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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54화


이드가 중앙광장에서 구한 정보는 다름 아니라 정보길드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정보길드란 게 실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가장 정보가 많이 보이는 용병길드와 도둑길드에서 정보를 구입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길드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정보의 유통에서만큼은 때에 따라 적이 될 수밖에 없는 두 길드가 합작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용병이고, 도둑이고 간에 모여드는 수많은 정보들 중 어느 것이 진짜고, 가짜인지 정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 고급정보인지, 하급정보인지 골라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어느 귀족 댁에 고급 과자가 배달되었다, 라는 정보 축에도 못 드는 내용이 며칠 수엔 귀족 댁의 자제가 과자를 먹고 독살당했다, 하는 내용과 연결되어 초특급 정보가 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이다 보니 정확한 상황판단과 전체적인 흐름을 보는 능력이 부족한 단체에서는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 분석하고, 유용하게 가공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해서 두 길드에서는 모든 정보를 종합한 다음 진짜 정보들만 골라내고, 정보를 분석하기로 한 것이다. 두 길드 모두 정보의 중요성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또 필요로 하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적 합작이었다.

헌 이렇게 두 단체의 정보력이 합치고 보니, 그 세력 정도가 가히 길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자연히 외부에서는 이 정보 단체를 정보길드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드는 이 정보길드를 중원의 개방과 하오문에 배교해서 이해했다.

처음 이드는 곧장 용병길드를 찾았고, 그곳에서 소개를 박아 아나크렌의 정보길드를 찾을 수 있었다.

델리의 주점.

그렇다. 바로 주점이었다. 주점….

이드는 왠지 평범하고, 편안해 보이는 주점을 바라보며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도대체…. 왜 이런가 몰라. 중원의 하오문도 정보를 거래하는 곳으로 주로 객점을 이용했고, 지구의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도 주로 주점에서 정보거래가 이루어졌는데…. 여기서도 그런 거야? 이거 누가 법으로 정하기라도 했대? 정보거래는 주점에서 하라고…”

누군가 듣고 있는 사람은 없지만 정말 생각만으로 끝내고 싶지 않은 말이었기에 절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이드였다.

하지만 장담하는데…. 누구든 옆에 있었다면 분명히 이드의 말에 동조하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딱히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보도 구해야 했기에 이드는 묘한 표정으로 머리를 몇 번 긁적이고는 주점의 문을 열었다.

머리 한구석에 영화에서 보았던 뿌연 담배연기 가득한 술집의 분위기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정말 그런 분위기까지 똑같다면…. 신에게 한번 물어볼 작정이다. 당신께서 정해놓은 것이냐고…..

하지만 다행히 이드가 다시 신을 찾아야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주점의 분위기는 외부와 마찬가지로 거부감 없이 편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여관에 딸린 식당과 같은 느낌이랄까.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여관에 들어서면 으레 있기 마련인 손님을 맞잏는 점원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들어서는 손님을 판정하듯이 바라보는 중년의 남성과 젊은 여성 바텐더가 자리를 하고 있었다.

이드는 그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곧장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용병길드에서 들은 정보거래를 원하는 말을 하려고 했다.

“저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절로 가봐.”

하지만 그보다 먼저 말을 꺼낸 남자의 말에 이드는 입술을 들썩이다 말아야 했다.

더구나 말하는 품이 이미 이드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처음엔 좀 웃었는데, 확실히 정보길드라고 할 만하네요. 이드가 용병길드에 들렀건 게 벌써 이들에게 알려진 것 같은 걸요.]

지금까지 가만히 조용히 있던 라미아의 말이었다.

‘라미아, 너어…..’

하지만 이드는 지금 말을 걸어오는 그녀가 얄미웠다. 그의 불같이 이글거리는 화를 피해 아공간에 숨어 있던 그녀가 지금과 같이 말싸움을 할 수 없는 순간에 나타나다니….

만일 여기서 그녀와 그 유치한 말싸움을 시작한다면 이드는 다시 소동이 일어났던 식당에서처럼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거나, 바보로 얕보이고 말 것이다. 이런 정보길드 같은 곳에서 얕보여서는 결코 좋은 게 없다는 걸 잘 아는 이드였다.

마침 그런 이드의 생각을 또 그대로 읽어낸 라미아였다.

[헤헤헷…. 아까는 미안해요. 정말 고의가 아니었다니까요. 가벼운 장난이었다구요, 응?]

기회는 이때가. 낭창낭창 고양이의 말투로 애교를 떠는 라미아였다.

이드는 왠지 옆구리가 가려워지는 라미아의 목소리에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장난인 걸 잘 안다. 지금도 진심으로 화가 난 건 아니니까 말이다.

다만….. 번번히 이렇게 당하다 보니 심술이 나는 건 도저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얄밉긴 해도 밉지는 않은걸…..

‘너, 다음에 또 그러면 정말 화낸다.’

[넵!]

이드는 라미아의 힘찬 대답을 들으며 잘짝 처진 고개를 들었다.

잠깐 라미아와 대화하는 사이 어느새 그 남자가 가리켰던 테이블 앞에 서게 된 것이다.

그 테이블엔 한 남자가 느긋한 자세로 앉아서 이드를 올려다 보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가 이드를 상대할 정보길드의 사람인 듯 했다.

“음, 왔구만. 필요한 게 있을 테니…. 앉아서 이야기하자구.”

중년의 사내는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는 듯 자세를 조금 비틀며 이드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정작 그 사람의 말에 이드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사내에게서 발견한 이드는 사내의 말을 듣기보다 그의 몸을 먼저 살핀 것이다. 그런 이드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일까. 사내의 시선이 달라지며 슬쩍 몸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정적 이드는 그런 사내의 반응에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그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아아…. 죄송해요. 생각지도 못했던 게 눈에 들어와서 말이죠. 아시겠지만 정보를 구하려는데요.”

이드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하고 빙긋이 웃었다.

