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60화
우우우웅
순간 라미아의 검신으로부터 맑은 하늘보다 투명한 푸른빛이 번져 나와 순식간에 채이나와 마오를 둥글게 감싸 안았다.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두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마법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투명하면서도 푸른 느낌의 하늘빛 방어벽은 척 보기에도 고위의 마법으로 보였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누가 펼친 마법인데 허술하겠는가.
하지만 덕분에 많은 시선들이 순간적으로 라미아를 향했다. 이드는 그 눈 쏠림 현상에 씨익 커다란 미소를 지으며 발을 굴렀다.
꽈앙
“어딜 보나! 너희들의 상대는 내가 아닌가”
이드의 시선 끌기용 진각에 발끝에 모인 공기와 함께 땅이 파헤쳐지며 강렬한 폭음이 일었다.
느닷없는 큰 소리에 기사들은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하며 이드를 경계했다.
라미아에게 향했던 시선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은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이드는 그렇게 바짝 긴장하는 모습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기사들이 라미아를 주목하는 것은 이드가 의도했던 바이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이 상황 그대로 자신이 준비했던 말을 꺼내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생각보다 한 발 빠르게 조용한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한심하구나. 그 잘난 기사도까지 집어던지면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라고 해서 기사가 아니라 용병이 되어 버린 것이냐. 이 이상 네놈들이 한심한 꼴을 보인다면 임무 이전에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은백의 기사단의 기사가 아니라 일개 용병으로서…….”
모두 들으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큰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저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누는 것처럼 억양의 고저도 없는 나직한 목소리였다.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멀뚱히 상황을 지켜보던 노기사가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작지만 모두의 귓가에 확실히 울리는, 그러니까 누구라도 그렇게 느낄 수 있는 호소력 강한 목소리였다.
[……내용은 섬뜩하지만 목소리는 듣기 좋네요. 짧으면서도 내용 전달이 확실한 것도 그렇고, 말도 길 못지않게 잘하는 것 같고요.]
느긋하게 이어지는 노기사의 목소리를 들은 라미아의 짧은 평이었다.
“뭐, 그렇긴 하네. 하지만 누구 귀에는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을걸?”
이드는 라미아가 빈정거리는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의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다름 아니라 노기사가 말한 상대란 길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기사들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들 모두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들을 향한 노기사의 말은 기사들을 더 이상 기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기사를 목표로 지금까지 그들이 겪고 헤쳐 왔던 모든 시련과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것은 그들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기사들을 수치스럽게 한 것은 노기사의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치스러운 임무에다 기사답지 않은 부끄러운 행동이라니…….
뭐, 사실 꼭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긴 했다. 지금은 모든 기사들의 존경의 대상이 된 마인드 마스터의 검이 그 커다란 힘을 발휘하며 눈앞에 당당히 서 있으니, 검을 수련하는 기사로서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눈부신 미모를 지닌 미녀에게 저절로 눈길이 가는 남자의 본능과 같다고나 할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이 기사로서 용서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은백의 기사단 모두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노기사 만큼이나 고지식한 몇몇 기사들의 질끈 깨문 입술에서는 피가 맺히기도 했다.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견디기 위해서 입술이라도 깨물지 않고서는 안 될 정도였다는 얘기였다. 그들에게는.
그리고 그때를 맞추어 길의 목소리가 묘한 침묵 속에서 울렸다.
“은백의 기사단! 출진!”
짧고 간단한 명령이었다. 하지만 기사들의 마음을 하나로 잡아 모으는 데는 더없이 좋은 말이었다.
“하!”
앞서 채이나의 귀를 아프게 한 목소리보다 딱 세 배 더 큰 목소리가 대기를 쩌렁하고 울렸다.
우렁차게 목소리를 높이는 기사들의 눈에서 불꽃들이 튀었다. 바로 이런 긴장된 분위기야말로 정상을 되찾은 것이라는 듯 노기사는 다시 제삼자의 자세로 돌아가 눈을 감아 버렸다.
