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03화
가만히 있었어도 하거스가 그리 쉽게 불리는 없는데 괜히 나섰다가 하거스의 놀림만 받았다. 자신의 실수였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실수는 그에 그치지 않았다. 갑작스런 하거스의 웃음과 혼잣말에 마침 이드 일행을 살피던 체토가 이드를 본 것이다. 하거스의 말에 따라 눈을 질끈 감아 버리는 이드를 말이다.
순간적으로 그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체토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우연일 거라 생각했다. 설마 하거스보다 세다 하더라도 그 분야가 다를 것 같았다. 도저히 저 체격과 몸으로 나이트 가디언일 것 같지는 않았다. 특히 저 이쁘장한 얼굴로 우락부락한 검사들과 검을 가지고 싸운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냥 물어보는 게 무어 대수겠는가.
“혹시….”
슬쩍 말문을 여는 그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워낙 아무 말도 않고 몸을 숙인 채 쓰레기를 치우고 있어 아무도 그를 주목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산만해 보이는 외모에 존재감 없는 모습.
하지만 그 존재감 없는 남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모습에 이드는 아무도 듣지 못한 욕설을 내뱉어야 했다. 그 시선은 무언가 알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하거스 씨가 말씀하신 사람이 저 사람 아닌가요?”
그러면서 올라가는 체토의 손가락은 정확하게 이드와 라미아가 앉아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순간 이드 본인과 라미아를 제외한 이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할 말을 잊었다. 정말 정확하게 맞춘 것이었다.
자신들은 이드를 처음 보고는 웬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구나 하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디처 팀원들과 이드 일행들뿐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카리나는 고개를 저어 강한 부정을 나타냈다.
“무슨 소리야? 체토. 평소 때도 보는 눈이 없더니만…. 저 사람의 어디가 검사로 보여? 정말 오늘 돌아가면서 안경이라도 새로 하나 맞추는 게 어때?”
“아니야. 카리나. 내가 분명히 봤거든. 하거스 씨의 혼잣말에 분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는 모습을 말이야. 갑작스런 소음에 깜짝 놀랐다면 모르겠지만, 그건 도저히 놀란 표정이 아니었거든. 어때요? 저분이 맞습니까, 하거스 씨?”
“으… 응. 대충… 그렇… 지.”
하거스는 확실하게 구겨져 버린 이드의 얼굴을 보며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가벼운 농담으로 끝내려 한 말이었지만, 정작 체토가 저렇게까지 말해 버리는 데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실을 밝히더라도, 이드가 잠시 귀찮을 뿐 별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하거스의 가벼운 긍정에도 카리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웬만큼 실력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이드의 실력이었다.
“저, 정말…. 저 사람이 방금 하거스 씨가 말했던 그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란 말이에요? 도저히 못 믿겠어. 도대체 뭘 보고 그걸 믿으란 말이에요.”
강하게 부정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드는 마음으로나마 응원했다. 그녀가 계속 저렇게만 해 준다면 오늘 하루도 별탈 없이 넘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이드는 그렇게 되길 바랬다면 저 하거스의 입부터 먼저 막았어야 했다. 이미 이드에 대해 들통나버린 때문인지 하거스는 이드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한 거야. 이드 말고 다른 무공의 고수를 데려다 놓는다 하더라도 무공을 익혀보지 못한 네 눈으로 알아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 특히 이드의 경우는 그 경지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높기 때문에 네가 알아본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 이상으로 어려워. 솔직히 이드를 처음 만났을 때는 나는 물론이고 여기 있는 디처의 팀원들 중 누구도 이드가 엄청난 무공의 고수라는 것을 몰랐었으니까. 뭐… 솔직히 말해서 그런 실력에 저런 외모는 좀 어울리지 않긴 하지만… 흠, 험험….”
주절대던 하거스는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자신을 찔러오는 날카로운 눈길과 다듬어진 살기에 급히 입을 닫아 버렸다.
“그럼 정말 하거스 씨 말대로 건물을 통째로 반 동강 내버릴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번쩍이는 검도 장식용 검이 아니란 말이네요?”
어이, 뭐가 장식용이란 말이냐. 병동으로 오는 길에 인피니티 사이에 오고 갔던 대화를 듣지 못한 이드는 일라이저를 장식용 검으로 급 하락시켜버리는 카리나의 말에 강한 부정의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가지고 있는 일라이저는 저에게 과분할 정도의 검이죠. 또 그 건물을 반 동강 낸다는 말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면, 가능하긴 해요. 나는 못하지만.”
‘거짓말!!’
이드는 마음속으로 들리는 라미아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하거스의 말에 오히려 재밌어하며 뭔가 일이 일어나길 바라던 그녀에게 저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카리나는 이드의 말에 하거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건물을 동강 내지 못한다는 데요? 하고 묻는 듯했다.
“…. 난 엄청나게 강한 사람은 그럴 수도 있다고만 했지,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는 한 적 없어.”
“흐응… 아쉽네. 구경하고 싶었는데….”
정말 아쉽다는 표정인 카리나의 말에 주위 사람들은 위험하다는 생각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구경이라니… 그럼 이드가 가능하다는 말이라도 했다면 당장이라도 잘라보라고 할 생각이었단 말인가?
