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2권 9화 – 묵향의 풀리지 않는 분노

묵향의 풀리지 않는 분노

최근 묵향은 아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처음 팽선이 작전을 제대로 세운 것인지 조사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많아질 줄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던 묵향이다.

개방과 무영문, 그리고 서문세가에서 보내온 자료들을 몽땅 모으니 작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양이 많았다. 문제는 그걸 조사하다 보니 뭔가 미비한 부분이 있어 그에 따른 추가 자료를 요청하게 되었고, 덕분에 챙겨 봐야 할 자료의 양은 단숨에 두 배로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이런 빌어먹을!”

팔자에도 없는 문서 검토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자 묵향은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쭉 자료들을 훑다 보니 아무래도 팽선이 뭔가 수작을 부린 냄새가 어물어물 나는 것 같기는 한데, 아무리 꼼꼼히 살펴봐도 결정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수작을 부린 것으로 보기에는 팽가를 비롯한 정파의 피해가 너무 컸다. 그렇다고 팽가가 세운 작전을 그대로 믿기에도 뭔가 뒷맛이 찜찜했다. 팽가로 쫓아가 사실 대로 불라고 몇 대 손보면 좋겠지만 성질대로 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거칠 것 없이 살아온 묵향이지만 지금은 정파와의 협조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그렇기에 묵 향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팽가 놈을 향해 달려가 개 패듯 패 버리고 싶은 것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이래저래 묵향으로서는 짜증나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진팔까지 족치며 기분 전환을 꾀했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젠장, 형님을 찾아가서 술이나 마실까?”

마음이 동하자마자 묵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만통음제가 묵고 있는 숙소를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 가다 보니 짜증보 다 더한 감정이 슬슬 고개를 치밀었다.

문득 묵향은 왜 이런 식으로 멍청하게 자료를 찾고 있어야 하는지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흠~, 그런데 내가 왜 팽선이 잘못한 게 있는지 증거를 찾아야 하지?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충분히 있잖아? 무엇보다 감히 소연을 죽음에까지 몰고 간 것만으로도 두들겨 맞아야 할 죄가 되거든.’

지금까지 묵향이 언제 증거 따지면서 살아왔던가. 물론 팽선을 아무 증거도 없이 조져 버린다면, 한동안 무림맹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하 지만 그게 어때서. 언제는 그런 뒷일까지 걱정하며 화산파를 멸문시켰던가.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쓸데없이 이런 거 잡고 계속 시간을 끌 이유가 없지.’

묵향은 만통음제의 거처로 향하던 발길을 팽가가 머물고 있는 쪽으로 돌렸다. 기왕 생각난 김에 그동안 쌓인 짜증도 풀겸, 팽선이나 가볍게 주물러 주러 갈 생각 이었던 것이다.

요즘 들어 팽선은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 이 일을 벌일 때만 해도 양양성에 함께 와 있는 팽지량 장로에게 팽가에 그 어떤 피해도 오지 않도록 처리하겠다며 큰소리친 뒤 작전을 추진했다. 어차피 전 투에 참여해야 할 거라면 얄미운 천지문도 정리하고, 팽가의 명성도 얻을 수 있게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그 결과는 최악이었다. 가문의 동량이라고 할 수 있는 우수한 고수 184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 두 배에 달하는 수가 중상을 당했다. 그중 30여 명은 목숨만 간신히 건졌을 뿐, 폐인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물론 팽가만 이런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게 아니었고, 비록 마교 놈들이 도와주기는 했지만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니 팽선과 하북팽가로서는 체면치레는 한 것 이다. 팽선은 팽가가 앞장서 작전을 성공시켰다는 것으로 애써 자신을 위안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며 팽선의 업적을 칭찬했었다.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개방 쪽에서 파악된 정보들을 분석해 보니 이번에 팽선이 제안한 작전은 그야말로 상대 방의 손가락 끝에서 놀아났음이 증명되었던 것이다. 원로고수 팽선이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짠 작전은 처음부터 적들에게 읽혔고, 적들이 오히려 팽선이 거느린 세력을 묵사발 내기 위해 역으로 함정을 파고 기다렸다. 그리고 그 아가리 속으로 팽선은 순진하게 들어간 것이다. 만약 뒤늦게 마교에서 흑풍대를 투입해 적을 교란해 주지 않았다면 전투에 참여한 무사들은 몽땅 전멸당했을 거라는 게 개방의 분석이었 다. 마교를 원수처럼 미워하고 있던 팽선에게 있어서 그것은 최악의 치욕이었다. 쓰레기 같은 마교도 따위에게 목숨을 구원받다니 말이다.

