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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63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상단과 동행하는 동안 어느새 시간은 정오를 지나고 있었는데, 그때쯤 저 멀리 제국과 드레인의 국경 관문이 눈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치 감시탑과 같은 두 개의 높다란 성탑 위에는 네 명의 기사들과 사십 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엄격하게 서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으로 먼저 도착한 상인들이 증명서와 짐을 풀어 일일이 검사를 받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잠시 후 이드 일행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상인들도 그들의 틈에 끼어들었다.

근래에 이렇다 할 사건 사고가 없었던 탓인지 국경 수비대의 입출국 검사는 다분히 형식적이었다. 먼저 심사를 하는 기사들의 표정이 그리 엄해 보이지 않았고, 좀 시큰둥해 보이는 눈길은 꼼꼼하게 증명서를 대조하거나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허술해 보인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덕분에 이드 일행의 검사 차례가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그리고 과연 채이나의 말대로였다.

“이런! 푸른 숲의 수호자께서 오셨군요.”

엘프를 칭하는 말은 많다. 그 중 한 가지를 말하면서 관문을 지키던 기사가 채이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지금까지 식상한 태도로 상인들을 대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제법 환영한다는 표정을 만들기까지 했다.

“환대 감사합니다.”

호의를 가득 담은 기사의 제스처에 대외용 멘트를 간지럽게 날리는 채이나를 보자 이드는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힐끗 보이는 바로는 마오의 표정도 약간 묘했다. 모친의 능수능란한 처세가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마오는 여자를 몰라도 아직 한참은 모르는 숙맥이나 다름없었다.

“드레인으로 가십니까?”

‘그럼 어딜 가려고 여길 왔겠냐’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말이었다. 여기 오는 이유가 그것 이외에 뭐가 있겠는가 말이다.

“네.”

“그럼 뒤에 두 분도?”

“맞아요. 제 아들인 마오와 제 친구인 이드입니다.”

“아…… 네…….”

역시나 아들이라는 말에 떠오르는 묘한 표정이란.

확실히 누구라도 저 아름답고 생생한 얼굴을 보고 다 큰 애가 있는 아줌마라고 짐작하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덕분에 이드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수습한 기사는 상인들을 상대로 기록하던 책자를 펴며 입을 열었다.

“엘프님이 계시니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바로 관문을 넘으셔도 됩니다. 다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목적지만 남겨 주십시오.”

허가서는 물론 검사도 하지 않으면서 굳이 목적지는 왜 묻는 것인지……. 이드는 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이어질 채이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생각해 보면 목적지가 드레인이라는 말만 들었지 정확하게 드레인의 어디를 향해 가는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이죠. 저희들은 푸른 호수의 숲을 찾아가는 중이랍니다.”

순간 그녀의 말에 채이나와 대화를 나누던 기사는 물론 주위에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요정의 숲을 말씀하시는군요. 과연 그곳을 찾으시는 엘프님들을 몇 분 보았습니다. 됐습니다. 그럼 모쪼록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부드럽게 이어지는 기사의 인사에 채이나가 또 간지럽게 대답을 하고는 그대로 관문으로 들어섰다.

이드는 마오와 함께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생각했다.

‘많은 엘프들…….’

확실히 채이나의 말대로 엘프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모양이었다.

“자, 자. 어서들 들어오시오.”

라일론 제국의 황제 자인 세이반시드 라일론은 막 집무실의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는 사람들을 인상 좋은 얼굴로 맞이했다.

근엄하거나 고자세가 아니라 어찌 보면 친절해 보이기까지 한 자인의 태도가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인지 들어서던 사람들은 특별히 과장되지 않은 일상적인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며 한 목소리를 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자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은 모두 여섯이었다.

아마람 공작을 포함해 다섯 명의 라일론 대공작들과 모든 정보의 관리자인 파이네르 백작이었다.

다시 말해 라일론을 이끌어 나가는 중추이자 핵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러한 회동을 계획에 넣어 라일론을 혼란에 빠트리고자 한다면 아마 지금이 최고의 찬스일지도 몰랐다.

