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05화


놀랑의 말에 긴장감이 갑절로 늘어나며 주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곧 있으면 시작이군요.”

긴장과 흥분으로 떨리는 오엘의 목소리에 이드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평소 검을 수련할 때 입는 편안한 옷에 검은색 반코트 모양의 웃옷을 껴입고 있었다. 무거운 갑옷을 대신한 그 옷은 특수섬유를 덧대어 만들어진 옷으로 일명 실크 아머(silk armor)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오엘에게 저 옷을 건네준 세르네오의 설명에 따르면, 힘으로 인한 직접적인 충격이나 검기에는 어쩔 수 없지만, 단순한 검의 날카로움은 만족스러울 정도로 커버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주로 가벼움을 중시하거나 스피드 위주의 전투를 해나가는 가디언들이 껴입고 다니는 장비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저 옷은 라미아가 부여한 마법 때문에 원래의 효과보다 몇 배는 뛰어나다. 우선은 오엘이 간단한 시동어로 쓸 수 있도록 걸어둔 실드 마법과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적을 날려 버리는 파이어 링이 걸렸다. 마지막으로 귀환의 마법이 걸렸는데, 그것은 소호검에도 걸어 둔 마법이었다.

당연히 귀환지는 라미아의 바로 옆. 만약 전투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가장 안전한 장소가 이드 옆과 라미아의 옆자리일 테니까 말이다. 모두 한 번 쓰면 끝나는 일회용의 마법이긴 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오엘이 다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급한 위기는 실드와 파이어 링으로 넘길 수 있을 것이고, 정 힘들다면 귀환 주문을 사용하면 될 테니 말이다.

마침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제이나노는 부러운 모습으로 자신도 하나 얻어 보려다가 실패했다. 그는 누가 뭐래도 비전투원인 사제이기 때문이었다.

“보호구와 검은 확실히 정비를 해뒀겠지?”

“네.”

“좋아. 하지만 어제 말했던 대로 라미아의 시야 내에서 전투를 해나가야 된다. 더 멀리 나가면 안 돼. 그렇게 되면 라미아가 당장에 귀환 주문을 사용해 버릴 거야.”

어제에 이어 다시 한번 이어지는 이드의 당부에 오엘은 믿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다시 한번 놀랑의 목소리가 일행들의 귓가를 울렸다. 정말 저렇게 높지도 않은 목소리가 잘도 사람들의 뇌리에 확실하게 잘 전달되고 있었다.

“모두 주목. 잠시 후면 우리는 제로와의 전투를 벌이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다시 한번 대열을 정비하겠어요. 이번 일에 참가 중인 사제분들은 모두 제일 뒤로 빠져 주십시오. 지금 이곳에서부터 최소한 이 백 미터 이상은 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마법사 분들과 정령사, ESP 사용자도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여러분들은 직접 접전을 벌이는 나이트 가디언들을 지원하고 원거리 공격을 맞습니다. 물러날 거리는 지금 있는 곳에서 칠십 미터. 나머지는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메우고, 다시 대열을 정비하세요.”

그의 말에 따라 많은 수의 사람들이 뒤로 빠졌다. 라미아와 제이나노도 빈을 따라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덕분에 자연스레 영국의 가디언들의 대장직은 드윈에게 넘어갔다. 빈도 그가 있기에 저리 쉽게 물러난 것이었다.

오엘은 “라미아 정도의 시력이라면 이곳에 서 있는 절 볼 수 있어요.”라는 말을 하고는 방금 전까지 라미아가 서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섰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보통의 기다림과는 차원이 다른 지금의 상황 때문인지 육 킬로라는 길이가 그 두 배는 됨직하게 느껴졌다. 너무 긴장하며 기다린 덕분에 시간이 길게 늘어지는 듯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 둘 기다림에 목이 말라갈 때쯤, 모두의 시선에 검은 그림자로 아른거리는 수 개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 그 그림자는 순식간에 수십, 수백 개로 불어나며 자신들의 수가 적지 않음을 알려왔다.

촤아앙. 스르릉… 스르릉…

어디의 누구인지 몰랐다. 한 사람이 긴장감 때문인지 성급하게 무기를 뽑아 들었다. 이어 그 소리에 자극받은 듯 여기저기서 무기를 뽑아 드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소리들의 주인은 대개가 용병들이었다.