팽가의 가주도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를 호되게 질책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나쁜 소문일수록 가을 평원에 들불이 번져 가듯 빠르게 퍼지는 법이다. 양양성에 나와 있는 무인들이 이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 만무하다. 팽선은 요즘 자신을 바라보는 무인들의 시선이 예전과 다름을 느꼈다. 그리고 그 눈초리 속에는 팽가의 젊은 제 자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팽선은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듯한 끔찍한 시간이었다.

그런 팽선에게 또 다른 불행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장로님, 마교 교주가 장로님을 뵙고 싶다고 청하고 있습니다.”

팽선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주가 왜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한다는 말이냐?”

“그건 제자도 잘 모르겠습니다.”

별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자신이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에 마교로부터 큰 신세를 지지 않았던가. “객방으로 모시도록 해라.”

그렇게 지시한 후, 팽선은 가급적 천천히 객방으로 걸어갔다. 그의 방문 목적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행여 자신이 서두른다는 인상을 다른 이들에게 안겨 주기는 싫 었던 것이다. 급히 달려가면 교주의 명성에 주눅이 들었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팽선은 마교의 교주를 만나는 것 자체가 썩 내키지 않 았다.

팽선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 있던 묵향이 그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너무 매서웠기에 팽선은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부 팽선이라고 하오.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는지?”

“네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들렀다.”

묵향이 다짜고짜 반말로 말하자 팽선은 기분이 몹시 상했다. 사실 상대가 정파인이라면 배분이 자신보다 높기에 말을 놔도 할 말은 없겠지만, 놈은 사파가 아닌가. 그것도 팽선이 이를 가는 마교의 교주다. 즉, 두 사람 사이에는 배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대답하는 팽선의 말투는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뭘 물어본다는 거요?”

“먼저 이번에 모든 계책을 세운 놈이 너냐? 누구 다른 사람의 의견이 들어간 게 있다면 정확하게 말해 봐.”

안 그래도 그놈의 작전 때문에 쌓인 게 많은 팽선이다. 그런데 마교 교주라는 놈까지 그걸 들먹이자 팽선의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

“물론 노부가 모든 계획을 짰소. 왜? 귀하에게 작전을 물어보지 않았다고 지금 내게 항의하러 온 게요?”

시비를 거는 듯 삐딱한 말투에 묵향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일단 참았다. 아직 물어볼 것이 몇 가지 더 남아 있었으니까.

“천지문 따위를 기습조로 임명한 이유를 듣고 싶다. 그들 대신 너희 팽가가 가든지, 아니면 다른 문파를 보냈다면 훨씬 적은 피해만으로 그곳을 박살 낼 수 있었을 게 아닌가?”

묵향은 일부러 천지문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고, 팽선은 그걸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

“기습조로 누구를 보내든, 그건 순전히 내 맘이오. 나는 천지문이 기습을 해 주기를 원했고, 비록 그들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유감이지만 노부의 뜻대로 작전은 성 공했소.”

거침없는 팽선의 대답에 묵향의 눈썹이 점차 위로 치켜져 올라가고 있었다. 참기 힘들 정도로 열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묵향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더욱 팽 선을 조롱했다.

