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12화
549화
에단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급히 몸을 돌렸다.
자정을 넘어 숨어든 팀장의 방에는 에단의 보고서가 없었다. 보고서는 고사하고 에단의 이름이나 이드의 이름이 들어간 종잇조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에단은 정말 재수 없게도 오늘 보고서가 읽힌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상황이 어떻게 바뀌게 될까, 하는 다급한 마음에 당장이라도 이드에게 보고를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에단은 짧은 순간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함정일 가능성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아니다! 함정은 아니야. 앞뒤가 안 맞아.’
함정일 이유가 없었다. 보고서를 확인했다면 자신을 소환하거나 이드가 머물고 있는 방을 감시할 일이지 이곳을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보고서를 언급했으니 내용을 알건 모르건 팀장의 방에서 사라진 보고서와 연관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혹시, 재수 없으면’이라는 생각이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거기다 적이라고 생각되는 미지의 인물이 덤으로 붙어서 말이다. 에단은 이 사실을 꼭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한 점의 기척도 읽지 못한 상대지만, 그가 자신을 잡으려고 하더라도 충분히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 트와이스로 활동하면서 수행했던 임무가 얼마인데 이런 비슷한 상황이 없었을까!
‘무엇보다 마스터의 수업을 받은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라고! 누구든 나오라 그래!’
에단은 케마란과 네리베르 사이로 내던져진 사건을 기점으로 자신의 실력이 월등히 발전했다는 사실을 깨달아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그대로 목소리에 더해져 흘러넘쳤다.
“어떤 놈이냐. 모습을 보여라!”
“클클! 놈이라니, 그리 불려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구만.”
존재를 죽이고 어두운 그림자에 기대어 있던 워스는 자신만만한 얼굴의 에단을 보며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검을 휘두르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신선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이 두근거림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도 모르지.’
쿵.쿵.쿵.
어린 시절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 죽어라 수련할 때와 평기사로 초인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던 때를 제외하고 이렇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껴 본 것이 얼마만인지.
워스는 젊어진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그림자 밖, 은색의 달빛 아래로 걸어 나갔다.
과연, 자신의 얼굴을 보고 저 에단이란 놈의 얼굴이 어찌 변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기대를 품은 워스의 얼굴이 달빛 아래 드러나는 순간.
워스의 눈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클클클! 얼굴이 볼만들 하구만. 그래, 자네가 부른 놈이 나왔네만? 어쩔 텐가?”
악동 같은 워스의 웃음소리가 작게 흘렀다. 그러나 그 웃음은 에단과 록에게는 악동이 아니라 악마의 웃음소리로 들려왔다.
‘……. 빌어먹을. 아무리 그래도 아직………… 삼검왕은 힘들다고!’
워스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태산 같던 에단의 자신감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흔적도 없이 스러져 버렸다.
이드의 일로 노인네, 꼰대라고 부르면서 씹어 댔지만 삼검왕의 이름은 자신감만 가지고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똑같이 뻣뻣이 굳어 있던 록이 굼실굼실 기는 걸음으로 에단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야………… 어쩌냐?”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한 말투다. 실력이 모자라서 문제지, 가능만 했다면 미련 없이 에단을 버리고 갔을 것 같은 모습에 에단은 내심 이를 갈았다.
“몰라, 이 새꺄!
“왜 몰라, 이 새꺄! 화를 내도 내가 내야지.”
필사적으로 소리를 죽이고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이지만 저 멀리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워스에게는 큰 소리로 떠드는 것과 같았다.
더구나 지금은 조그만 소리도 귀에 똑똑히 들리는 밤. 워스는 실로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두 악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날 앞에 두고 딴소리할 정도로 배짱 좋은 젊은이들이 우리 소드 팰러스에 있는 줄 내 미처 몰랐군.”
“시, 실례했습니다.”
가볍게 던진 워스의 말에 에단과 록이 신병처럼 부동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서로 입장이야 어떻든 간에 소드 팰러스에서 무공을 배우면서 뇌리에 박힌 삼검왕의 위엄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아니, 실례는 아니지. 내가 놀라게 한 것이니 실례는 아니야. 그런데 자네 둘 재밌어 보이는군. 원래 오늘은 자네만 보려고 했는데, 뒤에 록이라고 하던가? 자네도 함께 셋이서 이야기를 좀 할까”
등 뒤에서 록의 입이 찢어지게 벌어지는 소리가 들려 에단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이 앞에 어떤 지옥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지만 혼자 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심 웃음을 흘리던 에단은 눈앞의 인상 좋은 마을 어르신 같은 워스의 모습에 내심 침음했다.
‘저 허리에 달려 있는 검만 없으면 진짜 힘없는 노인으로 보이는데.’
하지만 그런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살짝 도망갈 마음만 먹어도 귀신처럼 뻗어 오는 삼엄한 기세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상대가 강해도 목줄 찬 강아지처럼 순순히 따라 갈 수는 없었다.
‘암, 암! 다른 누구도 아닌 마스터를 모시는 내가 힘없이 끌려가서 마스터의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지.’
에단은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억지로 풀어내며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철벽의 검왕께서 어떤 이유로 절 보자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절 찾으시는 게 맞으신지요.”
질문을 받은 워스의 얼굴이 변했다. 마을 어르신 같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최상위 포식자로서의 카리스마가 흘렀다.
조금 전까지 에단이 워스를 소드 팰러스의 삼검왕으로 보고 있었다면, 지금은 적아를 알 수 없는 견제의 대상으로 여기고 의심과 반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나이가 제법 되지만 아직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못나진 것은 아니야. 에단 웍. 자네를 보기 위해서 저녁까지 거르고 나왔지.”