하지만, 놀랑은 그것을 따로 말리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당부를 했을 뿐이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제로는 그냥 보아도 백여 구가 넘어 보이는 강시들을 끌고 왔다. 영국에서 스무 구를 끌고 나온 것보다 몇 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더구나 그들이 가지고 온 참혈마귀 사이로 간간이 흩날리는 백발은 밸혈수라마강시의 것이었다. 참혈마귀 사이에 저들이 섞여 있다면 파괴력과 날카로운 검기를 사용한 마구잡이 공격은 할 수 없게 된다.

만약 공격한다면 한 방에 상대를 완전히 지워 버릴 수 있는 수법들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저들의 독혈이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마 제로 측도 그것을 알고서 참혈마귀 사이에 백혈수라마강시를 섞어 넣었을 것이다.

일견 무질서해 보이지만, 정확하게 위치를 지키며 다가오는 강시들의 모습은 제로가 그들을 확실히 제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아마도 빈이 말했듯, 종속의 인장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말대로 지금 이드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강시의 이마에는 자그마한 역삼각형 형상의 노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문득 이드는 그 문양이 새겨진 존재가 강시라는 것만 제외하면 꽤나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노란 문양. 확실히 저들 제로가 종속의 인장을 사용하고 있긴 한 모양이었다.

그런 강시들의 선두에는 제로의 사람으로 보이는 서른 명의 각양각색의 남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백 수십에 이르는 가디언들과 용병을 보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마도 등 뒤에 서 있는 강시들을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이드는 그들의 모습에 록슨에서 처음 겪었던 제로가 생각났다.

“록슨과… 상당히 비슷한 전투가 벌어질 모양이군.”

그랬다. 그때보다 규모가 크고 그들이 이용하는 것이 강시라는 것을 제외하면 별로 달라져 보이지 않는 전투 방법이었다.

하지만 가장 실용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적의 힘을 충분히 빼둔 후 가볍게 승리를 거두는 것.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방법임에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흐음… 숫적으론 어느 정도 균형이 맞는 건가? 하지만 저 강시라는 것을 보면 오히려 우리가 불리할 것도 같은데… 괜찮을까요? 사숙.”

오엘은 창백한 안색에 섬뜩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강시들을 처음 보는 때문인지 걱정스러운 듯 물어왔다.

확실히 강시를 처음 보면 누구나 그런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강시들이란 보통의 언데드 몬스터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데다, 이미 죽어버렸다는 점에서 상대에게 꺼림직한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인 오엘이 더할 것이다. 평소의 딱딱한 얼굴과는 달리 무서움을 타는 오엘의 얼굴도 꽤나 귀엽다고 생각한 이드는 풋 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푸훗… 걱정 마. 어제 알려줬었잖아. 저 강시들을 상대하는 방법. 뼈를 가루로 만들어버리면 되는 거야. 그것도 백혈수라마강시만. 다른 녀석들은 검기를 사용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정신만 바로 차리고 있으면 상대할 수 있어.”

처음 이드의 웃음에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던 오엘은 뒤에 이어지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에 걸린 소호검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그녀는 아직 소호검을 뽑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이드가 움직이고 난 후에나 뽑혀질 것이다. 저번의 경험으로 이드 옆이라면 검을 뽑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로는 십여 미터를 사이에 두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작은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을 거리였다. 그러나 이미 주위는 쥐 죽은 듯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화를 한다면 큰 불편이 없을 정도였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놀랑의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로 똑똑히 들렸음은 물론이고 상대의 대답까지 깨끗하게 들을 수 있었다.

“본인은 프랑스 가디언의 본부장직을 맡고 있는 놀랑이라고 하오. 귀하들의 정체를 밝혀주시겠소?”

“물론이오. 놀랑 본부장. 우리는 제로의 단원들이며, 나는 잠시나마 이들의 대장직을 맡고 존 폴켄이요. 지금부터 당신들을 귀찮게 해야 된다는 점을 미리 사과하는 바요.”

서른 명에 이르는 제로의 단원들 중 유난히 눈에 띄는 대머리 남자의 말이었다.

놀랑과 비슷해 보이는 나이의 그는 코끝에 걸린 큼직한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그런 그에게선 어떠한 기세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아니, 느껴지지 않았다기보다는 그러한 기세가 없었다.