“호오, 놀라운 일이군. 박쥐들의 문파라고 하며 모두들 상대도 안하는 천지문을 자네는 그토록 믿었다니 말이야. 아마 천지문에 줄을 대서 본교에 아부하고 싶었 던 모양인데, 괜히 그런 식으로 한 단계 건너올 필요 없네. 그런 생각이 있다면 앞으로 본좌에게 직접 얘기하도록 해.”

이죽거리는 묵향의 말에 팽선은 너무나도 화가 나서 안면근육이 제멋대로 푸들푸들 떨릴 지경이었다.

“귀하, 말씀이 너무 심한 것 같소. 내가 왜 귀교와 친분을 맺고 싶어 한다는 말이오? 행여 그딴 소리 아무 데서나 떠들지 마시오. 다른 문파들의 구설수에 오를까 두렵소.”

“그게 아니라면 얘기가 안 되잖아. 천지문은 겨우 문도수가 2천 남짓밖에 되지 않는 작은 문파야. 제령문처럼 엄청난 실력이라도 보유하고 있다면 또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거든. 이번 작전에서 기습조의 중요성은 어느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지. 그런데 왜 천지문 따위에게 그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 거지? 하마터면 그 때문에 작전이 실패할 뻔했는데 말이야. 물론 천지문이 간신히 임무를 완수했다고는 하지만, 하마터면 전멸당할 뻔하지 않았나. 만약 팽가나 다른 명문대파가 그 임무를 맡았다면 그 정도까지 피해를 입지 않고도 성공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본좌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팽선은 그곳에 있지 않았기에 정확한 상황을 모른다. 묵향은 진팔에게 명령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상대를 물리쳤다고 보고하도록 했다. 그리고 개방과 무영문에까지 연락을 보내 일체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함구령을 내려놓은 상태였기에, 천마혈검대가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팽선 이 알 리 없었다.

팽선은 버럭 화를 냈다.

“어떤 놈이 당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놈들을 거기에 보냈다고 했소?”

“그렇다면 천지문의 실력을 그토록 신뢰했나?”

팽선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딴 놈들이 무슨 실력이 그리 뛰어나다는 거요? 그 망할 계집은 제법 뛰어나지만, 나머지는 다 쓰레기…….”

여기까지 말하던 팽선은 아차 싶었다. 갑자기 묵향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자신을 노려봤기 때문이다.

“아, 아니…….”

어느샌가 묵향의 손은 새파랗게 질린 팽선의 멱줄을 틀어쥐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망할 계집이 바로 소연을 칭하는 표현이 아니겠는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팽선은 소연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고, 그 때문에 천지문을 사지로 밀어 넣은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물증은 확보하지 못했지만, 이 정도로도 묵향은 충분했다.

“망할 계집이라고?”

짝! 짝!

묵향의 손이 휘둘러질 때마다, 팽선의 뺨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획획 돌아갔다.

“이, 이게 무, 무슨 짓이오?”

짝!

이번에 때린 건 좀 셌는지 팽선의 입에서 핏줄기와 함께 흰 것이 하나 튀어나와 바닥을 도르르 굴러갔다. 피 묻은 팽선의 이빨이었다.

“크윽!”

“천지문이 본교와 협정을 맺은 유일한 문파임을 네놈은 잊었느냐? 천지문을 사지로 몰아넣고, 네놈이 살아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니…, 정말이지 가소로운 일이 군.”

갑자기 뺨을 얻어맞은 팽선은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다급히 공력을 끌어 모아 묵향을 향해 휘둘렀다. 만약 정신이 있었다면 절대 하지 못할 행동이다. 무공의 차 이도 차이였지만 반항하다 보면 오히려 묵향에게 비무의 명분만을 줄 수도 있다. 노회한 팽선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치미는 분노로 인해 이성이 거의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이얍!”