어쩌면 그는 지금의 기세를 회복한 기사들이라면 이드를 충분히 잡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모양인지도 몰랐다.
확실히 지금처럼 등등한 기세라면 하지 못할 일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이드는 그런 기사들의 비장한 눈빛들을 보자 쯧쯧, 낮게 혀를 찼다.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강하게 손을 써야겠는걸.’
그저 뼈 한두 개만 부러뜨려서는 도저히 물러서지 않을 태세들이었다.
“뭐, 그것도 자기 복이지. 탓하려면 노기사를 탓하라구.”
이드는 나직이 뇌까리는 혼잣말과 함께 두 주먹에 철황기의 기운을 끌어 올려 칠흑의 검은 강기를 형성시켰다.
그러자 이드의 손끝에서부터 손목까지 마치 전투용 건틀릿을 낀 듯 손 전체가 검은색에 휩싸였다. 실제로 두 손에 강기를 형성한 이드로서는 손에 꼭 맞는 최고급의 가죽 장갑을 낀 느낌이기도 했다. 이드는 그렇게 강기에 싸인 두 주먹을 가볍게 부딪쳤다.
쾅 쾅 쾅
마치 모루 위에 놓인 쇳덩이를 두드리는 것만큼이나 크고 거친 소리가 두 주먹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적당히 하지 않을 테니 각오하라는 일종의 신호 같은 것일까…….
이드는 간단한 행동으로 자신의 주먹이 결코 물렁하게 사용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확인시키고는 천천히 눈앞의 기사들을 향해 걸어 나갔다.
“자, 그럼 시작해 보자고! 어느 정도 정신들은 차린 것 같지만, 어차피 기사도도 저버린 녀석들 검도 필요 없어. 간단하게 이 두 손으로 처리해 주지, 하하하…….”
이드는 이런 말을 내뱉고 나자 만족스런 웃음을 띠었다. 중간에 노기사가 끼어들어 늦기는 했지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라미아를 땅에 꽂아 놓은 것도, 이 말을 하는 것도 다 지금을 위해서였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큰 소리를 치는 것이 다 기사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확실히 인식시키기 위한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앞으로 이어질 무력 행사가 라미아의 힘이 아닌 오직 이드 혼자만의 힘이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것!
또 그런 거대한 힘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앞서 이드가 말했듯이 지금 은백의 기사단처럼 무언가를 노리고 나타난 상대에게는 분명하게 힘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가 보물을 지킬 힘이 있는 보물의 주인이라고 강하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강호의 누군가가 조소를 섞어 내뱉었던 말대로 ‘힘 있는 자가 정의!’라고나 할까?
하지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었다.
바로 라미아처럼 노리는 물건이 강력한 힘을 가진 경우 그것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라미아를 사용하거나 몸에 지니고 싸웠을 경우 이드가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내보이더라도 상대는 그것이 이드의 힘이 아니라 라미아의 힘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좋은 예로 국가 간의 전쟁을 들 수 있다. 보통 전쟁에서 승패가 갈릴 경우, 지는 쪽의 열에 아홉은 그 이유를 상대측의 최신 무기에서 찾는 것과 같은 작태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패배에 대한 변명이면서 일종의 자위행위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따져 볼 때 기사들이 패배할 경우 라미아는 더없이 좋은 패배의 변명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드 일행을 제외하고 이 자리에 모인 모두는 라미아를 평생에 보기 힘든 고위 마법검이면서 전설의 용사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은 마인드 마스터의 신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변명거리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물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될 경우 그 부작용이란…….
“하아!”
생각만 해도 한숨에 머리만 지끈거릴 뿐이다.
하지만 이미 무림에서 그런 이야기를 숱하게 접한 이드는 순식간에 그 후의 일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마…… 잠은 물론이고 제대로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달려들겠지.’
그런 생각과 동시에 새까맣게 몰려들 탐욕에 물든 인간 군상들의 그림자가 눈에 선했다.
도리도리
이드는 골치 아파질 그 상황들에 대한 결론에 진저리치듯 힘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지금의 일을 생각해 내고 일부러 연기를 해낸 것이다.