이어 이드가 살펴본 바로, 존이란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내력은 물론 마법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평범한 사람.

하지만 몸 곳곳에 특이한 마력의 움직임이 보인다는 라미아의 말이 있었다. 그 말대로라면 꽤나 많은 수의 마법적 물품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생각과 함께 염명대의 남손영이 생각이 났다. 별다른 특별한 능력이 없는 대신에 머리가 좋고 손재주가 많아 여러 가지 신기하고 이상한 마법물품을 만들어 내는 사람. 연금술 서포터.

“당신들에게 사과라는 건 받고 싶지 않군요. 다만 사상자만 많이 나지 않도록 바랄 뿐이오.”

“그건 우리 제로 역시 원하는 결과지요. 전투 도중이라도 그쪽 사람이 항복의 뜻으로 무기를 버리고 우리 측으로 넘어온다면 그들의 목숨은 절대 안전할 것이오. 하지만 그 이전에 당신들이 순순히 물러나 준다면 전투는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오.”

순간 그의 말에 부드럽던 놀랑의 얼굴이 굳으며 그의 눈썹이 씰룩였다. 누가 들어도 그렇겠지만, 존이란 남자의 말은 너무도 상황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글쎄… 나에겐 순 억지처럼 들리는군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는 바가 아니었던가? 가만있는 호수에 돌을 던진 건 당신들이요.”

“하지만 이미 태풍을 만나 크게 출렁이던 호수였소. 오히려 그 던져진 돌들이 하나하나 쌓이고 쌓여 좋은 제방 역할을 해줄지 모르는 일이잖소.”

“제방은 이미 설치되어 있었소! 나라라는 이름의 제방이!!! 그 제방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은 당신들이고.”

“크큭… 크하하하하하하!!!!”

놀랑이 버럭 소리쳤다. 그러나 상대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소리 높여 커다란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 웃음은 통쾌하고 시원해 보이긴 했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기도 했다.

“나라라…. 설마 그 썩어빠지고 구멍나 언제 무너질지도 모를 그 것을 말하는 것인가?
너희들은 정말 나라가 너희들을 위해 제방역할을 한다고 어리석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냐?”

웃음을 그친 후 나오는 그의 말투는 어느새 바뀌어 있었고,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내용도 상당히 의미 심장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자신의 조국에 믿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크큭…. 아직 그들에 대해 잘 모르시는 군. 놀랑 본부장. 그들에겐 당신들은 그저 하나의 좋은 돈줄일 뿐이야.
자신들에게 부를 챙겨주고, 자신들의 세력을 넓혀주는 좋은 일꾼. 그 이하는 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될 수 없는 일꾼일 뿐이지.”

이드는 그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처음 제로가 모습을 보일 때부터 주장해온 것이 나라의 소멸이었다.
지구라는 땅 위에 선을 그어놓은 그 세력들의 소멸.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지금 보니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저들의 입장에선 국가라는 이름이 사라져야 할 정당한 이유가 말이다.

그러는 사이 존의 말은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당신들이 모르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나를 포함해서 여기 있는 단원들 중 반 정도가 프랑스의 비밀 연구기관에 붙잡혀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우리들이 가진 능력을 실험하고 연구했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들에게 우리는 도구 취급을 당했고, 실험쥐와 같은 취급을 당했다.
뿐인가. 자신들의 뜻대로 우리들을 조종하기 위해 마약을 사용하는 일은 너무도 흔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로잡아 인질로 사용하는 일 역시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인질을 죽였다.
우리들이 보는 바로 앞에서, 그 앞에서…. 윤간하고는 죽여버렸단 말이다!!

자신의 여동생이, 아내가 또는 자식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그들의 모습이 내 눈엔 아직 선명히 떠오른다.
네 놈들은 그런 썩어빠진 인간들을 믿으며 살아간단 말인가?

그렇다면 말해주지.
너희들은 정말 불쌍한 인간들이다. 영국에서 드미렐이 말했다지?
당신들은 개라고. 정말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 잡아먹힐지도 모르고 주인을 향해 꼬리를 흔드는 충성스런 개.”

“……………”

조용했다. 존의 말이 끝나고 그가 입을 닫았는데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신을 개로 비하하는데도 말이다.