극성의 혼원벽력장이 바로 코앞에 있는 묵향을 향해 터져 나갔다. 하지만 묵향이 그걸 그대로 맞아 줄 사람이 아니다. 팽선이 공력을 장심에 끌어 모으고 있음을 벌써 눈치 채고 있었다. 묵향이 팽선에게 무공을 펼칠 기회를 준 것은 최후의 공격이 막혔을 때 놈이 느낄 절망감을 노린 것이었다.

콰쾅!

혼원벽력장은 묵향의 바로 코앞에서 엄청난 반발력과 맞부딪쳐 대 폭발을 일으켰다. 그 충격의 여파로 팽선의 몸은 뒤로 날아 문짝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가 볼썽 사납게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쿨럭, 쿨럭!”

내장까지 상했는지 기침을 할 때마다 팽선의 입에서 시뻘건 핏물이 흘러나왔다. 묵향의 행동은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천천히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팽가의 장로쯤 되는 놈이 이 정도로 죽으면 말이 안 되지. 자, 일어서서 좀 더 씩씩하게 발악해 봐.”

팽선은 두려움에 질려 외쳤다. 자신의 무공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상대. 암흑마제가 중원 최강의 고수라더니, 그 말이 오늘에야 뼈에 사무치게 그 의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대, 대체 왜 이러는 거요?”

“방금 말해줬잖아. 천지문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라고 말이야.”

“겨우 그따위 쓰레기 같은 문파 때문에 무림맹과 분란을 일으키겠다는 말이오? 당신이 나를 해친다면, 맹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팽가를 들먹여 봐야 소용없을 것 같았기에 팽선은 무림맹을 걸고 넘어졌다. 하지만 그의 위협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호오, 네 말대로 가만히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는 무림맹의 돌대가리 같은 놈들이 결정하겠지. 하지만 그놈들 머리가 아무리 돌이라고 해도, 겨우 팽가의 장로 하 나 죽였다고 감히 본교에 따지려고 할까?”

물론 묵향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교는 얼마 전에 화산파까지 멸문시키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무림맹은 마교와의 전면전으로 들어가는 대신 동맹을 선택했다. 그만 큼 지금은 힘을 모아 금나라를 상대해야 했고, 마교와 전면전을 벌이기 꺼려했던 것이다.

팽선의 얼굴에 처음으로 절망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묵향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때, 팽선의 눈에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팽가의 무사들이 보였다. 하기야 팽선이 방문을 뚫고 튕겨져 나갔을 만큼 커다란 소리가 났는데 팽가의 무사들이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말이 되지 않았다.

“교주!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장 멈추시오.”

소리친 인물은 이곳에 파견되어 있는 또 한 명의 장로 팽지량이다. 묵향이 팽선의 멱살을 쥐고 들어 올리는 것을 본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왜 교주가 여기까 지 와서 이런 행패를 부린다는 말인가? 멈추라고 소리는 질렀지만 교주는 그의 경고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호오, 죽은 척 가만히 있으면 내가 안 때릴 것 같아? 반항을 해 보라구. 이 쓰레기 같은 새끼.”

퍽! 팍!

“쿨럭, 쿨럭.”

호되게 맞아 한쪽 구석에 처박힌 팽선의 입에서는 기침을 할 때마다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반항? 반항도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어야 하는 거다. 바로 코앞에서 그 가 가장 자신 있는 공격을 날렸는데도 먹혀들지 않았는데, 어찌 반항할 엄두를 낸단 말인가. 축 늘어져 거칠게 기침을 하던 팽선은 자괴감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 다. 더군다나 이런 무력한 모습을 수많은 제자들이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팽선은 묵향을 갈아 마시고만 싶었다. 그동안 어떻게 쌓아올린 명성인가. 잠시 기침을 내뱉던 팽선은 이를 갈며 문도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물론 그의 목소리는 이제 곧 숨이 끊어질 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뭐, 뭣들 하는 거냐? 저, 저놈을…, 저놈을 쳐라!”

