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43화
푸른 하늘과 둥실 떠 흐르는 구름.뜨거운 태양과 푸르른 대지.
그리고 마음대로 하늘을 휘저으며 작은 새돌이 노니는 곳.이곳은 지금 전세계적인 몬스터와의 전쟁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한적하고 여유로운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 안은 열개의 산봉우리들이 듬직하게 배경으로 버티고 섰고, 그안으로 전형적인 농촌 풍결이 들어앉았지만, 30호쯤 되는 집촌에서 옛모습을 간직한 기와 집은 십여 채가 고작이었다.그런대로 규모있는 시골 마을은 제법 풍족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을 사람들은 바로 등 뒤로 커다란 산을 두고 있으면서도 몬스터에 대한 걱정따위는 좀처럼 없어 보였다.몬스터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만한 어떤 안전장치도 마을에는 되어 있지 않았다.아마도 몬스터로부터 습격을 받은 전례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래서 더욱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몇마리의 몬스터만 출현하여도 이 마을은 순식간에 쑫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요즘같은 세상에선 이 마을에 언제 몬스터가 나타난다고 해도 이상한 일도 아니었으므로.
어쨋든 아직은 들에 나온 사람들이 땀 흘리며 일하는 게 여간 평화로워 보이지 않았고, 그 자체로 다른 세상으로 착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평화와 긴장이 똑같은 무게로 공존하는 이 마을에 지금 막 남청색의 튼튼한 벤 한 대가 들어서고 있었다.
듬직한 덩치이긴 했지만 여기저기 범상치 않은 커다란 주타장을 잘도 찾아 들어서며 그 중 한곳의 빈자리에 떡하니 자리 잡고 섰다.
드르르륵……
“와, 경치 좋다.언니 여기가 거기야?”
레일이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열려진 차문 사이로 또랑또랑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이내 두사람이 내려섰다.
좁은 차 안에서 한낮의 태양 빛 아래로 나온 두 사람은 주위에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반드시 아, 하는 감탄을 발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찰랑이는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와 소녀처럼 가는 얼굴선을 가진 소년.
바로 연영의 부탁을 받은 이드와 라미아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구 사람의 뒤를 따라 내린 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가 드워프와 염명대가 현재 머물고 있는 상향이라는 마을이야.”
연영은 두 사람에게 간단하게 마을을 소개해주었다.
무려 두 시간이나 걸려 찾아왔을 만큼 먼 거리였는데, 연영은 혼자 꼬박 차를 운전하고 오느라 굳어버린 허리와 몸을 풀었다.
그리고 뿌드득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몸 상태에 정말 이드 말대로 가벼운 운동이나 손쉬운 무술이라도 좀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건강 뿐만 아니라 몸매를 위해서도 그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이야기를 들어 보면 가디언에서 이번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데.보통 그런 일에는 보안이 잘 되는 건물을 쓰지 않나? 왜 이런 마을에 그냥 머무르고 있는 거야?”
라미아는 한창 몸 풀기에 바쁜 연영을 향해 예전 TV에서 봤던 것들을 생각하며 물었다.
중요한 물건은 그만큼 호위가 엄중한 곳에 두는 것.물론 그것은 그레센도 마찬가지이고, 드워프가 물건도 아니지만 앞서 연영이 몇 번이나 중요하다고 언급한 것만 염두해 보아도 드워프는 최소한 가디언 본부의 어느 내밀한 건물에나 머물고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라미아의 의문에 연영은 꽤나 할 말이 많은지 몸을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킥킥거렸다.
“호호홋…… 사실 가디언들도 그것 때문에 상당히 애를 먹었는데, 사실은 옮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옮기지 못한 거래.”
옮기지 못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드와 라미아의 시선이 다시 한번 연영에게로 슬며시 돌아갔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 귀하신 드워프께서 절대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면 당장 가지고 있는 도끼를 들이댄다나?
원래는 그 드워프가 산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것도 겨우 막았던 거라서 몇 번 가디언 본부를 옮기려다가 그냥 포기하고 이쪽에서 거처를 마련했대.”