사실이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던 워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에단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아침에 에단이 록의 집으로 향했다는 보고를 받았던 워스는 록의 집으로 향했고, 덕분에 두 사람의 행동을 끝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워스는 의심스러웠다. 왜 스스로 제출해 놓은 보고서를 지금에 와서 회수하려 하는가. 그 폭탄 같은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말이다. 혹시 보고서를 올릴 때까지는 에단의 마음이 이드가 아니라 소드 팰러스를 향하고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모를 일이었다.
워스는 보고서의 내용을 확인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의문을 풀어 볼 생각으로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자넨 힘없는 노인이 끼니를 거르고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 알아야 하네.”
‘알고 싶지 않아! 거기다 누가 힘없는 노인이야, 누가!’
저 철벽의 워스가 힘없는 노인이면 이 세상 노인들은 모두 관 뚜껑 덮고 누워 있어야 할 것이다.
목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겨우 삼킨 에단은 워스의 대답에서 그가 자신들이 팀장의 방에 몰래 잠입한 것까지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실력차가 있는 사람에게 약점까지 잡혔다.
“절 찾으신 이유가………….”
“당연히 자네가 제출한 보고서 때문이지. 아직 나 말고는 아무도 읽어 보지 못했으니 너무 크게 걱정 말고. 나와 보고서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지?”
“알겠습니다.”
본인 이외에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무섭게 들렸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에단은 겁먹은 아가씨처럼 옷자락을 부여잡는 록의 손을 쳐 내고는 이드가 있을 방향을 돌아보았다. 내심 이드가 미녀를 구하기 위해 나타나는 이야기 속의 영웅처럼 등장해서 이 난감한 상황에서 구해 주었으면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미녀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비 맞은 강아지 꼴로 워스의 뒤를 따랐다.
“마스터~!’
에단이 이드를 애타게 찾는 그 시각.
이드는 다른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데일리가 케마란과 네리베르를 데리고서 찾아온 것이다.
“큰일이 생겼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예?”
너무나 태연하게 대답하는 이드의 모습에 데일리의 눈이 커졌다.
“낮에 여기 두 아가씨들과 연무장에 나갔는데 클라인 백작이 몰래 들렀다 가더군요.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라미아에게 따라가 보도록 부탁해서
화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들을 수 있었습니다.”
데일리는 라미아라는 말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이드가 케마란과 네리베르를 가리켜 보이고 말했다.
“그래도 여기 두 아가씨를 데리고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케마란과 네리베르는 사정도 듣지 못하고 데일리에게 끌려온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제 두 사람도 관계자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언니, 아무래도 저희들 이야기 같은데 무슨 일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관계자라는 말에 눈을 반짝인 네리베르가 또록또록하니 물었다.
이드가 직접 이야기하라고 손짓 하자 데일리는 클라인 백작이 그녀에게 찾아온 일을 이야기했다. 그 안에는 백작과 워스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가 가감 없이 들어 있었다.
라미아에게 전해 들은 그대로였다.
케마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처음 알았다는 듯 놀란 표정이었다. 무엇보다 삼검왕이 직접 자신들을 보겠다고 했다는 말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귀족가에서 자라며 계략이라는 쪽으로 눈이 밝은 네리베르는 다르게 반응했다.
“혹시, 삼검왕분들이 검후님의 실종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우뚝!
조심스럽지만 반쯤 확신하는 네리베르의 말에 그때까지 방방 뜨고 잇던 케마란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처음 볼 때부터 생각했지만 촉이 좋은 아가씨야.’
이드는 어쩔까 하는 생각에 일리나와 라미아를 돌아보았다.
“이 두 사람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단언하는 일리나의 말에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듣게 될 이야기들은 상당히 무겁고 위험할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이후 삼검왕 앞에 서게 될 일에 대한 조언을 듣고 돌아가는 것을 추천해요.”
이드는 진심이었다.
좀 깊게 관련되고, 시르피의 실종 장소에도 함께했고, 그녀가 남긴 책의 존재도 알고 있지만 지금이라면 발을 뺄 수 있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데일리의 관계자 발언 역시 클라인 백작과 함께하는 자리라면 큰일은 없을 것이라고 이드는 생각했다. 반대로 그녀들에게 감추어 두었던 책의 내용을 알게 될 경우, 그때부터는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알고 있는 두 사람이기 때문에 무조건 관계되지 말라고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특히 이드와 관련하여 삼검왕의 눈에 들어 버린 점도 간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검후에 대한 두 아가씨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같았다.
“아니요. 저희도 관계자라면 듣겠습니다. 특히 검후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건 절대 타인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의 답이었다. 이드는 두 사람에게 재차 생각하길 권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두 사람의 눈이 너무 곧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드도 은근히 기대한 대답이었는지도 몰랐다. 에단을 제외하고는 이드의 말에 움직여 줄 사람이 없었던 탓이었다. 거기에 두 사람은 아직 어리고 미숙하지만 충분히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에단이 돌아오면 계속하지요.”
“참, 그러고 보니 에단 선배님은 어딜 가셨습니까?”
이드의 말을 듣고서야 생각났다는 듯 케마란이 에단을 찾았다.
“좀 특별한 일을 부탁했는데, 아무래도 생각대로 풀리지 않은 모양이야.”
이드는 복도를 울리는 다급한 발자국 소리에 문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모두의 눈이 문을 향해 있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에단이 뛰어 들어왔다.
“마스터 큰일….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다급하게 말을 쏟아내던 에단은 자신에게 모여 있는 의외의 시선에 숨을 삼키며 바보처럼 눈을 껌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