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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53화


이드의 의견은 마음에 들었지만 휴를 함부로 하는 행동이 불만인 듯 라미아의 말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하지만 그녀의 말과는 달리 휴는 부서질 것도 없이, 허공에서 떨어지는 도중 빛과 함께 형성된 아공간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부서질 건덕지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드도 라미아가 휴를 잘 받아 낼 것을 알고 던진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뭐, 라미아가 받아내지 못해도 상관은 없었다.

“저 놈이 얼마나 단단한데 요기서 떨어진다고 부서지겠어?”

[….]

사실이 그랬다. 휴의 몸체는 단단해도 보통 단단한게 아니었다. 서울에 집을 얻어 살 때였다. 한창 라미아가 휴를 가지고 놀던 때였는데, 우연히 그녀가 높은 곳에서 휴를 떨어트릴 뻔한 적이 있었다. 라미아의 능력이 능력이다 보니 직접 땅에 떨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하마터면 부서질 뻔하지 않았느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휴에게 얼마만큼 단단하냐고 물어보았었다. 그때 하는 대답이 여러 가지 복잡한 수치를 빼고, 웬만한 소총은 맞아도 끄떡없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우주시대의 물건이고, 용도가 용도이다 보니 웬만큼 튼튼한 것은 이해가 되지만, 소총에도 끄떡없다니.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라미아가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이드가 직접 일라이져를 들고 휴를 그어보았는데 정말 작은 흠집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 원래 그렇게 날카롭지 않은 일리이져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에 가디언 본부의 날카롭다 하는 검으로도 해보았지만 역시 깨끗한 은빛 몸을 유지하는 휴였다. 결국에는 검기를 쓰고서야 휴의 몸체에 흔적을 남길 수가 있었다. 세상에 검기를 사용해야 상하는 몸체라니, 이드는 그때 현철(玄鐵)도 아니면서 검기를 사용해야 상하는 휴의 몸체의 정체에 상당히 고민한 적이 있었다. 좌우간 그런 단단한 녀석이 휴였다. 단순히 던지는 것이 아니라 초고층 빌딩에서 떨어트려도 흠집도 나지 않을 녀석인 것이다.

[그래도요. 함부로 던지지 마세요.]

뭐, 그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겐 그 물건의 강도는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쩝. 알았어, 살살 다룰게. 그보다 이제 그만 출발할까? 주위에 마침 아무도 없잖아.”

이드는 라미아가 얼마나 휴를 애지중지 하는지 알기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헤에… 그럼, 그럴까요.]

“그래. 부탁을 못 들어줘서 미안하긴 하지만, 뱃삵도 냈고 하니 바로 가자.”

갑판으로 나오는 도중 전날 들렸던 접객실에 슬쩍 들려 작은 보석으로 뱃삵으로 놓고 나온 이드였다. 라미아는 과하다고 아까워 했지만 이드의 마음은 편했다. 이제 이 배에서 꾸물거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옛써. 그럼 목적지를 향해 날아갑니다.]

대륙으로 나가는 게 즐거운지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막 시동어를 외우려는 찰라. 이드의 추가 요구 사항이 이어졌다.

“아, 텔레포트 하면서…. 우리 저기에도 잠깐만 들렸다가 가자.”

그렇게 말하면서 이드가 가리키는 곳. 그곳에는 작은 점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떠 있었다. 하지만 이드의 눈엔 아주 정확하게 그 점의 정체가 보였다. 그것은 찢어진 돛과 함께 그들의 직업을 상징하는 붉은 해골이 그려진 배였다.

[호호호…. 오랜만에 한바탕 하겠네요. 그럼 갑니다.]

파하앗!