만족스럽게도 조금은 어설픈 이드의 연기에 기사들은 장단을 잘 맞춰 주었다.
이드는 그런 기사들을 향해 기쁜 마음으로 보답을 해 주었다.
“자, 철황출격이시다.”
바로 철황권이란 보답이었다.
이드는 크게 한 발을 내딛으며 마주 보고 서 있던 기사와의 거리를 한순간에 압축했다.
이드의 신형이 기사의 정면에 멈춰 선다 싶은 순간 들려온 소리가 있었다.
까드득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무릎에 힘이 빠질 정도로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다름 아니라 이드의 주먹에 기사의 턱이 조각조각 부서지며 나는 소리였다.
그와 함께 기사는 끽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핏물을 뿜으며 뒤로 날아가 버렸다.
어설퍼 보일 정도로 큰 동작에서 나온 철황권의 충격량을 생각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일 년간은 죽만 먹고 살아야 할 것이다.
“좋아, 이런 식으로 깨끗하게 마무리를 지어 주지.”
단 한 방으로 기사에게 초장기 휴가를 줘 버린 이드의 말이었다.
남의 것을 노리는 자들에겐 적당히 한다는 말이 필요 없기에 이 정도가 공격 수위로 적당하다고 나름대로 생각하는 이드였다.
소름 끼치는 소리만큼 잔인하게 들리는 엄포에 가까이 있던 몇몇 기사들은 당장이라도 뒤돌아 달아나고 싶은 표정이 되었다.
이드는 공포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는 기사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음 기사를 향해 크게 몸을 움직였다.
그 동작은 평소의 정교하면서도 화려하던 이드의 그것과는 달리 거대하고 폭발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 속에는 길과 은백의 기사단을 통해 제국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려는 이드의 의도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덕분에 이드와 마주 선 기사들은 조금 전 처참한 꼴로 저만치 날아가 버린 동료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으면 제국의 기사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검진을 형성해! 상대는 강하다. 기사로서 강자와 상대하는 것은 더 없는 영광이다. 그 영광에 힘껏 보답하는 것이 기사다.”
“하! 우리는 기사다.”
이미 한 번 노기사에게 쓴소리를 들었던 탓인지 기사들은 길의 명령이 다시금 떨어지자 통일된 대답과 동시에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일정한 방향으로 각도 있게 움직이며 이드를 중심으로 삼각형 모양의 검진을 형성했다.
특이하게 각 꼭지점에 기사가 검을 들고 있는 검진은 상대의 앞과 양옆으로만 공격이 가능한 진형이었다. 다시 말해 상대의 등 뒤를 공격하지 않는 정직함이 들어 있다고나 할까?
마치 저기 서 있는 노기사의 성격을 그대로 닮은 검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 만만히 볼 수는 없었다. 진형의 정직함 때문에 오히려 공격을 받는 쪽에서도 뾰족한 대응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오직 정직하게 실력으로서 기사들과 끝없이 부딪쳐야 하는, 소위 꼼수가 통하지 않는 검진이다.
자연히 이 속에 들어간 적은 실력이 딸려서 죽거나 체력이 다해서 죽을 뿐이다.
이드는 정밀하게 짜여진 검진의 특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러거나 말거나 이드는 주위의 기사들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
지금 이드의 생각과 너무도 잘 맞아 떨어지는 검진의 등장에 누가 일부러 준비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누가 준비했던지 간에 잘 써먹어 줄 생각이었다.
이드는 단단한 결심과 함께 바로 기사들을 향해 다시 주먹을 뻗었다.
빠르고, 강하게!
이후 이어진 이드의 행동은 딱 이 두 단어로 표현이 가능한 단순한 움직임의 연속이었다. 상대의 검이 정직한 만큼 이드의 반응도 정직했던 것이다.
티킹
찔러 오는 검을 빠르게 막아 내고,
빠가각
이어서 강하게 후려친다.
