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181화
전혀 생각밖이었던 이드의 말에 잠시 굳어 있던 제이나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엘프를 찾는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것에 대한 이유로 무언가 거창한 걸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단순히 몇 마디 물어보기 위해서라니… 제이나노로서는 너무 상상 밖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라미아의 대답에 제이나노는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
이 세계가 봉인되어 있었던 이유.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봉인에 대한 것은 알고 있지만 왜 그렇게 된 것인지, 또 자신들이 봉인된 것인지 아니면 봉인을 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제이나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봉인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어진 라미아의 이야기에 나오는 지트라토 드리네크라는 마족의 일기책과 던전에 등장했던 봉인이전의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마법사와 마족.
라미아의 이야기를 들은 제이나노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그가 대사제라는 이름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아직 모험이라고 말할 만한 경험은 없었다.
하지만 라미아의 이야기는 그 하나하나가 흥미진진한 모험거리였다. 그리고 그 역시 모험을 동경하는 한 명의 사람이었다.
“너무 그렇게 기대는 하지 말아. 웬만해선 그 마족과 부딪칠 일도 없어. 엘프를 찾는 것만도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이잖아.”
이드가 점점 기분이 고조되어 가는 제이나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말했다.
물론 거짓말이다.
마족이야 어찌 될지 모를 일이고 엘프라면야 자신들이 목적한 숲에만 있다면 라미아와 자신이 충분히 찾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 덕분에 고조되어 가던 제이나노의 기운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흥분 상태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평안과 약속의 신이라는 리포제투스의 사제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사람이었다.
“하, 하지만… 정말 상상만 하던 상황이잖아요.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볼 수 있었던 그 모험을 정말로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에효~ 제이나노, 당신 눈에는 그럼 모험만 보이고 봉인이전의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마족이나 마법사에 대해선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지.’
이드가 마음속으로나마 제이나노를 향해 그렇게 말하며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직접 말하진 않았다. 저 촐싹대는 사제가 그 말을 들었다간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라미아가 세 사람이 잠잘 자리를 만들어 정리했다.
각각 세 사람이 누울 땅바닥을 노움을 이용해 평평하고 부드럽게 고른 후 실프를 불러 그 위에 넓은 나뭇잎을 깔아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다 다시 자신의 공간에서 꺼내 든 푹신해 보이는 침낭을 올려놓았다.
사실 생각 같아서는 연영이 챙겨준 텐트를 쓰고 싶었지만, 생각도 못한 일행인 제이나노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침낭을 꺼낸 것이었다.
게다가 여름인 이상 꼭 텐트를 꺼내야 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련된 잠자리는 다시 한번 제이나노로 하여금 만족스런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특히 라미아가 침낭을 허공에서 꺼내는 공간마법은 그로 하여금 배울 수 없냐며 매달리게 할 정도였다.
그러는 동안 해는 완전히 져버리고 달이 둥실 떠올랐다.
작긴 하지만 숲은 숲이기 때문에 달빛이 들지 못하는 숲은 상당히 어두웠다.
깊은 밤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에 세 사람은 일찌감치 자신들의 침낭으로 들어갔다.
불침번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다.
라미아와 이드가 잠자리를 마련하며 주위로 알람마법과 구궁진(九宮陣)을 설치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침낭에 몸을 뉘인 그들은 숲 속에 감돌고 있는 안온함에 자신들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으음…..”
“…..”
오랜만에 편안한 느낌에 깊이 잠들어 있던 이드는 자신의 귓가로 작게 울리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소리의 근원지가 워낙 먼 탓에 이드 옆에 누운 라미아와 조금 떨어진 곳에 누워 있는 제이나노는 아직 아득한 꿈나라를 여행 중이다.
아마 이드도 지금 귀를 기울이고 있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린 것이 아니라면, 희미하고 멀게 느껴진 것이 아니었다면, 귀에 익은 소리가 아니었다면 라미아와 함께 꿈속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드는 어느새 달아나 버린 잠에 입맛을 다시며 귀를 기울이고 있다.
대개의 고수가 그렇듯 이드도 가까운 곳에서 웅성이는 소리보다는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이드는 잠시 후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 큰 물체가 굴러가는 소리 사이로 들리는 것은…
“…. 이런 새벽에 사람이란 말이지.”
사람들의 대화 소리였다.
그것도 라미아의 모은 정보를 마법으로 가공하여 쓸 수 있게 된 이 세계의 언어 중 영어라는 언어였다.
“으음…. 사람….”
라미아가 잠꼬대처럼 웅얼거리며 몸을 움찔거렸다.
이드와 영혼이 이어진 그녀인 만큼 방금 전 이드가 귀를 기울이는 데 정신을 모은 덕분에 그 내용이 잠자고 있는 라미아에게 무의식적으로 전해진 모양이었다.