“음…… 확실히 드워프의 고집은 대단하지.더구나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인간을 따라 가지도 않을 테고…… 그런데 산이라면…… 저 산?”
스스로도 비슷한 경험이 있기에 고개를 끄덕인 이드가 마을을 든든히 받치고 있는 산세 좋은 배경을 가리켜 보였다.
“응, 바로 저 산이야.그런데…… 지금쯤이면 마중 나올 사람이 있을 텐데……”
연영은 그렇게 말하며 주차장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초행길인 일행들을 위해 염명대의 누군가가 마중 나오기로 되어있었던 모양이었다.이곳 상향 마을까지는 물어물어 찾아왔지만 여기서부터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연영의 걱정은 이드에 의해 쓸데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이미 마중 나와 있으니까 그렇게 찾을 필요 없어.”
“이리 나와. 네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던 아이지?”
라미아가 이드의 말을 이으며 허공을 향해 누군가를 부르듯이 양팔을 들어 올렸다.
슈아아앙
순간 라미아의 말과 함께 작은 돌풍이 잠깐 주차장 주위를 감싸더니 허공 중에 바람이 뭉치며 작은 참새 크기의 파랑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앗…… 노이드. 아우, 바보. 정령술사이면서 노이드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니.”
연영은 파드득거리며 라미아의 양손 위로 내려앉는 노이드를 바라보며 자괴감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명색이 가이디어스의 스피릿 가디언의 선생이 노이드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니. 이드와 라미아는 한참 스스로에 대한 능력에 회의를 느끼며 절망하는 연영의 모습에 삐질 땀을 흘리고는 노이드를 향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좀 있으면 정신 차리겠지. 그렇게 생각하고서 말이다.
“자, 노이드 오랜만이지? 가부에 씨가 마중 보낸 거니?”
퍼드득퍼드득
라미아의 말에 노이드가 그렇다는 표시를 하며 날개를 퍼득였다.
“그래, 그래. 착하다. 그럼 우릴 가부에 씨에게 안내해 주겠니?”
이어진 라미아의 말에 노이드가 라미아의 어깨 높이로 날아오르며 한쪽으로 스르륵 미끄러지듯이 나아갔다. 따라오라는 듯이 말이다. 이드와 라미아는 더 이상 지체 없이 노이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연영은 머리를 감싸 쥐고 절망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양팔을 한쪽씩 붙잡고 질질 끌다시피 하며 노이드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세 사람의 볼썽사나운 모양은 염명대와 드워프가 머무르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마을 사람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 아마 잠시 후 연영이 깨어난다면 더욱 절망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다니……’
노이드가 일행을 안내해 들어간 곳은 마을에 십여 채 존재하는 옛 기와집 중에서 가장 산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가옥이었다. 밖에서 보기에도 반듯한 외형에 옛날 토담까지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 주인이 누군지 몰라도 집 보존을 아주 잘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점이 이드와 라미아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바로 산을 가까이하고 있다면 당연히 몇 차례 몬스터의 공격이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이 집부터 온전하지 못했을 텐데 어디에도 당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딱히 이 집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을 전체가 그랬던 것 같았다. 이렇게 산을 가까이하고 살면서 산에 살고 있을 몬스터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없다니, 더구나 이렇게 몬스터가 날뛰는 시기에 말이다. 두 사람은 여간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런 점을 이드와 라미아는 마을을 가로질러 이 집 앞까지 오면서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유난히 몬스터의 공격이 많았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 반대로 몬스터의 공격이 없다는데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 집인가 본데?”
사아아아……
세 사람이 집 대문 앞에 도착하자 노이드는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날개를 한번 크게 퍼덕인 후 허공 중으로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삐걱거리며 오랜 세월 동안 집 지킴이 역할을 했을 대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나타나 일행을 맞이했다.
“노이드의 안내는 만족스러웠나요? 어서 오세요. 세 사람 모두 오랜만이에요.”
은색 빛 반짝이는 안경을 쓰고 세 사람을 반기는 여인. 그녀는 다름 아닌 염명대의 정령사 가부에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머리가 좀 더 짧아진 것을 제외하고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맑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였다. 뭐,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한 것이 정령사인 만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자연스럽고 맑은 기운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응, 그러는 언니도 잘 있었던 것 같네.”
