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266화
채이나와 마오를 중앙에 둔, 마치 빙산처럼 불규칙한 각과 측을 이룬 차가운 하얀색의 방어막이 생겨났다.
병사를 따라 들어간 수군의 진영은 우선 넓찍하고 큼직큼직했다.
진영 안에 지어진 건물의 간격도 넓어 병사 여러 명이 일렬로 쉽게 쉽게 다닐 수 있을 것 같은 넓이였다. 신속한 움직임을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듯했다.
아무래도 전투 시 육전보다 준비할 것도 많고, 언제든 호수로 투입되어야 하는 만큼 더 기동성이 필요할 테니 그럴 것이라고 이해를 했다.
하지만 건물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아 삼 층을 넘는 건물이 없었다.
헌데 그렇게 병사를 따라 진영 삼 분의 일쯤을 걸어 들어왔을 때였나. 조용히 병사와 채이나의 뒤를 따르던 이드의 얼굴에 곤란한 표정이 떠오르며 손이 저절로 머리를 매만졌다. 곤란하거나 고민스러운 일이 있을 때 나오는 이드의 전형적인 버릇이었다.
“쩝, 이거…… 아무래도 당한 것 같은데.”
[응? 뭐가요?]
이드의 작은 목소리를 가장 먼저 들은 라미아는 물음과 동시에 주위를 살폈다.
순간 주위로 퍼져 나간 그녀의 감각에 일행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적의가 걸려들었다.
[어머나? 완전히 포위당했는걸요. 헤에, 우리 유인당한 걸까요?]
“뭐,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겠지?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던 걸 보면 말이야.”
느껴지는 기세나 진형으로 보아 아마 포위 진형의 중앙에 도착하면 공격을 시작할 듯 보였다.
하지만 준비는 정말 철저히 했다는 것을 여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세가 삼엄하긴 했지만 일행들이 진영의 포위진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 전혀 적의를 비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공격 신호도 없었다는 말인데, 이드 일행이 들어서고 나서야 공격 신호가 떨어졌다는 말이다. 이드와 채이나의 날카로운 감각을 피하기 위해 그런 듯 보였다.
“그나저나 다른 나라에서까지 이렇게 나올 줄이야. 이러면 널 변형시킨 보람이 없잖아.”
[글쎄 말예요.]
대답을 하는 라미아의 모습은 며칠 전과는 또 다르게 변해 있었다. 며칠 전의 모양은 한쪽 어깨와 팔을 가리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목을 중심으로 양 어깨를 가리는 형태로 척추를 따라 등 뒤의 엉덩이 부분까지 유선형으로 늘씬하게 뻗어 역삼각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마치 연인을 등 뒤에서 껴안고 있는 모습이랄까.
거기에 더해 양 어깨에 나뉘어 새겨진 드래곤과 유니콘의 문양 역시 상당히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솔직히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변형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화려한 파츠 아머의 외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따지고 보면 라미아가 아니라도 일부러 모습을 숨긴 적도 없는 일행이었다.
또 이들은 그 자체로 이미 눈에 확연히 띄는 일행이었다. 지금 가까이 다가온 채이나가 끼어 있으니 말이다.
“뭘 둘이서 속닥거리는 거야?”
아직까지 상황을 느끼지 못한 듯 태평한 얼굴의 채이나였다.
이드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과 마오의 사이에 세웠다.
“길이 길목에서 기다리던 것처럼 이번에도 우리가 또 걸린 것 같아요. 그나저나 아주 다양하게 함정을 파는군요. 숲에서 이번에는 호수에 면한 수군 진영이라…… 주위를 잘 둘러봐요.”
채이나와 마오도 동시에 눈살을 찌푸리며 기감을 활짝 열고 위를 살폈다. 세 사람이 갑자기 멈춰 서 버리자 앞서 걷던 병사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멈춰 서시다니.”
말하는 투나 표정으로 보아 이 병사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앞서 이곳까지 안내한 라멘이나 지금 진영의 내부로 안내하고 있는 이 병사는 이 일과는 무관한 듯 보였다. 아무튼 이 계획을 주도한 세력은 무척이나 조심스럽다고 볼 수 있었다. 이드 일행이 이상한 것을 느끼지 않도록 하급자들에게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은 듯했다.