이들만 제거할 수 있다면 라일론은 비록 비상시 국가 방위 시스템이 견고하게 가동된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인 혼란에 빠트리는 데는 꽤 가능성이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회동의 장소가 제국의 황궁이 아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겹겹의 황궁 방어막을 뚫고 이들을 한꺼번에 몰살시킬 수 있을 만큼 대병력이 잠입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고, 설사 이드와 같은 실력자가 여럿 쳐들어온다 하더라도 성공 가능성은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인은 여섯 인물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집무를 보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옮기기 위해서였다. 집무실 중앙에 놓인 회의용 소파의 상석에 가 앉고는 여전히 서 있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비록 스스럼없는 태도로 맞이한다 하더라도 황제가 권하지 않는데 자리에 앉을 수 없는 건 그들이 라일론 황제를 받들고 있는 처지이며, 제국과 막대한 이해관계가 얽힌 귀족들이기 때문이었다.

“흠…….”

모두들 자리에 앉자 자인은 시선을 천장으로 향한 채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곧 고개를 천천히 내리며 다섯 공작들과 백작의 시선을 하나하나 마주했다.

“내 저번에 있었던 이야기는 아마람 공에게 자세히 전해 들었습니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 기회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위기라고 해야 할지 정확하게 사태를 예견하기 곤란한 상황이오. 그래 더 알아낸 것이 있습니까?”

이드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람이 목소리를 한껏 높였던 그다음 날 새벽같이 자인 황제에게 보고가 되었다. 그때 자인은 얼마나 어리둥절하고 놀랐었던가.

보고를 받은 자인은 곧바로 모든 공작들을 불러들여 아마람의 말을 전하고 이드를 찾게 했다.

자인은 그만큼 이드의 출현을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한 것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이드에게서 마인드 로드를 전해 받은 아나크렌이 그것을 기반으로 최강의 기사단과 많은 기사들을 얻었으니 말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풍부해진 병력은 나라의 세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꿔 말하자면 이것은 양면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기도 했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인 이드에게 또 다른 마인드 로드를 얻게 된다면 라일론의 전력은 다시 한 번 상승의 기회를 맞아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또는 그 반대로 타국의 전력이 그만큼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했다.

자인의 말처럼 하나의 사건에 제국의 기회와 위기가 똑같은 무게로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인이 이번 일을 국가 전력에 연관시켜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여섯 신하들의 얼굴은 난감한 표정으로 물들어갔다. 지금 이드에 대한 별로 좋지 못한 소식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 반갑지 않은 소식인가 보구려?”

딱 한마디에 무언가 새로운 소식의 색깔을 그대로 간파하는 자인이었다.

또 그것을 아는 순간 그의 말이 짧아졌다. 기분에 따라 길이가 변하는 그의 특유의 말투였다.

자인의 어두운 반응에 아마람이 나서서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들이 가져온 소식을 풀었다.

“저희가 그의 흔적을 찾기 시작한 그날,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마법인 거요?”

자인은 아마람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적어도 라일론의 현재 황제 자인은 이 정도의 정보 해독력 정도는 가지고 있으니 놀고먹는 제왕은 아님에 틀림없었다.

라일론이라는 나라가 내부적으로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구가하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만이 성취할 수 있는 장점이기도 했다. 후계자에 대한 교육과 선택은 철두철미하고 확실했고, 이러한 장치야말로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폭군의 출현이 그동안 얼마나 막대한 국가적 피해를 야기시켰는지 그 무수한 경험들이 녹아 있는 산물이기도 했다.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단과 전투가 벌어진 곳을 중심으로 이드의 행방을 찾기 위해 많은 병력을 동원해 사방을 뒤졌었다.

하루 밤낮을 꼬박 뒤지고 나서는 결국 수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신출귀몰하는 자라도 발자국 하나는 남기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근방에서 그야말로 발자국 하나 발견하지 못했고, 그 많은 조사 병력을 동원하고 이런 헛수고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엄청난 사건을 암시할 수 있는 자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만큼 불안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동 경로를 도저히 추적할 수 없게 되자 일단 각 영지와 국경에 이드에 대한 신상 정보를 일제히 하달했다.