라미아의 말이 끝나는 순간 붉은 검을 들고 서 있던 이드의 모습이 갑판에서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창칼이 난무하던 시절, 지구의 아시아권 국가의 평균수명은 사백 년이 못 된다. 그에 반해 그레센 대륙에서 둥지를 트는 왕국이나 국가의 평균수명은 오백 년에서 육백 년 정도다. 그 사이 전쟁도 있고, 반란도 일어나지만 확실히 지구보다는 그 수명이 길다는 말이다.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국가가 국민들을 대하는 태도와 국민들이 가진 가능성 때문이었다. 역사를 따져 보면 알지만 지구의 평인들의 삶은 한마디로 말해서 착취의 삶이었다. 언제나 힘없는 백성으로서 관리와 권세가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덕분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반란이 일어나도 진정으로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거는 백성의 수가 적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국가가 백성들에 대한 학정이 극에 달했을 때 전쟁이나 반란이 일어나면 너무도 쉽게 그 국가는 망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레센은 조금 다르다. 바로 국민들이 힘을 가질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국가에서 최고의 무력으로 생각하는 소드 마스터와 고 클래스의 마법사의 존재였다. 언제 어디서 어떤 기회를 통해서 소드 마스터나 고위 마법사가 탄생하게 될지 모르는 일인 것이다. 평소 천하게 생각하며 방패막이로 이용하던 용병들 중에서 소드 마스터가 생겨날 수 있고, 세금 대신 마법사에게 팔아넘긴 평민 중에서 고위 마법사가 탄생할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무력을 인정받아 국가의 귀족이 된다면 당연히 그들을 막 대한 귀족은 그들의 적이 될 것이고, 그들이 그 힘으로 복수할 생각에 쳐들어온다면 고위 귀족이 아닌 이상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자연히 국가나 귀족들로서는 국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고, 현대의 지구보다는 못하지만 창칼이 난무하던 시절의 지구보다는 훨씬 뛰어난 정책이 펼쳐질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그 중에는 그런 걸 생각지도 않고 뿌리 깊은 귀족전신을 발휘하며 오만하지만 한 귀족들도 많고, 멍청한 왕이 나오기도 하지만 확실히 지구보다는 국가의 수명이 길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런 긴 수명을 가진 그레센의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나 오랜 역사를 가진 국가들이 있는데, 바로 카논, 라일론, 아나크렌의 세 제국들이 그랬다.

이 세 제국의 역사는 거의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넘나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세 국가 모두 위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국민들을 위한 수많은 정택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것을 바탕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지금까지 그 긴 역사를 쉬지 않고 이어 온 것이다. 만약 이 세 제국들에 대한 국민의 사랑이 식었다면, 그 국가는 이렇게 긴 시간을 이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나크렌은 그런 긴 세월을 유지해 온 제국들 중 그 나이가 가장 어렸다. 어리다고 해도 800 년이 넘어 다른 일반 국가에 비해서는 턱없이 많은 세월이지만 말이다.

좌우간 아나크렌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덕분인지 다른 두 제국에 비해 그 무게감은 조금 적지만 가장 밝고, 화려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것을 가장 잘 보여준 곳이 수도인 안티로스였다.

그러나…..

“하아…..”

옆에서 듣기만 해도 같이 힘이 쭉 빠져버릴 듯한 엄청난 한숨을 내쉬는 이드.

그에게는 거대하고 오래된 제국의 화려한 역사 따위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가 않고 있었다.

그럼 그렇게 이드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드는 문제는 무엇일까?

뭐, 답은 간단하다. 현재 이드가 곤란해 하는 일은 세 가지 정도로 추린다고 할 때, 그 중 두 가지는 오직 시간이 해결해야 할 일이니 그걸 빼고 나면 남는 것은 하나였다. 이곳 그레센에 와서 가장 처음 하고자 했던 일이자, 꼭 해야 할 일. 그렇다, 바로 일리나들을 찾는 일이었다.

바로 그 일이 지금 이드의 마음을 뒤죽박죽으로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전날 자연이 가진 가장 신비로운 예술적 능력이라고 할만한 노을을 바라보며 텔레포트 하는 순간, 이드는 바로 일리나를 만나볼 수 있을 줄만 알았다.