“음…. 그래. 정보를 구한다고 했지. 뭐가 알고 싶은 건가?”

이드의 태도에 사내도 별것 아니라는 투로 자연스럽게 이드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이드는 그의 모습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태도나, 몸 상태가 바뀌진 않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확연히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처음 이드를 바라보던 눈길이 애송이 여행지를 보는 눈이라면, 지금은 다분히 경계해야 할 적을 보는 눈길이었다. 또 이드가 봤다는 게 무언지 궁금해하는,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길이었다.

[저도 궁금한데요.]

그리고 그런 사내의 눈길과 같은 뜻을 감은 질문을 던지는 라미아였다.

하지만 이드는 그런 라미아를 놀리듯 자신의 생각을 숨기며 웃었다.

‘크크크….. 고민해봐.’

이드의 다소 음흉해 보이는 미소는…. 아마도 식당에서 당한 일의 앙갚음인 듯했다.

“엘프에 대해서 알아볼 게 있어서요. 혹시 알티로스에 엘프가 들어와 있는지…”

“엘프란 말이지.”

사내는 엘프라는 말을 반복하며 좀 더 이상한 시선으로 이드를 바라보았다.

“비밀시장을 말하는 건가?”

그 말에 이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가 말하는 비밀시장이 뭔지 쉽게 감이 잡혔던 것이다.

“…… 노예시장을 말하는 건가요?”

이드는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보였다. 사실 비밀스런 노예시장은 중원에도 암암리에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명백한 반대 입장을 가진 이드였다.

“그게 아닌가?”

“뭐, 그런긴 하지만….. 그것도 같이 알고 싶네요.”

만약 노예시장에 엘프가 있다면 그곳을 완전히 뒤집어버리고, 그들을 구할 생각인 이드였다. 그렇게 한다면 좀 더 신뢰관계가 쉽게 형성될 것이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 개인적으로 그런 노예시장이 맘에 들지 않기도 했고.

하지만 아쉽게도 이드에게 그럴 기회는 없는 것 같았다. 사내가 고개를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노예시장에 관한 정보 같은 건 매일매일 들어오는데…. 아쉽게도 엘프에 관한 정보는 없군.”

저 말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뭐, 별수 없죠. 그럼 현재 안티로스에 들어와 있는 엘프는요?”

“흐음….. 글쎄…..”

사내는 이드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한 제스처 때문에 이드는 기억을 더듬는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곧 그게 아니란 것을 알았다. 미약한 마나의 흐름이 저 벽 너머에서부터 사내에게로 이어져 왔던 것이다.

[메시지 마법이네요.]

거의 확실하지만 메시지를 통해 이드가 문의한 물음에 대한 정보를 듣는 것 같았다. 허기사 한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정보를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겠는가. 그때그때 필요한 정보를 저런 식으로 전해 받는 것일 터이다.

확실히 물어올 때마다 서류를 뒤진 것보다는 강한 신뢰감을 심어줘 보이기도 좋고, 좀 더 보안에 철저해질 테니 더할 나위없이 좋은 마법인 것 같긴 했다.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의 실력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엿들어볼까요?]

다만 이렇게 라미아 같은 능력 좋은 마법사 앞에서는 오히려 역효과로 무용지물이 되겠지만 말이다.

‘응, 한번 해봐. 이런 곳에서는 여러모로 조심하는 게 좋을 테니까.’

그리고 다음 순간….. 라미아를 통한 메시지 마법 도청이 이루어지며 그 내용이 이드의 머릿속으로 중계되었다. 헌데 그 내용이란 게…..

‘….. 그래서 참새의 먹이는 없습니다. 다만 하늘이 바라보는 것은 땅과 그림자인데, 현재 푸와이 백작가의 집에 머무르…..’

‘….. 그만 됐어.’

이드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큰 기대를 가지고 엿듣는다고 들었지만 은어로 교환되는 정보 탓에 하나도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런 일에 대비한 암호 같죠?]

‘그렇지? 확실히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인 만큼 이런 일에도 대비를 한 모양이야. 더구나 암호도 몇 개의 단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게 아니라…. 문장과 문장을 교묘하게 이어야 하는 고급 암호 같아.’

이드는 더 이상 들어볼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에 얌전히 사내의 대답이 나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사내는 암호를 듣고 그 내용을 모두 정리했는지 드디어 이드와 시선을 맞추었다. 헌데 그의 표정이 조금은 묘했다.

“이거… 체면이 안 서는군. 미안하지만 자네가 원하는 정보는 지금 당장 없군. 원래 엘프와 관련된 사건이 거의 없어서 말이야. 우리도 엘프 쪽은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있거든.”

묘한 표정을 지을 만했다. 정보길드에서 정보가 없다니…..

“그러면….”

“글쎄, 미안하지만 오늘 저녁, 아니면 넉넉하게 잡고 내일 다시 와줄 수 있겠나? 아니면 내가 찾아가도 좋고.”

이드는 그의 말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나의 일만 아니라면 현재의 이드에게는 가장 넉넉한 게 시간이었다.

“그럼, 내일 다시 찾도록 하죠. 정보료는 그때 내면 되겠죠?”

“물론. 어차피 자네에게 건네진 정보래 봐야 노예시장에 엘프가 없다는 것 정도에 불과하니까. 대신 내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죠?”

사내의 말에 막 일어서려던 이드는 그 자세 그대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빈틈없는 자세에 그의 질문이 뭔지 알 수 있었다.

“….. 처음 자네가 날 봤을 때….. 내게서 뭘 본 거지?”

