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44화
“흠…… 그럼 자네들이 그 가디언이라는 사람이란 말이군.”
“네.”
톤트의 말에 가부에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서야 톤트는 자신이 외부와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감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씻을 수 있었고, 경계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가디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정체를 알 수도 있었다. 슬쩍 갑자기 변해 버린 세상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나섰던 자신을 붙잡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자신을 이곳에 억류하고 있는 이유까지도……
“자네들이 하는 말 잘 알았다. 사실 우리도 아직 세상에 성급하게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도 없기 때문에 이렇게 내가 나섰던 거지.”
톤트는 가부에의 말을 듣고는 시원하게 결정을 내렸다. 이드는 그런 톤트의 결정을 보며 확실히 드워프가 엘프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엘프보다 급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성질을 말이다.
“하지만 세상과 닫고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가 세상에 나서기 전까지 자네들 가디언들과는 연락이 있었으면 좋겠군. 아직 지금의 세상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이 꽤나 많은 것 같으니까 말이다.”
이것은 가디언들과의 안면을 트겠다는 말이기도, 우선 그들에게 드워프와의 인연을 맺는 데 우선권이 주어진 것이었다.
“그래 주시면 저희들이야 감사할 뿐입니다.”
가부에는 톤트의 말에 기꺼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디언으로서는 이종족 중 하나인 드워프와 우선적으로 교류하게 됨으로 오는 이점들이 상당한 것이다. 특히 아직 확인은 되지 않았지만 그 실력이 대단할 것으로 생각되는 드워프들의 손재주를 빌릴 수도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기뻤다고 할 수 있었다. 가디언들이 사용하는 무기들이란 대부분이 검과 창, 스태프 등의 옛 것들이다. 그 무기들의 성능은 만들어 내는 장인의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뉘게 된다. 당연히 이야기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 세상 최고의 장인들이라는 드워프가 그 힘을 빌려 준다면 최고의 무기가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지금의 금속 제련술이 아무리 좋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장인의 손길을 따르지 못하는 면이 있었다. 장인의 혼이 깃드는 물건과 그렇지 않은 공장형 물건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말이다. 양측 간에 교류를 약속하는 상황이 정리되자 톤트의 거처도 다시 정해졌다. 우선은 그들의 마을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지금 과감하게 맺어진 결정과 톤트의 안전함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실로 지금까지 답답하게 서로를 경계하고 지켜보며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했던 것들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결론은 싱겁게 나 버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부분은 바로 톤트의 마을이 있는 위치였다. 톤트는 정확하게 알려 주진 않았지만, 그들의 마을이 바로 이 상향 마을 뒷산에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는 와중에도 이 마을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이 상향 마을에 몬스터의 습격이 거의 없었던 이유도 산에 있는 몬스터 무리들을 드워프들이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가디언들과의 일이 우호적으로 결론이 나자 톤트는 다시 이드와 라미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과의 이야기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물렸다. 일행은 다소 의아해했지만 별다른 의문 없이 자리를 비웠다. 톤트가 두 사람에게 특별히 해를 끼칠 것도 아니고, 설사 그럴 생각이라 하더라도 그에 당할 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좋은 관계를 만들어 놓은 지금 상황에서 괜히 고집을 부려 서로 기분이 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정원에 한 명의 드워프와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톤트는 손에 든 일라이저를 다시 한번 쓰다듬어 보더니 두 손으로 들어 이드에게 건네었다.
“수백 년 만에 보는 신검일세. 덕분에 잘 봤네. 고마워.”
일라이저 때문인지 가디언들을 대할 때와는 어투부터가 달랐다.
“일라이저가 좋아하겠군요. 그런 칭찬이라니……”
“아니, 당연한 말이지. 그런데…… 그 검과 자네들은…… 누구지?”
흠칫
생각도 못한 톤트의 갑작스런 질문에 이드와 라미아는 움찔 놀라며 바라보았다. 갑자기 누구냐니. 이미 앞서 서로 간에 인사가 오고 가며 소개했으니 이름을 묻는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지.’
‘하지만 어떻게요? 드래곤도 알아볼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예요?’
‘하지만 그것밖엔 없잖아.’
이드와 라미아 사이로 급하게 마음의 언어가 오고 갔다. 하지만 일단 톤트가 물었으니 대답은 해야 하는 것. 이드가 당혹스런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에요. 앞서 소개했잖아요.”
