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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3화


490화

“크크큭.”

파이온은 보름달처럼 새하얀 에단의 얼굴을 보며 키득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이야기했소.”

긴 이야기를 마친 파이온은 편한 얼굴로 등을 기대고 앉았다. 이후의 일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방 안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제법 대단해 보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심각한 얼굴이 되어 있다는 사실도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그때 이드가 물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 거죠? 무언가 목적이 있으니까 우리가 성으로 가는 것을 막았을 것 아닙니까?”

그 말이 맞았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 불을 당긴 건 이드들이다. 꼬시다고 박수를 치면 몰라도, 자신이 발각될 위험을 감수하고 이드에게 경고를 날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을 게 분명했다.

“당연히 원하는 것이 있소.”

파이온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이라는 듯이 두 손으로 탁자를 짚었다.

“나는 영주성에서 탈출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이상은 힘들었소. 상처를 입고 더 멀리 가지도 못하고 영주성 근처의 굴뚝 속에 숨어서 떨어야 했소. 내 힘으로 하이탈을 탈출하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지. 그때 저 남자가 성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소. 그래서 그를 쫓아서 여관까지 갈 수 있었던 거요.”

파이온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그는 앞서 이야기할 때보다 훨씬 진지한 모습이었다.

대장은 그의 말을 듣고 포식자에 대한 생각으로 아직 멍한 표정인 에단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다 그의 정강이를 송곳처럼 차올렸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 없게 발 주변의 마나를 동결하여 부딪치는 소리가 새지 않도록 만들었다.

정강이 하나 차는 데 사용하기에는 아까운 고급 기술이다.

‘으악! 미쳤어요? 대장!’

탁자 밑으로 갑작스럽게 날아든 발에도 에단은 용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내심 비명을 지르며 대장을 노려봤다. 수년간 함께 사선을 넘은 덕분에 간단한 뜻은 눈으로 주고받을 수 있었다.

‘야, 이 돌대가리야. 도대체 그동안 수련한 건 어디다 팔아먹고, 부상자가 따라오는 것도 몰라!’

‘아니, 저 새끼가 굴뚝 속에 있었다고 하잖아요. 지붕 위로 쫓아오는 놈을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걸 왜 몰라? 공기의 파동은? 기척은? 마나의 이상 난류는? 내가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해 줬잖아!’

‘아, 그게 이럴 때 써먹는 거였습니까? 몰랐죠. 지붕 위로 추적당한 적이 있어야 알지요.’

‘야, 이 새끼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뺀질거리는 에단의 대답에 뚜껑이 열린 대장은 여전히 에단의 정강이에 닿아 있는 발끝을 마나로 강화해서는 맷돌처럼 에단의 정강이를 갈아붙였다.

‘끄아악!’

순간 에단은 처음 정강이를 맞았을 때보다 더한 비명을 속으로 지르며 발을 빼려 했지만, 그에 앞서 대장이 남은 발로 그의 발뒤축을 걸어 당겼다. ‘으헉!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이놈, 어딜 도망가려고!”

시커먼 남자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얼굴을 이리저리 구기며 눈을 맞추는 모습은 바보처럼 한심해 보였다.

누가 볼까 부끄러운 그 모습에 이드는 작게 혀를 찼다. 저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에단과 얽히기만 하면 왜 바보짓을 하는지 도저히 모를 일이다. 이드는 모른 척하기로 하고 파이온에게 눈을 돌려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사실을 알려주고 힘을 합칠 생각이었소. 자작이 당신들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들도 분명히 하이탈을 탈출하려고 할 것이니 말이오.”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죠. 보통은요.]

가만히 듣고 있던 라미아가 그렇게 말하며 슬쩍 이드를 돌아보았다.

과연 보통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는 이드에게는 어떤 것이 일반적일까.

이미 한 번 그녀에게 지져진 파이온은 갑자기 말을 하고 나선 그녀의 모습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경계하며 앉아 있던 의자를 뒤로 살짝 물렸다.