영지와 영지, 국경과 국경을 잇는 라인으로 연결된 거미줄에 한 마리 나비, 그것도 막강한 강철 나비가 저절로 걸려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드에 대한 신상이 하달된 그날 당일 드레인의 국경에서 그에 대한 보고를 받게 되었다.

사실 그 보고를 받고서 아마람과 공작들은 마치 놀림을 당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이틀 동안 신경을 바짝 세우고 그물망에 걸리길 기다렸는데 정작 주인공은 비웃기라도 하듯 이미 다른 나라에 가 있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저희들 생각으로는 함께 있던 엘프와 마인드 마스터가 소유한 검으로 마법을 사용한 듯합니다.”

어디까지나 예상에 가까운 아마람의 보고에 파이네르가 말을 더했다. 하지만 얼마간의 추측을 더해도 결과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복잡하게 됐군.”

자인의 부드럽고 온화한 그 표정이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꼭 자신의 나라로 끌어들여야 할 인물이 제국 내에 있지는 못할망정 기사단과 전투를 치러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는 다른 나라로 옮겨 가 버렸으니. 언제나 인재 육성과 나라의 이익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는 황제로서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뒤에 후속 조치는 어찌했소?”

“다행히 목적지를 알고 있어 즉시 추적에 나섰습니다. 또 연락을 통해 드레인에 머물고 있는 자들을 움직였습니다.”

보고와 함께 즉시 내려진 공작들의 명령이었다.

타국으로 들어간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자인도 그걸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마람의 말 중에 신경 쓰이는 부분을 골라냈다.

“목적지를 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국경을 넘을 때 기록을 남겼습니다.”

“허, 기록을 남겼다는 말이오?”

아마람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자인의 얼굴에 색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습니다. 엘프가 한 말이니 거의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생각해 보면 그들로서는 정체를 감추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상식적으로 정체를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봐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희들의 상식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국의 범죄자도 아니고, 지금까지 저희들이 일방적으로 쫓을 뿐이지요.”

뻔한 내용을 아뢰는 아마람이나 듣는 자인이나 그 말에 묘한 표정이 되었다.

사실 처음 이 보고를 받아들고 아마람과 공작들 그리고 파이네르는 적지 않게 고민을 했었다.

비록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엘프가 적었다지만 제국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사실을 곧이곧대로 적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보니 영 엉뚱한 결과가 나왔다. 어이없게도 그 일행들이 거짓말을 하고 숨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하…… 이거, 이거. 그러니까…… 이쪽이 악당이라는 얘기군요.”

자인은 약간 허탈하지만 재미있다는 듯 익살스런 웃음을 지었다. 그랬다. 제삼자가 보면 라일론 제국이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악당인 꼴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공작들이나 백작은 그저 민망할 뿐이었다. 외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기득권을 가진 자리에 있으면서 인면수심의 계략을 꾸며 치졸한 짓이나 잔인한 명령을 내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권력의 자리는 그것을 용인하게끔 되어 있었고, 다수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합리화되는 것이 또 일반적이었다. 적대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면 공모자일 수밖에 없으니 거기에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 문제 삼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이렇게 자신들의 입장이 확실하게 나쁘다고 판명 내려지긴 처음이었다.

잠시 그렇게 웃던 자인이 가만히 있자 파이네르가 앞으로 나섰다. 이대로 더 있다가는 안 그래도 악당이라는 표현까지 나온 마당에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을 것이기에 조금이라도 환기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폐하, 저번에 말씀하셨던 임무의 책임자가 밖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끄덕.

자인이 별말 없이 고갯짓을 하자 파이네르는 문 밖으로 신호를 보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물을 불러들였다.

“라일론의 지고한 영광을 뵈옵니다, 폐하. 길 더 레크널이옵니다.”

길은 집무실에 들어서자 털썩 주저앉듯 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원래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는 것이 군신의 예이지만 길은 받았던 임무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염두에 두고 그 죄를 표하는 의미로 양쪽 무릎을 모두 꿇은 것이었다.

