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7화


544화

“그 보고서 다시 빼내 올 수 있겠어?”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이드의 질문에 에단이 즉답했다.

그다지 인격적으로 완성된 상사를 두지 못한 대부분의 부하들이 그럴테지만, 에단도 머릿속으로 수십 번 상사의 목을 따 봤다. 그러는 과정에서 상상이기는 하지만, 상사의 집무실을 비롯해서 그의 집 등에 몇 번이나 침투했다.

그것도 특수 요원이라는 특별한 직업을 가진 특성 탓에 쓸데없이 세밀한 디테일을 가지고.

이드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서류 두는 곳이 드나들기 쉬운 곳인가 봐?”

“그렇지는 않지만 몇 번이나 암살을 시도해 봐서 견적이 나옵니다.”

“뭐?”

이드가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듯 에단을 봤다.

“아니, 이상한 일이 아니라 그냥 훈련 삼아 이미지 트레이닝을 꾸준히 해 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익숙하기도 하지만 어려운 곳이니까요. 혼자라면 어렵지만 조금만 도와주시면 큰 어려움 없이 제가 올려놓은 보고서를 빼올 수 있습니다. 빼올까요?”

에단은 이드가 명령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움직일 태세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소드 팰러스에 적이 있는 상황에서 이드의 정보가 퍼져서는 좋을 게 없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언제든지 빼내는 게 가능하다는 걸 알았으면 됐어.”

하지만 이드는 아직 결정하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스터, 제 보고서가 언제 읽힐지 모릅니다. 당장 지금 보고서를 읽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 그때는 그것대로 대처하면 돼.”

“아니, 그래도. 끙!”

에단은 나름대로 정보 계통에서 일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다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어쩌면 그게 그의 단점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에단이 정보 계통의 요원으로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 일은 모두 정보를 지키거나 비밀리에 빼내 오는 것들이었다.

자연스럽게 고급 정보는 숨겨야 한다는 쪽으로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쯧, 너무 안달하지 마. 내가 봤을 때 둘 다 각각 장단점이 있으니까. 단지 나와 시르피와 책에서 언급한 문제들을 알아보는 데 어느 쪽이 더 도움이 될지 정하지 못한 것뿐이니까.”

“으음……… 그러네요. 소드 팰러스의 문제만이 아니었지요.”

에단이 뒤이어 생각난 듯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한발 물러났다. 그리고 밤새 고민하다가 생각이 한쪽으로 너무 치우쳤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있는 곳이 소드 팰러스이고, 그의 소속도 소드 팰러스다 보니 너무 소드 팰러스 중심으로 사고가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에는 소드 팰러스만이 아니라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로 활동할 당시 카논의 대륙 통일을 목표로 전쟁을 벌였던 혼돈의 파편이라는 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인간에게는 언제나 환상 속 존재인 드래곤에 관한 이야기까지.

‘확실히 소드 팰러스만의 문제가 아니지.’

에단이 스스로 생각을 고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이른 아침의 방문자에 에단이 나섰다.

열린 문 뒤로 네리베르가 서 있었다. 에단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조금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전날과 마찬가지고 책에 적힌 일을 알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네리베르, 내가 어제 말했지만 책의 일은…….”

에단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딱딱한 얼굴로 네리베르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입을 열었지만, 그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네리베르의 손을 따라 밀려나고 말았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그 일이 아니에요. 다른 급한 일로, 실례인 줄 알지만 아침 일찍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방 안으로 들어선 네리베르는 이드와 라미아, 일리나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새벽에 데일리 경이 찾아 오셨습니다.”

화원의 밤과 달리 데일리를 경이라고 정중히 높여 칭하는 네리베르였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분초를 다투는 일이었다면 데일리가 직접 찾아왔을 것이다. 네리베르가 이드의 말을 따라 소파에 살짝 엉덩이를 걸치고 말을 이었다.

“데일리 경께서 오늘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찾아오셨습니다.”

‘도대체 여기 소드 팰러스에 개구멍이 얼마나 있는 거야?”