그때 대장과의 시시한 눈싸움을 마친 에단이 끼어들었다.

“크흠. 저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스터. 자작과 엮여 봤자 괜히 문제만 복잡해질 겁니다. 자작에 대한 문제는 제국에 가서 천천히 초인들에게 정보를 흘리면 그들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겁니다. 포식자는 초인들에게 공공의 적이니까요.”

에단은 파이온의 말에 힘을 실어 주고 자작의 처리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적극적으로 탈출을 주장했다. 그로서는 자신을 노리는 괴물이

있는 하이탈에 더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드는 에단의 강력한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파이온은 초조한 듯 깍지 낀 손으로 이드를 바라보았다.

이곳의 분위기와 지금까지 이야기를 주도한 것을 보아 이 방에서 가장 어려 보이는 그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드들이 택할 수 있는 길도 이것뿐이다 싶었지만, 막상 말로 나오지 않으니 불안하긴 했다.

그러나 파이온의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이드의 대답은 금방 나오지 않았다.

이드의 마음은 앞선 이야기를 듣는 중에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흡성대법과 비슷하잖아.’

하이탈 자작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드는 상대의 내공을 강제로 흡수하는 흡성대법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었다. 강호무림의 마공이자, 무인을 유혹하는 마물. 가지고만 있어도 무림의 공적이 되는 귀물. 그것이 흡성대법이다. 내공을 흡수하는 무공인 흡성대법과 상대를 잡아먹고 능력을 키우는 초인 포식자.

추구하는 목적도 다르고 형태도 다르지만, 강해지기 위해서 타인의 것을 갈취한다는 부분에서 너무도 닮아 있었다.

특히, 흡성대법의 경우 타인의 내공을 탈취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흡성대법의 소유자는 모든 무림인에게 공공의 적이 되었다.

내공이란 무인에게 평생 수련의 결과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인에게 수련이란 그의 인생과 같은 것이다.

무인은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서 스스로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 이상은 스스로의 완성일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얻어질 명예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이 어떠하든 그것을 위해 깊은 수련을 쌓다 보면 그 결과물의 하나로서 내공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흡성대법은 이런 내공을 탈취하는 수법이다.

무인들에게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는 것도 당연했다. 흡성대법이 빼앗아가는 것은 단순한 내공이 아니라 무인의 피와 땀이자 인생의 기록이며, 그걸 빼앗는다는 건 무인으로서 가지는 자아의 근간을 무너트리는 행위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흡성대법의 유혹이 강렬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의 노력 없이 타인이 피땀 흘린 노력의 결정체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가지고 있는 명예와 힘이 내 것이 된다.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군침 도는 짜릿한 쾌감이자 무인의 자존심을 버리게 하는 악마의 유혹이었다.

흡성대법이 무림에 나타나는 순간 공공의 적이 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무인의 자존심에서 자연스레 일어나는 분노를 표출하는 동시에, 모든 무인들에게 흡성대법에 대한 유혹과 욕망을 경계하고 스스로 조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드는 초인의 반응이 격렬한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준 힘과 생명을 통째로 빼앗아가는 행위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런 방법으로 스스로의 능력을 키울 수는 있겠지만, 그러다가는 모든 초인의 적이 되어 죽게 될 것이라는 현실적인 경고.

“그럼 하이탈 자작이 다른 초인들에게 몰매 맞아 죽기 전에 가서 한번 만나 보자.”

“마, 마스터!”

“으음!”