간단한 두 동작이 마무리될 때마다 꼭 한 명씩의 기사가 허공으로 나가 떨어졌다. 마치 그렇게 하기로 서로 합의라도 본 것처럼.
그렇게 몇 명의 기사가 차례차례 나가 떨어졌을 때…….
“끄아압! 죽어라!”
“이번엔 나다!”
어느 순간부터 기사들은 쓰러진 동료를 돌아보지도 않고 거칠게 검을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검진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앞으로 나서려는 기사도 있었다. 좀 전 이드의 기세에 밀렸던 자들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공격적으로 돌변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치열해지는 전투 상황이 야기하는 뜨거운 흥분과 단순하면서도 격렬한 철황권을 상대하면서 기사 이전에 검을 든 전사로서의 피와 투기가 뜨겁게 달아오른 때문이었다.
“하찻! 좋아, 그렇게 나와야 무인[武人]이라고 할 수 있지.”
제정신이 아닌 기사들의 광분에 이드는 점점 반가운 표정이 되었다. 그저 남의 것을 탐하기만 하는 저급한 강도보다는 열혈의 이런 전사다운 패기가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애초의 목적이 좋지 못했던 때문이었는지 그런 이드의 기분은 별로 오래가지 못했다. 다름 아니라 그 뜨거운 열기 사이에 섞여 이드의 등 뒤를 견제하고 있던 기사가 검을 찔러 들어온 탓이었다.
검을 휘두른 기사의 표정은 한껏 술에 취한 듯 몽롱해 보였다.
비겁한 기습이라기보다는 투기에 취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검을 휘둘렀다는 인상을 주었다.
마치 싸움판에 싸움닭처럼 요란스럽기만 한 작태였다.
“흥,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도 못할 만큼 제 투기에 미쳐 버렸군……. 그래서는 기사는 물론이고, 투사도 못 돼. 그저 싸움꾼에 불과한 거지.”
이드는 등 뒤로 느껴지는 너저분한 기세에 금세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잠시 떠오른 이드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투기에 취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면 진정한 투사요, 전사라고 할 수 없었다. 검을 수련한다기보다는 검에 휘둘린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는 순간 그자는 그저 싸우기 좋아하는 싸움꾼일 뿐이다.
이드는 그런 상대는 볼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파리를 쫓아 버리듯 짜릿한 철창권의 경력[經力]을 휘둘러 저 뒤로 날려 버렸다.
“켁!”
정신 못 차리고 나댄 만큼 허무하게 스러지는 기사였다.
하지만 허무한 최후와는 달리 그 기사의 행동은 한창 전투의 흥분에 정신없던 다른 기사들의 자제심을 무너트리는 큰일을 내버렸다.
정신없는 중에도 지킬 것은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그를 시작으로 명령 따위는 깡그리 잊은 듯이 마구잡이로 검을 찔러 넣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히 검진은 처음의 형태를 순식간에 모조리 잃고 무너졌으며, 전장은 치열한 혼전의 개판이 돼 버렸다.
뿐만 아니었다. 검진의 와해와 함께 자제심을 잃은 기사들의 검에서는 어느새 희미한 갖가지 빛깔들의 검기까지 맺히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안 돼. 검기는 절대 안 돼. 어디까지나 상대를 생포하는 게 목적이란 말이다. 모두 멈춰!”
통제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자 길은 낭패한 표정으로 악을 쓰듯이 고함을 질렀다.
아무리 상대가 강하더라도 검기는 곤란했다. 검기라는 것에 잘못 스치기만 해도 최소 불구며, 심하면 사망이다. 상부로부터 상대의 생포를 명령받은 길로서는 애가 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길의 생각이야 어떻든 간에 이미 전투에 깊이 몰입한 기사들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 명을 상대로 명령 체계마저 지켜지지 못하는 상황은 기사단으로서는 처음 해 보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럽기만 할 뿐인 기사들이었다.