적이라는 말을 들은 이상엔 마음을 편히 할 수 없고, 마음이 편치 않으면 기를 고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치밀한 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드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병사를 향해 먼저 가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저희들이 알아서 가죠.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알아서 갈게요.”
“아닙니다. 여러분들을 대로까지 모시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다면 잠시 기다리겠습니다.”
이드는 수문장으로 보이는 병사가 제 본분을 끝까지 지켜야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탓할 것은 아니지만 군인 정신이 너무 투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참, 그게 아닌데. 그냥 가세요. 아무래도 여기 군인들과 문제가 좀 있을 것 같으니까요. 오늘 이 진영이 이상한 것 못 느끼셨습니까?”
이 정도 단련된 인원을 작은 진영 안에 준비하려면 뭔가 평소와는 달랐을 것이다.
“으음.”
이드의 말에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얼굴이 굳어지더니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알았으면 피하세요. 지금 이 포위 작전과 무관한 병사인 당신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확실히 주위에 느껴지는 자들만 해도 평범한 병사는 단 하나도 없었다. 저번 은백의 기사단처럼 주위를 포위한 자들은 거의가 기사들이었다. 경험이 많은 병사인 듯 이드의 말을 들은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한쪽 건물 사이로 서둘러 몸을 피했다.
“자. 그만들 나오시죠. 나름대로 서로 준비는 된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적의 은폐를 확인한 이드가 그대로 서서 외쳤다.
그 짧은 이드의 말이 신호가 되었다.
사아아아.
단단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군대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약간의 긴장만이 흐르던 테이츠 영지 수군 진영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날카로운 기운과 함께 당장에 폭발할 듯한 투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투기를 안고서 주위에 숨어 있던 자들이 이드를 중심으로 포위망을 형성하며 하나둘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략 느껴지는 숫자만 해도 저번의 두 배가 훨씬 넘어 보였다.
이제 더 이상 이곳은 수적을 상대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서의 수군의 진영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피를 볼 수 있는 살벌한 전장이 되고 있었다.
“휘우, 이번엔 저번보다 준비가 더 확실해 보이는걸?”
건물과 건물 사이, 건물 내부와 건물 옥상에서 나타난 자들을 체크하듯 돌아보던 채이나의 적 규모에 대한 감상이었다.
기사들의 규모로도 그렇고, 그 사이에 숨어 있는 마법사의 존재로 보아도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릴긴 하네요. 그런데 정말 내가 했던 경고는 전혀 씨도 먹히지 않은 모양이네요. 이렇게 또다시 몰려온 걸 보면 말예요.”
이드는 길과 코널에게 다음번엔 목숨을 취할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했었다.
물론 제국 황제의 명령을 받는 자들에게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경고란 걸 알긴 알았지만 막상 이렇게 또 몰려오자 그다지 기분은 좋지 않았다.
한국에 소 귀에 경 읽기라는 속담이 있는데, 딱 그 짝이었다. 소는 주인의 명령 이외에는 따르지 않는 것이다.
[누가 협박을 한다고 순순히 따르면 그건 국가의 권력이 아니죠. 그것보다 저기 반가운 인물이 와 있는 걸요, 이드.]
라미아의 말에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대로의 중앙으로 모아졌다.
이미 수많은 기사들로 단단히 막힌 대로의 한가운데에서 천천히 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세 사람이 결어와 기사들 앞에 섰다. 그 중 한 사람은 세 사람 모두에게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길이었다.
또 다른 두 사람은 호리호리한 체격에 특징 없어 보이는 장년인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은발머리를 한 청동 거인 같아 보이는 호한이었다.
이드는 그 중 부리부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호한에게 특히 시선이 갔다.
느껴지는 기세로 보아 정통의 금강선도를 익힌 것은 물론이고, 새롭게 정리된 그레센 대륙의 검의 경지로 판단해도 그레이트 소드의 경지에 든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들보다는 이미 안면을 익힌 인물이 있기에 곧 이는 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젠 만나지 않는 게 피차 좋지 않았을까. 만나서 반가운 얼굴도 아닌데 여기서 또 보게 되는군, 길 소영주.”