그저 궁금해서 한 번 물어본 것뿐이라는 표정이었지만, 사내의 눈에서 은은히 스며 나오는 기운은 먹이를 놓쳐 한껏 자존심을 구긴 표범의 미묘한 그것이었다. 정보 계통에서 일하고 있는 그가 오히려 정보를 구하러 온 상대에게 묻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정말 궁금했다. 자신에게서 도대체 무엇을 발견한 것인지….. 그는 누구에게도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겉모습만으로 뭔가를 알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그래서 첫 대면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그런데 지금 그런 예상을 깨버린 듯한 상대를 만났다(더구나 이 상대는 평소 낌새가 이상할 때마다 그러던 것처럼 뒤를 추적해서 감시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신에게서 뭘 본 건지 알아낼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처럼 잠시 자존심까지 굽힐 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드는 상대의 눈빛에서 대충 그의 심정을 읽었다. 그러자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흘렀다.

한동안 라미아에게 당하기만 했던 반작용 때문인지 자신이 이렇게 상대를 몰아세운 것이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이거, 이렇게 바로 물어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어때, 라미아. 넌 저 사람이 궁금해하는 게 뭔지 알겠어?’

이번엔 이드가 느긋하게 선생님의 말투를 흉내 내며 라미아에게 말을 걸었다.

[…….칫, 몰라요. 이드가 그렇게 생각을 꼭꼭 막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요?]

확실히 이드의 생각을 알기 위해 라미아가 그의 마음으로 수차례 접속을 시도했었다.

이드는 그런 라미아의 말에 쯧쯧 속으로 혀를 찼다.

‘으이고…. 왜 내 맘속만 읽으려고 해? 라미아가 네가 직접 저 사람에 대해 조사해보면 되잖아.’

순간 그 말에 아공간 속에 들어 있던 라미아의 검신이 꿈틀했다. 항상 이드와 감각을 공유하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 덕분에 그런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드의 생각을 알 수 없자 그 마음을 엿보려고 노력했던 것이고….

[에잇. 그런 건 빨리빨리 좀 말해 달라구요.]

라미아는 괜스레 민망하여 꽥 소리를 지르고는 바로 사내에 대해 그녀의 감각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이드가 처음 그 사내를 보고서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를 말이다.

[저건…..금강선도(金强禪道)?]

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듯한 라미아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라미아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저게 왜 여기 있대요.]

분명 이드가 그레센에서 친분이 있는 몇몇에게 저 금강선도의 수련을 전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단 여섯 명에게 전한 수법이었다. 또 그들 중에는 이런 계통의 일을 할 사람과 관계된 이가 없었다. 이런 정보길드에 저 금강선도를 수련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드라고 그 사연을 알겠는가.

‘단지, 네 말대로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더구나 저건…. 내가 전한 금강선도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조금 변형된 모습이거든.’

[변형이요?]

‘응, 금강선도는 가장 정순하면서도, 치우침이 없는 수련법인데…. 저 사람이 익힌 수법은 좀 특화된 모습이 있달까? 더 이상 금강선도라고 부를 수는 없게 된 상태야. 확실히 저런 걸 보니 시간이 지났다는 게 실감 나게 느껴져…..’

이드는 조금은 씁쓸한 기분으로 말을 맺었다. 보통 내공의 수련법이 변하려면 그 변화의 정도를 떠나서 많은 연구와 실험이 필요하기에 오랜 기간이 흘러야 한다.

헌데 저렇게 금강선도의 변형된 모습을 보니, 라미아가 말한 세월의 흐름이 다시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분은 이드와 라미아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렇게 웃기만 해서는 내가 알 수 없는데 말이야……”

이드와 라미아가 저들끼리 생각을 나누는 동안, 이드의 웃는 얼굴만 보며 마냥 대답을 기다려야 했던 사내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고, 자신이 놀림을 받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아, 미안해요. 잠깐, 뭐라고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해야 했거든요. 간단히 말해 드리죠. 제가 당신에게서 본 건 당신의 외형적인 것에서가 아니라, 당신의 몸 속 내면의 특수한 마나 수련법에 의해 단련된 마나의 모습을 본 거죠. 근데 좀 이상하군요.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을 텐데…..”

드르륵…….꽈당

이드의 말이 끝나는 순간 사내가 앉아 있던 의자가 주르륵 밀려나가 바닥에 뒹굴었다. 그만큼 그의 마음이 급하고 놀랐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은 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갑작스런 반응과 동시에 주점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어느새 주점의 문과 창문이 닫혀 있었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던 손님들은 이드를 중심으로 포위하듯 숙련된 동작으로 정교하게 늘어섰다.

“귀하는….. 누구요. 왜 날 찾아온 거요?”

어느새 말을 건네는 사내의 말투가 확연히 달라졌다.

“알지 않나요? 엘프에 대한 정보를 사려는 것뿐이죠. 단순한 손님.”

손님들이 아니라는 게 이젠 명확해진 주변 사람들과 정면으로 노려보는 사내의 위협적인 반응을 이드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러한 태도가 사내와 포위한 사람들의 긴장을 한층 높이고 있었다.

정보를 다루는 일에 종사한다는 건 정보라는 것에 접근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만큼 모두 눈치와 상황판단 능력이 매우 빠르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들은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로움을 유지할 수 있는 자는 위험하다는 것을 말이다.

특히 그런 긴장은 방금 전 대화를 나누던 사내가 특히 더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수련한 마나의 흔적으로 느끼려면 최소한 그와 동등한 실력을 가졌거나, 더 뛰어나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자신이 익힌 마나 수련법은 기본적인 은밀성이 있어서, 자신보다 한 단계 우위의 실력을 가진 자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눈앞의 미소년이 가진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말이 되었고, 싸우게 된다면 자신을 비롯해 이곳에 있는 길드원들까지 모두 죽을 수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상대가 자신에 대해 알고서 찾아온 것이 아니고, 그가 순수한 실력으로 자신의 마나를 느꼈다는 점과 확실히 싸우게 된다는 전제가 붙어야 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단순한 손님이 내가 사용하는 수련법을 알 수는 없을 것 같소만…. 더구나….. 흠, 미안하지만 내가 보기에 귀하가 날 파악할 정도의 실력이 되는지 알지 못하겠소.”