자인은 그런 길의 참담한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곧 파이네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레크널의 소영주로군. 코널이 오지 않은 것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이번 일의 책임자가 길 소영주이기에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코널 단장은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은 기사들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헛, 그런가. 그래, 그 성격 내 알지. 뭐, 상관없지.”

자인은 코널 단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파이네르는 그의 의중을 확인하고는 길에게 이드와의 전투를 보고하게 했다.

길은 명령대로 처음 이드가 영지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시작해서 그가 기사단을 전원 환자로 만들고 떠날 때까지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아마람의 보고 때보다 좀 더 자세하긴 했지만 내용상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말을 모두 듣고 나오는 자인의 한숨과 말은 아마람에게 보고를 받을 때와 똑같았다.

“후! 역시…… 애초부터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그런 식으로 청(請)하는 게 잘못이었어.”

“모든 것이 저의 잘못입니다. 저를 벌하소서.”

자인이 실망스러운 투로 말하자 길은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돌바닥이라면 이마가 찢어졌겠지만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집무실이라 그저 쿵 하는 소리만 나고 말았다.

하지만 길의 각오는 충분히 전해진 것인지 자인은 손짓을 해 길을 일어나게 했다.

“아니다. 꼭 너 혼자의 잘못만은 아니다. 너뿐만이 아니라 보고를 받고 작전을 허가한 모두의 잘못이다. 너무 쉽게들 판단한 거지. 그러니 그만 일어나라.”

자인의 말대로 상황의 심각성을 너무 간과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판단이 물러도 너무 물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는 데는 비슷한 인식들이 있기도 했다.

난데없이 작은 영지의 소영주가 연락을 해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나타났다고 하니, 이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로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반신반의한 태도는 제법 먼 과거의 선례를 소급해서 보아야 했다.

처음 이드가 사라졌을 때 두 제국이 이드의 행방을 찾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잘못된 신고가 들어왔었다. 그러니까 이드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여기저기 나타났으니 자신도 모르게 신출귀몰하는 존재가 된 셈이었다.

때로는 소문이 소문을 만들어 이드가 새로운 왕국을 만들기 위해 바다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는 황당한 얘기도 퍼졌었다. 상상력은 제법 근사치에 이르기도 했다. 이드가 딴 세상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바로 삼십 년 전까지 그런 신고는 때때로 접수되었는데, 당연하게도 그것들은 모두 거짓으로 판명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그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잘못된 보고일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이 지배적이었고, 결국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기사단까지 움직이게 했다는 사실이 제법 길의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는 반증이라면 그렇게도 볼 수 있었다. 비록 그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만 일어나래도. 네 말대로 너의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허나 너만 탓할 수도 없는 일. 네가 제법 똑똑하다 들었으니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백작의 밑에서 잘못을 만회해 보아라.”

자인의 뜻하지 않은 용서나 다름없는 말을 듣게 되자 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지엄한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내린 명령이 바로 길이 이번 임무를 성공하고 그 대가로 바란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작위와 중앙 정계로의 진출이었다.

비록 작위는 없지만 임무를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도 바라던 중앙 진출을, 그것도 중요한 정보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오히려 실보다 득이 많은 전화위복의 경험을 하고 있었다.

길은 곧 마음을 수습하고는 황제에게 다시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고 그의 명령에 따라 파이네르의 뒤에 섰다. 이제 그 자리가 그의 자리가 된 셈이었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와 만난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어떤 정보의 베테랑 관리보다 이 일에 있어서는 앞서 있게 된 형국이었다.

자인은 그런 길을 바라보다 곧 시선을 돌렸다.

“어떻소, 나람 공. 마스터의 후예에 대한 그대의 생각은 여전하오?”

자인의 눈과 말이 향하는 곳.

그곳에는 거대한 체구에 마치 청동 거인처럼 단단하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 무장이 앉아 있었다.

천상 군인처럼 보이는 그 인물은 은색 머리가 마치 사자 갈퀴처럼 우람한 어깨 근육을 덮고 있었고, 무엇보다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만큼 뚜렷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바로 황제의 집무실에 들면서도 허리에 검을 풀지 않을 권한을 가진 라일론 군의 총지휘관, 라일론의 검과 방패라고 불리는 나람 데이츠 코레인 공작이었다.