“그럼 그게 아니더라도 뭔가 좀 보여 주세요. 저 가디언을 이렇게 가까이 보는 건 처음이거든요. 이번에 온 것도 가디언들이 사용한다는 검기라던가, 마법 같은 걸 보고 싶어서 겨우겨우 왔거든요. 네? 부탁해요.”
얼굴 하나 가득 기대를 가득 품은 채 눈을 반짝이는 카리나였다. 이드는 그 부담스러운 눈빛에 슬쩍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끝이 아니기에 어떻게 할까 생각 중이던 이드의 눈에 마침 카리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하거스가 보였다. 그는 방금 전 카리나의 이야기를 듣고서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차라리 그러지 말고 하거스 씨에게 다시 한번 부탁해 보세요. 저보다 카리나 양의 부탁을 잘 들어주실 거예요. 원한다면 몇 가지 검술도…”
‘댁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댁이 처리해요.’
이드는 한번 당해보라는 심정으로 아까부터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하거스를 가리켜 보였다. 만약 그가 아까처럼 거절해 버린다면, 지금 상황의 책임을 들어서라도 그에게 떠넘겨 버릴 생각이었지만, 아직은 이드가 하거스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선 그 수련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이드의 말을 들은 카리나가 뭐라 하기도 전에 하거스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인 것이었다.
“좋아. 보고 싶어하는 걸 구경시켜주지.”
그의 말에 카리나나와 체토가 눈을 반짝이며 벌떡 일어났다. 그게 카메라맨도 뒤에 있는 조명맨에게 뭔가를 급히 전했다. 이 뜻밖의 소식을 PD에게 알리려는 것 같았다. 하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침대 옆에 개대 놓인 육중해 보이는 자신의 검을 집어들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너희들 청소 중이었잖아…. 시끄럽게 이야기하다 보니 깜빡했네.”
그의 말에 카리나도 그제야 청소에 생각이 미쳤는지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하거스의 말에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꼭 검기를 구경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담겨 있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건 나중에 찍어도 상관없어요. 그런 청소하는 것쯤이야… 그보다 빨리 검기를 쓰는 걸 보여 주세요.”
“좋아, 그럼 수련실로 가볼까? 모두 따라와!”
하거스는 그녀의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 큰 검을 어깨에 덜렁 둘러매더니 앞장서 병실을 나섰고, 그 뒤를 행여나 놓칠 새라 키리나와 카메라맨이 바짝 따라 붙었다. 이드는 그들의 모습에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라미아에게 한 팔을 잡아당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려면 자신만 갈 것이지 왜 또 가만히 있는 사람을 끌어들이는지. 이드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였다. 뒤에 따라오던 오엘이 이드의 한쪽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속삭이는 것이었다.
“맘에 들지 않더라도 우선은 한번 따라가 보세요. 사숙.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아무래도 대장이 무슨 생각이 있는 것 같아요.”
순간 이드는 그 말에 얼굴 가득 떠올렸던 귀찮다는 표정을 한 번에 지워버렸다. 저 주책 맞은 하거스가 생각하고 있는 일이라니?
“아까 저 카리나라는 애가 가디언들이 사용하는 수법들을 보기 위해서 왔다고 할 때부터 대장의 눈빛이 변했거든요. 평소에 좀(?) 주책 맞긴 하지만, 진지할 땐 진지한 사람이니까 그냥 따라가 보세요. 대장이 전부 따라오라고 한 걸 보면 우리 중에 누군가 필요 한 것도 같으니까요.”
과연 용병 생활을 같이하면서 하거스를 확실히 파악한 오엘의 설명이었다. 아마 그걸 이드에게 설명한 이유도 대장이 뭔가 일을 꾸미는데 이드가 빠져 버릴까 하는 생각에서 일 것이다. 아무튼 같은 팀이라고 팀원들을 확실히 챙기는 오엘이었다. 이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하거스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처음 봤을 때는 꽤나 생각이 많고 믿음직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뭐, 지금은 그 시도 때도 없이 떨어대는 주책에 처음의 인상이 착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들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뭔가 생각이 있다면 구경해 보는 것도 좋겠지.’
칠 층의 수련실엔 저번 이드들이 들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십여 명의 가디언들이 각자 수련하고 있었다. 항상 그랬다. 들를 때마다 누군가 꼭 수련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루는 물론 일년 내내 잠시라도 비어 있지 않을 것 같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십여 명이 땀을 흘리고 있는데도 오히려 텅 비어 보이는 이곳에 일행들이 우루루 몰려 들어왔다. 그 소란 때문이었을까. 열심히 몸을 움직이던 가디언들이 하던 것을 멈추고 하나 둘 일행들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드는 그 모습이 처음 이곳 수련실에 들어올 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부룩의 모습에 곧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괜히 먼저 간 사람 생각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슬금거리던 십여 명의 가디언들은 들어선 사람들 중에 하거스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거침이 없었다. 순식간에 다가와 이제는 괜찮으냐, 벌써 여긴 뭐 하러 왔느냐는 등등 이 사람들이 가디언인지 수다장이 동네 아줌마들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또 그 모습에서 하거스가 이곳에서 얼마나 설치고 다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곳에 얼마나 있었다고 벌써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이드가 아는 사람도 몇몇 끼어 있었다. 주로 오엘과 대련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 오엘과 함께 자신이 해주는 조언을 들었던 사람들이었다. 하거스와 정신없이 떠들어대던 그들도 곧 이드들을 발견했는지 반갑게 일행들을 맞아 주었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에게서도 부룩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서로 그에 대한 이야기는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중 한둘은 카리나와 체토를 알아봤는지 그들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하거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세요? 다리가 부러진 부상이라면 아직은 무리할 때가 아닐 텐데. 그리고 닥터가 놔주지도 않을 거고…. 게다가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은 방송국의 사람들 같은데…”
“쯧쯧… 그렇게 소식이 느려서야. 아직도 못 들었냐? 방송국에서 병실 촬영 온 거.”