다시 말해서 이미 알고서 찾아온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자신보다 실력이 높으면 상대의 능력을 파악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로서는 이드의 외모 어디를 봐도 도저히 대단한 실력자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뭐, 그런 단순히 외적인 모습이 많은 악의의 피해자를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은근히 기도를 내비치고 다니는 것도 나름대로 문제가 있으니까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검지와 중지를 같이 내뻗었다.

사내가 원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실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파파앗….

내뻗은 두 손가락 주변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밀려나며 황금빛 불꽃과 같이 타오르는 마나가 일어나더니 순간 단검 정도의 검기를 형성했다.

이드가 금령참의 력을 손가락을 통해 검기로 형성해낸 것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죠.”

이드의 손끝에 걸린 황금빛을 정신없이 바라보던 사내는 긴장한 눈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저어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사람들을 물렸다. 이런 실력자를 상대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공격적인 기세를 거두어들이는 걸 보고는 내력을 거두며 손을 내렸다.

“미안하오. 이쪽 계통의 일은 항상 사람을 조심해야 하거든. 귀찮게 했소. 대신 귀하가 원한 정보는 최대한 빨리 구해보리다. 물론, 돈은 받지 않도록 하겠소. 실례에 대한 보상이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대신 당신이 그 수련법을 어디서 배웠는지 궁금하군요.”

“음? 그건 어째서….”

사내는 곤란한 표정으로 이드에게 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 수련법은 아주 오래전에 단 여섯에게만 전해진 방법이에요. 그런데 지금 여기서 그걸 알고 잇는 상대를 만났으니 궁금할 수밖에…. 어때요?”

“뭐, 비밀이긴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으니…. 난 이 일을 하기 전에 황실 황금의 기사단에 있었소. 당신이 말한 수련법은 황금기사단의 비밀 수련법이오. 그런데 이렇게 묻는 걸 보면 당신도 이 수련법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의자를 끌어와 앉더니 좀 능청스런 표정으로 이드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묘하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이드는 빙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고는 뒤돌아섰다.

“뭐, 일단은 관계자라고 해두죠. 의뢰한 정보는 내일 찾으러 올게요. 그럼….”

“끄응, 이렇게 되면 하루 쉴 만한 여관을 찾아야겠지?”

주점을 나온 이드는 찌뿌드드했던 몸을 기지개로 풀며 이쪽저쪽 사방을 돌아보았다.

[아까 식당이 있던 곳에 좋은 여관이 보였던 것 같아요. 거기로 가요. 그런데 아마도….. 그 공주님인가 봐요?]

“응? 뭐가?”

라미아의 말을 듣고 발길을 옮기던 이드는 뒤이어진 말에 입을 열었다. 그러다 곧 식당에서의 일을 떠올리고는 라미아에게 생각을 전했다.

‘공주가 뭐?’

[저 사람이 말했던 황금의 기사단에 금강선도를 전한 사람 말이에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머리 뒤로 손을 돌려 깍지를 꼈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야. 나머지 다섯의 성격으로 봐서는 이곳 황궁에 남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시르피가 생각 외로 상당한 경지에 들어간 모양이야.’

[하긴…. 이드가 구결을 전하지 않고, 내력을 직접 운용하는 방법으로 알려줬으니까요.]

확실히 이드는 그레센에 무송에 대한 구결을 남기지는 않았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기사단이 익힐 정도로 전해졌다는 것은 시르피가 금강선도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그것을 다시 구결로 만들어낼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드가 어릴 때 잠깐 가르쳤을 뿐인데, 그 정도라면 상당히 재능이 있었나 봐요.]

‘그렇기도 해. 거기다 주변에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으니까.’

이드는 그레센에서의 마지막 날 혼돈의 파편과 마주섰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이라면 능력도 능력이지만, 국경에 신경 쓰지 않을 사람들이 확실했으니 아마 시르피에게 알게 모르게 가르침을 주었을 것이다.

[그럼, 금강선도가 그레센에 모두 알려졌을까요?]

이미 하나의 기사단 단원 모두가 익히고 있는 만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고개를 흔들고는 머리를 정리했다.

‘아니, 그건 아닐 거야. 그레센에 금강선도 말고 다른 수련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는 힘이 곧 권력이기도 한 곳이다. 만약 알려졌다면 그때 주점에 있던 그 남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익혔을 거야. 거기다 지금 이 거리에는 금강선도의 수련자들로 넘쳐 났겠지.’

정말 그럴 것 같다. 중원과는 달리 그레센에 심법이 널리 알려진다면, 정말 익힐 수 없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심법을 수련할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정말 볼 만한 구경거리가 될 것이 틀림없다.

라미아는 그런 생각에 킥하고 웃어버렸다.

[정말 그렇겠네요.]

‘그렇지?’

금강선도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지자 자연스레 주점에서 이야기했던 남자가 다시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도 상당히 수련한 것 같은데….. 참, 그 사람! 이름을 물어보지 못했잖아. 한참 동안 이야기를 했으면서.’

정말 그 정도의 이야기를,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잘도 주고받았다.

[에이, 모르면 어때서요. 서로 정보만 주고받으면 되는데. 무엇보다…. 그런 사람이 가르쳐 주는 이름이 진짜겠어요?]

그것도 그랬다.

모르긴 몰라도 만나는 사람마다 이름을 바꿔가며 상대하지 않을까?

[좌우간 지금은 그 사람 이름보다 여관이 먼저라구요. 자…. 좋은 여관을 골라 보자구요.]

아직 인간의 모습을 취하지 못하는 라미아였지만 이드를 좋은 곳에 재우고 싶은 마음에선지 이드를 끌고 꽤나 많은 여관을 돌아다녀 결국 그녀의 마음에 드는 여관을 잡을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이야! 내가 낮에 내 소개를 하지 않았었지? 지금이라도 다시 소개하지. 비쇼라고 한다.”