“굳이 비밀이라면 묻지는 않겠지만…… 내 말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해서 물어보는 것이라네.”
쿠궁
짐작은 했지만 정말 저런 말이 나오자 이드와 라미아의 가슴에 놀람과 흥분이 일었다.
“…… 어떻게 아셨습니까?”
“음…… 역시 그런 모양이군. 혹시나 해서 물었네만. 내가 알게 된 건 자네들 때문이 아니라 저 숙녀 때문이지.”
톤트의 손이 가리키는 것은 다름 아닌 이드의 손에 얌전히 안겨 있는 일라이저였다.
“우리 드워프들은 애매모호하고 복잡한 건 싫어하지. 그런 덕에 나도 마법이라든가 이론이라든가 하는 건 잘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직접 손으로 만들어 낸 물건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네. 그것이 어떤 형태를 가진 물건이든지 말이야. 헌데 그런 내가 저 숙녀를 살폈을 때 이상한 걸 알았지.”
톤트는 잠시 말을 끊으며 이드의 손에 들린 일라이저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생각도 못한 곳에서 이런 일을 만날 줄이야.
이드와 라미아는 이어질 톤트의 말에 바싹 귀를 기울였다. 가장 중요한, 어떻게 이세계에서 왔다는 걸 알았는지 그 핵심이 나올 차례였기 때문이었다.
“우선 그 숙녀 분…… 신검이겠지?”
묻고는 있지만 확신에 찬 확인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이드는 그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이어질 이야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자네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에도 드워프가 있을 거야. 이건 드워프의 솜씨거든. 신검이라 이름 받은 많은 검들이 우리들의 손을 거치게 되지. 신검이라는 것이 중간계에서 만들어진 검에 천계나 마계의 기운이 깃드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신검이라 칭해지는 검들에 대해서는 잘 알아볼 수 있지. 또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검에 깃든 후에는 느껴지는 그 신성력까지도 말이야.”
“아!”
이드와 라미아는 톤트의 마지막 말에 순간 탄성을 터트렸다. 그제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톤트가 어떻게 이드와 라미아가 이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알았는지를 말이다.
“알았나? 맞아. 저 숙녀 분에게는 내가 수백 년간 살아오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분의 신성력이 깃들여 있더군. 하하하핫!”
톤트는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안목에 흡족한 듯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 이드와 라미아로서는 생각도 못한 부분이었다. 다름 아닌 일라이져를 통해서 알아보다니.
‘흠…… 그럼 지금까지 곁에 있으면서 일라이져의 신성력을 알아보지 못한 사제들은 뭐지? 바본가?’
‘네이나노가 좀 엉뚱한 걸 보면…… 그런 것 같죠?’
한순간이지만 라미아가 동조함으로써 순식간에 지구상의 모든 사제들은 다른 신의 신성력도 알아보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정말 사제들이 바보인가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그들이 자신이 모시는 신도 아닌 다른 신의 신성력을 알고자 한다면 스스로 신성력으로 조사를 해야 한다. 아니, 그전에 신성력이 깃든 물건이란 걸 알아야 하는데, 누가 일라이져가 신검이라고 말해 주겠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항상 주위로 신성력을 발휘하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톤트보다 눈썰미가 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사항이 생겨났다.
“어떻게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그렇게 확신하셨죠? 엘프 분들은 물론이요 드래곤들도 차원 이동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던데……”
그렇다. 마법에 있어서는 가장 앞서 간다고 할 수 있는 그 두 존재들이 불가능이라고 못 박아 놓은 마법. 주위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그 소리를 듣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인식하게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지금과 같은 상황과 만나게 되면 보통 아, 내가 모르는 신의 힘이구나. 라든지, 뭔가 신성력과 비슷한 힘이 깃들었구나, 라고 생각하고 말게 된다. 그런데 톤트는 다른 건 생각도 해 보지 않고 바로 핵심을 짚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톤트도 그 나름대로 그렇게 짐작한 이유가 있었다.
“아, 물론 불가능하지. 하지만 우리 마을에는 있거든. 이계의 물건이 말이야.”
“그…… 그런!”
