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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269화


  • 여전히 이드의 어깨에 앉아 라미아를 살살 흔들고 있는 페어리의 말대로 정말 상상도 못할 만큼 신비한 곳이었다.

생명력과 정령력이 넘쳐나는 숲이라 그런지 엘프인 그녀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아주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이드와 마오는 푸릇푸릇 생기 넘치는 채이나를 따라 걸음을 빨리하며 바짝 따라붙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은 그저 그녀의 뒤꽁무니를 부지런히 따라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앞서 말했듯 요정의 숲은 엘프의 손길이 늘 닿는 숲이다.

엘프의 손길을 입은 숲은 언제나 푸르고 건강하다.

이곳에서 푸르다는 말은 단순히 숲속의 나무들과 식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거나 뒤엉키듯 무성하다는 말과는 조금 달랐다.

오히려 나무건 꽃이건 간에 어느 정도의 경계와 거리를 가지고서 조화롭게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신의 푸르름을 숲에 더하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으니 듬성듬성 잘린 흔적이나 인위적으로 꾸민 것 같은 건 아예 눈 씻고 찾고 봐도 찾을 수 없었고, 자연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제멋대로 뻗고 자라나거나 하지도 않았다.

숲의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건 어찌 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일 것이다.

답답할 정도로 빽빽하지 않으면서, 빈 곳이 있거나 듬성듬성하지도 않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침범하고 있다는 인상도 전혀 받을 수 없기에 이드는 이 숲에서 정말 명쾌한 단어 하나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평화!

숲의 또 다른 이름은 평화이며, 그것이 맑은 생명력과 함께 마음의 안정을 한없이 유지시켜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요정의 숲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채이나는 그런 요정의 숲을 조화롭게 구성하고 나무 사이를 팔랑이는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일정한 방향만을 따라 움직인다는 인상을 주었다. 불규칙적인 것 같지만 규칙적인 패턴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드 일행도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채이나의 발자국만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채이나를 따라 갔을까.

파아아아

은은하게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투명한 빛살이 일더니 어느 순간 그 빛이 폭발하는 것처럼 커지며 푸르게 물들어 이드의 눈을 살며시 간지럽혔다.

이드는 급히 손으로 눈을 가리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와 동시에 직접 눈을 사용하지 않기에 눈부실 일도 없는 라미아의 목소리가 깨끗한 물방울 소리만큼이나 찰랑거리며 들려왔다.

[화아, 아름다워!]

몽롱하게 풀리는 라미아의 목소리였다.

이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손 가리개를 풀고 슬며시 전방을 향해 시야를 넓혔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란…….

“……무릉도원이 바로 이곳이구나.”

이드의 눈에 들어온 황홀경!

그것은 진정 하늘나라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따사로운 햇살과 그 햇살을 받아 푸르게, 또 부드럽게 주위를 감싸는 여러 겹의 파릇파릇한 나무들과 형형색색의 갖가지 꽃과 작은 동식물들…….

무릉도원은 어쩌면 인간이 없는 풍경일 때 진정한 무릉도원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자신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미안할 만큼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눈이 가는 것은, 그 모든 것의 중앙에서 세상의 빛살을 담아 한없이 푸르게 빛나는 호수였다.

마치 저게 물이 아니라 에메랄드가 가득 찬 호수처럼 수없이 풍부한 푸른빛을 사방으로 뻗어 내고 있는 커다란 호수였다.

라미아의 말처럼 정말 아름답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만약 사람들이 이곳의 환상적인 풍경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지옥도가 떠오를 정도였다.

더 끔찍한 지옥이란 단순히 공포의 살풍경이 아니라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제 모습을 버리고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일 것이다.

“이 호수가 블루 포레스트예요?”

잠시 몽롱한 표정으로 호수를 바라보던 이드는 곧 정신을 차리고 채이나를 찾았다.

“그래, 푸른 호수. 블루 포레스트야. 너무 아름답지?”

끄덕끄덕

말이 필요 없었다. 뭐라고 덧붙이는 말이 오히려 이 풍경을 손상시킬 것만 같았다.

“목적지가 바로 여기였어요?”

“응.”

채이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포레스트의 수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호수 바닥에 에메랄드가 잔뜩 깔려 있는 것 같은 눈부신 빛의 호수.

“여기가 목적지야. 요정의 광장…….”

채이나도 잠시 감상에 빠진 듯 목소리가 가라앉을 정도였다.

마오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다시 살폈다.

이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채이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살필 필요도 없었다.