또 그런 생각과 기대감으로 목표로 정했던 드래곤 로드, 세레니아의 거처였다.

그레센을 떠나기 전 그녀에게 일리나를 부탁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드와 라미아가 세레니아의 거처라고 알고 있는 곳이 그곳뿐이었고, 또 그녀에게서 직접 그 통나무집을 좋아한다는 마을 들었기에 당연히 일리나와 함께 거기서 자신을 기다릴 것이라 생각했던 것.

하지만 세레니아의 거처에 도착해서 본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속절없이 썩어 무너져 내린 통나무집의 잔해 뿐이었다. 이드는 기대했던 만큼 고스란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낙담해 있는 이드를 끌고서 라미아가 한 호흡 만에 이동한 라일로시드가의 레어 역시 비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이상한 점은 처음 일리나와 함께 찾았을 때 레어 곳곳에서 느꼈던 가공된 마나, 즉 마법의 흔적이 눈에 띄었는데,

지금은 그런 흔적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레어를 옮긴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눈에 보리는 모든 곳에 인간들이 예술품이라고 말하는 물건들이 널려 있었으며, 라미아가 마법으로 탐지해낸 보물의 산이 손댄 흔적도 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보물 좋아하기로는 유명한 드래곤이 이런 보석들을 그대로 버려두고 갔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건 정말 스크루지가 돈을 싫어한다는 말만큼이나 말이 되지 않는 말이지. 그럼그럼.”

스스로의 표형이 맘에 들었는지 과장되게 고개를 끄적이는 이드였다.

그렇게 장담하고 난 다음이었다. 순간 이드의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 한 가지가 스치듯 떠올랐다. 바로 이 레어의 상태와 로드의 통나무집의 흔적으로 연결 지어 결론 내릴 수 있는 단 한 가지 상황!

승부의 세계에서 둘일 수밖에 없는 결론 중 한 가지.

바로 전투의 패배에 따른 죽음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이드가 지구에 있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걱정거리로 간직하고 있었던 최악의 상황이며, 일부러라도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일이기도 했다.

이드는 머릿속을 채우는 불길한 상상에 그만 전신에 힘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때만큼은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도 없는 경지의 무공이라는 것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드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 빠진다면 똑같이 절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드에겐 그런 사람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라는 것이다. 더구나 그 누군가는 매우 똑똑했다!

“정말…. 바보 아냐?”

라미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레어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뭐가 답답했는지 생각으로 말을 전하지 않고, 저번처럼 마법을 이용해 직접 음성을 만들어낸 그녀였다.

“이래서 절망도 똑똑한 사람들이나 한다는 말이 있는 거야. 이봐요. 이드씨. 정말 홀리벤호에서 뭘 들은 거야? 진짜 혼돈의 파편이 이겼다면 그들이 속한 하루카라는 나라가 멀쩡할 리가 없잖아. 전부 카논이 정복했을 텐데….. 생각 좀 하면서 행동하라구요.”

정말이지 가차없이 쏟아져 나온 말이었다.

그 덕분에 이드는 힘이 빠져 막 쓰러질 것만 같던 몸을 간신히 바로 세울 수 있었다. 대신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쪽팔림에 동굴 벽에 머리를 박아야 했지만 말이다.

‘아, 옛날의 라미아가 그리워라. 거기다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떻게 그런 걸 하나하나 따지냐. 그런 사람 있음 나와 보아 그래, 이씨!’

그 뒤에 이드는 더욱 깐깐하게 들려오는 라미아의 목소리를 따라 레어 안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혹시라도 라일로시드가의 행방이나, 혼돈의 파편과의 전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별수 없이 그날 밤을 레어에서 보낸 이드와 라미아가 다음날 일찍 정보수집과 식사를 위해 찾은 곳이 바로 이곳 안티로스였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앞에 둔 상황에서 식욕이라고 있을까. 자연히 맛좋은 요리를 앞에 두었지만 한숨만 내쉬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하아…..”