“벌써 본부 안에 쫙 퍼진 사실인데 당연히 알고 있지 왜 모르겠습니까? 제 말은 저 사람들이 여기 수.련.실.에 뭐 하러 왔느냐는 말이죠.”
개김성이 가득한 말투였다. 짧게 자른 갈색 머리에 당돌해 보이는 그 가디언은 하거스 너머로 보이는 방송국 사람들과 인피니티의 두 멤버를 바라보며 싫은 기색을 그대로 내 보였다. 그 역시 하거스와 맞먹을 만큼 잔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었기에 방송국에서 온 것이 순수한 차원의 자원봉사가 아니란 것을 아는 것이다. 그 사실에 그 또한 한 사람의 가디언이며, 또 죽어간 가디언들의 동료로서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거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그의 속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 일이 있어서 온 거야. 허기사, 네가 내 깊은 생각을 어떻게 알겠냐? 잔말 말고 저쪽으로 빠져서 구경이나 해. 꽤나 재밌을 테니까.”
끝말은 거의 소근거리는 수준으로 상대만이 들을 수 있도록 하고 능글맞은 중년의 모습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윙크를 해 보였다. 하거스와 마주 서 있던 가디언은 하거스의 윙크에 속이 울렁거린다는 듯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더 이상 그에게 뭐라 따지지 않고 자신 옆으로 모여 있는 가디언들과 함께 한쪽 벽으로 물러났다. 하거스 만큼 잔머리가 돌아가는 그인 만큼 하거스의 의도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의도라면 충분히 협조할 생각이 있는 그였다.
“키킥…. 이거이거… 꽤나 뜨거운 맞을 보고 나서야 돌아가겠군. 불쌍해~”
하지만 말과는 달리 전혀 불쌍한 표정이 아니었다. 옆에서 같이 물러서던 한 가디언이 그의 말을 듣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저 두 너구리의 희생양이 된 것으로 보이는 방송국 사람들을 잠시 걱정했을 뿐이었다.
쿵.
수련장 입구의 묵직한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리며 일단의 무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그들은 다름 아닌 PD와 나머지 스탭들, 그리고 오늘 촬영의 주인공이 인피니티의 나머지 멤버들과 그들을 안내하고 있던 빈이었다. 아마 연락을 받고서 한 장면이라도 놓칠까 허겁지겁 뛰어온 모양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거스는 수련장의 중앙으로 나서다가 그들이 들어서자 마침 잘 왔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어이~ 이제 막 시작하려고 했는데, 다행이 늦진 않은 모양이군.”
하지만 그의 말에 반갑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아무 말 없이 행동하는 하거스에게 따지기 위해 급히 앞으로 나서는 빈이 있을 뿐이었다. 방송국 사람들의 눈과 귀를 생각해 급히 하거스 앞으로 나선 그는 얼굴 가득 불편한 심기를 드리우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아무런 연락도 없이. 자네 분명 처음엔 저들이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고 했었지 않나.”
사실 방송국 사람들에게 별 상관없는 곳 몇 곳을 대충 둘러보게 한 후 돌려보낼 생각이었던 빈이었기에 지금 하거스의 행동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였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음모자의 얼굴로 소근거리는 하거스의 말을 들은 빈은 잠시 하거스를 바라보다 한마디를 남기고 따라온 일행들과 함께 가디언들이 물러선 곳으로 조용히 물러났다.
“그럼… 잘 부탁하지.”
“좋아. 그럼 처음엔 그냥 검술만을 펼쳐 보일 테니 잘 봐두라고. 이건 어디까지나 실전을 위한 살.상.검이니까.”
무게감 있는 하거스의 말을 이어 주위에서 그의 검이 묵직한 느낌으로 들어 올려졌다.
그 모습과 기백은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자신이 그 큰 검을 들어올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기백에 휩쓸린 것은 방송국 사람들과 인피니티들 뿐이었다.
“자, 간다! 우선 빅 소드 1번 검세(劍勢)!”
후우우웅….
순간 묵직하고 크게 원호를 그리며 휘둘러진 검으로부터 둔중한 소성이 흘러나왔다.
하거스의 검술은 전체적으로 묵직했다. 빠르기와 기술보다는 힘을 우선시 한 중검(重劍)이었다.