그의 감각은 호수 주위에 있는 생명체는 동식물뿐이라고 알려 주고 있었다.

채이나를 제외하고 어디에도 엘프를 비롯한 이종족은 없었다.

요정의 광장이 이처럼 깨끗하게 비어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는 건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혹시…… 이 호수를 보고 말하는 거예요?”

이드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설마 이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엘프가 인어도 아니고, 호수 안에서 생활할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래도 채이나가 아무것도 모른 채 여기로 올 리도 없을 것이고, 도통 헛갈렸지만 호수를 바라보자니 오히려 더 갑갑해졌다.

정말 설마 설마 했다. 하지만 누누이 말하는 거지만 살면서 설마에 발목 잡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딩동댕! 잘 맞혔어. 상 줄까?”

다분히 장난스런 대답이었다.

이드는 그녀와 호수를 번갈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준다면 받지요. 그런데 정말 여기가 요정의 광장이에요? 엘프가 혹시 수중 생활에 맛들이기라도 한 건가요? 인어도 아닌 종족이 어떻게 호수에 있어요?”

그러니까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이드의 말이었다.

그 뒤를 라미아의 목소리가 바로 뒤따랐다.

[아니면 호수가 특별한 건가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이 어떤 새로운 느낌을 주기라도 했는지 호수를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정말 특별하기는 한 호수였다. 방금 전 주위를 살필 때 호수에서 피어나는 은은한 생명력과 활기찬 정령력을 느끼긴 했었다.

엘프가 아니라, 호수.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말이 되는 것 같은 게 아니라…… 그게 정답이었다.

“맞아. 여기가 요정의 광장!”

화아아아

라미아에게 빙그레 웃어 보인 채이나가 가만히 호숫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손이 담겨진 곳을 중심으로 호수물이 하얀색으로 변하며, 그곳으로부터 색색깔로 빛나는 은은한 파스텔 톤의 빛이 확 번져 나갔다.

번져 나가던 빛은 약 사 미터 정도의 크기를 이루고서 그 성장을 멈추었다.

“요정의 광장은 바로 이 호수 속에 있어. 이 세상이 아니면서도 이 세상에 속한 반정령계가 바로 요정의 광장이야. 나 먼저 들어간다.”

“어어…….”

이드가 뭐라고 채 묻기도 전이었다. 호수에 담그었던 손을 빼더니 채이나는 두 발을 파스텔 톤 빛 속으로 들이밀며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너무도 순식간의 일이라 도대체 채이나가 무슨 짓을 한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호수에 그대로 빠졌다!

그녀의 발 아래 놓이게 된 빛 속으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빛 위에서 사라졌다.

이드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채이나처럼 빛 위로 올라섰다.

“그럼 나도 가볼까. 마오, 어서 따라와…… 앗!”

너울거리는 빛 더미 위로 올라서며 마오를 돌아보던 이드는 순간 몸이 기우뚱하더니 무지개 빛으로 빛나는 호수 속으로 그대로 떨어져 버렸다.

정말 말 그대로 뻥 뚫린 구멍 속으로 떨어지듯 그렇게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채이나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이쯤 되면 한소리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무슨 차별이야!”

이드의 목소리가 울리며 멀어져 갔다. 그렇게 혼자 남게 된 마오.

“후우.”

작은 한숨과 함께 그도 망설임 없이 그대로 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빛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넓게 퍼져 있던 파스텔 톤의 빛은 마오에게 묻어 가듯이 구멍 속으로 빨려 들며 없어져 버렸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생겨났던 빛이 역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인기척을 지워 버리고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는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의 블루 포레스트였다.

이 세상을 유지하는 정령들.

이 세상의 모든 곳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정령들.

그레센 대륙의 어디에서도 그 정령들이 살고 있는 곳을 이렇게 부른다.

정령계.

오직 정령들만이 존재하는 세상으로 중간계의 기본이 되어 두 세계는 보이지 않는 순환을 계속하며 그 생명력을 유지해 간다고 한다.

어떻게 알게 된 지식인지는 그 시초를 찾을 수 없지만 정령에 대해 깊게 공부한 자들이 생기면서 정령계에 대한 지식은 보편적인 지식으로 누구나 알게 되는 그런 것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이 정령이라는 존재를 모두 알려 주고 있지는 않았다.

여전히 미지로 남아 있는 정령에 관련된 지식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기도 어려웠다.

어쩌면 누군가는 좀 더 정령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자들에게조차 전무한 지식이다시피 한 세계가 바로 정령계라고 할 수 있었다.