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한숨소리를 들으며 맛도 보지 않은 요리들을 이리저리 뒤적여댔다.

[왜요. 별로 입맛이 없어요? 그래도 아침은 잘 먹어야 하는데…… 다른 걸 시켜드려요?]

“쳇, 지금 밥이 문제냐? 일리나의 일이 문제지. 거기다 지금의 난 상당 기간 아무것도 안 먹어도 아무 이상이 없다구. 그나저나….. 나는 그렇다 치고…… 넌 의외로 기분이 좋아 보인다?”

이드의 말 그대로였다. 전날만 해도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한다고 구박해대던 깐깐한 라미아의 목소리가 지금은 봄날 뛰노는 강아지마냥 통통 튀는 느낌으로 바뀌어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이건 따로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그녀가 라일로시드가의 레어를 나서면서 주인 없는 물건을 맡아둔다는 의미로 레어의 보물을 깡그리 챙겨놓은 것을 알고 있는 이드였다.

말이 좋아 맡아둔다는 것이지 거의 강탈이며, 도둑질에 다름 아니었다.

좌우간 갑자기 그러나 은근 슬쩍 늘어난 재산 때문에 라미아의 기분은 지금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작태를 바라보는 이드로서는 뾰로통한 심술이 일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누군 걱정이 되어 심각하다 못해 절절한 심정으로 고민에 빠져 있는데, 구구는 순식간에 쌓아올린 재산에 콧노래를 부르다니….

그래서 괜히 심술을 담아 ‘너 그런 식으로 나올래?’ 하는 투로 건넨 말이었다. 그러나 과연 라미아는 라미아였다.

[에이, 그럴 리가요. 저도 나름대로 일리나를 찾을 방법을 모색 중이라구요. 이드가 너무 기분이 처져 있어서 내 목소리가 그렇게 들린 것뿐이에요.]

이드의 말이 무엇을 겨냥해서 하는 말인지 다 알면서도 유유히 받아 넘겨버리는 것이다.

“흠…… 그럴까나.”

가증스럽게 들리는 라미아의 능청에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맘 같아서는 한마디 쏘아 붙여주고 싶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정말 그 뒤에 있을 후환이 여간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아, 힘없는 자의 슬픔이여….. 아니, 공처가의 슬픔이라고 해야 하나?

결국 이드는 아침식사를 말 그대로 손만 대고 말았다.

일리나의 문제도 문제지만, 라미아와의 말싸움에서 스스로 물러났다는 좌절감 덕분에 도저히 입맛이 나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음료와 함께 이후의 일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손에 들어온 보물 때문에 지금 당장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라미아를 제쳐두고 본격적으로 혼자서 궁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여러 가지 방안을 웅얼거리기를 반시간…..

타악

마지막 한 모금과 함께 비어버린 유리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이드는 고민 끝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차례대로 가자고.”

자신 있는 목소리와 비장한 표을 보이자 자작대로 이번에 건진 보물을 정리하고 있던 라미아가 슬쩍 관심을 보였다.

[헤에….. 뭐, 좋은 생각이라도 났어요?]

“아니. 별로…..”

조금 전 마치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한 복안이라도 찾아낸 것 같았던 자신만만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대답에 라미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에? 그럼 아까 말했던 그 차례대로라는 말은 뭐에요?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거 아니었어요?]

이드는 고민거리를 날려버려 시원하단 표정으로 빙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좋은 아이디어라기보다는….. 생각을 정리한 거야. 그렇게 하고 나니까 별달리 고민할 일이 아니더라. 이미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고…. 아마 당연하게 그렇게 될 줄 알았던 일이 이상하게 꼬인 적분에 생각도 잠깐 꼬였던 모양이야. 하지만 이제 정리됐어.”

라미아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말 이드나 자신이나 세레니아와 일리나가 당연히 통나무집에서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 조금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좋아요. 그럼 어떻게 생각을 정리했는지 한번 들어볼까요?]