라미아의 말에 따르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사내의 이름을, 그것도 느닷없이 나타난 사내, 비쇼와 마주 대하고는 입에 우물거리던 고기를 얼른 씹어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음…. 음….. 꿀꺽…. 설마 이름을 알려주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니겠죠? 난 내일 직접 찾아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 나도 알지. 그런데 의외로 의뢰했던 정보가 빨리 나와서 말이다. 거기다 다른 일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나왔지. 그런데…. 확실히 시간을 잘못 택했던 모양이야. 식사 중인지는 몰랐군.”

정말이지 그의 말대로 꽤나 늦은 저녁이지만, 아직 식사시간이라 여관의 식당에는 많은 사람들로 들어차 북적이고 있었다.

이드도 그 중 하나의 식탁을 어렵게 차지하고 앉아 제대로 먹지 못한 아침과 점심을 겸한 저녁을 먹는 중이었는데, 때마침 비쇼가 찾은 것이다.

거기다 어느새 친근한 척 편하게 말을 놓고 있는 비쇼였다. 어떤 면에선 이드가 적이 아니란 것을 확실하게 인식한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드는 그의 말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비쇼의 곁에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사람,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의 사내가 더욱 신경이 쓰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사람도 금강선도를 익혔네요.]

라미아의 말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비쇼와 함께 온 사람은 비쇼보다 두 배 이상 강했으며, 비교와는 달리 이드가 처음 전한 그대로의 금강선도를 익히고 있었다.

이드는 이 새로운 인물에게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다. 괜히 복잡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비쇼에게 들었던 대로라면, 상대는 금강선도를 익히고 있는 황금 기사단의 인물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정도(正道)의 금강선도를 익혀 이 정도의 내력을 쌓았다면, 보나마나 기사단의 단장급 내지는 대장급 인물일 것이고, 작위를 가진 귀족임이 분명했다.

[그런 인물을 빤히 바라본다는 건 시비를 건다는 말과 같죠.]

뭐, 꼭 그게 아니더라도 기분 나쁠 일이다. 이드는 비쇼에게 한번 웃어주고는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괜찮아요. 저도 제가 부탁한 걸 빨리 알게 되면 좋고요. 그러지 말고 앉으시죠.”

“고맙군. 앉으시죠.”

이드의 말에 비쇼는 옆에 선 사내에게 자리를 빼주며 먼저 앉기를 권하고는 그가 앉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면 그의 신분이 어떻든 그 사람이 비쇼의 상급자인 건 확실한 모양이었다.

“뭘 좀 드시겠어요? 제가 사죠.”

“그럼 가볍게 와인을 좀 마셔볼까. 어떠십니까?”

비쇼는 이번에도 사내의 의견을 묻고 가벼운 와인을 주문했다.

“아, 참. 여기 자네가 원한 정보야. 자네에게 실수한 것도 있고 해서 안티로스만이 아니라 이 주변 영지에 대한 내용도 함께 첨부했다네. 그런데 자네한테는 아쉬운 일이지만 여기 안티로스에는 엘프가 들어와 있지 않더군.”

이드는 비쇼가 건네주는 종이봉투를 건네받았다. 슬쩍 열어보니 안에 다섯 장 정도의 서류가 들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리고 고맙습니다. 부탁하지도 않은 정보까지….. 그럼, 여기서 계산을…..”

이드는 당연한 수순을 밟는 동작으로 주머니에 항상 가지고 다니는 일 골덴까지 금화 두 개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비쇼가 먼저 나서서 계산을 하려는 이드의 행동을 말렸다.

“아, 아까 주점에서 말한 대로 돈은 됐네. 거기다… 자네에겐 미안하게도 자네에 대한 정보를 다른 곳에 알려버렸거든.”

이드는 비쇼의 말에 피식 웃으며 슬쩍 새롭게 등장한 사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건 이 사람이 금강선도를 익혔다는 것을 느낀 순간, 그가 비쇼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서 이곳에 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이드는 손에 꺼내 든 골덴을 다시 집어넣었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떠들어댔다면 정보의 교환 차원에서 다시 정보료를 낼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결국 자신에 대한 정보를 주고서 정보를 구한, 일종의 물물교환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물론 어느 쪽 정보가 더 가치 있을지는 두고 볼 문제지만 말이다.

“다른 볼일이란 건 제게 이분을 소개시켜주시는 건가 보군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하는 이드의 태도에 비쇼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 자신에 대한 정보를 함부로 흘려 화를 내지나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만약 공격이라도 한다면, 막아낼 자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도망은 그 뒤의 문제다.

“아, 소개하지. 이분은 현재 황금의 기사단 세 명의 부단장 중 한 분이신 라오 델칸 자작님이시지. 자네도 성함은 아니라도 질풍의 검이라는 칭호는 들어왔을 거야.”

이 순간만큼은 정보 길드의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풀어져 자랑스럽게 소개를 하고 있는 비쇼였다. 전에 황금의 기사단에 몸담았던 만큼 아직 기사단에 대한 자부심과 소속감이 고스란히 남은 듯했다. 기사단 부단장의 명성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다니….

그러나 아쉽게도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이드였다. 93년간의 소식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며, 질풍의 검이라는 라오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레센을 떠난 사람. 당연히 그런 칭호는 들어본 적도 없다.

“아니요.”

자연히 이런 덤덤한 대답이 나올 뿐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열을 올리던 비쇼의 얼굴에 부끄러움과 함께 무안함이 떠올랐다.

“험…. 그, 그렇다면 뭐…. 그럼 라오님의 소개를 이 정도로 하고…. 어떤가, 대충 내가 이분을 소개하는 이유를 알겠나?”

“뭐, 대충 짐작이 가는군요. 비쇼 씨가 낮에 기사단에 대해서 한 이야기도 있고요.”

“그렇다면 편하겠군. 라오님, 이쪽이…..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아직 못 들었군.”