하지만 그 명령에 따르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팽선 같은 엄청난 고수를 순식간에 걸레로 만들어 놓은 사람이다. 마교 최강의 고수라고 칭해지고 있으며, 혹자 는 중원 최고수라고도 부르고 있는 자가 바로 마교 교주다. 그런 자를 향해 앞장서서 공격할 마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팽지량은 주위를 한번 훑어본 뒤 제자들이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단숨에 눈치 챘다. 사실 그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으니 일반 제자들

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다시 한 번 묵향에게 정중하게 질문을 던졌다. “교주,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말씀을 해 주시오. 왜 본가의 팽선 장로를 핍박하고 계신 것이오?”

“내가 네놈에게 대답해 줄 의무는 없다.”

묵향은 싸늘하게 대답한 후, 팽선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다리를 짓밟아 버렸다.

우드득!

“크아아악!”

팽선의 다리뼈가 박살이 나며 기괴한 모양으로 비틀렸다. 묵향은 냉기가 풀풀 날리는 어조로 이죽거렸다.

“어때? 강자에게 짓밟히는 기분이 말이야. 네놈이 감히 천지문을 벌레 보듯 하며 짓밟아? 그렇다면 네놈은 나한테 짓밟혀도 할 말이 없다. 강하기만 하면 약자를 짓밟아도 된다고 네놈이 말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말이야.”

또다시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팽선의 다른 쪽 다리 뼈도 박살이 나 버렸다. 묵향이 내공을 운용해 밟았기에 수많은 뼛조각으로 갈라져 가루가 된 것이 다. 설혹 화타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조각조각 부서져 버린 팽선의 다리를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팽선은 땅바닥을 데구루루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제발, 제발 살려 줘…….?”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팽지량의 눈에 서서히 공포가 떠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인간이 저토록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잠시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서 있던 팽지량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교주, 멈추시오. 계속 팽선 장로를 핍박한다면 노부도 묵과할 수 없소.”

말은 그렇게 내뱉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오히려 이 정도에서 묵향이 손을 거두고 물러가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만이 가득했다.

“호오, 묵과할 수 없다고? 꼴에 자존심은 있는 모양이군.”

묵향의 이죽거림에 팽지량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만약 여기서 자신이 물러선다면 팽가의 제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리고 이 사실이 양양성에 운집한 다른 문파에까지 알려진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설사 죽음이 빤히 보인다고 하더라도 팽지량은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다. 쳐랏!”

“흥, 쓰레기 같은 것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퍼퍼퍽!

묵향의 손이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자 그를 향해 달려들던 팽가의 고수 10여 명이 뒤로 튕겨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들은 극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몸을 버둥 거리더니 쭉 늘어져 버렸다. 보기에는 부드러워 보이는 손짓이었지만 한 방만 맞아도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할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여, 저놈을 죽이란 말이야!”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팽선은 계속 공격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묵향은 덤벼드는 팽가의 고수들을 상대하면서도 짬이 나면 팽선을 두들겨 패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정신을 잃지 않을 정도로 힘 조절을 하면서 말이다. 소연이 죽음의 경계에까지 간 모습을 본 묵향의 분노는 그렇게 컸다. 팔다리를 모조리 박살 내 병 신을 만들었지만 이 정도로 손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물론 편안한 죽음을 선물할 생각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호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아직 매가 부족한 모양이군.”

퍽! 퍽!

“크으으윽! 이, 이런 잔인한 놈..”

어느 순간 팽선은 계속되는 고통에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그래도 묵향의 매질은 계속되었다. 그동안 쌓인 짜증을 한 번에 풀기라도 하려는 듯.

“크, 큰일 났습니다, 대주님.”