하나 하나의 움직임에 넘쳐나는 힘이 한가득 느껴졌으며 휘둘러지는 검로를 따라 훈훈히 달구어진 바람이 불어왔다.
보통 이런 중검을 사용하는 상대에게는 빠르기와 현란한 검초를 주로 한 환검을 사용하면 쉽게 이길 수 있지만 하거스는 이미 그런 경지는 벗어나 있었다.
아마 환검으로 하거스와 비슷한 경지에 오르지 않은 사람이라면 승기를 잡지 못 할 것이다.
또 한 몬스터와의 전투가 많은 하거스에게는 더없이 좋은 검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몬스터에겐 따로 환검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파아아앗!!
순간 강렬한 기세로 휘둘러지던 하거스의 검 황토빛 빛이 일어나며 보고 있는 사람의 가슴을 내리누르는 묵직한 기분과 함께 살을 에이는 예리함이 느껴졌다.
검기(劍氣)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검술이 빅 소드가 21개의 검세를 모두 마쳤을 때였다.
“무거운 힘을 잘 다스린 상승의 검법이야.”
이드는 오늘에야 자세히 보는 하거스의 검술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거스의 황토빛 이글거리는 검은 앞서 펼쳤을 때 보다 좀 더 오랜 시간동안 펼쳐지며 21개의 모든 검세를 마치며 황토빛 검기를 거두었다.
연속해서 펼쳐낸 검세에 검을 집고서 잠시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는 그의 모습은 방금 전에 펼쳐낸 검술의 기백이 남아 마치 옛 이야기에서 나오는 대장군과도 같아 보였다.
그 모습에 방송국 사람들은 아직 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기백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사 말은 한다 해도 대단하다는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겠지만 말이다.
그때 숨을 모두 골랐는지 다시 그 묵중한 검을 번쩍 들어올린 하거스는 방송국 사람들과 이드를 바라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이제 막 시작되려는 영화의 내용을 기대하고 있는 자의 모습과도 같았다.
“좋아! 그럼 검술 시범은 충분한 것 같고…. 카리나. 이번에 아예 대련시범도 보여줄까?”
은근히 말끝을 흐리는 그의 말에 카리나는 물론 그 뒤에 있는 인피니티의 멤버들과 PD가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앞서 보여준 하거스의 검술에 깊이 빠졌던 그들은 이번엔 또 다른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네! 꼭 부탁드릴게요. 정말 보고 싶었거든요.”
“하하하… 물론 그럴 테지. 그럼 내 상대는….. 괜히 고개 돌리지 마 이놈들아. 실력 딸리는 너희들 안 시켜. 이드, 이번에도 네가 좀 움직여야겠다. 여기 내 상대 할 사람은 너뿐이라서 말이지.”
하거스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십여 명의 가디언들에게 핀잔을 주며 이드를 불렀다.
“네, 네…. 알았습니다.”
이드는 그의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이미 오엘에게서 뭔가 꾸미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때문이었다.
게다가 보아하니 앞서 빈도 찬성하는 것처럼 보였던 계획인 만큼 꽤나 내용이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이번 계획에 필요한 것은 자신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막 수련실 중앙에 섰을 무렵, 마침 생각이 났다는 표정으로 라미아와 방송국 사람들을 불렀던 때문이었다.
“아, 차라리 그럴 게 아니라. 카리나 양과 나머지 멤버들도 여기 와서 보는 게 어떨까? 그럼 더 박진감 넘치고 실감 날 테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수련장 한가운데를 가리켜 보이는 하거스였다.
갑작스런 그의 말에 이드도 그게 뭔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 거기…. 서요?”
“그래, 그게 좋을 것 같거든. 거기다 라미아가 실드 마법을 펼쳐주면 별다른 피해도 없을 테고 말이야. 어때? 괜찮을 것 같지? PD 양반은 어때요?”
재촉하는 하거스의 말에 잠깐 망설이던 PD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하거스가 말한 그 장소라면 더없이 좋은 장면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희들이야 감사할 뿐이죠. 자네들은 어떤가?”
PD가 인피니티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가 뭐라고 하기 전부터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카리나였다.
그녀는 다른 멤버들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여댔다.
“물론이죠. 꼭! 꼭! 꼭 보고 싶었어요.”
“좋아, 그럼 라미아 잠시 나와 볼래?”
“네.”
라미아가 하거스에게 다가가자 이드도 슬그머니 그 옆으로 다가갔다. 힐끔 방송국 사람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니, 그들은 뭔가를 준비하는 모습으로 이곳은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데요? 알아야 쿵짝을 맞추죠.”
“아아… 꽤나 궁금했던 모양이지?”
“뭘 할 건지 말이나 해요.”
또 한번의 재촉에 하거스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두 사람에게 소근대기 시작했다.
“다른 건 없어. 아까 내가 한 말 그대로야. 좀 더 실감나게 보여주겠다는 거지. 단, 그 현실감이 마치 몬스터와의 싸움 때와 같다는 게 다르겠지. 살을 배일 듯한 예기에 심장을 쥐어짜는 살기. 거기다 죽일 듯한 기세로 자신들을 덮쳐오는 검기. 거기다 자신들을 보호하는 것은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는 여성 마법사와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실드. 어때? 이만하면 전투를 단순히 오락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는 행동이 확 바뀌겠지?”