이드는 일어나다 말고 그런 라미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작게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쉬~ 괜찮아, 괜찮아. 별일 아니니까 라미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알았지….. 그러니까 더 자도록 해.”
잠결에도 이드의 속삭임을 들었는지 라미아의 입가로 방긋 미소가 어리며 다시 색색 안정된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이드는 조용히 신법을 이용해서 숲 외곽지역으로 걸어나왔다.
일라이져도 챙기지 않은 채, 간편한 옷차림 그대로였다.
다행히 이드들이 노숙 장소로 고른 곳 주위는 언덕이나 나무들이 별로 없는 평야 지역이었다.
거기에 이드가 지금 서 있는 곳은 그런 평야 중 작게 솟아 언덕이라 부를 만한 곳.
덕분에 숲 외곽으로 나온 것만으로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일단의 무리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마차로 보이는 커다란 물체와 그것 주위로 걷고 있는 사람들.
순간 이드의 뇌리로 오늘 아침에 헤어졌던 하거스의 모습이 스쳤다.
하지만 곧 고개를 내저었다. 헤어진 지 하루도 되기 전에 다시 만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 일행엔 마차를 끄는 시끄러운 차가 끼어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 일행들에게선 그 차의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그들을 살피던 이드는 주위에 앉을 만한 곳을 찾아 털썩 주저앉았다.
“자, 새벽에 남의 잠을 깨운 사람들이 누군지 얼굴이나 보자. 빨리빨리들 오라구…”
자신의 감각이 너무 뛰어나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들만 탓하는 이드였다.
확실히 그들은 똑바로 지금 이드들이 노숙하고 있는 숲을 향해 오고 있었다.
이곳은 야영을 하기엔 더없이 좋은 곳.
이드들이 이곳을 찾은 만큼 다른 사람들이라고 이 장소를 모르란 법은 없었다.
“하. 하… 이거 참, 인연이 있다고 해야 되나?”
잠시 후 이드는 버릇처럼 뒷머리를 긁적이며 의미 모를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이드의 시선이 닿는 곳엔 이제 지척으로 다가온 일단의 일행들이 있었다.
이드의 시선은 그 일행 중 선두 부분에 서 있는 다섯 명에게 향해 있었다.
네 명의 덩치 좋은 남자와 금발의 여성.
아침에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던 디처의 팀원들이었다.
그 외에도 처음 보는 상인들과 용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드가 그들을 살피는 사이, 그쪽에서도 이드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며 주위를 경계했다.
그들로서는 자신들을 기다린 듯한 이드의 모습이 의외였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가냘파 보이는 소년이란 사실에 그 경계는 쉽게 풀렸다.
이어 이드를 알아본 디처의 리더 하거스의 목소리에 그들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디처의 리더가 알고 있는 상대라면 경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들이었다.
“여~ 과연 인연이 있는 모양이야. 이런 곳에서 또 보고 말이야. 그나저나 자네들 상당히 빠른데…. 벌써 이곳까지 도착하고 말이야.”
원래대로라면 이보다 더 멀리까지 갔을 겁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드는 그의 말을 웃음으로 넘기며 되물었다.
“하하… 별거 아니예요. 그나저나 하거스 씨야말로 상당히 늦으셨네요. 저희들이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하신 게 아닌가요? 게다가…. 트랙터는 어디 가고 웬 말들이…. 화물칸을 끌고 있는지….. 음… 물으면 안 되는 거였나?”
이드는 자신의 말에 하거스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인상이 구겨지는 모습을 보고 말끝을 흐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게다가 간간이 알 수 없는 누군가를 씹어대는 용병들의 모습이 확실히 질문 내용을 잘못 고른 것처럼 보였다.
“험, 험. 여기엔 나름대로 사정이 있지. 그런데… 자네하고 같이 다니던 두 명은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아직 쉬는 중인가 보지?”
“아직 어두운 밤이니까요. 저는 낯선 기척 때문에 무슨 일인지 살필 생각으로 나와 본 거구요.”
“이거이거… 본의 아니게 자네 잠을 방해한 꼴이구만. 미안하군. 그럼 나머지 두 사람은 어디서 쉬고 있나? 늦게 온 건 우리들이니 그 근처는 피하도록 하지.”
이드는 하거스의 말에 빙긋 웃으며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그런 이드의 행동에 상단 일행들은 일행들이 야영 중인 곳에서 조금 떨어진, 그러면서도 개울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 그들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잠자리에 들지 않고 바쁘게 이것저것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아하니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드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디처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이번 식사 당번이 아닌지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미 잠이 완전히 깨어버린 이드는 나온 김에 이들과 잠시 이야기라도 나눠볼 생각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