도대체 정령만이 존재하는 정령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존재는 너무도 많았다. 드래곤, 엘프, 인간을 비롯한 정령을 소환하는 모든 존재들이 한 번쯤 가져 봤던 궁금증이었다.

실제 드래곤은 정령왕을 소환해 물어보기까지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듣게 된 대답은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이었다.

“물로 이루어진 세계랍니다.”

물의 정령왕의 대답은 이랬다.

“모든 것은 불에서 태어나고 있다.”

불의 정령왕의 대답이었다.

“바람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곳이야.”

바람의 정령왕의 대답이었다.

“언제나 포근한 끝없는 대지의 세상이다.”

대지의 정령왕의 대답이었다.

네 정령왕에게서 나온 네 가지 제각각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속성뿐이라는 정령왕의 대답을 듣고 뭘 알 수 있겠는가.

또 정령왕에게서 정령계의 모습을 전해 듣는다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직접 보질 못하는데.

그래서 지금까지도 중간계에 있는 자들 중 그 누구도 정령계의 모습이 어떻다는 것을 본 자는 없다.

하지만 모두 짐작은 해 본다. 정령계, 그곳은 이 세상의 가장 근본에 해당하는 원소들이 정해진 경계 없이 존재하는 자유로운 세상이다, 라고.

그럼 채이나가 말하는 중간계와 정령계의 중간에 걸려 있는 반정령계의 모습은 어떨까?

누군가 그렇게 묻는다면 이드는 이렇게 대답해 줄 것이다.

“항상 보던 것과 다를 게 없다!”

거리감을 느끼지도 못한 채 하염없이 떨어지던 이드가 갑자기 나타난 바닥에 이르자 급히 몸을 틀어 내려선 후 주변을 둘러보고 난 첫 감상이었다.

[하지만 그 속은 전혀 다른데요.]

그리고 이어진 라미아의 두 번째 감상이었다.

두 사람의 곁으로 곧 마오가 떨어져 내렸다.

마오는 그 날쌔던 모습과는 달리 전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이해했다. 저 속은 거리감은 물론 무게감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한다.

이드는 떨어지는 마오의 몸을 살짝 밀어 그에게 감각을 되살리고, 중심까지 잡아 주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마오는 날렵한 동작으로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긴…….”

“아까 들었잖아. 반정령계라고.”

마오는 이드의 퉁명스런 대답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보이는 반정령계의 풍경…….

“하지만 여긴 그냥 숲이지 않습니까. 밖에 있는 요정의 숲과 전혀 다른 점이 거의 없어 보이는데요.”

마오의 말은 적어도 보이는 것에 한해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눈앞에 있는 반정령계의 풍경.

그것은 채이나와 함께 지나온 요정의 숲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정말 별다른 특별한 구석을 찾아볼 수 없는 숲이든가 아니면 호수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 눈이 이상해졌다든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특별히 눈이 간다면 푸르른 하늘이 아닌 투명하게 반짝이는 물결의 하늘이 머리 위에 존재한다는 것뿐이었다.

이드는 마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드와 라미아는 마오와는 좀 다른 점을 보고 있었다.

“아니. 그건 겉모습만 그런 거고…… 속은 달라.”

“다르다면?”

[이곳에 있는 것은 모두 정령이야. 지금 디디고 있는 땅에서부터 저기 서 있는 나무와 돌, 심지어 저기 풀 한 포기조차도. 모두 정령이야.]

“가서 한번 물어봐. 여기가 어디냐고.”

라미아의 설명에 이드가 한마디를 더하며 두 사람의 앞에서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어디긴 어디야. 요정의 광장이지.”

움찔

이드는 갑자기 흘러나오는 싱그러운 목소리를 듣자 앞으로 향하고 있던 손가락을 급하게 거두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 싱그러운 목소리의 주인이 이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던 아름드리 나무였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마오에게 그 실체에 대해선 역시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정확하게 안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드. 그 스스로 말해 놓고도 놀라 나자빠질 일이었다.

이드뿐만 아니라 마오도 상당히 당황한 듯했다.

나무의 대답은 명쾌한 것이었다. 이곳이 요정의 광장이라고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러나 지금 마오처럼 그게 정확한 답이든 아니든 간에 나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누구나 마찬가지 표정이 될 것이다.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아무 말도 못한 채 입만 헤 벌리고 있는, 그야말로 멍청한 표정!

“정말 오랜만이야. 이곳에 인간이 들어온 것은 상당히 오래전 일이거든.”

