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9화
356화
‘말로 풀어 낼 상황은 아닌 거지, 이거?’
이드는 2미터가 넘는 거체가 검을 세우는 모습을 보며 말로 상황을 풀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은기사가 대화로 해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오해를 깔고 주고받은 이야기를 기초로 생각해 봐도 좋게 풀어 낼 수 없는 관계였다. 화원에 대한 외부인의 침입을 막겠다는 은기사의 생각이 확고한 탓이다.
그렇다고 이드 자신의 정체와 목적을 이야기해 줄 수도 없었다.
이 은기사가 긴급대책위와 완전히 무관하다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관계가 없을 수가 없었다.
은기사 역시 소드 팰러스 안에 있는 화원을 지키는 자다. 소드 팰러스에 머물고 있는 사람으로서 직간접적으로 긴급대책위의 인물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살아갈 수는 없는 게 당연했다.
설사 정말 운이 좋아서 은기사가 시르피 개인의 사람이라고 해도, 과연 그가 이드의 설명에 납득하고 이드를 화원에 들일까? 이드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은기사가 긴급대책위의 인물들과 같은 요구를 해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럼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증거로 내가 보는 앞에서 그의 무공을 펼쳐 보여라. 검후님께 전했던 기술들과 함께!’
어쩐지 은기사의 갈려 나가듯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귓가에 당장이라도 울릴 것 같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에게 얻어 낼 생각뿐이구나. 이놈의 소드 팰러스는 검사들의 성이 아니라 아귀(餓鬼)의 성이야, 아귀의 성.’
이드는 소드 팰러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이곳을 떠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은기사의 정체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순간 이드의 생각을 읽은 라미아의 목소리가 가슴속에서 들려왔다.
[어떻게 하긴요. 상대가 이야기하고 싶도록 만들면 되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상대가 진심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말하는 상태를 이르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드도 그 방법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미 상대는 그 이외의 결론이 나오지 않도록 행동하고 있었다.
“그럼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
이드는 일라이져를 꺼내 들었다.
막 공격을 시작하려던 은기사는 일라이져를 바라보더니 콧방귀를 뀌며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하! 그게 네놈의 검이냐?”
“내가 아끼는 검이지요.”
“네가 그 검을 완벽히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기를 빌어 주마.”
얼굴은 투구로 가려져 있지만 어쩐지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퉁!
다음 순간 은기사는 무거운 풀플레이트 메일을 걸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지면을 박찼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의 걸음만으로 이드의 코앞에 도착해서 검을 내리쳤다.
기술이나 속임수가 전혀 가미되지 않은, 끝없는 수련 후에야 할 수 있는 완벽한 내려치기였다.
‘좋구나.’
이드는 하나로 연결되는 단순한 동작에 감탄했다. 그것이 기본기를 무식할 정도로 철저하게 거친 후에야 나올 수 있는 깨끗한 일격이었던
때문이다.
고집이 강해서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지만, 이 일격으로 그의 검술만은 인정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는 좋은 검이다.’
이드는 어쩐지 자신이 처음 수련을 시작하던 때가 생각나게 만드는 검술에 보답을 주기로 했다. 그의 내려치기와 똑같은 올려치기로 은기사의 검을 막아낸 것이다.
떠엉!
두 개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에 홀 전체가 떨어 울렸다. 무도회의 음향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덕분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은기사는 이드가 자신의 내려치기를 막아 낸 것에 살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어지는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었다. 이어지는 것은 내려치기와
수평 베기, 그리고 올려치기의 연속이었다. 그에 대응하는 이드의 검도 마찬가지였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 은색의 직선들이 무수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웅-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검격음에 홀은 마치 거대한 북을 끝없이 두드려 대는 듯 웅장한 소리로 가득 찼다.
몇 호흡일까. 그 짧은 순간에 수백 번은 검을 휘두른 것 같았다.
‘내가 잘못 봤구나. 이자는 단순한 애송이가 아니다. 강자다
투구의 하얀 눈구멍에 가려진 은기사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처음에는 이전과 같이 검후님의 실종을 전해 들은 소드 팰러스 수뇌부의 자제라고 생각했다. 검후의 실종을 전해 들은 그들이 어린 나이의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화원을 찾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은 탓이었다. 물론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기밀이란 말이 무색하게 검후에 대한 일을 가족과 자식에게 흘려 버린 멍청이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귀한 정보를 접한 애송이들은 자신이 이야기 속의 영웅이라도 되는 것처럼 화원에 숨어 들어왔다. 그리고 하나도 남김없이
은기사를 만나게 되었다.
화원을 찾은 그들의 목적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어쩌면 자신이 실종된 검후를 찾을 영웅일지도 모른다는 환상과 어쩌면 자신이 검후의 숨겨진 비기를 찾아 초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을 품고 있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바보 같은 이야기에 은기사는 친절하게 정성 들여 그들의 몸에 현실을 새겨 주었다. 그리고 피 떡으로 변한 그들을 검궁에 던져 버렸다.
오늘도 그런 줄만 알았다. 그리고 상대가 검을 꺼내 들었을 때, 그 바보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바보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 있게 꺼내든 것이 단검보다 조금 더 긴 소검인 때문이었다.
검사에게 있어 가장 주요한 것은 물론 실력이지만, 무기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은기사였다. 특히 같은 종류의 무기를 들었을 경우 무기가 가지는 사정거리는 승패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다.