“설마……”
순간 이런 곳에서 듣게 될 거라고 생각도 못한 그 말에 이드와 라미아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느낌과 함께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드는 자신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그레센에서는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들었었다. 이곳에서도 엘프와 드래곤에게 같은 대답을 들었다. 돌아갈 수 없다! 이 절망적인 한계 상황을 자력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이드는 마냥 답답할 뿐이었다. 그래서 일리나가 기다릴 그레센이든 누님들이 기다리고 있을 중원이든 팔찌가 다시 반응해야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저 톤트의 마을에 이계에서 넘어온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 차원 이동을 쉽게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혹, 그레센이나 중원으로 돌아갈 어떤 방법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않을까? 흥분에 휩싸인 이드의 생각을 그대로 라미아가 받아 입을 열었다.
“그럼 톤트 님 마을의 누군가가 차원 이동을 했다는 말인가요? 그런 건가요?”
“어떻게요? 어떻게! 마법입니까?”
“자자…… 우선 진정하고……”
놀랍고도 놀라울 수밖에 없는 새로운 사실에 급하게 질문을 던지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톤트는 드워프 특유의 굵은 신경으로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둘을 우선 진정시키려고 했다. 일순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던 순간이 지나가자 톤트는 두 사람이 원하는 것에 대해 비로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양 귀를 바짝 기울여 그의 말을 들었다.
“정확히는 나도 잘 모르네.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 과거의 일이거든. 아니, 인간들이 결계 속으로 들어간 후라고 해야 맞을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지. 자네들도 그 위대한 인간의 마법사가 한 일에 대해서 숲의 수호자들에게 들었겠지? 그는 위대한 마법사지. 그런 일을 실행했고, 성공시켰다는 것 자체가 말일세. 그리고 인간들에게도 칭송받을 만한 일이지. 몬스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으니까. 비록 알려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가 일관되게 꼭 칭송받은 것만은 아니네. 그는 많은 인간들과 다른 종족들로부터 동시에 저주와 원망도 받아야 했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이와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헤어져야 했던 자들이지.”
“아!”
낮게 탄성을 발하는 이드의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일리나의 얼굴이 스쳤다. 그렇다. 자신도 엘프인 일리나와 인연을 맺었으니 과거의 그들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그때도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과 이종족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어떻게 보면 같은 종족 간의 사랑보다 더욱 뜨겁고 비장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테니까. 그런 그들의 짝이 바로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그들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 마법사가 눈앞에 있었다면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그 결계에 대해 안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지.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됨으로 해서 많은 이들이 자신의 반려를 찾는 일에 절망했다. 드래곤조차도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쉽게 포기하지 못한 자들도 많았지.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는 열망을 가진 자들 중에 말이야. 그리고 그 자들 중에서 우리 마을의 드워프도 계셨어. 그분에게도 열렬히 찾으려고 했던 반려가 있었던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충분히 이해가 되네요.”
라미아가 톤트의 말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먹은 일에 대해서는 저돌적이고, 포기할 줄 모르는 근성의 드워프인 만큼 아마 이리저리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드워프와 짝을 맺은 사람은 누구지? 묘한 미적 감각을 지녔군.’
그것도 그렇다. 여성 드워프든, 남성 드워프든 간에 인간의 심미안엔 차지 않는데 말이다.
“다행히 그분이 원래 마법 물품 만들기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마법을 쉽게 연구하고 접하게 되셨지. 그래서 결계 속으로 들어가든지, 결계를 깨든지 간에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마법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걸 쉽게 깨달았지.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마법을 알아야 했고, 그때부터 그분의 일생이 마법 연구에 바쳐지기 시작했어. 하지만 앞서 말했듯 결계를 펼친 자는 진정 위대한 마법사, 결국 그분은 당신에게 허락된 수명을 마칠 때까지 당신의 반려를 찾을 방법을 알아내지 못하셨지.”
“어? 하지만 앞서 말씀하시기로는……”
“아아…… 그 말대로 그분은 반려를 찾을 방법을 찾지 못하셨던 건 사실이야. 대신, 마법의 연구 중에 우연히 이계의 물건을 소환한 적이 있었네. 결계를 풀어내는 것보다 더 획기적인 발견이었지만, 그분이 바란 건 오직 반려를 찾는 것이기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지. 그리고 그분의 연구 자료들은 지금도 잘 보관되어 있네.”