전황을 표시한 지도를 쳐다보던 관지는 급하게 보고를 하는 부하를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보며 물었다. 일사불란한 조직 체계를 자랑하는 흑풍대의 일원으로 저렇 게 호들갑을 떠는 부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지금 교주님께서 팽가에 쳐들어 가셔서…….”

관지는 그 뒷얘기는 듣지도 않고 지도를 내팽개친 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워낙 서류 작업이 지지부진한 상태였기에 혹여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나 않을까 내심 걱 정하고 있던 그였다. 물론 팽가를 상대로 혼자 쳐들어간 묵향을 걱정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보다 묵향의 성질을 건들이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Otēt!”

“예, 왜 그러십니까? 장로님.”

“큰일 났다. 빨리 흑풍대를 출동 준비시켜라.”

흑풍대 대원 전체가 항시 출동 대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금나라와의 대치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일부는 성 주변을 정찰하거나 물밑 작전에 투입되지만, 그 외의 인원은 개인 훈련을 하거나 술을 마시든 장원에서 멀리 떨어지지만 않으면 어느 정도 자유롭게 시간

을 보낼 수 있었다. 

“예? 그건 무슨 말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지금 바로 전투 가능한 인원들을 모아라. 중무장을 갖출 필요도 없다. 검 한 자루라도 들고 빨리 모이라고 해!”

관지의 명령에 마화는 급히 끌어 모은 천 명 정도의 흑풍대원들을 이끌고 팽가가 묵고 있는 장원을 향해 달려 나갔다. 모두들 장검 한 자루만 달랑 들고 있을 뿐, 워 낙 급하게 나온 탓에 암기를 휴대한 놈조차 거의 없었다. 그건 흑풍대원들이 작고 휴대가 편한 암기보다는 철령전이나 비도(飛刀) 계열의 크고 묵직한 암기만을 선 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화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은 악화되어 있었다. 팽선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묵향을 중심으로 백여 명에 달하는 팽가의 무사들이 나자빠져 있었다. 간혹 신음성을 흘리거나, 바닥을 기어가는 자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몽땅 다 죽여 버린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그나마 마화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묵향을 중심으로 거의 2천이 넘는 팽가의 제자들이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고, 이 진귀한 광경을 구경한답시고 인근의 문파에서 구경나온 자들이 거의 만 명에 육 박하는 실정이었다. 거기에 마화가 이끄는 천여 명의 흑풍대원들이 도착한 것이다.

팽가의 무사들은 흑풍대의 등장에 당황한 듯했다. 전면전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상황을 종결할 것인가. 팽지량 장로는 순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로 상황을 끝내기에는 자존심의 상처가 너무나도 컸다. 그렇다고 대대적으로 전면전을 벌이기에도 만만치가 않다. 마교 교주가 거느리고 온 흑풍대의 수는 9천이 넘는다. 그리고 그들의 전투력은 금나라와의 전투를 통해 이미 입증된 상태였다. 만약 그들과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양양성에 파견 나온 팽가의 무사들은 절대 살아 남을 수가 없을 것이다.

비감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던 팽지량 장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웅성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 그들 중에는 평소 안면 이 있던 문파의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팽지량 장로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그대들은 본가가 이런 무뢰배들의 공격을 받고 수모를 당하는 것을 그냥 구경만 할 거요?”

팽지량 장로의 추궁에 종리세가(鍾里世家)의 가주 패도(覇刀) 종리영우(鍾里英優)가 앞으로 나서며 묵향에게 말을 걸었다. 그 역시 내키지는 않지만 말을 한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런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보시오, 교주. 도대체 왜 팽가에 난입하여 이런 무도한 일을 벌인 것인지 모두가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해 주시구려.”

묵향은 이제 완전히 걸레가 되어 있는 팽선의 옆구리를 한 대 더 걷어찬 후 싸늘한 어조로 대꾸했다.

