던 것이다. 정말 두 사람 모두 어지간히도 제이나노의 수다가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그때까지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제이나노의 입이 조용히 닫혔다. 동시에 그의 표정 또한 신을 받드는 사제라는 느낌이 드는 평온하면서도 엄숙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순식간에 바뀐 그 느낌에 이드와 라미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제 말이 또 길어졌군요. 다시 한번 정중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분과의 동행을 허락해 주십시오. 절대 두 분께 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후우~ 도대체 왜 우리와 그렇게 동행을 원하는 거지? 우린 그냥 평범한 여행자일 뿐인데…. 우리가 어딜 가는 줄 알고 따라 오겠다는 거야? 우리가 가는 곳이 위험한 곳일지도 모르지 않아? 그리고 불편하게 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넌 지금도 우리에게 꼬박꼬박 높임말을 써서 신경 쓰이게 하고 있잖아!!”
그렇게 서로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길 삼십 분. 라미아의 응원까지 받아가며 그의 부탁을 거절하던 이드는 결국 지고 말았다. 원래 사제란 사람들이 말재주가 좋은데다, 평소 엄청난 수다로 말빨을 세워둔 그를 말로써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 동행에 내건 몇 가지 요구 조건으로 그의 수다를 막은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요구 조건으로도 그의 말투는 고칠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써오던 것이라 고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 그럼 우리 파티의 목표와 목적지는 어디죠? 이쪽? 저쪽? 아니면, 그쪽? 어디로 가야 되죠? 제가 느끼기엔 요쪽 같은데 말이죠. 아- 아니다. 이쪽일 수도….”
“제이나노…. 제발. 조용히 하기로 했잖아. 그리고 우리 목적지는 커다란 숲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괜찮아. 그러니까 그렇게 두리번거리지 좀 말아.”
이드는 자신의 말에 급히 입을 손으로 가로막는 제이나노의 모습을 보며 지금이라도 도망쳐 버릴까 하는 생각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쓰잘 때 없는 이야기에 휘말리기 싫었던 라미아는 이미 지나다니는 사람을 붙잡고 영국에서 새로 생긴 커다란 숲에 대해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