무엇보다 기사들은 이드와 같은 상대가 너무 낯설었다. 기존의 전투 방식에서 벗어나자 수습이 되지 않는 것이다. 전술은 상대의 공격을 예측 가능할 때만 발휘된다. 그러므로 모든 전술은 전례를 남기는 법이었다. 지금 이들의 당혹스러움의 정체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니까 길의 명령을 듣고 주위를 살필 정신이 있었으면 애초에 검진을 무너트리거나 명령을 잊고서 검기를 사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길은 몇 번이나 쓸데없는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고서야 그러한 사실을 감지한 것인지 몇 마디 욕설을 씨근덕거리고는 다급히 은발의 노기사를 찾았다.
“단장님, 기사들을 진정시켜 주십시오. 어서요.”
하지만 길의 다급한 말이 들리지 않는지 노기사는 그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눈을 감고 있었다.
“코널 단장님!”
길이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노기사 코널은 그제야 눈을 설풋이 뜨며 무심한 눈으로 제멋대로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을 바라보더니 못마땅한 시선으로 길을 돌아보았다.
그런 코널의 시선에 길은 움찔 움츠러들었다.
이번 임무를 시작할 때부터 탐탁지 않은 태도로 무관심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완연히 불만을 내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코널의 눈치를 볼 상황이 아니었다.
다만 길은 기사들의 폭주가 어떤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모를 뿐이었다.
“단장님, 어서 기사들을……. 단장님도 아시겠지만 이번 임무는 생포입니다. 만약 저 이드가 죽거나 불구가 되면 보통 곤란한 게 아닙니다. 이번 작전의 핵심은 마인드 마스터의 검보다는 저 소년이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길은 애원조로 사정하면서도 시선만큼은 강렬하게 내비치며 코널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코널은 애가 타는 길의 말을 듣기나 한 것인지, 기사들을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 허……. 광전사가 따로 없군. 저게 어딜 봐서 임무를 수행하는 기사란 말인가. 하아, 애초에 이런 일을 수락하는 게 아니었는데……. 마인드 마스터라는 말에 혹한 내 잘못이 크다.”
코널의 음성엔 후회라는 감정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한 길로서는 쓸데없는 잡소리로 밖엔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 무슨 말도 안 되는 푸념이란 말인가.
길은 한 번 더 코널에게 행동을 취하도록 재촉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길의 생각보다 이어지는 코널의 말이 좀 더 빨랐다.
“길, 이번 일은 잘못된 거다.”
“압니다. 하지만 제국을 위한 일입니다.”
처음 임무를 받을 때 코널이 달가워하지 않았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길이었다.
“아무리 나라를 위한 일이지만 기사로서 할 짓이 아니다. 덕분에 저 녀석들이 미쳐 날뛰는 거지. 기사도를 버린 기사는 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일은 처음 계획부터 잘못 되었다. 특히 상대의 전력을 제대로 평가하고 있지 못했던 것은 치명적이다.”
“…….”
길은 이어지는 코널의 명명백백한 말에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재촉하지도 않았다. 코널이 그저 기사도에 어긋난 행동을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느낌이 맞다면 코널은 지금 이번 임무가 실패할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절대 코널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다름 아니라 이번 계획을 실행시킨 것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 이드가 혹여 다칠까 애가 타던 길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네가 그랬지. 저 소년의 실력이 소드 마스터 최고의 경지인 것 같다고…….”
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의 길에서 벌어졌던 일과 성문 앞에서의 소동을 보고받은 후 이드의 실력을 소드 마스터이거나 막 그레이트 소드에 접어든 것 같다고 보고했었다.
“네, 그렇습니다. 단장님 역시 확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끄덕
코널은 그것을 전혀 부정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길의 설명을 듣고 성을 나서기 전에 성문 앞의 흔적을 확인하고는 그의 말에 동의했었다.
“그랬지.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다. 너나, 나나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너무 쉽게 봤다. 마인드 마스터라는 이름이 단순한 것이 아닌데. 우린 너무 쉽게 생각했다. ……길, 물러날 준비를 해라.”