반갑다는 말 같기도 했고 신기하다고 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 진위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웠다.

이 낯설고 당혹스런 경험 앞에서 마오는 아직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거의 얼이 빠져 있었다.

이제는 마오를 본격적으로 놀래켜 주기로 작정을 한 것인지 한 술 더 떠 정령은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숙이며 찬찬히 이드와 마오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무가 인간을 뚫어지게 관찰한다는 게 얼마나 다양한 동화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인지 이 세상의 어린이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라면 인간을 관찰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나무를 향해 얼른 손을 내밀어 나뭇잎들을 쓰다듬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이 잘 기억나지도 않는 이드와 마오에겐 여전히 충격적인 장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을 요리조리 나뭇잎들을 흔들며 호기심 어린 눈길로 – 눈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그럴 것으로 예측된다 – 살펴보던 나무 아니, 정령의 모습은 서서히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무성하던 줄기와 나뭇잎은 어느새 사라지고 마치 빚어내듯 초록색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 남성 엘프의 외모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헌데 이상한 것은 그의 상반신은 엘프의 모습이지만 그의 허리 아래 하반신은 여전히 나무의 형상을 한 채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야. 거기다 넌 엘프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니 하프 엘프구나. 흠, 인간만큼은 아니지만 그쪽도 오랜만이야. 그런데 너희들은 누구의 초대를 받은 거지? 엘프가 없으면 문이 열리지 않는데 말이야. 혹시 네 녀석의 부모가 함께 온 거냐?”

그에게서는 조금 전보다 더 강력한 정령의 기운이 느껴졌다.

나무일 때는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던 기운이 엘프의 외모를 드러내는 것과 함께 강하게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모습이 변하면서 늘어나는 건 정령력만이 아닌가 보다. 줄줄이 이어지는 저 말들을 보면 말이다.

“네, 그녀의 이름은 채이나죠. 이곳으로 들어서며 서로 떨어졌습니다.”

나무의 정령이 묻는데도 아직 입도 벙긋 못할 만큼 정신 못 차리는 마오 대신 이드가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이드처럼 지금 이 나무의 정령을 대신해 말을 하는 또 다른 정령이 나왔다.

“채이나라고? 그녀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더니, 역시 그녀의 아들이었나 보군.”

잔잔하게 흐르는 목소리가 들리며 저쪽에 새들이 앉아 쉬고 있던 바위가 꿈틀거렸다.

이드 일행이 있는 방향의 한 면이 이리저리 울퉁불퉁 일어나는가 싶더니 무뚝뚝한 얼굴 하나가 만들어졌다.

볼 것도 없이 바위의 정령이었다.

이드는 그 형상을 보며 이곳이 알고 보니 참 재미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곳에선 그 어디라도 정령이 있다. 아니 온통 정령이며 정령 아닌 것이 없다. 절대로 혼자가 될 수 없는 곳이다, 이곳은.

“채이나를 아시나 보네요.”

“그래, 그녀의 기운을 기억하거든. 드래곤이 생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이곳의 우리들은 우리가 느낀 모든 기운을 기억하고 있지. 채이나의 기운도 내가 느낀 기운 중 하나야.”

“그럼 부탁이 있습니다. 어머님의 기운을 느끼신다니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혹시 아시나요? 분명히 먼저 들어오신 것 같은데, 저희들과는 따로 떨어졌습니다.”

마오의 얼굴에 채이나에 대한 걱정이 슬며시 떠올랐다. 정말 채이나를 끔찍이도 챙기는 착한 아들 마오였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채이나는 아들 하나는 정말 잘 두었다.

걱정 어린 마오의 말에 또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한마디 말할 때마다 새로운 정령 하나씩을 새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호호호, 걱정하지 마. 그녀는 너희들과 떨어질 걸 알고 들어온 거니까. 원래 엘프나 페어리가 이곳으로 들어올 때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되어지지. 하지만 너희 인간이나, 하프 엘프, 드워프를 비롯한 이종족은 게이트가 열린 바로 그 장소와 통하는 곳에 떨어지게 되거든. 아마 그녀는 너희들을 두고 자신의 일을 보고 있을 거야.”

말이 이어지는 동안 사방에 만발한 꽃들 중 보랏빛의 이름 모를 한 송이 꽃이 천천히 네 쌍의 날개를 단 귀여운 보랏빛 눈동자의 페어리로 변해서 날아올랐다.

[헤에, 이번엔 꽃의 정령인가 봐요.]