연영보다는 가부에와 좀 더 친한 라미아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가부에는 그 말에 빙긋이 웃고는 일행들을 손짓해 집 안으로 들였다.
“그렇지? 요전까지는 정신없이 바쁘기는 했지만. 지금은 톤트 씨 덕에 편하게 쉬고 있지. 그나저나 어서 들어가자. 다른 사람들도 기다려. 연영 씨도 어서 들어오세요.”
“네, 고마워요.”
대문을 넘어서 일행을 처음 맞은 것은 청석이 깔린 넓은 마당과 그 한쪽에 덩그러니 놓인 보통 사람 키만한 거다란 바위 세 개였다.
“마당이 넓죠? 톤트 씨를 밖으로 내보낼 수는 없다 보니까 마당이라도 넓은 집을 구하고자 해서 산 집이에요. 여기 말고 집 뒤쪽에도 작은 정원이 또 있죠.”
어찌 보면 드워프에 대한 효율적인 감시와 노출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었지만 가부에의 말 그대로이기도 했다. 드워프 톤트. 그는 인간 세상에 처음으로 자신의 종족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 드워프였다. 그가 이 도시를 활보하게 된다면 아마도 온갖 종류의 사냥꾼들이 달려들 것은 자명한 일이다. 상대 종족에 대한 정보와 이해가 없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위험과 비극을 초래했는지를 알고 있다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답답한 집 안에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 만약 그래야 한다면 이렇게 마당이라도 넓은 집을 구하게 되었다는 건 가부에의 배려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런데…… 마당은 그렇다 치고…..
“저기 있는 바위는 뭐예요? 관상용은 아닌 것 같은데……”
“아, 저거? 톤트 씨가…… 아, 그 드워프 분 이름이 톤트거든. 하여간 그분이 심심할까 봐 솜씨를 부려 조각이라도 해 보시라고 가져다 놓은 건데…… 손도 대지 않은 상태지, 뭐. 그런데 이 사람들은 손님이 왔는데 빨리빨리 안 나오고 뭐 하는 거야? 이 게으름뱅이들! 어서 나오지 못해욧. 기다리던 손님이 왔다니까!”
가부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집 안 전체가 들썩거리는 듯했다. 좀 전까지 이드의 질문에 상냥하게 대답해 주던 부드러운 태도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상당히 과격한 면이 있는 것 같다고 세 사람은 생각했다. 가부에가 소리친 것이 소용이 있었는지 그제야 집 구석구석에서 한 사람씩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헌데 왠지 노곤해 보이는 것이 몬스터와 싸우는 전투적인 가디언답지 않게 늘어져 있었다. 그렇게 나온 사람들은 부스스한 몰골의 남손영과 그래도 좀 자세가 바른 딘 허브스, 그리고 깔끔하게 편안한 정장을 하고 있는 세이아, 이렇게 세 명이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가부에가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염명대의 대장인 고염천과 패두숙, 이태영, 신우영, 강민우는 따로 임무를 받아 출동했다는 것이다. 처음 그들 염명대가 받은 임무는 드워프의 가드 겸 감시였지만, 차츰 인근 지역에 몬스터의 공격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염명대의 전력을 그냥 썩혀 두기에는 아깝다는 가디언 본부 측의 판단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드워프의 호위와 감시는 남은 네 사람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주로 공격적인 능력이 강한 다섯을 몬스터와의 전투 쪽으로 돌린 것이다. 당시 그런 명령에 출동조로 지명된 다섯 사람은 상당히 아쉬워했다고 한다. 드워프 톤트를 호위하는 일은 일종의 휴가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한가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강민우의 경우에는 세이아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 가부에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일행은 밖으로 나온 세 사람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자, 그럼 가볼까?”
“…… 에?”
“너희들이 온 이유. 톤트 씨를 만나러 말이야.”