‘아무도 모르게’라는 말에 이드의 머릿속에 문득 쓸데없는 궁금증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진지한 네리베르의 얼굴에 직접 물어보는 실례는 하지 않았다.

“그 새벽에 데일리 경이 움직였다면 퍽 중요한 일이었던 모양이군요.”

“네. 데일리 경 말씀으로는 어젯밤에 이드 님에 대해서 은색 기사단장님께 보고를 마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후에 클라인 백작님께서 찾아 오셔서 화원의 침입자와 은색 기사단장님께 보고한 일에 대해서 언급하시면서, 침입자가 이드 님이 아닌지와 화원에서 무언가 획득한 물건이 있지 않은지를 언급하셨다고 해요.”

“라미아?”

이드는 네리베르의 말에 반사적으로 라미아를 돌아보았다. 당시 시끄러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라미아가 마법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라미아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다른 수단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날 있었던 일을 백업하는 식으로요. 그거라면 특정한 시간에 한 번 작동하기 때문에, 당시의 신호만 막는 걸로는 소용이 없을 수 있어요.]

“그럼 단순히 침입 사실 확인뿐 아니라 화원에서 있었던 일까지 알지도 모르겠네.”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화원 전체에 마법진을 깔아 둬야 하거든요. 조금 복잡한 마법이라면 저희 얼굴은 알았을 테지만, 책에 대해서는 모를 거예요.]

“그래서요?”

이드가 네리베르의 말을 재촉했다.

“데일리 경 말씀으로는 백작님의 추궁은 없으셨답니다. 대신 자신도 입장을 확실히 하고 싶다고 하시면서, 은색 기사단장님과 함께 이드 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고 말씀하셨답니다. 데일리 경도 어제 라미아가 마법을 차단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감시당하고 있다고 아시고는 직접 이드님을 찾지 않고 제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백작이 마스터 편에 서겠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에단이 정보 요원의 감을 따라 말했다.

“글쎄…….”

이드는 확답하지 않았다.

“혹시 네가 쓴 보고서를 본 건 아니겠지?”

“절대로 그럴 리는 없습니다. 봤다면 당장 달려왔을 겁니다. 최소한 저라도 불러올렸겠지요.”

에단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네리베르가 보고서라는 말에 살짝 눈을 반짝였지만 눈치 없이 끼어들지는 않았다. 조용히 있으면 보고서의 내용을 알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대화가 이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노크 소리가 있었다.

똑똑.

·오늘은 아침부터 손님이 많지 말입니다.”

네리베르와 같은 급한 일을 제외하면 이른 아침에 찾아오는 것은 실례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이드를 가볍게 생각한다는 말이기 때문에 에단은 마음이 별로 좋지 못했다.

에단이 문을 열자 그 사이로 케마란이 활짝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좋은 아침입니다!”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힘찬 목소리다. 에단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어………… 그래,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니? 설마 너도 데일리 경이 찾아왔니?”

“네? 데일리 경이 왜..”

“아, 아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데일리 경의 이름에 케마란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문 안을 살피다 네리베르를 확인했다.

“앗! 네리베르, 네가 왜……………! 선배님, 잠시 실례를 좀.”

케마란은 가게의 생선을 훔쳐 가는 도둑고양이를 목격한 가게 주인 같은 기세로 에단을 밀치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네가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야?”

“케마란 양은 모르는 중요한 일이 있답니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하는 네리베르의 모습에 케마란의 입가가 실룩였다. 앞서 데일리를 언급한 에단의 말에 대충 상황은 짐작할 수 있었다. 

“흥, 그래 봤자 전령이겠지 뭐.”

예리하게 찌른 케마란의 말에 네리베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당신이 알아야 할 일은 아니에요. 그보다 이른 아침부터 이게 무슨 실례되는 행동인가요?”

“남 말 하고 있네.”

“당신하고 관계없는 일이죠.”

“흥, 어련하시려고. 그럼 중요한 이야기 끝났으면 그만 가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아니다. 이드에게 전해야 할 이야기는 모두 전했다. 하지만 네리베르는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방을 나간다면 어쩐지 케마란에게 진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래서 살짝 억지를 부렸다.

