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6화


543화

클라인 백작은 멀리 창밖으로 보이는 화원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화원에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침입자의 존재 자체는 클라인의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그동안 화원에 몰래 기어든 바보들이 어디 한둘이어야 긴장을 하고, 걱정을 하지. 심심하면 한 번씩 벌어지는 바보들의 행진은 이제 특별할 것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다.

‘기밀’이라는 단어의 뜻도 모르는 바보들에게 그 단어의 뜻을 두개골 속에 깊게 새겨 주는 친절을 베풀기를 망설이지 않은 클라인이었다. 그때의 짜릿한 손맛이란………………

스트레스가 쌓일 때 한 번씩 생각나는 그 손맛은 확실히 중독성이 강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상황이 달랐다면, ‘기밀’이 검후와 관련한 사항이 아니었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바보들이 나서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만에 하나 그런 바보가 있어도 ‘기밀’을 유출한 작자와 함께 목이 잘려 나갔을 테니까.

그러나 바보들에게는 천만다행으로 검후와 관련한 사항은 소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오픈된 기밀’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검후가 사라진 지도 이미 일 년이 다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자식이 귀여워도 집으로 돌아간 기사들이 그런 일을 자식들에게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로는 바보처럼 맹목적인 돌진밖에 모르는 기사들이지만 결코 멍청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오래 지켜질 비밀은 아니었지. 옆집 남편이 집을 나가도 그 비밀이 이틀을 못 가는데, 나라의 큰 인물이 사라진 비밀이 오래갈 턱이 있나.” 

특히 검후 정도의 유명인이 한 달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건 그녀를 눈여겨보는 수많은 세력들에게 ‘제발 의심해 주세요’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소드 팰러스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보 유출에 대한 취약점이 가장 큰 문제이기도 했다. 이것은 소드 팰러스 설립 때부터 가지고 있는 열린 시스템에서 오는 약점이었다.

일찍이 소드 팰러스는 검후를 존경해서 자연적으로 모인 기사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자연적인 모임이기는 하지만 아는 사람만 알고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찾게 되는, 어찌 보면 회원제로 운영되는 비밀 클럽과 같이 철저히 닫혀 있는 시스템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런 소드 팰러스가 황제의 인정을 받고 체계가 세워지면서 달라져 버렸다.

철저히 닫혀 있던 시스템에서 오는 기사 막지 않고 가는 기사 막지 않는, 전 대륙을 향해 활짝 열린 시스템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비밀 클럽이 동네 사랑방으로 변해 버린 것과 같다.

지금 생각하면 정보부의 모든 사람의 속이 뒤집어질 일이지만, 이는 소드 팰러스로 새롭게 모여든 기사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소드 팰러스가 초인에게 밀리고 있는 기사들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기를 원했다.

그런데 이 계획을 생각한 기사들의 오지랖이 쓸데없이 넓었던 모양인지 그들은 아나크렌 안의 기사만을 생각하지 않고, 전 대륙에 걸쳐 초인에게 밀리고 있는 기사들을 대상으로 일을 진행했다.

이 시기 아나크렌의 기사들은 전 대륙의 기사들을 선도한다는 우월감과 자부심이 남달랐는데, 이는 제국과 검후를 중심으로 퍼져 나간 무공 때문이었다.

그들은 은연중 자신들을 기사들의 대표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기사로 대변되는 무인 세력의 지휘와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것인지, 그 뒤의 꿍꿍이가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일은 어렵지 않게 풀렸다.

스케일이 제국에서 대륙으로 커져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소드 팰러스의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소드 팰러스는 만인의 것이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아나크렌 황궁에서도 소드 팰러스의 열린 시스템을 원했다.

아니, 그들이 앞장서서 그런 시스템을 소드 팰러스에 짜 넣었다. 신하들이 조언하고 황제가 허가한 일이었다.

그들은 제국 안에 제국의 손을 떠난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제와 같은 피가 흐르는 고모를 믿는 것과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고 본 것이다.

황궁에서는 기사들의 구심점이 되면서 닫혀 있는 시스템을 유지할 경우 소드 팰러스가 하나의 국가와 같은 거대 세력이 될 것이라고 심각하게 경계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열린 시스템으로 소드 팰러스를 허락했다.