숙제검사를 하겠다는 선생님의 말투를 흉내 내는 라미아였다.

이드는 어울리지 않게 팔짱을 낀 라미아의 근엄한 태에 킥킥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창 밖으로 던졌다.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의 여유를 찾자 그제야 뜨거운 햇살 아래 번쩍이는 안티로스의 화려한 광경이 이드의 눈에 들어왔다.

“듣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우리는 그레센에 도착해서 일리나를 찾았어. 하지만 그녀가 있을 만한 곳 영순위인 곳에 그녀가 없었어. 그러니 당연히 그녀가 있을 만한 다른 곳을 찾아봐야지. 그것뿐이야. 그게 일을 풀어가는 순서지. 안 그래?”

[….. 안 그래는 뭐가 안 그래예요! 정말 고작 그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겠죠?]

“하하….. 응, 이라고 대답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은데?”

[같은 데가 아니에요. 정말 몸만 그대로였으면 벌써 한 대 때려줬을 거라구요. 그리고 지금 큰 걸 한 방 준비 중이에요. 대답에 신중을 기하는 게 좋다고 정중히 충고를 드리는 바입니다.]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삐질 등 뒤로 식은땀이 솟는 걸 느꼈다. 라미아의 말이 절대 농담이 아니라는 것은 은근히 격동하고 있는 주위 마나의 느낌을 통해 확실히 느낀 것이다.

‘아아….. 정말 옛날이 좋았는데….. 결혼하고 변하는 건 남자만이 아닌 거야.’

이드는 속으로 부르짖으며 얼른 입을 열었다. 조금 더 머뭇거리다가는 정말 이곳 식당이 형체로 못 알아보게 날아갈 판이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한 건 세 가지야. 그 세 가지가 모두 일리나와 연결되어 있는 연결점을 기준으로 한 거야. 우선 첫째가 우리가 두 번이나 해본 드래곤 찾기. 찾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찾기만 한다면야 저간의 사정도 듣고, 세레니아를 찾아 일리나도 만날 수 있어서 더없이 좋은 방법이지.

둘째는 일리나가 살고 있는 엘프의 마을을 찾는 것, 일리나가 현재 머물고 있을 수 있는 일 순위가 바로 일리나의 고향이거든. 뭐, 이건 첫째보다는 쉽다고 할 수 있지. 다만 그 마을의 위치를 알고 있는 엘프를 만난다 해도 그들이 그곳을 쉽게 가르쳐주느냐가 문제인데…..

쯧, 마지막으로 이곳 아나크렌의 황궁으로 찾아가 보는 거야. 우리와는 꽤나 깊은 인연이 있고, 일리나도 상당 기간 이곳에 머무른 시간이 있으니까 혹시라도 일리나의 흔적이 남았을지도 모르거든.

하지만 이 셋 중에서 내가 고른 것은 두 번째야.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인 것 같거든. 나머지 두 가지는 나름대로 좀…..문제가 있지. 아무래도…..”

[뭐, 그렇긴 하죠.]

라미아는 이드의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거의 같다고 해도 좋은 만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드가 말하지 않은 첫째와 셋째 방법이 가진 문제점도 대충 짐작이 되었다.

특히 두 번이나 직접 실행해본 첫 번째 방법에 대한 문제점은 더욱 확실히 알고 있는데, 바로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들, 드래곤의 능력에 비례해서 레어의 은밀성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더구나 레어를 찾는다 하더라도, 어제 찾은 라일로시드가의 레어처럼 비어 있지 말란 법도 엇으니 실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

사실 이건 아직 인간이란 종족에 대한 소속감을 가진 이드로서는 별로 꺼내고 싶지 않은 문제점이었는데, 바로 어떤 경우에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인간의 신뢰’에 대한 문제였다.