그런데 상대는 자신이 일반적인 롱소드보다 반 배 이상 더 긴 검을 들었는데도, 오히려 작은 소검을 꺼내 들었다. 은기사는 이게 무슨 자신감 과잉인가 싶었다.
동시에 화가 났다. 애송이다운 혈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소드 팰러스의 검사로서 저 겉멋만 잔뜩 든 것 같은 만용은 도저히 그냥 보고 넘길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체의 군더더기와 변화를 배제한 필살의 내려치기를 통해서 그를 계도하고자 했다. 물론 그는 그 대가로 팔 한쪽은 내놓아야겠지만, 어느 이름 없는 뒷골목에서 목이 베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이 철저하게 틀려 버렸다. 그 작은 소검으로 자신의 강격을, 그것도 위에서 내려치는 힘을 아래에서 올려치는 것으로 막아 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방에서도 전혀 밀리는 모습이 없다.
‘이자는 무기의 한계를 벗어난 자다. 어쩌면 이자야말로 내가 이 갑옷을 입고 이 자리에서 기다렸던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은기사의 머리를 스치는 순간 이드에게는 라미아의 목소리가 닿고 있었다.
[이드, 너무 기분 내는 거 아니에요? 너무 시간을 끌면 좋지 않아요. 목적을 잊지 말아요.]
‘아, 미안미안. 옛날 생각이 나서 말이야. 빨리 마무리할게.”
이드는 기분 냈다는 라미아의 말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오랜만에 정말 제대로 된 기본기를 접하고 옛 추억에 잠긴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대로 지금은 엉뚱한 추억에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어쩌면 쩌렁쩌렁 홀을 울리는 소리에 이미 밖에서 난리가 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 믿고 있다구, 라미아!’
[예이, 예이. 걱정 마세요. 그런 일은 없으니까. 제가 어떻게 하지 않아도 이 화원에 설치된 마법 덕분에 이곳의 소리는 밖으로 전혀 새나가지 않고 있으니까요.]
‘땡큐!’
이드는 라미아의 대답에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키스를 띄워 보냈다. 동시에 비어 있던 이드의 왼손이 허공을 점했고, 그의 손가락 끝에서 녹색 구슬이 떨어져 은기사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취을난지!’
“이놈, 암수를!
그렇지 않아도 이드에 대한 경계를 한껏 끌어 올리고 있던 은기사였다. 눈앞을 어지럽히며 나타난 이드의 지공에 즉시 검을 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이드는 찰나 간에 드러난 은기사의 배를 쓸었다.
푸스스스.
그것은 간단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의미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음유한 기운을 흘려 장애물 넘어 적을 치는, 격산타우로 속을 부수는 침투경의 무서운 일수였다. 이게 바로 중원에 갑옷을 입고 설치는 무인이 없는 이유였으며, 그레센 대륙에 파츠 아머가 대세를 이루도록 만든 원인이었다.
어떻게 보면 은기사는 시대에 뒤떨어진 무인인지도 몰랐다.
이드는 은기사가 멈칫하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전력을 상실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은색의 갑옷 위에 새겨진 청색의 마법진이 번개와 같은 속도로 빛을 내더니 은기사의 뒤에서 묵직한 소음이 들려왔다.
퍼서석!
그것은 그의 뒤에 있는 홀 바닥이 가루로 부서지면서 나는 소리였다.
“어리석은 놈!”
“헛!”
이드는 생각지 못한 소음과 이어지는 은기사의 노성, 그리고 그 뒤를 바싹 쫓아서 날아오는 은기사의 검날을 보며 헛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이드는 정말 놀라고 있었다. 상대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어 힘 조절은 했지만 분명히 제대로 들어간 공격이었다. 죽지는 않겠지만, 죽을 것 같은 고통에 바닥을 뒹굴어야 할 존재가 멀쩡히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놀랄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이드의 몸이 특별하고 강하다고 해서 이 검을 그대로 맞아 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상처의 문제가 아니라 기분의 문제였다.
기운을 담은 이드의 손이 은기사의 검면에 올려졌다.
쯔즈즈릉-
기운과 기운이 부딪치며 기괴한 소성이 흘렀다. 동시에 이드는 검의 힘을 타고 은기사의 등 뒤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자리가 바뀌었다.
몇 미터를 미끄러져 착지한 이드는 발밑에 보이는 잘게 부서진 돌 조각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깨져 나간 모양이 자신의 침투경에 의한 역도(力圖)였다.
‘어째서 이게……..?
그때 이드의 기억 속에 침투경이 투입된 곳을 시작으로 빛살처럼 달려가던 청색 빛이 떠올랐다.
‘과연. 생각 없이 저런 물건을 걸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
처음 대륙에 떨어졌을 때 격산타우와 침투경에 나가떨어지던 기사들을 기억하고 있는 이드로서는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당연히 쓰러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방심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충분히 반성해야 할 점이기도 하다. 단단한 몸이라고 부서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 쓸데없이 긴장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방심하는 것도 꼴사납다.”
이드는 늘어진 스스로의 마음을 단속하며 은기사를 살폈다.
“그 갑옷, 보통 물건이 아닌가 보오.”
“네놈의 정체에 따라 네놈을 위해 준비한 물건이 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짜증과 분노가 가득하던 은기사의 목소리에 음울한 살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네놈, 소드 팰러스의 사람은 아닐 테지. 정체를 밝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