기사들은 당연히 받아들였다. 오히려 그들이 바라던 바였다. 그들은 떳떳했고, 당당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초인에게 밀리는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고 싶고, 충성을 맹세한 믿음을 지키고 싶을 따름이었다.

검후는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황제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녀는 권력에 전혀 뜻이 없었다. 차라리 제국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묵묵히 황제의 뜻을 따를 뿐이었다.

“검후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다른 놈들은………… 질투에 눈이 먼 등신들이었던 거지.”

클라인은 비밀을 유지하기 힘들도록 만들어진 소드 팰러스의 형태에 짜증이 치밀었다.

그때의 멍청이들은 대륙 모든 기사들의 구심점이 된다는 일이 얼마나 엄청나고 중요한 일인지 몰랐단 말인가. 설마, 초인을 밀어내기만 하면 소드 팰러스는 필요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목 위에 달려 있는 걸 투구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지금도 가끔 소드 팰러스가 세워질 때 한 손을 거들었던 노인들을 보면 열불이 오르는 클라인이었다. 황궁의 말에 고개만 끄덕거린 그들로 인해서 소드 팰러스에서 만들어지는 기밀 사항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데.

“아, 생각할수록 열 오르네.”

파닥파닥.

클라인이 속에서 차오르는 울화에 손바람으로 얼굴을 식혔다.


소드 팰러스는 기사의 성지로서 한 점의 숨김도, 부끄러움도 없이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하다.


소드 팰러스에서 교육받은 기사들이 자랑스럽게 하는 말이지만, 그것은 클라인과 정보부 요원들의 피와 눈물로 쓰인 표어였다.

특히나 검후의 실종 후에 노골적으로 변해 가는 제국의 견제를 느낄 때마다 이런 원망은 점점 더 강해질 뿐이었다.

“황궁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일반 귀족 가문 정도의 보안만 유지돼도 내가 이 고생은 안 한다.”

검은 여우라는 별명에 걸고, 절대 머리에서는 다른 세력에 딸린다고 생각하지 않는 클라인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정보들이 줄줄 새나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도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당장 멀리서 그 예를 찾을 필요도 없다.

요즘만 해도 그렇다.

도대체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간 것인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와 소드 팰러스의 불화설이 돌면서 소드 팰러스를 흔들고 있다.

도대체 그날 있었던 불편한 대화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빠져나간 것일까.

지금 제국 안에는 소드 팰러스의 권력자들이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견제하고, 적대시하고 있다는 소문이 쉬쉬하며 돌고 있다. 미치고 팔짝 뛸 일이지만 적이 많은 소드 팰러스의 위치 때문에 정확히 누구의 짓인지 특정하기도 어려웠다.

“후아, 후아.”

클라인은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음에 창문을 열어 차가운 공기를 마셨다.

그들이 재주 좋게 빼냈든지, 누가 빼돌렸든지 어떤 상황이라도 반갑지 않은 일이다. 솔직히 무시해 버릴 수 있으면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클라인이지만, 불가능한 일이라 더 속이 탔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런 클라인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부쩍 심해진 위염으로 끙끙거리며 출근했더니 은밀히 연결해 둔 마법 등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노란색으로, 침입자를 알리는 색이었다.

벌레 먹은 잎처럼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방첩망을 메꿔 볼 생각에 예비의 예비로, 극비리에 설치한 것이었다.

급히 근원지를 찾은 결과 화원이었다.

처음엔 마음이 놓였고, 즐거웠다. 이번에 침입한 애송이는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 철저하고 특별하게 정성 들여 굴려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당일 퇴근 시간이 되도록 데일리 경에게서 아무 소식이 없었다.

침입자는 있는데, 보고는 없다.

클라인은 퇴근 시간을 넘기고서도 화원을 보며 기다렸다. 내심 침입자의 정체는 짐작이 되었다.

“내 눈이 틀린 게 아니라면 침입자는 이드라는 남자의 일행이겠지.”

이드의 화원 잠입을 확신한 클라인은 혹시 그가 화원에서 얻은 것이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그것은 ‘어쩌면’ 정도의 기대였다.