“흐응…. 괜찮은 것 같은데요.”
정말 그럴 듯 했다. 하거스와 이드 정도라면 전투 때와 같은 광폭한 살기와 투기를 뿜어내 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그 정도의 살기에 보통 사람이 휩싸인다면? 아마 담이 약한 사람들은 금새 기절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 대련이 끝날 때까지 잘 버틴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저렇게 전투를 가볍게 볼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저들이 전투 직후의 모습이라도 직접 본 경험이 있다면 지금과 같이 행동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걱정인 건 라미아가 그 살기를 견디느냐는 것과 실드의 강도가 어떤가 하는 것인데… 어때? 가능한가?”
“맡겨만 주세요. 저도 이드님 만큼이나 살기엔 익숙하니까. 또 제가 펼치는 실드도 쉽게 깨지는 일은 없을 테구요. 두 분 다 최소한의 강도로 검기를 사용하실 생각이잖아요. 더구 나 지금은 연약한 여성 마법사를 필요로 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수줍은 표정으로 양손을 마주잡아 연약한 여성의 모습을 연기하는 라미아였다. 이드는 그녀의 모습에 가증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그렇게 하거스의 주도 아래 음모를 꾸미는 사이 방송국 사람들은 모든 준비를 끝마쳐 놓고 있었다. 그 중 특히 카리나는 기대감으로 달아오른 양 볼을 매만지며 빨리 하거스가 불러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그 모습을 바라본 하거스는 문득 대련이 끝난 후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상당히 궁금해졌다. 어쩌면 이곳에 오자고 때를 쓴 자신을 저주하지는 않을지?
“자, 그럼 이쪽으로 와서 라미아 뒤에 서요. 단, 라미아의 실력으론 많은 사람을 보호하진 못하니까…. 거기 인피니티의 멤버들과 PD 양반, 그리고 카메라맨 한 명만 오도록 해요.”
하거스의 말에 그들은 여러 가지를 준비한 일행을 두고 카메라맨 한 명과 다가왔다.
라미아는 그들이 자신의 뒤쪽에 서자 작게 입술을 들썩이며 캐스팅하는 듯한 모습을 취한 후 시동어를 외쳤다.
“실드!!”
우우우웅….
주위를 울리는 기분 좋은 울림과 함께 라미아와 그 뒤의 사람들 주위로 희미한 청색의 투명한 막이 생성되었다. 실드가 완성된 것이다.
이드와 하거스는 반구형의 그 실드를 중심으로 양측으로 나누어 섰다.
“자…. 그럼 진지하게…. 시작해 볼까.”
이드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일라이져를 뽑아 들었다. 순간 가만히 서 있는 이드로 부터 천천히 가슴을 조여 오는 듯한 피 빛 살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서서히 일라이져의 은빛 검신에 맺혀 흐르는 핏빛과도 같은 붉은 검기.
이드는 이번에 사용할 검술로 수라삼검을 생각하고 있었다. 수라삼검(壽羅三劍)은 이드가 익힌 무공 중에서도 특히 살기가 강한 무공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하거스가 말했던 살기를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맛보여 줄 수 있는 검법이란 생각에 이드가 택한 것이었다.
이런 이드의 생각을 읽었는지 반대편에 선 하거스의 검에서도 묵직한 황토빛 검기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후후… 이거 오랜만에 몸 좀 풀어 볼 수 있겠는걸…”
파팟…
혼잣말이 신호였을까.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이드의 몸은 뒤에서 누군가 떠밀기라도 한 것처럼 튕겨 날아갔다. 궁신탄영의 신법에 전혀 뒤지지 않는 속도를 보이는 이드의 신법(身法)은 그를 순식간에 하거스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이드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자신의 모습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레 검을 들어 방어하는 하거스의 모습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붉게 물든 일라이져를 그대로 내려그었다. 어떠한 복잡한 초식이 사용된 것이 아닌 단순한 베기 동작이었다. 그것은 대련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었고 또 출발점이었다.
투아앙!!
이드의 검과 하거스의 검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는 마치 산사의 범종이 울리는 듯 커다란 울림으로 전해졌다. 도저히 저 가느다란 검과 묵직한 검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한 순간. 키릭 하는 소리를 내며 하거스의 묵중한 검이 조금 올라오는 듯 하더니 한바퀴를 회전하며 이드를 몸째 날려 버렸다.
이드는 연이어 자신의 허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검의 모습에 막지 않고 오히려 운룡번신의 수법으로 허공으로 더 높이 떠올라 일라이져를 들어 올렸다.
“갑니다. 수라참마인!!”
쿠콰콰쾅…. 쿠구구궁…
이드의 외침에 이어 붉은색의 가느다란 검인이 하거스의 검과 맞다하며 강렬한 폭음을 냈다. 비록 그 검인의 위력이 전투 때와는 천지 차이로 껍데기 뿐이긴 하지만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흐아아압!! 빅 소드 11번 검세.”