코널의 명령에 길은 순간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또 온몸에서 끈적하고 기분 나쁜 진땀이 배어 나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심란한 마음을 그대로 내보이는 듯 뒤틀려 나오는 길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길의 심정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덤덤한 코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조금 후면 싸움이 끝난다. 기사들은 아무도 죽지 않은 채 모두 쓰러질 것이다.”
마치 예언자처럼 싸움의 승패에 이어 기사들의 생사까지 단언하는 코널이었다.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와는 달리 이드와 기사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복잡한 감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당연했다. 상황이야 어떻든 간에 저기 맞아서 쓰러지고 있는 기사들은 그가 몸소 가르치고 정을 주며 길러낸 부하들이기 때문이었다.
부하들이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저렇게 추풍낙엽으로 쓰러지고 있으니 아무리 기사도에 충실한 그라도 더 이상 참아 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속이 복잡하기로는 길이 코널보다 더했다. 누가 뭐래도 이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는 책임자는 그였기 때문이었다.
“단장님…….”
복잡한 심정으로 뒤엉킨 길의 목소리에 코널은 단단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흔들리는 길의 마음을 붙잡는 듯한 그의 느닷없는 행동에 길은 코널의 눈을 바라보았다.
“길, 이 일은 네가 책임자다. 책임자는 언제나 냉정하고 정확하게 상황을 봐야 한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지금을 봐라. 기사들과 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의 전투를. 저걸 보고 누가 전투라고 하겠느냐. 기사들의 검이 그의 옷자락을 스치지도 못하는데…….
냉정해져라. 우리 모두 철저하게 잘못 생각했다. 상대는 거대한 강자다. 그저 그런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 최소한 그레이트 소드, 아니면…… 아니면 그랜드 소드 마스터다.”
코널이 힘주어 말한 마지막 말에 길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길은 그 단어를 자신의 입으로 되뇌자 온몸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쩌릿쩌릿 저려 오다 또 순간 맥이 쭉 빠졌다.
검을 든 기사로서 최고의 영광된 칭호를 이 자리에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구십여 년 전 있었던 초인들의 전쟁 이후 파워, 마스터, 그레이트, 그랜드로 새롭게 정리된 검의 경지 중 최고, 최상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랜드……. 그러기엔 저자는 아직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처음 마인드 마스터가 출현했을 때 그 역시 소년의 모습이었다.”
아니길 간절히 바라는 길의 말에 코널의 즉답이 이어졌다.
길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에 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길로서는 이드의 실력이 그 정도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드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건 일이 실패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번 일은 길이 중앙에 보고해서 그가 중심이 되어 벌인 첫 번째 일이었고, 동시에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위한 포석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길에겐 결코 실패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너무 강하다!
마치 이야기책 속에 나오는 시시한 악당 중 한 명이 된 느낌이 스멀스멀 드는 길이었다.
그러나 길이 인정하건 말건 간에 이드는 코널이 예견한 상황을 착실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미 이드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의 반수 이상은 끙끙대며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좋아, 그럼 이 정도에서 상황을 마무리 지어 볼까!”
이드는 안 그래도 힘겨운 기사들이 질겁할 말을 가볍게 내뱉고는 저 깊이 가라앉아 하나의 단[丹]의 형상을 하고 있는 내력의 일부를 끌어 올렸다.
지금까지 사용한 가벼운 운용과는 달리 거침없이 흐르는 대하의 물길 같은 모양의 내력이었다.
단순히 그 양만 따져 보아도 일수에 남아 있는 기사들의 반을 한꺼번에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런 강력한 힘을 뿌려 댔다면 상황은 순식간에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드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간단히 끝내기보다는 살과 살을 마주 대어 좀 더 확실하게 힘의 차이를 느끼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뼛속 깊이 새겨지는 고통과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른 채 순식간에 당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 이드가 하는 것은 상대에게 자신의 강함을 정확하게 인식시키는 일! 그 정확한 정도를 온전히 체험해 낼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확실히 할수록 좋은 일인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이제 그런 작업이 충분하다고 생각한 이드는 한 방에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으려는 것이다. 앞서 강력함을 증명했으니, 이제 그 힘의 크기를 보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