그는 구십여 년 전 황궁에 들었던 이드 일행의 무례를 말했던 코레인 공작의 후손으로, 현재는 아마람과 함께 제국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또 하나의 기둥이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이번 이야기에 좀 더 확신이 굳어집니다. 그는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을 그대로 이은 것처럼 마인드 마스터와 같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분명합니다.”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단정적으로 말하는 굵직한 목소리가 집무실을 우렁차게 울렸다.

‘…….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

자인은 그 단어에서 느껴지는 힘에 조용히 나람의 말을 되뇌었다.

이드가 내공심법과 몇 가지 무공을 전하면서 변한 것은 파츠 아머뿐만이 아니었다.

이드가 이 대륙에 출현하면서 생긴 변화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이 검사들의 경지에 대한 것이었다.

아니, 이드뿐만 아니라 이드와 함께 했던 초인들로 인해 그때까지 판단의 기준이었던 경지가 다시 재정리되어 버린 셈이다.

아무리 봐도 그들이 발휘하는 힘의 거대한 과괴력은 그때까지 알고 있던 최고의 경지라는 그레이트 실버 소드 이상이었다.

또 마인드 로드와 무공의 연마로 좀 더 자신이 오른 경지가 확실히 느껴지자 자연스럽고 정확하게 검의 경지가 단계별로 정리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렇게 이드가 사라지고, 이십 년 후 다시 정리된 검의 경지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바로 처음 검을 들고 휘두르는 소드맨에서 시작해 파워 소드, 소드 마스터, 그레이트 소드,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이르는 다섯 단계의 경지가 그것이었다.

처음 소드맨은 말 그대로 검의 초보자를 말하는데, 이제 검을 배우며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상태를 말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직 마나를 알지 못하는 검사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파워 소드는 막 마나를 알게 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마나를 알지만 아직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단계.

하지만 몸에 쌓여진 마나로 인해 육체의 힘과 함께 검에 실려, 단순한 검 이상의 파괴력을 표출할 수 있는 단계다.

이 단계에 올라야 기사로서 최소한의 실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었다.

다음이 바로 소드 마스터다. 이것은 이드가 떠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지로 그 단계를 정리하고 있다.

말 그대로 검을 능숙히 지배하며, 마나를 검에 실어 검기를 보일 수 있는 단계다. 이 단계에 들고서는 갑옷을 쉽게 자를 수 있는데, 이드가 전한 마인드 로드로 인해 이 단계에 오르는 검사가 많아졌다. 파츠 아머가 나온 이유도 이 때문이다.

또 이 소드 마스터에 오르고서야 어느 정도 검사가 지닌 거리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레이트 소드는 그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레이트 실버 소드를 말하는 것이다.

예전엔 최고의 경지로 판단되었지만, 이드의 힘을 보고서 한 단계 낮게 느껴지는 경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과는 달리 이 경지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말 그대로 거대한 검을 일컫는 강기가 형성되는 단계이니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때가 되면 넘쳐나는 마나로, 육체의 재구성을 거치게 되면서 한층 강한 힘과 젊음을 손에 쥐게 되니 가히 이야기에 나오는 젊음의 샘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지였다.

수많은 검사를 비롯해 귀족과 왕들이 검을 수련하는 것도 바로 이런 목적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모든 것을 가진 그들로서는 수명을 늘려 주는 이 경지가 무엇보다 얻고 싶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 그레이트 소드 다음이 나람과 자인이 말하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다.

한마디 말로 정의하기 어려운, 표현 그대로 위대한 검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그레이트 소드를 지나 손에 검을 쥐지 않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부여되는 절대의 칭호!

정말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 정확한 힘의 측정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된다.

저 이드와 함께 세상을 뒤흔들었던, 그 능력을 알 수 없는 초월자들이 이에 속한다. 그 한계와 끝이 존재하지 않는 경지. 그것이 바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였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긴 했지만, 이제 와서는 더더욱 포기할 수 없겠어. 최선을 다해 바짝 쫓아가야겠습니다. 다른 곳에서 알기 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혼잣말 같은 자인의 명령에 집무실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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