폭음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이드를 향해 황토빛 검기가 쭉 뻗어 나왔다. 마찬가지로 위력은 전혀 없는 검기였다. 대신 묵직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드는 그 검기가 가지고 있는 뜻을 순식간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일라이져가 하거스의 검기 앞으로 세워지며 사람들의 눈을 돌리게 만드는 빛을 만들었다. 움찔하고 뒤로 밀려나는 이드의 어깨를 따라 이드의 몸 전체가 뒤로 쭉 밀려났다.
촤아아아악…. 쿵!!
이드는 등 뒤로 느껴지는 벽의 느낌에 자신이 뒤로 밀려나던 것이 실드에 막힌 것을 알았다. 그런 이드의 귀로 실드 안에 있는 사람 중 몇 명이 급히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목이 바짝바짝 마를 거다.’
“다음 간다. 빅 소드 7번 검세.”
하거스의 검에서부터 두 개의 검기가 날았다. 역시나 위력은 방금 보다도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막을 생각은 없었다. 이드는 바로 코앞에 검기가 다다랐을 때 몸을 회전시키며 옆으로 슬쩍 빠져 버렸다. 공격 목표를 순간 잃어버린 검기는 그대로 실드에서 강한 빛과 함께 폭발해 버렸다.
쿠콰콰쾅…. 콰쾅…..
“꺄아아아아……..”
“우왁!!”
정신없이 이드와 하거스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제각각의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실드라고 해서 실감나지 않을 테고, 검기 자체가 가진 살기 때문에 자기가 맞는 것 같았을 것이다. 바로 하거스가 바라던 장면이었다. 슬쩍 바라본 바로는 보고 싶다고 기를 쓰던 카리나까지 쪼그려 앉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피비를 뿌리는 수라의 검…. 수라만마무!!”
우우웅
일라이져의 검신이 가볍게 떨려오며 이드가 가볍게 너울 거렸다. 전혀 살기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건 검에서 강사가 뻗어 나오기 전의 이야기였다.
검에서 강사가 발출되자 막혔던 살기가 터지듯 강사 한 줄기 한 줄기가 자신의 전실을 뚫고 들어오는 환상이 일었다. 그 섬뜩한 느낌에 연극이란 걸 알면서도 하거스는 감히 태연하지 못했고, 실드 안에서는 놀란 비명과 함께 죄어오는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그리고 사방으로 뻗쳐나가던 강사가 실드를 사방에서 두드리며 폭음을 연발하자 결국 쓰러지는 사람이 생겨 버렸다. 바로 카메라맨과 카리나를 제외한 유일한 여성 멤버가 눈이 돌아간 채 쓰러져 버린 것이다. 덕분에 그 비싼 카메라가 그대로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졌지만, 현재 비명 지르기에 바쁜 PD나 인피니티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이번 대련이 끝날 때까지 신경도 써주지 못했다.
한 여름의 폭우처럼 이드와 하거스로부터 연속적으로 터져 나오는 공격에 정신 차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꺄아아악…. 그만, 그만해!!!! 우아아앙…”
카리나는 폭음이 일어날 때마다 주체할 수 없이 떨려오는 어깨를 간신히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자신이 어쩌자고 지금 여기 서 있는지 후회가 되었다. 애당초 아빠에게 부탁해서 이곳에 왔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왜 이런 일을 스스로 자초했단 말인가. 아니, 그런 걸 생각 않더라도 지금은 너무도 무서웠다. 눈물밖에 흐르지 않았다. 시야가 흐림에도 폭음은 정확히 자신의 귀를 때렸고, 그와 함께 오는 섬뜩함 역시 그대로였다.
눈물 사이로 슬쩍 바라본 PD님이나 나머지 멤버들 역시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한 쪽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법을 쓰고 있는 저 라미아라는 마법사가 대단해보였다.
콰쾅!!!
“꺄아아악…. 싫어~~~~”
카리나는 그냥 이대로 기절해버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저기 이미 쓰러진 언니처럼 말이다.
이드는 그런 카리나의 모습과 다른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하거스에게 전음을 보냈다. 꽤나 오랫동안 검을 나누었지만 양측 다 지친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껍대기뿐인 검기만을 날린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하죠? 계속했다간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살기에 미쳐버릴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마지막이다. 빅 소드 21번 검세!!”
쿠르르릉
천둥이 치는가. 하거스의 손에 들린 그 묵직하고 무게감 있는 검이 마치 얇은 납판처럼 흔들렸다. 아무리 그 흔들리는 폭이 좁다 해도 도저히 쇠뭉치로 된 저 큰 검으로선 불가능한 움직임.
이드는 하거스의 검으로부터 피어오르는 기세에 급히 내력을 끌어 올렸다. 저 능글맞고 주책 맞은 중년이 끝나는 시점에서 방송국 사람들을 놀리는 걸 관두고 자신을 놀래키려는 것인가.
저 검에서 흘러나오는 황토빛 진한 검기는 ‘진짜’였다.
“누가 당하나 보자구요. 수라섬광단!!”
콰콰콰콰광
“에구…. 삭신이야.”
“그러길래 왜 그런 짓을 해요? 하기를….”