갑작스레 나온 사무적인 말에 어리둥절해진 세 사람을 바라보며 가부에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집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정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
지금 가디언들이 머무르고 있는 집은 빌린 것이 아니라 가디언 측에서 직접 구매한 집이었다. 전체적으로 원형에 가까운 팔각형의 담을 두르고 그 중앙에 ㄱ자형의 본채를 중심으로 세 개의 별채가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옛 멋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최대한 생활하기 편하게 개조에 개조를 더해 겉으로나 속으로나 상당히 멋스러운 것이 비싼 값을 할 만한 물건으로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원래의 집값에다 급히 구하느라 웃돈까지 얹어 주는 바람에 거의 두 배 가까이 되는 가격을 주고 사야 했다니 말이다. 거기에 주인도 쉽게 집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단다. 하지만 이 집은 그 비싼 가격에 맞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깨끗이 치워진 넓은 마당과 건물들. 그리고 집 뒤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숲을 연상시키도록 꾸며진 아담한 정원과 연못은 마치 고급 별장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드와 라미아, 연영 세 사람은 가부에를 따라 정원까지 오면서 그런 점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라미아가 집을 둘러보는 시선이 가히 예사롭지가 않았는데, 아마도 곧 집을 구할 거라는 생각에 잘 지어진 이 기와집을 보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라미아를 바라보는 이드로서는 심히 걱정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괜히 꺼낸 집 이야기 때문에 나중에 그녀에게 시달릴 걸 생각하니……
‘휴우!’
절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런 한숨도 잠깐. 이드는 앞에서 낯선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이드 일행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정원 중앙에 놓인 돌 위에 앉아 맥주를 들이키며 유아용 한글 교재를 보고 있는 드워프의 모습이었다.
뚱뚱한 몸매에 단단하면서도 굵직한 팔다리, 잘 정리된 덥수룩한 수염. 그 조금은 특별한 외모를 가진 자가 유아용 교재를 보고 있는 것이 그 자체로 코미디이긴 했지만 그는 확실히 이야기에 나오는 모습 그대로의……
“드워프다. 꺄아, 어떡해…..”
흥분한 연영의 말대로 드워프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가만히 책을 보고 있던 드워프의 고개가 돌려지고 시선이 막 정원으로 들어서는 일행들에게로 맞춰졌다. 매일 얼굴을 보며 익숙해진 네 사람의 얼굴을 지나친 드워프 톤트의 시선이 새로 등장한 세 사람 주위에 잠시 머물렀다. 연영은 그 시선이 마치 자신을 좋아하는 연예인의 시선이라도 되는 양 얼굴을 붉혔지만, 톤트는 그런 것엔 관심이 없는지 곧 이드와 라미아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마치 관찰하듯 두 사람을 바라보던 톤트는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이드와 라미아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두 사람의 예상대로 그레센에 있는 드워프와도 언어가 달랐다. 잠시 이드와 라미아를 모호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톤트는 새로운 인간들에게 관심을 잃었는지 다시 손에 든 책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톤트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햇살에 반짝 빛을 반사시키는 일라이져만 없었다면 말이다.
“…… 페, 페르테바!”
일행의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톤트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그랬다. 그 짧은 드워프의 몸으로 허공을…… 그것도 아주 날렵하게 날다시피 뛰어오른 것이었다. 톤트의 비행 목표 지점에는 이드가 서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일행은 뭐라 말도 못 하고 돌발적인 톤트의 행동을 지켜만 보아야 했다. 도대체가 드워프가 그 먼 거리를 한 번에 뛰어 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르테바 키클리올!”
일행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톤트는 어느새 이드의 바로 앞까지 날아와 그의 허리, 정확히는 일라이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은 날렵한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는 동작과 같았으며 여태 조공의 고수의 그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톤트의 손은 일라이져와 한 뼘여 공간을 남겨 두고 딱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쯧쯧…… 검이 보고 싶으면 그 주인에게 먼저 허락을 받으셔야죠. 불법 비행 드워프 씨.”