이드는 저번도 그랬던 것처럼 길에게 말을 낮추었다.
“저번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시 한 번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이드님.”
다만 길의 태도는 저번과는 아주 달라져서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기까지 했다. 이드는 영 달갑지 않은 인물이 또 전과 다르게 예의를 다 갖추는 꼴을 보자 이게 뭔가를 의식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드는 슬쩍 그의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지금 길의 행동은 저 두 사람 때문인 듯 보였다. 하지만 굳이 아는 척을 하지는 않는 이드였다.
“이미 사과는 그때 받았어. 또 받고 싶은 생각은 없군. 더군다나 어디다 쓸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많은 병력을 등 뒤에 두고 하는 사과를 누가 진심으로 받아들이냐? 바보냐?”
이드는 본심에서 우러나온 것도 아닐 길의 형식적인 사과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면박을 주었다.
하지만 길은 또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번 공격 때와는 확실히 달라진 태도를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 뭔가 깨달은 게 있을지도 몰랐고, 그것보다는 옆에 떡 버티고 서 있는 사람들의 영향이 큰 때문인 듯 싶었다.
이어지는 길의 말을 보면 후자인 게 거의 확실했다.
“그 점 양해 바랍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드님에 대한 일은 저희 제국에서도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 먼저 소개해 드릴 분이 계십니다. 저희 라일론 제국의 검이자 방패라 불리시는 나람 데이츠 코레인 공작님과 파이네르 폰 디온 백작님이십니다.”
길이 정중하게 소개하자 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람에게로 향했다.
제국의 공작과 백작이라니. 생각도 하지 않았던 거물들의 등장이었다.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고 했더니 더 악착같이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 신경 쓰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광적인 집착에 가까웠다.
“라일론의 나람이네. 자리가 좋지 않지만 반갑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여.”
“파이네르 폰 디온입니다.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합니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길이 두 사람을 직접 소개한 것까지는 순조로운 인사의 절차였다. 이 두 사람은 자신을 직접 언급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다음은 상대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혀야 또 인사의 절차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람과 파이네르가 먼저 인사를 해 왔다.
황제나 동급의 작위를 가진 자들이 아닌 이상 먼저 인사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을 자들이 스스로의 이름을 먼저 밝히고 예의를 갖추었으니 실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이드라는 존재를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드는 두 사람이 말끝마다 붙이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것이 상당히 신경에 거슬렸는지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것 때문에 지금 또 이 난리가 일어나고 있으니…….
“이드 휴리나입니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보다 이드라는 이름으로 불러 주시면 좋겠군요.
그리고 이쪽은 제 친구인 채이나와 그녀의 아들인 마오입니다. 그보다 저희들을 이리로 불러들인 용건을 듣고 싶군요. 저희들은 갈 길이 바빠서 말입니다.”
이드는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은 생각에 두 사람을 향해 간단히 용건을 물었다. 이드 일행이 보기엔 그다지 별스런 상황도 아니었지만 이 인사 절차조차 당황스럽게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었다. 도저히 상상도 해 보지 못했던 일이 연거푸 벌어지자 세 사람을 빽빽하게 에워싸고 있던 기사들의 얼굴색이 벌겋게 변했다.
그들로서는 감히 바라볼 수도 없을 만큼 최상승의 자리에 있는 공작과 백작에게 먼저 인사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저토록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고 있으니 너무도 당연한 반응들이었다.
하지만 이드에게 그레센 대륙의 작위란 그저 이름 같은 것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평소 소란을 피하고자 거기에 적절한 대우를 해 주긴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기에 원래대로 무시해 버린 것이다.
“……그러지. 지금 내 손에 들린 것은 라일론 제국의 자인 황제 폐하가 내리신 편지네, 폐하께서는 간곡히 자네가 우리 제국에 와 주셨으면 하고 바라시네.”
나람은 이드의 말이 꽤 불쾌했을 텐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품에서 금으로 아름답게 치장된 봉투를 하나 꺼내 들었다. 미리 이야기가 된 듯 옆에 서 있던 길이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이드에게 그 봉투를 가지고 왔다.
‘오늘 벌써 두 번째 봉투군.’