클라인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굳은 듯이 창틀에 앉아 화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

반짝!

그가 애지중지하는 마법 등에 붉은 불이 들어왔다.

마법진의 연결이 해제되면 파란색, 침입자가 있으면 노란색, 마법 통신이 감지될 경우 붉은색 불이 켜지도록 만들어진 마법 등이었다.

지금 그 등에 불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마법 통신이 감지되는 곳도 정확히 화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으흐흐. 그래, 언제까지 이 검은 여우가 엉뚱한 놈들 뒷수습만 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 나 정도 되면 흐름을 선도하는 게 어울리지. 크큭.” 

비시시 웃어 보인 클라인은 굳은 몸을 풀고 일어나 화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정이 넘어 새벽이 가까운 시간, 클라인은 자신의 목적을 90% 이상 달성한 후 울상이 된 데일리를 남기고 기분 좋게 화원을 나왔다. 

“좋았어! 이번에야말로 한발 앞서 나가리라.”

클라인은 분연히 주먹을 쥐며 다짐해 보였다.


에단은 밤을 꼬박 샜다.

‘네가 알아서 해라.’

이드가 농담으로 한 말이란 걸 알고 있지만 에단의 고민은 깊었다.

에단은 그 일을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신자라니. 시르피가 남긴 글이 아니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정보 쪽 일을 하면서 볼 것, 못 볼 것, 더러운 일은 모두 겪었다 싶었지만 설마 내 집에서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탓에 에단의 충격은 특히 컸다.

하지만 충격을 받았다고 자신이 본 것이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책 속에서 검후는 그녀가 별장이라고 부르는 통나무집을 감시하는 인기척을 느꼈다고, 그 기척은 분명히 자신을 노리고 있었노라고 적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고 했다. 자신의 소지품에 특별한 마킹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검후는 담담한 필체로 적었다.

소드 팰러스에 기사도를 배신한 배덕자가 있다고. 검후는 자신을 배신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소드 팰러스를, 기사도를, 기사를 배신했다고 말했다. 에단은 그러한 글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검후가 소드 팰러스와 일정한 마음의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검후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에단으로서는 스스로의 생각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와 같은 생각이 밤새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책 안에서 검후는 은색 기사단에 대한 믿음을, 네리베르를 포함한 몇몇 기사에 대한 사랑과 정을 적고 있지만 그게 다였다. 그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애정 섞인 글은 없었다.

“허무하구만…….”

에단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뭐가 허무한데?”

“아, 일어나셨습니까. 마스터!”

“밤을 새웠나 봐?”

“아무래도 머릿속이 복잡해서요.”

“쓸데없는 고민이야. 네가 풀어야 할 문제도 아니고.”

선을 그어 버리는 이드의 말에 에단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은 없지만 섭섭합니다, 마스터.”

“섭섭하기는 사실인데. 풀 수 없는 문제를 안고 끙끙거리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어. 혹시 영웅이 되고 싶다면 또 모르지.”

“네?”

갑자기 웬 영웅?

“그런 쓸모없는 고민거리를 혼자 끌어안고 끙끙거리며 풀어 내는 인간을 영웅이라고 하잖아.”

“……헐…..”

에단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드를 바라봤다. 설마 영웅으로 칭송받는 그 본인이 영웅을 저렇게 평가하다니.

그때 라미아가 푸드득 날아와서는 에단을 달랬다.

[지금 말은 그냥 신경 쓰지 말아요. 책을 읽은 후부터 기분이 별로라서 괜히 투정 부리는 거니까.]

“내 나이가 얼만데 투정은…………….”

과연 이드가 라미아의 말에 입을 삐쭉이고 있다.

에단 역시 같은 일로 밤을 새웠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만한 상황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가 그런 에단을 불렀다.

“그보다 에단, 어제 네가 말했던 보고서 있지. 네 상사가 아직 확인 안 한 거 확실하지?”

“물론입니다. 그걸 봤으면 당장 절 불러서 머리를 열어서라도 알고 있는 걸 모두 뱉어 내게 만들었겠죠.”

“좋아,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