“아니, 난 페어리야. 꽃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뿐이지.”

스스로를 페어리라 말하고 있는 요정은 곧바로 이드의 어깨로 날아 내려 이드의 귀를 장식하고 있는 라미아를 바라보았다.

이드와 라미아는 그녀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지금 라미아의 말은 그녀의 마법으로 이드와 마오에게밖에 전달되지 않았다.

그런데 스스로 페어리라 말한 그녀는 정확하게 라미아의 말을 들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라미아의 존재까지 정확하게 알아보고 있었다.

“라미아를 알아본 건가요? 어떻게?”

자신이 알기로는 요정족으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페어리들도 한 번에 에고를 가진 물품을 정확하게 알아보거나 마법으로 전달되는 말을 듣지는 못한다.

거기에 한 가지 더하자면 꽃의 모습으로 변하지도 못한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이곳은 특별해서 그런 거니까. 이곳은 신비한 곳, 환상과 현실에 걸쳐져 있는 세계. 그래서 특별하고, 이상한 일들이 많이 생겨 지금의 나처럼. 이곳에 있으면 모두가 특별해. 지금 여기 있는 너희들도.”

그녀는 말하지 않아도 속을 다 안다는 듯 방글방글 웃으며 말했다.

[정말…… 신기한 곳이네요. 이런 곳이 있는 줄은 저도 몰랐는데…….]

“그래서 신기하다고 말하는 곳이지. 그런데 너희들은 어디서 왔지?”

또 새로운 목소리였다.

그와 함께 이드와 마오의 뒤로 땅이 솟아오르며 두 개의 의자를 만들었다.

“앉아서 이야기해. 모두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니까.”

그 말과 동시에 사방에서 수십, 수백의 선명하게 느껴지는 존재감이 강렬하게 일어나며 하나 둘 가지각색의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정말 어린이들이 이 놀랍고 신비로운 광경을 본다면 이곳이야말로 그들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천국이 아닐까 싶었다. 그들은 사물 하나하나를 살아 있는 생명체로 받아들이는 괴상한 존재니까 말이다.

어린이가 아닌 이드와 마오의 눈앞에서는 실로 당황스런 상황이 계속 연출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익숙해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에 대한 동질감과 공격성이 없는 것에 대한 호의가 서로에게 느껴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많은 정령들이 귀를 기울이며 다가왔다.

그 중에는 물의 정령도 있고, 풀의 정령도 있으며, 작은 드래곤의 모습을 한 정령도 끼어 있었다.

여전히 이드의 어깨에 앉아 라미아를 살살 흔들고 있는 페어리의 말대로 정말 상상도 못할 만큼 신비한 곳이었다.

모여든 요정과 정령들의 요청에 못 이기는 척하며 이드는 채이나를 만나고서부터 이곳에 들어올 때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해 주었다. 물론 필요 없는 이야기들은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말이다.

이드의 새록새록 이어지는 이야기에 요정과 정령들은 귀를 종긋 세운 채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요란스럽게 반응하며 즐거워하고 신기해했다. 또 무수한 질문을 쏟아 내기도 했다.

이드는 그들의 말을 끈기 있게 들어 주고 대답해 주면서 마침내 이야기를 마쳤다.

그리고 물었다.

“자, 내 이야기는 잘 들었겠죠? 그럼 혹시 이 중에 나의 연인 일리나가 살고 있는 마을을 알고 있는 분이 있나요?”

이것이다. 세상 다 산 노인도 아니면서 무슨 옛날이야기 하듯 정령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끈기 있게 늘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을 묻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드의 수고를 알아 주는 것인지 주위로 모여든 정령과 요정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알아. 그녀의 마을이 있는 곳을 알아.”

불끈

이드의 양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드디어 바라고 바라고 바라던 정보였다. 꿈 속에서조차 누군가에게 그런 정보를 받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 때로는 열망이 지나쳐 정말 일리나를 만날 수는 있는 것인지 의심도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꿈속도 환상도 아닌 깨어 있는 현실에서 그녀의 거처를 안다는 말에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이었다. 얼마나 열망하며 기다렸던 말인가.

일리나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

아! 그녀를 찾아가는 여정의 종착지에서 이드는 몸이 서서히 가벼워지는 야릇한 느낌을 체험하고 있었다.

이제 이 바라 마지 않던 정보를 듣게 된다면 더 이상 채이나에게 쓸데없이 끌려 다닐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바로 텔레포트로 날아 버릴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자 이드는 더욱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게 어디죠?]