이드는 길이 내미는 봉투를 멀뚱히 바라보다 받아 들었다.
길은 편지를 전달하자마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드는 봉투를 뜯어 역시 화려하게 꾸며진 편지를 꺼내 읽었다. 대충 내용은 이미 예상이 되었지만, 역시나 짐작한 대로였다. 거기에 덧붙인 내용은 조금 의외였다. 앞서의 일을 사과하며 동시에 제국의 힘이 되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대가로서 가장 눈에 띄는 게 공작의 작위를 수여한다는 것과 공주와의 결혼을 약속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화려한 조건을 세운 것만 보아도 그가 이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짐작이 갔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쪽의 사정에 불과했다.
화르르륵.
편지를 든 이드의 손에 진화의 공력이 모여지자 편지와 봉투가 한순간에 타올라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 저런…….”
“어떻게…… 저리 무례한!”
안 그래도 용서할 수 있는 단계를 훌쩍 넘어버린 이드의 불손한 행동은 기사들에겐 거의 반역의 수준으로 치달아 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자리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나올 필요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지만 저도 모르게 놀란 음성들이 쏟아져 나왔다. 앞에 서 있던 세 사람의 표정이 무너진 것도 거의 동시였다.
청동 거인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던 나람의 얼굴도 순간적으로 일그러지듯 흔들렸다.
황제의 편지를 그것도 제국의 귀족 앞에서 불태운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생각하고 말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편지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 귀족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결혼을 한 몸입니다. 신부를 더 늘리고 싶은 생각은 없군요. 마지막으로 분명하게 말하건대, 전 어떤 나라에도 속할 생각이 없습니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이미 황제의 편지를 태웠다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거기에 그것을 또박또박 확인시켜 주는 말까지 내뱉었으니!
이드를 바라보던 세 사람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드는 그들의 눈을 피해 슬쩍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쓸데없이 그들과 서로 눈치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시선을 돌린 허공에는 세 사람의 등장과 함께 펼쳐진 결계의 기운이 복잡하게 흐르고 있었다.
[전문적인 이동 마법진. 특히 장거리 텔레포트를 방해하는 결계예요.]
“뭐, 당연한 거지. 이런 인원을 동원하고도 우리가 마법으로 빠져나가 버리면 그처럼 한심한 일도 없을 테니까.”
채이나의 말대로였다. 이드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감안한다면 당연한 대비책이었다.
이드는 다시 시선을 내려 주위의 기사들과 앞의 세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 생각은 확실히 전한 것 같은데. 이만 길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저희들은 가던 길을 재촉하고 싶군요. 아니면 저번처럼 또 힘으로 소란을 피우겠습니까?”
이쪽이 결정을 내렸으니, 그쪽도 빨리 결정을 내리라는 이드의 말이었다.
길의 눈이 자연스럽게 나람에게 향했다.
하지만 다시 입을 연 것은 나람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파이네르였다.
“귀하의 뜻은 저희들이 확실히 받았습니다. 하지만 간곡히 다시 생각해 주실 것을 요청드리고 싶군요. 최악의 경우…… 서로에게 치명적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생각의 기회는 충분했습니다. 라일론에 일이 있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으니 말입니다.”
파이네르의 간곡한 부탁에 이드의 즉답이 이어졌다. 확실히 생각해 볼 시간은 차고 넘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니, 강대한 힘을 가진 강자라도 제국과 그런 문제가 벌어지고서 아무 생각이 없을 수는 없었다. 이드는 그걸 한 번 더 말한 것이다.
“제국의 힘입니다! 아무리 강대하다 해도 일개인이 감당할 수는 없는 힘입니다.”
이건 상당한 협박이었다. 그 말에 가벼운 코웃음으로 채이나가 이드보다 먼저 반응했다.
이드의 힘을 아는 그녀에게 지금의 협박이란 것은 우스갯소리만도 못할 뿐이었다. 그런 협박으로 제어가 가능했으면, 제국이나 왕국들은 벌써 드래곤을 신하로 부리고 있을 것이다.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라일론은 이드와 친했던 아나크렌과의 관계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쪽과는 싸우지 않기로 세레니아 님이 증인으로서 약속을 했을 텐데. 제국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렵지 않을까? 그 아나크렌과 세리니아 님의 힘 말이야.”