“그럼 저희들이 그 자료를 좀 볼 수 있을까요?”
라미아가 톤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그치듯 말했다. 우연의 산물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었다. 어떠한 연구의 결과물로 이계의 무언가가 소환되었다니! 확률이 낮고 만약이라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그 자료들을 잘만 연구해 나간다면 팔찌에 의한 것이 아닌 자력으로의 차원 이동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라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드도 알고 있었고, 톤트도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다.
“물론이네. 대신……”
“저희들이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이드는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듯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톤트가 마지막에 꺼낸 연구 자료라는 말. 그건 원래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톤트는 마치 두 사람에게 그 연구 자료를 보여 줄 수 있다는 투로 말했다. 더구나 저 뒷말을 흐리는 태도는 은연중에 노골적이기까지 했다. 부탁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그들의 습성상 저 정도의 태도만 보아도 확실하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뭔가 원하는 것이 있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도움은 필요 없네. 대신 거래를 원하네.”
하지만 톤트의 생각은 둘의 짐작과는 조금 다른 것인 듯했다. 그는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드워프의 성격을 고스란히 가진 종족으로서 연구 자료를 가지고 거래를 원한 것이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건네는. 사실 두 사람이 차원 이동을 해 왔다는 생각에 돕고 싶었던 뜻도 있었다. 이야기 속의 그분을 톤트 역시 고스란히 이해하듯 이계로부터 온 두 사람의 마음이 어떨지 역시 짐작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두 사람이 해 줄 만한 일도 있었으므로, 거절하지 않을 거래를 원한 것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닌 거래! 과연 드워프답다고 해야 할까. 뭐, 정작 당사자들인 이드와 라미아는 어느 쪽이든 좋았기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쯧, 성질 급하기는…… 내가 원하는 것도 들어봐야지. 아무리 상대가 원하는 게 있다고 그게 무엇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그렇게 덥석 고개를 끄덕이면 안 되는 거야. 내가 원하는 것은 다섯 가지네. 모두 쉬운 거야. 첫째, 자네들이 나를 우리 마을까지 데려다주는 것. 둘째, 아가씨가 만들었던 통역을 위한 몇 개의 아티펙트. 재료는 우리가 주겠네. 셋째, 몇 벌의 통신구. 앞서 아티펙트를 만든 실력이면 충분히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되는데, 무리 없겠지? 좋아, 그리고 넷째로 자네들이 들렀다는 엘프 마을과의 통신이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들에게 우리 마을의 위치에 대해 절대 비밀로 해 달라는 것이네.”
“네, 알겠어요. 모두 가능해요. 하지만 첫째와 다섯 번째 조건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걸요? 어차피 교류를 한다고 하셨으니, 가디언들에게 호위를 부탁하셔도 될 텐데……”
톤트가 일목요연하게 제시한 조건을 모두 라미아 입장에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거래라고도 생각되지 않을 만큼 쉬운 일이기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기에 물었다.
“음…… 간단하지. 우리는 인간을 별로 믿지 않거든.”
이드는 그 말에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들 드워프도 미랜드의 엘프들처럼 인간이라는 종족을 믿지 않고 있었다. 그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말이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혼돈의 존재라 칭해지는 인간의 특성,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해 버리는 마음의 색깔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종족들의 믿음을 배신해 왔을까. 더구나 그들이 이종족들에게 가했을 위해를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지극히 이해가 되기도 했다. 결코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마 이 드워프들도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교류를 신청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는 많은 숙고와 오랜 찬반의 토론을 거쳤을 것이다. 그리고 톤트가 대표 자격으로 인간들에게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 역시 인간들을 쉽게 신뢰하거나 믿지는 않을 것이다. 혹 모를 일이다. 이 교류 역시 인간을 여전히 잠정적인 적으로 인식하고 그들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인간에게 당하진 않기 위한 방책의 일환인지도……
“그럼 저희들은 어떻게 믿으시고.”
두 사람이 궁금한 것이 이것이었다. 두 사람도 톤트가 말했던 인간의 종족이었다. 정확히는 한 사람은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검이었다가 인간으로 변한 상태지만 말이다. 그러나 톤트는 오히려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핫…… 당연한 걸 묻는구만. 자넨 그 숙녀 분께 인정받지 않았나. 그것 하나면 충분하지.”