흥분한 이드의 마음을 느끼자 라미아가 주위의 요정들과 자신을 잡고 있는 페어리를 향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질문은 조금 더 빨라야 했다.

라미아와 페어리 사이에 끼어든 목소리가 정령들의 대답을 막아 버린 것이다.

“그만! 이야기하지 마. 그래야 더 재미있다구.”

너무 익숙한 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듯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요정과 정령들의 모습이라니…….

“이…… 채이나아!”

하필이면 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드는 가슴속에 치미는 원망을 담아 소리쳤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를 일이었다.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 이런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것인지조차 모호했다.

적어도 등 뒤에 그녀는 있지 않았고, 근방에 있다 손 치더라도 가능해야 하는데, 그녀의 존재감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덕분에 그녀의 말을 막지도 못했다.

페어리가 말한 이곳이 주는 이질적이고 신비한 경험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엘프에게 유리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는 이 황당한 상황을 설명할 게 없었다.

과연 그런 생각이 맞았는지 의자에 앉아 있는 이드와 마오의 앞쪽 공간이 흐려졌다가 하나의 인형과 함께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당연히 함께 나타난 인형은 채이나였다.

그녀는 얼굴이 푸르락불그락 하는 이드를 바라보며 잔인한 악마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뻐해라, 이드. 내가 일리나가 있는 푸른 나무 마을의 위치를 알아왔다!”

“뿌드득…… 저도…… 채이나만 나타나지 않았으면 들을 수 있었거든요.”

이드는 앞에 태연히, 아니 호기롭게, 아니 당당하게 서 있는 채이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악마의 미소를 지우긴 힘들어 보였다.

“자, 자. 진정해. 이곳에선 정보를 얻으면 자신이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구. 그게 여기 있는 녀석들의 마음이라 뭘 가지고 갈지 모른다고. 혹시 라미아를 가져 가 버리면 어쩔 거야? 이곳은 때때로 인간의 상식마저 통하지 않을 만큼 이질적인 곳이야.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행동이 어쩌면 인간에겐 비이성적이고 돌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고.

정령과 인간이 공생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야. 인간들은 그런 것을 신비하다고 여기는 모양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인간의 이성과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 있기에 신비로운 곳이겠군.”

아무튼 이드 네가 아무리 절대의 강자라지만 그 역시 이곳에서 전적으로 통할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절대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곳이지. 오히려 내 덕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

나도 푸른 나무 마을의 위치를 듣는 대신에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기로 하고 알아낸 거라고.”

그녀의 말에 주위에 있던 요정들과 정령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무엇이 그렇게 좋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채이나의 말마따라 이들의 생각과 자신들의 생각은 완전히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다소 끔찍한 느낌이 됫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저게 정말일까? 놀리는 거 아냐?’

[글쎄요.]

엘프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지만 채이나만큼은 믿을 수가 없는 두 사람이었다.

그것도 이제는 신비하다기보다는 엉터리처럼 보이는 이 요정의 광장에서 하는 말이다. 신용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알아왔다니…… 다행이네요. 수고하셨어요.”

이드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채이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또 다짐했다. 일리나만 찾으면…….

[글쎄, 찾으면 뭘 할 거냐니까요?]

이번에도 이드의 속마음을 보지 못한 라미아였다.

“자, 알아볼 건 다 알아봤으니까…… 이제 나가자.”

이번에도 이드의 속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 채이나의 말이었다.

채이나의 말에 따라 이드 일행은 이곳 반정령계 요정의 광장에 들어온 지 사십 분 만에 밖으로 나갔다.

처음 이곳을 이야기할 때 채이나가 말했던 많은 엘프와 이종족들은 그림자도 보지 못한 채 수십, 수백의 희한한 정령들만 보고 떠나게 된 꼴이다.

그러나 큰 아쉬움은 없었다. 목적은 이루었고, 그 보랏빛 페어리의 행운의 키스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귀여운 요정의 키스는 이종족들과의 만남 이상의 것이었다.

또 페어리의 키스는 저주와 축복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도 있었고 말이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요정의 광장을 나선 세 사람.

하지만 금방이라도 목적지를 향해 출발할 것만 같았던 세 사람은 요정의 숲을 바로 나서지는 않았다. 이미 해가 져 버린 시간이라 굳이 야행을 할 건 아니었으므로 노숙을 하며 하룻밤 이 숲에서 묵어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드는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고 누워 있자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채이나를 생각하면 속이 끓지만 일리나가 머물고 있을 마을을 찾았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이제 일리나를 만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드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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