지금 수련실 바닥에서 끙끙거리고 있는 것은 하거스였다. 한 쪽 벽에 기대어 있는 그의 모습이란 실로 가관이었다. 여기저기 찢어진 옷에 울긋불긋한 멍 자국들. 특히 부러졌다가 붙었다는 다리는 다시 퉁퉁 부어 있는 것이 가벼운 상처로 보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마지막 공격에서 진짜 검기를 펼쳐내다가 오히려 이드의 반격에 두드려 생긴 상처들이 었다.
가만히 다리의 상처를 살피던 가디언이 쯧쯧 혀를 차며 퉁퉁 부어 오른 다리를 가볍게 툭 하고 두드렸다.
“우아악!!!! 안 그래도 아파 죽겠는데 무슨 짓이야. 임마!”
“무슨 짓이긴요? 꼴 좋다는 뜻이지. 부러지진 않았지만, 다시 금이 간 모양이예요. 이 꼴을 해 가면 아마 닥터가 좋아할 겁니다. 겨우 고쳐놨는데 또 왔다고.”
“제길…….”
하거스는 그의 말에 닥터의 잔소리를 생각하며 씨근덕거렸다. 하지만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보니 어디다 화를 내거나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그때 이쪽을 바라보던 걱정스러운 눈을 바라보던 카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도 눈물 자국이 그대로 말라 있어 심히 보기 좋지가 않았다. 물론, 그녀 뒤로 서 있는 실드 안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 비슷한 꼴을 하고 있다.
“괜찮아요? 괜한 부탁 때문에…..”
이드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어 버렸다. 하거스가 자신을 놀리다가 저 꼴이 된 것인데… 그 사실을 알고도 저렇게 걱정해 줄까?
“그런데 어때요? 가까이서 구경해본 소감은? 재미있었어요?”
이드의 물음에 카리나와 그 외 꼴이 말이 아닌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PD 역시 같았다. 보통 때라면 좋은 장면 찍어서 좋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직접 눈물 콧물 흘리며 지른 비명에 심장에 칼이 박히는 섬뜩함을 직접 겪게 되자 도저히 재미있었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뇨….. 무서…. 웠어요. 하거스 씨도 이렇게 다치고….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확실히 약발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거스는 생각만으로도 몸을 잘게 떠는 카리나의 모습을 보며 능글맞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흐음… 난 또 이곳에 오고 싶어했다고 하길래. 이런 것에 익숙한 줄 알았지. 일이 있어 출동할 때마다 피를 흘리고, 또는 죽어가는 그런 힘든 상황에 익숙한 줄 알았지. 항상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과 심장을 파고드는 숨 막히는 살기에 말이야.”
“……”
갑작스런 하거스의 말에 카리나를 위시한 방송국 사람들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농담을 건네던 사람의 말이라고 하기엔 그 내용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었다.
“보면 알겠지만, 가디언들은 다치는 일이 많지. 이 녀석도 많이 다친 덕분에 지금처럼 쉽게 금이 간 걸 알아볼 수 있지. 가디언들에겐 그게 생활이야. 항상 목숨을 거는 그런 생활. 난 방송국에서 왔다길래 그 모든 것을 알고 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군. 설마 자신들을 위해 목숨 거는 사람들을 단순한 구경거리로 만들기 위해서 왔을 줄이야. 당신들에겐 목숨 걸고 일하는 게 그렇게 가볍게 보였나? 목숨 걸고 싸워 상처를 입은 것이 그렇게 흥미 있는 구경거리였던가 말이다!!”
언성을 높이며 따지는 듯한 하거스의 말에 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스탭들 중 몇 명은 주위에 있는 가디언들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일부러 이런 상황으로 이끌어 미리 생각해 놓은 대사를 읊고 있는 그였지만 그 내용은 진실이기에 가디언들의 분위기도 가라앉는 듯 했다.
방송국 사람들 중 PD를 포함한 머리가 꽤나 돌아가고 사람을 많이 접해본 사람들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했다. 자신들을 수련실로 안내한 것과 실드를 쳐서 대련장 한가운데 세우고 살기를 뿜어댄 것. 그리고 지금 하거스가 언성을 높이며 말하는 내용까지. 모두 가디언 들에 의한 것이란 것을 말이다. 하지만 따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전부 자신들이 자초한 상황이었고, 가디언에 대한 이해도 없이 행동한 자신들의 잘못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카리나는 더욱 할말이 없었다. 자신이 잠시 느꼈던 그런 감정들을 항상 느껴야 하는 가디언들. 그들을 단순한 흥미 거리로 봤다는 것이 그렇게 죄스러울 수가 없었다.
‘흐음…. 이쯤에서 퇴장하는 게 적당하겠지?’
하거스는 카리나를 포함한 사람들의 반응에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아직 할말이 좀 남긴 했지만 나머지 말들이야 저기 있는 말발 센 빈이 해줄 수도 있는 일이니 말이다. 자신은 여기서 빠져주는게 가장 멋있을 것이다.
“후우~ 뭐, 나야 무식한 칼쟁이다 보니… 더 말해서 뭣하겠어? 빈, 자네나 할 말 있음 해줘. 난 병실로 다시 가봐야 겠어. 쩝. 이제 닥터 잔소리에서 벗어나나 했더니. 비토, 네가 힘 좀 써줘야겠다. 이 상태론 못 걸어가겠어.”