‘협박에는 협박입니까?’
이드는 채이나가 당당하게 한마디 하자 속으로 고소를 지어 물었다.
한편으로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채이나가 말하는 아나크렌과 세레니아의 힘은 결코 만만히 볼 게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역시 상대는 오랜 세월 정치에 단련된 귀족이었다.
“글쎄요. 그 오래된 인연…… 저희 동맹국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런 걸 묻기도 전에 저희와 같은 행동을 보일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전에 부인께서 길 소영주의 영지 앞에서 하셨던 말처럼 인간들의 단체란 믿을 게 못 됩니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았는지 채이나가 했던 말을 다시 언급하며 반격하는 말에 이드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아나크렌의 수도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 탓이었다.
“그리고 세레니아 님이라면…… 글쎄요, 그분과 오고 갔던 내용 중에 지금의 상황과 관련된 말씀은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분의 화를 당할 이유가 없지요.
무엇보다 저희는 세레니아 님이 아직 살아 계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분이 중재하신 동맹 이후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순식간이었다. 채이나의 협박이 어이없이 깨진 것은!
그녀가 꺼내 들었던 두 힘, 아나크렌과 세레니아의 힘이 그의 말 몇 마디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역시 협박도 해 본 사람이 하는 모양이었다. 협박이란 상대가 어찌 나올지 미리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까지 대응할 거리를 채이나는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이드는 자신만만하게 대응했다가 몇 마디 대꾸에 와장창 깨져 버린 채이나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그녀를 마오의 곁으로 보냈다.
“길, 역시 열어 주지 않을 건가 보지요?”
이드는 그가 채이나와 나누었던 말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파이네르는 슬쩍 나람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쇳덩이 같은 나람의 표정을 읽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그 가공할 무력이…… 다른 나라에 있다는 것은 저희들에겐 더없는 걱정거리라서 말입니다. 그나저나 진정 본국의 힘을 혼자서 감당하실 생각입니까?”
채이나와 마오가 라일론에서 있었던 싸움에 함께 나서지 않은 때문인지 두 사람의 전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파이네르였다.
“물론 못할 일도 아니니까.”
이드는 말이 가진 내용의 무게에 맞지 않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할 겁니다.”
라일론의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확신이었다.
하지만 이드 일행이 생각하는 사실은 그 반대였다.
“가능하죠.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혼돈의 파편 하나에게 라일론의 수도가 거의 반이나 날아간 적이 있죠.”
순간 파이네르를 비롯한 세 사람과 몇몇 사람의 얼굴에 수치심이랄까, 자존심 상한 인간의 표정이 떠올랐다.
한 존재에게 수도가 파괴되었던 사실은 나라로서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귀하는 그가 아닙니다.”
“나 역시 그런 녀석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처럼 직접 라일론과 싸울 일도 없으니까요. 그냥…… 찾아오는 자들을 상대하고서 몸을 피하면 그만이니까요. 다른 나라에 있는 한 당신의 말대로 라일론 전체와 싸울 일은 없으니까 말이지요, 다른 나라들이 드레인처럼 당신들의 움직임을 쉽게 허락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에 있는 이상 라일론 제국은 이드를 향해 전력을 다할 수 없다. 다른 나라에 그런 커다란 전력을 투입한다는 것은 그 나라와 전쟁을 하겠다는 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이렇게 드레인으로 몰려온 상황은 지극히 예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파이네르였다.
자연히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이드와 채이나의 말에 잘만 돌아가던 그의 입이 뻔한 진실 앞에서는 막혀 버린 것이다.
“자네들 일은 여기까지네. 이제 그만 뒤로 물러나.”
당황한 파이네르의 어깨를 향해 나람의 두텁고 거친 손이 다가갔다.
“공작 각하.”
“이제부터는 내가 나설 차례인 것 같군. 자네 두 사람은 계획대로 돌아가게.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위험을 일부러 감당할 필요는 없어.”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부디 조심해 주십시오, 각하.”
파이네르는 나람의 말에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항상 차가울 만큼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얼굴처럼 결정을 내릴 때는 철저히 이성과 이익에 따르는 파이네르의 성격다웠다.