비쇼는 이름을 말해보라는 듯 턱을 살짝 들며 이드 쪽을 바라보았다. 낮에 보았던 신중하고 묘한 거리감을 두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이드는 그걸 비쇼의 옆에 앉아 있는 라오라는 사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비쇼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정도라면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뜻이었고, 그만큼 실력도 좋다는 말이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있다 보니, 조심 대범함과 자신만만함이 드러난 것이다. 대개 든든한 배경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그렇듯 말이다. 아마 좋아하는 스타의 일에 열성적으로 나서는 소녀 팬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까?

“이드 휴리나. 이드라고 편하게 부르세요.”

비쇼는 이드의 이름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라오를 돌아보고서 조금 테이블에서 떨어지는 느낌으로 자리에 기대 앉았다. 이드와의 대화를 완전히 라오에게 넘긴다고 말하는 모습이었다.

이드는 그런 의식적인 비쇼의 행동에 맞추어 라오를 돌아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우선 조금 이상한 상황에서 만났지만 반갑습니다. 나도 라오라고 편하게 불러줬으면 좋겠군. 작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좋네.”

“그러죠, 라오 씨.”

라오의 말에 님도 아니고, 바로 ‘씨’자를 붙이는 이드였다.

라오는 그 모습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비쇼의 말대로 내가 자네를 찾은 이유는 ‘그것’ 때문일세. 자네 말대로 그것을 익힌 사람은 우리 기사단을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극소수만이 익히고 있지.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 극소수만이 익히고 있지.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 극소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활하는 곳 밖으로는 잘 나서지 않는 걸로 알고 있네.”

이드는 라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오가 말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레센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 중 유난히 사이가 좋아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던 한 커플. 바로 그레이와 하엘의 후손들을 말하는 것일 게다.

‘뭐, 어쩌면….. 운 좋게 늦장가를 든 일란의 후손도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야, 하하하…..’

이드는 스스로의 생각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라오는 그 미소를 조금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자네도 알고 있는 것 같군. 헌데 자네가 이렇게 갑자기 등장하다니… 우리로서는 꽤나 신경 쓰이는 일이었네.”

신경이 쓰인다고 하지만 왠지 듣는 상대방도 신경에 거슬리는 말에 이드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라오 씨가 말하는 그것 때문일까요?”

“그렇네. 자네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꽤나 많지. 덕분에 우리 기사단의 기사들은 항상 주변의 주목을 받고 있고…..”

이드는 그의 말에 요리를 반이나 남겨 두고서 포크와 나이프를 놓았다. 왠지 복잡한 심사가 느껴지는 그의 말을 듣다가는 체할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하아…. 입맛만 버렸구나…. 그런데…’

대략 그가 하는 말이 뭔지 알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 강호에 신공의 비급이 출연하고, 그것을 향해 몰려드는 온갖 인간 군상들의 저속한 자화상…… 라오의 말은 현 상황이 그렇다는 말이다.

“쯧, 설마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전한 금강선도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이드로서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또한 적잖이 신경 쓰이는 일이기도 했다. 바로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대충….. 상황은 이해했습니다. 그래서요?”

“자네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이네. 자네가 말하지 않아도, 실력을 보이게 된다면 자네보다 실력이 뛰어난 자들은 알아볼 것이라는 말이지.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알기 위해서 자네를 찾을 테지. 우리들과는 달리 딱히 속한 곳도 없으니, 상당히 거칠게 나오지 않을까 싶네.”

한마디로 너 죽을지도 몰라. 엄청 위험해, 라는 말이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라오의 생각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 거죠?”

이드는 라오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괜히 그가 그 말을 전하기 위해 찾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아마도 기사단 측에서도 역시 뭔가 원하는 것이 있기에 자신을 찾았을 것이다.

“황금 기사단에 입단하는 게 어떻겠나? 기사단의 이름이 자네의 보호막이 될 텐데.”

“싫습니다.”

바로 대답이 튀어 나왔다. 그와 더불어 금강선도로 인해 벌어진 문제에 제3자의 입장이 되지 못해 불편한 심정이던 문제도 치고 박고 싸우든 말든 저희들끼리 알아서 하라는 심정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바로 라오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이건 어떤 식으로 듣는다고 해도 한 가지 뜻이다. 바로 금강선도와 그로 인해 나오는 힘을 자신들이 독차지하겠다는 것과 똑같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게 쉽게 단정하고 대답할 문제가 아니야. 자네나 다른 수련자들이 기사단에 관심이 없다는 건 알아. 그러니 나서지 않는 거겠지. 하지만 자네는 달라. 이미 고향을 떠나 이곳 수도에 들어와 있어. 그들과 상황이 다르다는 거지.”

더구나 말하는 내용과 설득하는 골자가 마치 이드를 밖에 처음 나온 어설픈 애송이로 보는 것 같았다.

“신경 써주시는 건 고맙지만, 전 곧 이곳을 떠날 예정이라서요.”

“하지만 이미 나와 만난 게 그들의 귀에 들어가 귀찮아질 수도 있네. 수도 밖으로 나가면 더 쉽게 우려되는 사간이 벌어질 수도 있지. 그러지 말고 기사단에 한번 들러보는 건 어떻겠나. 내가 아니라 직접 단장님을 만나보고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이드는 라오의 말에 기가 막혔다. 도대체 자신을 어떻게 봤길래…..

저 꼬마 아이를 사탕으로 구슬리는 납치범과 같은 말투는 뭐냔 말이다.

순간 이드는 지금의 상황을 엎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이어지는 라미아의 말에 조용히 사그러들었다.

[그건 참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도 상대는 기사단 부단장에 자작이라구요. 잘못하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

‘아?’