“본교는 천지문과 협정을 맺은 관계임을 모두들 잘 알 것이다. 여기 있는 팽선이 천지문과 무슨 원수가 졌는지 본좌는 알지 못하나, 이자는 천지문도들을 사지(死 地)로 내몰아 막대한 피해를 안겨 줬다. 본좌가 손을 쓴 것은 그 때문이다.”

종리우는 침중한 표정으로 팽지량을 바라보았다. 만약 묵향의 말이 사실이라면 쉽게 끝날 일이 아니다.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같이 싸우는 문파를 사지로 몰아 넣는다면 누가 무림맹의 명령에 따르겠는가. 이 말이 사실로 들어난다면 맹의 권위는 추락할 것이 분명했다.

“팽지량 장로, 귀하가 천지문에 큰 피해를 안기기 위해 일부러 사지로 내몰았다는 교주의 말이 정말이오? 사실대로 말해 주기 바라오.”

그때 정신을 잃은 듯 보이던 팽선이 몸을 꿈틀거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드는데 참혹한 모습이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는 듯 팽선은 죽을힘을 다해 고개를 필사 적으로 저었다. 물론 그런 의도로 일을 벌이긴 했지만 아무도 모른다. 자신만 입을 굳게 다물면 끝날 일이다. 묵향의 말에 그렇다고 시인하면 자신의 복수는 물 건너 가는 것뿐만 아니라, 자칫 팽가가 무림의 공적으로 몰리게 될 일이다. 그걸 잘 아는 팽선이기에 필사적으로 반박했다.

“마, 말도 안 되는 어, 억지외다.”

이빨이 몇 개 빠져서인지 발음이 어눌하기만 했다. 하지만 알아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팽지량도 팽선의 주장을 거들고 나섰다. 자칫하다가는 팽가가 모든 죄를 뒤집어쓸 것 같다는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모두들 아실 겁니다. 이번 작전에서 피해를 당한 것이 어디 천지문 한 곳뿐이오? 그 교활한 오랑캐들의 계책에 넘어가, 본가는 물론이고, 거기 참가했던 모든 문 파들이 다 막심한 피해를 입었소이다. 만약 이 일이 팽 장로의 지휘 능력을 비판하는 것이라면 노부로서도 할 말은 없소. 그가 판단 착오를 해서 모두에게 막대한 피 해를 안겨 줬다는 것은 더 이상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니 말이오. 하지만 천지문을 상대로 차도살인의 계책을 썼다는 누명만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팽지량의 말에 묵향은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것이다. 물론 팽선의 말실수를 이끌어 내기는 했지만 그 당시 그 말을 들은 건 자신 뿐이다. 팽선을 묵사발 내기 전에 살살 구슬려 확실한 증거를 찾아냈어야 했는데,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손부터 나간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 그러나 묵향은 차후 일어날 사태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벌레 같은 놈들이 자신을 오해해 봐야 어쩌겠는가.

묵향은 주위를 오만하게 둘러보며 소리쳤다.

“본좌는 이놈이 죄가 있다고 판단했고, 그에 따른 적절한 응징을 가했을 뿐이다. 만약 팽가 쪽에서 피 값을 받겠다면 상대해 줄 용의는 충분히 있다.”

자기 할말만 하면 끝이라는 듯, 묵향은 주위 사람들은 안중에 두지도 않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주위에 흑풍대 무사들이 깔려 있는 상황이었기에 섣불리 아무도 손을 쓰지는 못했다. 여기서 칼을 휘두르려면 흑풍대를 상대로 대 혈전을 벌일 각오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옆으로 다가오며 마화가 근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대로 그냥 가도 됩니까? 교주님.”

그 말에 묵향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복수를 하고 싶다면 나중에 찾아오겠지. 뭐, 제발 그래 준다면 좋겠지만 말이야.”

그동안 쌓여 있던 짜증을 말끔히 풀기는 했지만 그래도 묵향의 분노는 쉽게 가실 줄 몰랐다. 그만큼 중상을 당한 소연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