하거스의 말에 비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가볍게 들어 안고서 수련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가 나서는 사이 방송국 사람이나, 인피니티들 중 누구도 고개를 드는 사람은 없었다.
하거스 뒤를 따라 이드들 역시도 막 수련실을 나서려 할 때였다. 미약하게 흔들리 듯 약한 카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죄송…. 해요…..”
작은 소리였지만 검을 수련해 검기를 느낄 정도의 고수들이 듣지 못 할 정도로 작지는 않았기에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모두의 얼굴 위로 스륵 미소가 떠올랐다.
하거스역시 자신의 연극이 생각 외로 잘 들어맞는다 생각하며 한 손을 들어 흔들어 보이며 비토에게 안겨 나갔다.
“노래 좋았어. 사인 잘 간직하고있을테니…. 2집 나오면 좀 보내줘.”
그렇게 하거스들이 병실로 돌아온 그날 인피니티와 방송국 사람들은 밤늦은 시간까지 병실을 청소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이 찍어갔던 장면들은 방영되지 않았다. 하거스의 말에 느낀 것 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틀 후 하거스 앞으로 날아온 한 장의 CD를 일행들은 같이 들을 수 있었다. 인피니티의 2집 테스트 작품이었다. 하거스는 자신이 했던 일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지 CD를 항상 틀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몇 날이 지났을까. 그날도 할 일 없이 라미아의 무릎을 베고 누워 졸고 있던 이드가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림벨 소리와 함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호출에 라미아와 함께 급히 빈을 찾았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 있었다. 부 본부장이란 직책이 있는 만큼 그 사무실을 꽤나 컸다. 이드와 라미아가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는 록슨 전투 때 만났었던 드윈을 비롯해 낮선 몇 명의 가디언들이 먼저와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늦은 것 같네요.”
이드는 빈과 그 앞에 자리한 가디언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닐세. 오히려 손님인 자네들을 오라 가라한 내가 미안하지. 그러지 말고 거기 않게나. 아직 자네들 일행 두 사람이 오지 않았지만 어차피 자네 일행들이니, 우선 급한 대로 자네들에게 이야기하지.”
이드와 라미아는 그가 권해 주는 자리에 앉아 무슨 일인가 하는 생각에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이드의 시선에 하거스가 한 장의 종이를 꺼내놓고 그것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보였다. 얼마 전 회의를 마치고 제로에게서 온 글이라면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종이였다.
“오늘 아침이었습니다. 프랑스로 부터 저희 정부와 가디언 본부로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이 왔습니다. 바로 이게 그 공문이죠.”
“협조… 공문이라. 그것도 영국 정부뿐 아니라 가디언 본부에 같이 보내졌다면… 제로… 입니까?”
목까지 올 것같은 갈색의 머리를 성냥개비 두개를 합쳐놓은 크기의 도톰한 줄로 질끈 묶은 꽁지머리의 가디언이 빈의 말을 되짚어 가며 물었다. 특이하게도 그가 머리를 묶고 있는 줄은 이상할 정도로 길어서 일어서 있다면 하더라도 땅에 다을 듯 말 듯한 길이일 것 같았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빈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프랑스에서 날아온 공문에 아침부터 상당히 시달렸던 모양인지 꽤나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또 부 본부장이란 직책이 전투가 없다 하더라도 쉽게 손놓고 놀 수 있는 위치가 아닌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난 25일. 그러니까 어제죠. 제로로부터 예고장이 날아왔고, 그 쪽 전력 만으론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주위로 협조 공문을 뛰운 모양입니다. 전날 서로 연계하기로 한 상황이기도 하고, 바로 이웃의 일이기도 해서 저희들은 그 공문에 응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럼…. 저희를 여기 부르신 건 여기 있는 가디언 분들과 저희들을 거기 보내기 위해서겠네요.”
이드는 그제야 그가 자신들을 급하게 불러들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프랑스라…
“자네 말이 맞네. 이드군. 물론 자네는 우리 쪽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부탁일 뿐. 결정은 자네들이 하는 것이네.”
그의 말에 가만히 있던 꽁지머리가 다시 물었다.
“그럼 여기 있는 이 인원만 가게 되는 겁니까? 제가 보기엔…. 굉장히 실력파들로만 골라 뽑은 느낌인데요.”
“훗, 자네 느낌이 맞아, 페스테리온. 정예들만 골라 뽑았지. 프랑스 쪽에서 협조를 원하는 것도 평범한 전사들보다는 진짜 실력자들일 테니까 말이야.”
확실히 그랬다. 평범한 실력의 용병들이 필요한 것이었다면 이렇게 협조 공문을 보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빈의 말에 수긍하는 뜻에서 고개를 끄덕이던 페스테리온은 가만히 있다 다시 빈을 향해 물었다.
“그럼. 이번에 제로의 목표가 된 도시는 어딥니까? 이렇게 협조공문까지 뛰우는 걸 보면 런던의 중요도시 같은데요.”
빈은 그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바로 하고 책상위에 손을 깍지 끼워 올려놓았다. 그의 입이 열리며 일행들을 놀라게 할 내용을 담은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 이번 제로가 예고장을 보낸 도시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