무언가 생각에 빠져 있던 이드가 문득 입을 열어 내놓은 결론에 라미아와 일리나를 제외한 모두에게서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로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상황에서는 썩 이성적이고 효율적인 대처 방법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하이탈을 나서서 자작에 대한 이야기만 해 놓아도 자동으로 해결될 일인데, 상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직접 얼굴을 보겠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마스터, 굳이 자작을 직접 만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번에는 에단의 의견이 크게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현재 하이탈 자작의 힘도 일반적인 초인의 경지를 넘어서 있을 것입니다.”대장도 비슷한 마음으로 드물게 에단의 의견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드는 오히려 그 말에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래서 직접 만나 보려고 합니다. 그의 힘을 보면 초인이 어떤 자들인지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저는 초인이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아주 많이 궁금해요. 그리고 에단의 말대로 하면 하이탈 자작이 제재를 받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동안 저자는 계속해서 사람을 먹을거리로 보고 침을 흘릴 텐데, 그 꼴을 어떻게 그냥 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우묵한 눈으로 벽 너머에 있을 영주성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이리저리 떠돌고 있지만, 이드도 당당한 무림의 무인이었다. 그에게도 흡성대법에 대한 무인으로서의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거부감은 흡성대법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포식자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드를 지켜보고 있던 라미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의 말이 틀린 건 없죠. 그냥 두면 희생자가 얼마나 더 늘어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이드가 마음에 걸린다면 처리하고 가요.]


대장은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들었다.

기사도를 아는 기사의 입장에서 보면 이드의 말이 맞다. 그러나 트와이스의 대장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이드가 제국도 아닌 타국의 일에 피해를 입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드는 이미 제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목적지가 황궁이든, 소드 팰러스든 상관이 없었다. 그는 제국의 핵심 인물로서 제국을 강하게 만들어 줄 사람이니 그가 제국과 상관없는 일에 나서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이드는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다. 자신은 이드의 생각을 돌릴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대장은 이드와 하이탈 자작이 싸우면 일어날지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당장 하이탈을 떠나자던 에단은 이드의 결정이 내려지자 오히려 느긋한 모습이었다. 그는 달관한 표정으로 말했다.

“놈이 날 노리기 전에 마스터께서 먼저 처리해 주시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

에단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드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아무리 하이탈 자작이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이드는 저 시간의 신인 칼마의 권능마저 비켜 가는 초인이었다.

‘빌어먹을!’

이드의 대답을 기다리며 입만 바라보고 있던 파이온의 어깨가 가슴까지 떨어졌다.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이, 이봐. 상대는 일반적인 강자가 아니오. 보통 초인이 아니라고. 벤 같은 놈을 상대로 쉽게 이겼다고 해서 자작을 상대로도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엄청난 오산이라고!”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실망할 것 같으니까.”

“미, 미친…….”

파이온은 웃으며 답하는 이드의 모습에 머리가 아팠다. 도대체 자신이 발각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에단을 뒤쫓고, 이드에게 위험을 알린 것은 무엇을 위해서였다는 말인가.

“난…… 싸우지 않겠다. 그런 괴물과 싸우고 싶지는 않다.”

파이온은 이 바보들과 더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이들과 함께 움직이다가는 같이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드로서는 파이온이라는 인물은 처음부터 일행의 테두리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 이드는 별말 없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하세요. 이곳에 숨어 있다가 틈이 보이는 대로 도망쳐도 좋고, 하이탈 자작이 죽고 나서 나와도 좋아요. 대장님, 이곳에 이 사람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은 있겠죠?”

“당연합니다. 안가에 시크릿룸은 필수지요.”

파이온은 하이탈 자작이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이드의 모습에 기가 막혔지만, 자신을 챙겨 주는 그의 행동과 대장이라고 불린 이의 말에 고개를 숙여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곳이건 굴뚝 안보다 나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하이탈에 안가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앞서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제국의 인물 같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하이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하기야 산적이 걱정할 일은 아닌가? 더구나 하이탈에 누가 있든 무슨 상관인가. 누가 됐건 하이탈을 무너트려 준다면 대환영이다!”

파이온은 일단 잠시지만 편히 쉴 수 있는 곳을 마련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일은 이곳에서 나가 있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성으로 가서 하이탈 자작에게 잡히면 자신에 대해서도 자백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파이온은 백이면 백,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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