다름 아니라 이드의 손이 톤트의 머리를 바로 앞에서 턱 하니 잡아 버린 덕분이었다. 아무리 갑작스런 상황에 정신이 없었다지만, 뻔히 두 눈 뜨고 일라이져를 빼앗길 만큼 허술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드는…… 그리고 그렇게 간단하게 추진력을 잃어버린 일명 불법 비행 드워프가 갈 곳은 하나 밖엔 없었다.
쿠웅
바로 땅바닥뿐인 것이다.
“커허헉!”
거의 날아오던 기세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진 톤트에게서는 단 한마디 폐부를 쥐어짜낸 듯한 신음성이 기어 나왔다. 그런 그의 주위로는 뽀얀 먼지가 피어올라 떨어진 충격이 얼마나 되는지 실제로 증명해 주고 있었다.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떨어진 자세 그대로 부들거리는 톤트의 몰골에 이드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이 입을 가리고 킥킥거렸다. 톤트가 뛰어오른 것에서부터 지금까지의 널브러짐이 마치 만화의 한 장면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일행의 웃음이 사그러들자 톤트가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보통 그런 일을 겪게 되면 어디 한 군데가 터지거나 부러져도 시원하게 부러져 일어나지 못할 텐데 말이다. 원래 그의 몸이 단단한 건지 드워프 모두가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대단한 맷집을 가졌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맷집으로도 땅에 떨어진 충격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는지 일어난 톤트의 표정과 몸의 움직임이 삐걱대는 것 같았다.
“잠깐만 가만히 계세요. 치료해 드릴 테니까. 시련 있는 자에게 자비의 미소를…… 회복!”
세이아가 다가가 신성력으로 그의 몸에 남은 충격을 씻어 냈다. 지금 끙끙대는 것이 톤트 스스로가 자처한 일이고, 상황 자체가 웃기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염명대가 맡은 임무가 있기 때문에 빠르게 그의 몸을 회복시킨 것이다. 가디언으로서 그들이 받은 임무가 톤트의 보호와 감시였으므로. 맑고 푸른빛이 순간적으로 톤트의 몸을 휘감고 사라졌다. 끙끙거리던 톤트는 그제야 괜찮아졌는지 신음을 멈추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고는 세이아에게 슬쩍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너무 간단하긴 하지만 고맙다는 인사였다. 그리고 곧바로 이드, 정확히는 일라이져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톤트의 시선엔 무엇인가 뜨거운 기운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사실 톤트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언가 만들기를 좋아하고 빚어내길 좋아하는 드워프의 본능이 일라이져를 엄청난 작품이다, 라고 말하고 있으니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나 탐욕이 아니었다. 그들은 만들기를 좋아하지 굳이 소유하고 싶어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일라이져를 바라보는 것도 그것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의 발로일 뿐이었다.
“사…… 사피라도…… 으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어렵게 말을 꺼내던 톤트였지만 곧 고개를 흔들었다. 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제약이 상기된 탓이었다. 대신 그는 이드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이고는 일라이져를 손으로 가리키고는 다시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톤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 하는 짓에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치료한 사제에게도 고개를 까딱거리기만 한 그가 이렇게 고개를 숙이다니, 과연 드워프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드는 톤트의 무언의 부탁에 빙그레 웃고는 방금 전 톤트가 앉아 있던 정원의 중앙으로 가서 앉았다. 그 앞에 일라이저를 끌러 내려놓았다. 이리와서 보란 뜻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톤트는 다시 한 번 허공을 날았고, 이번엔 그가 바라는 것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다른 일행들도 그런 톤트의 열렬한 모습에 웃으며 다가와 이드와 톤트의 주위로 둘러앉았다.
“참, 근데 너희들이 통역 마법이란 걸 알고 있다고?”
잠시 톤트와 일라이져를 번갈아 보던 남손영이 이드와 라미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통역 마법이란 걸 들어보지도 못했고, 톤트와 대화도 똑바로 되지 않았던지라 남손영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예, 라미아가 알고 있죠.”
“마법만 걸면 바로 돼요.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은데요.”
라미아가 톤트를 가리켰다. 과연 톤트는 정신없이 일라이져를 살피고 있는 것이 통역 마법이 펼쳐져도 말 한마디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라미아가 슬그머니 남손영을 바라보며 왠지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입에 물었다.