바로 그러한 점이 제국의 정보를 한 손에 쥘 수 있게 만들기도 했겠지만 말이다.
“길, 따라와라. 우리는 이대로 물러난다.”
파이네르는 지체 없이 돌아서며 이드를 스쳐 보고는 바로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사람 같으면 한마디 했을 텐데 정말 자기 통제가 확실한 사람 같았다.
그리고 그런 파이네르의 뒤를 이드와 나람에게 허리를 숙여 보이며 길이 뒤따랐다. 그렇게 자리를 뜨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어쩐지 닮아 보였다.
두 사람이 포위망 밖으로 나가고 나자 길을 만들어 놓던 기사들이 그곳을 촘촘히 채우며 다시 포위를 공고히 했다. 그들 앞에는 여전히 나람이 당당히 버티고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공격 명령이 떨어진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진영의 외곽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파동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텔레포트. 진영의 외곽에서 사용되었네요. 아까 전의 두 명이 사용한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나람은 포위망을 나선 두 사람이 몸을 피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준 것이었다.
하기사 전투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두 사람의 경우 일찌감치 몸을 피하는 게 도와주는 것을 테다.
그리고 또 잠시 후 한 기사가 다가와 나람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이었다. 두 사람이 잘 떠났다는 소식일 테다.
“그럼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만 묻도록 하겠네. 제국으로 들어오지 않겠나?”
우렁우렁 공기를 울리는 나람의 중후한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어질 전투를 생각한 묘한 투기가 은근히 묻어나고 있었다.
“저야말로 묻고 싶군요. 꼭 싸울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요. 더구나 내가 과거의…… 마인드 마스터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나요. 당신들이 말하는 그랜드 마스터의 거대한 힘을요.”
자기 입으로 자기 칭찬을 하려니 가슴 한구석이 가렵다.
“우리는 이미 그대를 그랜드 마스터로 짐작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곳에 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랜드 마스터의 실력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기쁘다. 오히려 그대가 제의를 거절한 것이 더 기쁠 정도로…….”
이드는 나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랜드 마스터로 생각하고 왔다면 철저하게 준비하고 왔다는 뜻일 테다.
“무슨 수를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준비를 하는 게 좋겠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자연스럽게 돌아간 이드의 시선에 등을 맞대고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채이나와 마오의 모습이 보였다.
채이나만 보면 고생하라고 그냥 두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
“이번에도 부탁해, 라미아.”
[맡겨만 두세요. 아이스비거 디펜스 베리어!]
바우우웅.
라미아의 시동어를 따라 마나가 공명하며 채이나와 마오의 발밑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지고 있었다.
마치 쾌검처럼 번쩍거리는 속도로 순식간에 복잡한 진이 만들어져 나갔다.
그리고 진이 완성되는 순간!
쩌엉.
서늘한 냉기와 함께 채이나와 마오를 중앙에 둔, 마치 빙산처럼 불규칙한 각과 층을 이룬 차가운 하얀색의 방어막이 생겨났다.
척 봐도 속성까지 띄고 있는 고위의 방어 마법임을 적이 놀란 표정으로 굳어 있는 마법사들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이스비거 디펜스 베리어. 나인 클래스 상위에 있는 마법이죠. 고대의 눈의 여신이 머물렀다는 산의 이름을 딴 마법. 저 방어막이면 마법은 물론이고, 웬만한 검기엔 흠집도 나지 않을 거예요.]
“좋아. 그럼 난 이쪽 일만 빨리 처리하면 되겠구나. 그럼 그쪽에서 먼저 오시죠.”
이드는 이제 제법 손에 익은 롱 소드를 뽑아 들었다. 그의 입가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온다. 저 빙산의 마법으로 주위의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진 때문이었다.
“그랜드 마스터와의 결전이라……. 심장이 흥분으로 요동을 치는군. 다시 한 번 말해 두지만 솔직히 난 그대가 제의를 거절할 때 내심 반기고 있었다. 이렇게 검을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말이야. 모두…… 검을 뽑아라. 상대는 그랜드 마스터! 최강의 존재다.”
나람의 목소리에 따라 이백 명의 인원이 동시에 검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