이드는 라미아의 말을 금방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이드와 이들 사이에 생각할 수 있는 좋지 않은 일이라 해 봤자 서로 간의 칼부림이고…. 거기에서 이드에게 피해가 돌아올 게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어지는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곧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드 말고요. 방금 전 저 라오라는 사람이 말했던 그레이와 하엘의 후손들 말이에요. 저자는 이드가 그들과 가족이라고 생각한다구요. 또 이드도 부정하지 않았고….]

그 이유는 대충 이해가 갔다. 혹시 자신과의 다툼에 대한 화풀이를 엉뚱한 곳에 퍼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런 일은 충분히 도모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례란 얼마나 부지기수로 넘쳐나는가.

‘쯧…. 이거 대충 하고 빨리 갈라지는 게 최고겠군.’

이드는 생각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내일 들르도록 하죠.”

이제 할 말 다 했다는 듯한 태도로 대답하는 이드였다. 다시 말해 더 이상 볼일이 없으니 이만 자리를 피해 달라는 뜻이었다.

비쇼와 라오 역시 용건을 다 끝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드의 뜻을 알고 잘 받아들인 건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기사단에서 보도록 하지. 기다리겠네.”

“술 잘 마시고 가네.”

이드는 어쩐지 무덤덤하게 일어서는 두 사람을 배웅하듯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막 돌아서는 라오를 불러 세웠다.

“참, 궁금한 게 두 가지 있는데 대답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 내가 아는 대로 말해주지.”

지금까지 그저 무심하게 건성으로만 듣고 있던 이드가 자발적으로 물어왔기 때문인지 라오는 오히려 반갑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이라고 말하는 게 이상해서 말이죠. 저희는 그냥 마나 수련법이라고 칭하는데… 따로 이름이 있나요? 그리고 라오 씨가 말한 수련법을 익힌 그 사람들은 어디서 살고 있습니까?”

이드의 질문에 라오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슬쩍 비쇼를 한번 돌아보고는 주변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해주었다.

“우리도 가끔 그렇게 부르기는 하지. 하지만 정식 이름은 마인드 로드라고 하네. 태(太) 대공녀님께서 이것을 전하실 때 마나의 흐름과 마음의 흐름이 항상 같아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며 이런 수련법을 칭하는 명칭으로 정하셨지. 그리고 나와 자네가 익히고 있을 마인드 로드의 정식 이름은 이드 마인드 로드라고 하네.”

순간 이드는 생각도 못한 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것에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드….. 라구요?”

“후후…. 그래, 처음 태대공녀님께 마인드 로드의 수련법을 전하신 분의 이름을 따서 지으셨지. 덕분에 기사단의 기사들 중에는 이드라는 이름을 가진 기사들이 꽤나 많아. 자네처럼 마인드 로드를 전하신 분의 이름을 따라 지었거든. 기사들 대부분이 그 아버지가 황금 기사단의 기사이셨던 덕분이랄까.”

라오는 그렇게 말하며 별달리 변화가 없던 얼굴에 느긋한 미소를 띠었다.

하나의 기사단에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면 재밌는 일도 그만큼 많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라오는 그런 해프닝이 머릿속에 떠올랐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드에게는 그런 걸 들어줄 틈이 없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심법(心法)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다니…..

“이드 마인드 로드…”

“좋은 이름이지 않은가? 기사들에게 검과 기사도와 함께 가장 중요시 해야 할 수련법의 이름으로 말이야.”

좋기는 개뿔이…. 들을 때마다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리는구만…. 그러나 그런 이드의 생각과는 별도로 마음속에 울리는 라미아의 목소리는 그 이름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웃으며 그 이름을 되뇌고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은 조금 그렇군. 이건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고 있는 일이 아닌가? 왜 내게…..”

왜 묻기는…..

“아무래도 저는 라오 씨가 말한 그 소수의 수련자들에 속한 게 아닌 것 같아서요.”

이 말을 하려고 물었지.

“라오 씨의 말대로 저희 집안도 수련법을 전해 받고 밖으로 나서서 실력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저희 쪽은 제가 할아버지께 수련법을 전수받고는 더 이상의 수련자가 없지요. 지금은 저뿐이죠. 그런데 라오 씨의 말을 들어보니, 기사단 말고 수련자들이 따로 모여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라는 말과 같은 뜻이었다.

좀 전에 라미아가 했던 말에 신경이 쓰였던 이드는 이렇게라도 시선 돌리기를 유도하고 있었다. 만약 혹시라도 그들에게 애꿎은 해가 가지 않도록 말이다.

“흐음…… 이건 생각 외로군. 기사단과 그들 외에 다른 수련자가 있을 거라고는…. 그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련자들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인데… 아, 내가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군. 내가 말한 그들은 일리나스에 살고 있네. 스완 남작령에 가장 외곽 지역에 속한 곳이지.”

이드는 라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일란에게 듣기로는 그들의 마을은 일리나스의 국경 부근의 산맥이라서 어느 영지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도 별수 없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확실히 저희 쪽과는 다르군요.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자네가 만족했다면 좋겠군. 그럼 내일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라오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정보를 나누자는 말을 하고는 그제야 뒤돌아 여관을 나섰다.

이드는 두 사람의 모습이 문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음료수를 한 잔 부탁해 마시고는 방으로 올라갔다.

여관의 방은 과연 라미아가 고르고 고른 방답게 넓고 깨끗했다.

“어쩔 거예요? 내일 가보실 생각이세요?”

여관의 객실 문이 닫히자 곧바로 아공간에서 라미아의 붉은 검식이 뛰쳐나왔다.

이드의 눈앞에서 둥실 떠오른 라미아는 전처럼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항상 둘일 때만 목소리를 만드는 그녀였다.

“어디? 기사단?”

“아니면 어디 다른 곳에 가기로 했어요?”

“당연히 안 가지. 가서 무슨 골치 아픈 일을 당하라고! 더구나 이드가 바글바글 댄다잖아. 으으…..”