“근데…… 보석은 가지고 계시죠? 마법에 필요한데……”
“보…… 보석? 이, 있긴 하다만……”
남손영은 아름답지만 묘하게 불길한 라미아의 미소에 움찔거리며 자신이 머물던 방 쪽을 바라보았다. 왠지 앞으로의 자금 사정에 상당한 타격이 올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 지금 도망가야 하는 건 아닐까? 왠지 심각하게 고민되는 그였다.
“자, 그럼…… 인터프리에이션!”
파아아앗
라미아가 낭랑한 목소리로 시동어를 외치자 그녀를 중심으로 백색의 투명한 빛이 나는 구가 일행들을 잠시 감싸 안더니 순식간에 줄어들며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라미아의 손바닥 위로 그녀의 손엔 어린아이 주먹만 한 화려한 녹빛의 에메랄드가 들려 있었다. 헌데 특이하게 그 에메랄드의 중심부에서는 손톱만 한 하얀빛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방금 전 모여든 빛의 정화였으며, 라미아가 시전한 인터프리에이션, 통역 마법의 결정체였다.
“마법이 완성됐네요. 이제 말씀을 나누셔도 될 것 같은데. 톤트 씨 제 말…… 이해할 수 있죠?”
“아아…… 물론이다.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는데, 이제야 살겠구만 하하하핫…… 고맙다.”
그때까지도 일라이져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던 톤트는 정말 고마웠는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에이, 별거 아닌걸요. 앞으로도 이 보석을 가지고 계시면 편히 대화하실 수 있을 거예요.”
라미아는 손에 들고 있던 에메랄드를 일행들의 중앙 부분에 내려놓았다. 톤트는 보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더 없이 좋지. 더구나 저렇게 아름다운데 보기도 좋고 말이다.”
톤트의 말대로 투명한 흰빛을 감싼 에메랄드는 마치 전설의 보석인 양 정말 아름다웠다. 다른 사람들 역시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 남손영만은 그런 일행들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보석의 원래 주인이었던 그로서는 에메랄드의 아름다움에 취하기보다는 손에 들고 있는 보석 주머니의 가벼워진 무게가 너무나 슬펐기 때문이었다. 처음 라미아가 보석을 원할 때만 해도 찝찝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마법에 필요하다고 하기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5 써클 후반에 속하는 통역 마법은 짧게 개인 간에 사용할 때는 바로바로 마법을 시전해 쓸 수 있지만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사용하기 위해선 중계기 개념의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라미아의 설명이 이어졌다. 또 통역 마법 자체가 일종의 텔레파시와 최면술이 뒤섞였다고 할 수 있는 만큼 마법을 사용하는 쌍방간에 약간의 부하가 걸려 미미하지만 두통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점과 이를 중화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해 줄 물건-보석-이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결정적으로 마법을 시전한 라미아가 없이도 상당 기간 마나의 주입만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 물품을 만들어 낼 거란 말에 아예 가지고 있던 보석 주머니를 통째로 내줄 수밖에 없었던 남손영이었다. 더구나 마법에 사용될 보석을 직접 고르겠다는 그녀의 말에 조용히 물러나 있던 그에게 한참 만에 다시 돌아온 보석 주머니는 너무나 과도한 다이어트로 홀쭉하게 줄어 있었다. 그에 불만을 표시했지만 다 마법에 사용된다는 말에 반항 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한데 막상 마법이 시전되는 자리에 나온 보석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보석 중 세 번째로 질과 크기가 좋았던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었으니……
‘끄윽…… 당했어. 당한 거야.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더라니…… 끄아, 내 보석!’
남손영은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며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저 라미아의 옷 중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보석을 지금 찾아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전부 사용했다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그였다. 마법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아닌 그였으니 말이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그래서 더욱 슬픈 남손영이었다. 그러나 그런 남손영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일행들은 그동안 나누지 못해 답답해하던 말을 마음껏 쏟아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특히 그 중 한 사람은 두 배나 무거워진 주머니의 무게에 그 즐거움이 두 배가 되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