아까 전부터 톤트가 숙녀라 칭하는 것은 일라이져뿐이다. 일라이져에게 인정받았으니 믿을 만하다. 참으로 드워프다운 말이었다. 검의 인정을 받았기에 믿는다니. 또 그것은 자신이 살펴본 일라이져의 선택을 믿는다는, 돌려서 말하면 자신의 안목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톤트는 그런 생각을 자신감 있게 피력했다.
“더구나 자네들은 여기 사람들보다는 우리들에 대해 더 잘 알지 않겠나. 그리고 나는 그 많은 광맥과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내 눈을 확신한다네.”
“호호…… 기분 좋은 말씀이시네요. 확실히 엘프가 진실의 눈을 가졌듯이 드워프가 판단의 눈을 가져다는 말이 맞는가 봐요.”
라미아의 말은 그레센에 떠도는 말로 정확하게 물건의 가치를 판단하는 드워프를 두고 한 말이었다.
“오오…… 좋구만. 우리에게 어울리는 말이야. 판단의 눈이라, 크하하하핫!”
시원하게 웃어 보이는 것이 정말 듣기 좋았던 모양이다. 드워프의 성격은 정말 대단했다. 결단력 있다고 해야 할지 급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드, 라미아와의 이야기가 원하는 대로 마무리되자 톤트가 곧바로 출발할 것을 원했다. 당연히 조금이라도 빨리 연구 자료를 넘겨받고 싶었던 이드와 라미아에게도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연영과 가디언들에게는 날벼락과도 같은 소식, 아니 통보였다. 한마디 툭 던져 놓고, 가지고 왔던 짐을 싸고 있으니 그것이 통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곳에서 일행들을 이끌고 있는 가부에는 돌발적이라고 할 만한 톤트의 행동에 속이 탔다. 통역 마법을 위한 마법구를 만들어 준 라미아 덕분에 시원하게 의사소통이 되고, 이야기도 잘하고 나서 잠시 자리를 비워 달라기에 그렇게 해 줬더니 갑자기 집으로 돌아간단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물론 그와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충분히 나누었다고 볼 수 있었다. 서로 교류한다는 장기적이고 유익한 결과도 도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떠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녀가 상부에서 받은 명령은 보호와 감시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서로 장기적인 교류에 합의하기로 한 마당에 뚜렷한 이유 없이 강제로 붙잡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라 허둥지둥 당황할 수밖에 없는 가부였다. 여기 책임자로 상부에 보고를 해야 하는 가부에에게 교류라는 것 말고는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충실한 내용이 아직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되어 보였는지 라미아가 나서서 당장이라도 집을 나서려는 톤트에게 잠시 시간을 얻어 주었다. 가부에는 그 사이 상황을 정리해서 바로 가디언 본부에 연락을 했고, 짧고 간결하게 핵심만을 간추린 그녀의 전언에 가디언 본부는 일단 그 정도의 성과에 만족하자며 간단하게 회신해 주었다. 가디언 측에서 톤트를 감시, 억류하고 있었던 이유가 그들 드워프와 인간들을 위해서였고, 그 일이 잘 풀렸으니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더 이상 그를 억류한다는 것은 한창 세계의 영웅으로 떠오른 가디언의 이미지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가부에는 그 소식을 전하고 톤트에게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를 물었다. 그에 톤트는 두 달 후 이곳이라고 짧고 확실하게 답해 주었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 옆에서 연영과 가디언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연영이 부탁했던 일도 이렇게 끝이 났으니 바로 목표한 곳으로 날아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에 연영과 가디언 일행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쁜 와중에 이곳까지 와 준 것만도 고마운 일인 것이다. 대신 남손영이 나서서 그에 보답하듯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을 물었다. 하지만 지명을 모르는 두 사람은 라미아가 집어낸 곳의 좌표를 말했고, 남손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곳에 가면 길 안내를 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 말해 주었다. 처음 가는 곳이니 만큼 안내인이 있어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에 이드도 거절하지 않고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연영과 진하게 작별 인사를 나눈 셋은 늦은 시간임에도 거침없이 산을 향해 걸었다. 그들 뒤로 연영이 마을 앞까지 따라 나와 축 늘어진 아쉬운 눈길로 배웅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