‘억지는 아니에요. 어쩌면 이드 님이 절 통해서 데일리 언니에게 전하실 말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그런 마음과 달리 그녀의 눈은 이대로 내쫓지 말아 달라는 듯 간절하게 흔들리며 이드들을 향해 깜빡거렸다.

재미있는 두 아가씨의 자존심 싸움에 이드는 키득거리며 웃음을 삼켰다. 방금 전까지 끈적거리던 기분이 씻겨 나가는 듯했다.

“케마란 양도 이쪽으로 앉아요.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아직 아침 식사 전이겠네요.”

두 아가씨가 곱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는 그럼 같이 식사를 하자고 권했다. 그 말을 들은 에단은 두 사람 것을 포함해서 아침 식사를 요청했다.

“그럼 케마란 양이 일찍 찾아온 이유를 들어 볼까요?”

“그보다 이드 님이 먼저 말씀을 편하게 해 주세요. 선배님은 벌써 말씀을 편하게 하시는걸요.”

“그러지.”

케마란은 이드의 반말에 미소 지었다. 가벼운 말투의 변화만으로도 이드와의 거리가 줄어든 것 같다는 느낌에서였다.

“네리베르 말대로 아침 일찍 실례라는 건 알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찾아왔어요. 화원에 들어가기 전에 제 링스피어를 봐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또 화원에서 찾은 책의 내용도 궁금하긴 했지만, 알려 주지는 않으실 거죠?”

“그러고 보니 그렇게 약속했지.”

이드는 케마란의 뒷말은 듣지 못한 척 넘기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곁에 놓인 링스피어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링스피어를 받아 든 이드는 링스피어의 이음새와 강도, 균형 등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허공을 향해 몇 번 휘두르더니 케마란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이름이 링스피어라고?”

“네. 모르는 사람들은 변형된 핼버드라고 말하지만 절대 그런 게 아니에요.”

케마란은 그 모르는 사람이 너라는 듯 네리베르를 한 번 노려봐 주면서 말했다.

“조금 모양이 다르긴 하지만 내가 있던 곳에서는 이런 걸 미첨도라고 부르지.”

“미첨도. 미첨도.”

케마란이 이제야 정확한 이름을 알았다는 듯이 링스피어를 보며 ‘미첨도’라고 여러 번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름이 어렵네요. 전 역시 링스피어가 더 좋은 것 같아요. 하하.”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도 링스피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 역시 이 녀석을 완벽하게 다룰 줄 아는 것은 아니야.”

기본적인 무기술을 배우고 십여 종의 무공을 익힌 이드지만, 그 안에 미첨도에 대한 무공은 없었다.

이드는 케마란의 얼굴에 살짝 실망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링스피어를 쓰는 것을 본 적은 있지. 덕분에 어쩐 점을 중심으로 링스피어를 사용해야 할지 가르쳐 줄 수는 있겠지. 무엇보다 링스피어에 응용해 볼 수 있는 무기술도 알고 있으니까.”

형태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따져보면 링스피어도 창의 일종이다. 창술이라면 기본적으로 배운 적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케마란은 언제 실망했냐 싶게 활짝 핀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까지 그 작은 조언도 소드 팰러스에서는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그럼 식사 후에 봐주지.”

“저도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옆에 앉아 있던 네리베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옆에서 지켜보다가 기회가 된다면 자신도 이드에게서 조언을 받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케마란은 충분히 그 속을 짐작했지만 미운 정을 봐서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그때 식사를 주문하고 돌아와 있던 에단이 조용히 이드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그런데 마스터, 그러면 보고서는 어떻게.”

클라인 백작이 중간에 끼어든 만큼 상황이 변했다.

이드가 슬쩍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가 말했다.

“일단 빼내 놔.”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에단의 얼굴에 악마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상상만 하던 상사의 목을 딸 수 있는, 아니, 집무실에 침입해 볼 기회가 생긴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