드윈조차 이번엔 눈을 부릅뜨고 그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지금 저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내용만은 사람들의 입을 쉽게 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엔 혹시라도 저 말이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몇 가지 선례가 있고, 영화에서 보여 주었듯 국가라는 이름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두 사람의 인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린해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사람들 사이사이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있었다. 드윈이었다.
록슨 때의 급한 성격은 어딜 갔는지 개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그의 표정은 진중했다.

“하지만 정부는 처음 몬스터가 등장할 때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소. 우리 가디언들이 나서기 전까지.
만약 정부에서 능력자들을 억류하고 있었다면 그들이 우리들보다 먼저 나섰어야 하는 것 아니요?”

“크하핫…. 내 말하지 않았던가. 국민들은 일꾼일 뿐이라고.
몬스터 때문에 죽어나간 건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

각국의 일명 높으신 분들은 안전한 곳에 꽁꽁 숨어 있었지.
더구나 우리들을 밖으로 내놓으면 자신들이 우리에게 행한 일이 발각될 텐데.

그 욕심 많고 약아빠진 놈들이 과연 그런 일을 할까?

그리고…. 몬스터들이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들은 제로의 여신님께 구출을 받을 수 있었지.
한마디로 놈들은 정말 우리를 보내고 싶었어도 보낼 수 없는 상황이 됐단 말이지.”

“여신이라니? 제로가…. 종교단체였던가?”

가만히 듣고 있던 놀랑의 물음에 존은 이번에도 쉽게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는 분노와 흥분이 묻어났다면, 이번에 대답하는 그의 말에는 믿음과 신뢰가 담겨 있었다.

“아니다.
그분 역시 인간이고, 우리들처럼 미국의 비밀기관에 붙잡혀 많은 수모를 겪으셨던 분이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를 구출하셨고, 그분을 중심으로 모인 우리들이 제로가 되었다.
우리들은 그분을 여신이라고 부르지.

더구나 그렇게 불리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또 다른 질문이 들려왔다.
높으면서 맑은 목소리. 그 목소리는 지금까지 오고갔던 묵직하고 침침한 대화들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밝게 만들었다.
다름 아닌 놀랑의 옆에서 있던 세르네오의 목소리였다.

“그럼 제로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들처럼 나라에 의해 고통을 겪으신 분들인가요?”

“오늘따라 질문이 많군.
하지만 대답해 주지. 어린 아가씨.

아가씨 말대로 우리 제로는 처음엔 모두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뿐이었다.
모두가 각국에 붙잡혀 있던 능력자들과 인질들이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붙잡혀 있던 사람들과 안면이 있거나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능력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지금의 제로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건 어린 아가씨가 내 딸과 같은 또래로 보여서 한 가지 더 말해주지.
지금 각국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우리들 제로의 단원들은 대부분이 그 나라에 붙잡혀 있던 사람들이라네.”

생각지도 못했던 존의 말에 용병들은 물론 가디언들까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의 말의 영향은 컸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용병들이나 가디언들 대부분이 저 제로와 같은 능력자였다. 만약 봉인의 날 이전에 국가에 자신들의 능력이 발견되었다면, 자신이 저런 사람들의 신세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존은 자신의 말에 술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어쩌면 이번엔 별다른 충돌 없이 파리를 점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파리를 점령하게 된다면 제일 먼저 국회와 군 시설을 파괴해 줄 생각이었다. 다름 아닌 자신이 만든 물건들로서….

“사숙. 저 사람이 하는 말이…. 사실일까요?”

술렁이는 사람들 중엔 오엘도 들어 있었다.

그녀는 숨죽여 존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서 정말 저들과 싸워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드는 그녀의 그런 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강호에선 이런 경우가 없지 않아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힘 있는 자들은 복수라는 이름을 자신들에게 해를 끼친 자들을 처단했었다. 물론, 성공하지 못하는 사례도 많았다.

“글쎄. 사실일 수도 있고…. 우리를 동요시키려는 거짓일 수도 있어. 당장 사실을 밝힐 수 없는 한은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게 좋겠지.”

이드는 말을 하면서도 제로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자신이 느끼기에 그 말들은 사실 같았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날 생각도 없었다. 저들의 행동이 바르긴 했지만, 마족이 끼어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 녀석이 종속의 인장의 지배를 받긴 하지만, 꺼림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였다.