이드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가지고 올라온 음료수를 쭉 들이켰다. 하지만 라미아는 수많은 이드와 그들 앞에서 이드입니다, 하고 자신을 소개하는 진짜 이드를 상상하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후후훗…. 왜요, 무지 재밌겠는데….. 이드라고 부르면 여러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 텐데….”

정말 당하는 입장만 아니라면, 그런 해프닝들은 누가 봐도 재밌을 만한 일이었다. 다만 자신이 그 당하는 장본인이다 보니 생각도 하기 싫은 이드였다.

더구나 자신이 바로 이드라는 이름의 원조이고, 자신으로 인해 지어진 이름들이 아닌가 말이다.

“절대로 그 기사단에는 근처도 안 갈 거야. 오늘은 그냥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 바로 떠나자.”

라미아는 진절머리를 치는 이드를 보며 정말 싫긴 싫은가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드라고 부르는 소리에 십여 명이 동시에 돌아보면 자신도 좋은 기분은 아닐 것 같았다.

더구나 이드처럼 아름다운 얼굴도 아닌, 자기들 마음대로 생긴 얼굴들이 돌아본다면 말이다.

“뭐, 그렇게 하죠. 그런데 기사단에서 상당히 신경 쓰고 있나 봐요. 저렇게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걸 보면요.”

“그렇지? 어쩌면 자기네 것을 우리가 멋대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

이드는 무언가를 의식한 듯 또박또박 말하며 슬쩍 눈을 감았다. 그러자 머릿속에 이드를 중심으로 한 주위의 모습이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똑같이 떠올랐다.

그 넓이는 순식간에 넓혀졌고, 한순간에 반경 3백 미터가 이드의 지배하에 놓여지게 되었다.

그 넓은 공간 중에서 이드의 감각에 예민하게 잡히는 자가 다섯 명 있었다.

바로 여관의 입구와 뒷문 그리고 이드가 머무는 객실의 창문이 보이는 곳에서 당장 뛰어들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며 지키고 서 있는 다섯 명.

분명 그들은 우연히 지나가는 자도, 우연히 그곳에 서 있는 자도 아니었다.

“당연하죠. 저렇게 금강선도의 기운이 흐르는데….”

라미아의 말 그대로였다. 금강선도를 익힌 걸 보면 황금 기사단의 기사들이 당연할 것이고, 그들이 이곳에 있을 이유와 그 대상은 오직 이드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기사를 감시에 쓸 정도로 이드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드와 라미아에게 그들은 신경 밖의 존재였다.

차라리 허수아비를 세워놓는 게 낫지, 저건 말 그대로 인력 낭비였다.

저들 다섯으로는 마법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이드와 라미아가 빠져나가는 것을 알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덕분에 그들 다섯의 존재는 그대로 두 사람의 머리에서 지워져 버렸다.

대신 이드는 비쇼가 전해 준 다섯 장의 서류를 읽어 나갔다.

“뭐라고 적혔어요?”

이드가 종이를 내려놓자 라미아가 물었다.

“없대.”

이드는 대답과 함께 갑갑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소리긴. 엘프가 없다는 소리지. 안티로스는 물론이고, 그 주변 영지 어디에도 엘프가 없대.”

이드는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침대 한쪽에 다섯 장의 서류를 라미아가 보도록 주르륵 늘어놓았다.

그 서류에는 뭔가 꽤나 상세하게 써 있는 듯했지만 일단 보니 결론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거의가 없다, 모르겠다, 적다라는 소리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전에도 엘프는 몇 보질 못했어.”

그랬다. 정말 그때도 거의 항상 일리나가 곁에 있긴 했지만, 그녀를 제외하고는 다른 엘프를 만난 것은 십여 번이 채 되지 않았었다. 그렇게 여러 곳을 쏘다녔는데도 말이다.

“허긴….. 생각해보면 엘프가 뭐가 아쉬워서 인간들이 사는 시끄러운 곳으로 나오겠어?”

일리나도 부족의 중대사가 아니었다면 결코 마을을 나서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름대로 이드가 조사 결과에 고개를 끄덕일 때 라미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캬악! 정말 이걸 정보라고 가져온 거야. 이걸론 이드의 정보를 판 값은 고사하고, 술 한 잔 값도 안 나와. 타버려!”

라미아의 날 선 명령과 함께 침대에 놓였던 다섯 장의 종이가 허공에 떠올라 순식간에 재도 남기지 않고 불타 버렸다.

“자자… 일단은 진정해. 전에도 엘프를 별로 보지 못했다는 걸 생각 못한 우리 잘못도 있지 뭐. 그것보다 이젠 어쩌지? 여행 중인 엘프가 없으니…..”

이드는 라미아의 의견을 묻고는 스스로도 궁리했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비쇼가 말했던 노예시장을 털어볼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도 곧 포기했다. 비쇼가 그들에게 노예시장에는 이 종족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으음…. 그럼 다시 아나크렌 전체에 대한 조사를 부탁해야 하나? 하지만 그러면 기사단 문제가 걸리는데. 끄응……”

이드는 고민스런 머리를 부여잡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버렸다. 그때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 고민 끝. 괜찮은 방법을 찾았어요.”

“어떤?”

이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채이나 씨를 찾아가요.”

이드는 갑작스런 이름에 곰곰히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의 주인을 찾았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이름에 맞는 인물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다크 엘프 채이나 씨?”

“네, 그녀라면 이드 님을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거기다 엘프의 성격상 거주지도 바꾸지 않았을 테니 바로 찾을 수 있죠.”

“음….. 그녀가 다크 엘프지만 엘프에 대한 소식도 알고 있을 테고… 정말 좋은 생각인데?”

“그렇죠?”

이드의 칭찬에 라미아가 으쓱해진 투로 답했다.

이드는 그런 라미아가 마냥 귀여운지 빙글 웃고는 좋은 말 몇 마디 더해 준 다음 침대에 편하게 누웠다.

라미아 덕분에 고민거리가 날아간 이드는 그날 밤 편하게 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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