찾아가야 할 곳이 온갖 권모술수의 결전장인 황궁인 만큼. 이드와 라미아를 노리고서 속이고, 이용하려 들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거기다 이미 백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 직접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뜬 이후가 되고 말았으니 더 말해 뭐할까.

아니, 그 전에 그런 인간들이 생리에 대해 오랜 시간 겪어보았을 엘프인 일리나가 황궁에 무언가를 남기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두 가지를 제외하고 남은 게 자연히 두 번째 방법이었다.

[확실히 저도 일리나의 마을을 찾아볼 생각을 했으니까요. 뭐, 그럭저럭 잘 생각했네요. 칭찬해줄게요, 호, 호, 호.]

순간 이드는 라미아의 마지막 말과 딱딱 끊기는 웃음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곧 자신을 놀렸다는 것이 이해가 되자 이드의 얼굴이 붉게 물들지 않을 수 없었다.

“라미아, 너!”

이드는 라미아의 말장난에 반사적으로 소리치고 말았다.

그러나 화도 때와 장소를 가려 가며 내야 하는 법. 이드는 순간적으로 그 사실을 잊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

“이봐, 도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저런 미친 녀석이 이곳에 들어와 있는 거야?”

“….. 어서 경비를 불러”

“어머…. 아까 전부터 계속 혼잣말을 하더니….. 어머, 어떻해, 미친사람이야…..”

…… 한 순간에 미치광이가 되어버렸다.

사실 이 일은 이드가 자초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라미아와 입을 열어 대화를 했으니…. ‘내가 정령과 대화하고 있소’ 또는 ‘내가 에고를 가진 아티펙트와 대화하고 있소’라고 말이라도 하지 않은 이상, 누가 봐도 미친놈이라는 결론밖엔 나오지 않는 자업자득의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 이드로서는 어디 그렇겠는가. 어제부터 라미아에게 당하기만 했으니 이것도 라미아가 유도한 것이 아닌가 라는 다분히 미심쩍은 생각이 들 뿐이었다.

이드는 바람의 상급정령인 로이콘을 불러 사람들에게 보이며 미친 사람이라는 누명을 벗는 한편 라미아에게 이를 갈았다.

‘너….. 좀 있다 두고 보자………’

단단히 벼른 듯한 말이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순간 라미아는 위에 있을 날벼락을 피해 슬그머니 아공간 속으로 도망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식당에서는 다시 한 번 라미아를 향해 이를 가는 이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라미아는 뽀득뽀득 이 갈리는 소리가 들리는 이드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상황은 그녀로서도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었다.

라미아는 이드를 달래기보다는 슬쩍 숨는 방법을 택해서 아공간 속으로 슬그머니 도망쳐버렸다.

“캬악! 라미아!”

다시 한 번 식당 안을 떨어 울리는 이드의 목소리를 뒤로하고서 말이다.

식당에서 일어난 엉뚱한 소동도 한참이 지났지만 이드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볼썽사납도록 씩씩거이며 안티로스 중앙광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여타 다른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애꿏게 시간을 지체할 필요도 없었고 그래서 바로 일리나를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이드가 중앙광장으로 향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리나를 찾기 위해 선택한 두 번째 방법에서 중요한 핵심은 바로 엘프였고, 그 엘프를 만나기 위해 가장 사람이 많이 다니는 중앙광장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모든 길이 여기서 뚫려 나가고 또 모든 길이 여기로 모이는 중앙광장인 만큼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닐 것이고, 혹 그사이로 엘프가 지나갈지 또는 엘프에 대한 이야기도 나올지 몰랐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게 생각대로만 풀리는 건 아니다.

이드는 중앙광장에서 엘프를 찾기보다 사진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서야 다시 한 번 절실히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미남미녀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되어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구하고자 했던 엘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중앙광장에 떠도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 도움이 되는 정보를 구했던 것이다.

이드는 그것을 듣는 즉시 중앙광장을 떠났다. 그 정보를 이용하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몰려드는 부담스런 시선들을 피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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