존에게서 다시 한번 용병들과 가디언들을 뒤흔들어 놓는 말이 들려왔다.

“항상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의미 없는 희생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를 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희생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싶다. 모두 내가 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내 말에 거짓은 없다. 지금 그 말을 증명할 증거나 방법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내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주기 바란다.”

웅성웅성…

그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요했다. 그리고 그 웅성임이 극에 달했다고 생각될 때, 용병 중 한 명이 대열을 이탈해 버렸다.

그 순간 놀랑은 눈을 감아 버렸다.

저 한 명의 행동으로 인해 마음은 있으나 행동력이 없던 사람들이 자극을 받아 대열을 떠날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였다.

그 한 사람을 시작으로 용병들 십여 명이 대열을 떠났다. 하지만 나머지는 아직 망설이고 있었다.

그들이 용병인 이상 자신들이 의뢰받은 일을 두고 무단으로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디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투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더라도 가디언이란 사명감과 동료에 대한 정으로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히 읽었을까.

존은 그들을 향해 다시 소리를 높였다.

“떠나는 용병들은 걱정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들 제로가 당신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책임을 질 것이다.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점령한 도시에 대한 보호라는 일거리를 지급할 것이다. 그리고 가디언들 역시 마찬가지다. 잊지 마라. 그대들이 싸워야 할 것은 사람들을 헤치는 몬스터. 그대들도 잘 알 것이다. 우리가 도시를 점령한다고 해서 시민들이 고통받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제로의 이름을 걸고 약속할 수 있는 부분이다. 생각해 보라. 그대들에게 우리와 맞서 싸우라고 명령한 것은 정부이지 시민들이 아니다.”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여태 망설이던 용병들이 다시 떨어져 나갔고, 가디언들조차 서넛이 주위에 용서를 빌며 자리를 떴다.

그들 대부분이 ESP 능력자들이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졌던 능력에 주위의 눈길을 살펴야 했고, 그 덕분에 존의 말이 쉽게 마음에 와 닿았던 때문이었다.

주위 동료들은 그들을 한두 번 잡아보긴 했지만, 굳이 앞을 막지는 않았다.

전투 의지가 없이 싸움을 하는 것은 검을 들지 않고 싸우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팽팽하던 양측의 전투 인원은 존의 몇 마디 말에 의해 완전히 균형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용병들을 주축으로 원래 인원의 삼분의 일이 대열에서 빠져버린 것이다.

놀랑은 병력 절반이 떨어져 나가버린 듯 휑한 마음으로 대열을 돌아보았다.

이 정도라면 심각하게 이번 전투를 포기할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상황을 세르네오 역시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다 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상당히…. 말씀을 잘 하시는군요.”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네.”

“정보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느껴지는군요. 덕분에 병력의 삼분의 일을 잃었으니…. 그럼 그런 뜻에서 저희들에게 잠시 시간을 주시겠어요? 덕분에 생각지 않은 문제가 발생해 상의를 해봐야 할 듯하거든요.”

상당히 가시 돋힌 말이었다.

불리한 상황에서 저렇게 말한다는 것 또한 재주다.

때문에 유능하다는 말을 들으며 부 본부장이 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렇지 않아도 항복을 권할 생각이었으니까. 서로 의견을 모을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주겠네. 똑똑한 어린 아가씨.”

장난스러운 듯 뒷말에 세르네오를 칭하는 호칭은 마치 귀여운 딸을 보고 “우리 공주님” 하는 투의 말이었다. 정말 딸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르네오는 별로 반갑지 않은 반응이었는지 날카롭게 코웃음을 날리며 놀랑과 함께 대열의 뒤쪽, 그러니까 나이트 가디언들과 마법사들 사이에 서 있다는 뜻이었다.

세르네오는 그곳에서 서서 각국의 대장들을 불렀다.

이드는 이번에도 문옥련에게 끌려갈 뻔하다가 겨우 그녀의 손에서 벗어났다.

어중간히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그 머리 아픈 이야기가 오고 가는 곳에 서 있다면, 그 이상의 고역도 없을 듯 해서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저렇게 머리를 맞대고 꽤나 시간이 지나야 결정이 내려질 것이다.

만약 이성적인 결정이라면 항복이 나올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감정적으로 나간다면….

‘그렇게 되면 어려운 난전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