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3권 9화 – 아아! 화산파여
아아! 화산파여
교통의 중심지 섬서성(陝西省)의 성도(省都) 서안(西安)에 도착하면, 중원무림을 대표하던 검의 명문 화산파의 성지 화산이 지척에 다가온다. 파문당해 쫓겨나고, 제자들은 주살당하고, 사문은 멸문당하고……. 화산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현천검제에게 있어서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산으로 달 려가고 싶어 두근거리는 마음에 현천검제는 씁쓸하기만 했다. 잊고 싶은 기억도 있지만 그의 인생에서 제2의 고향인 화산을 어찌 기억에서 아예 지울 수가 있겠는가.
고민하던 현천검제는 슬쩍 소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사질, 화산에 잠시 들렀다가 가면 안 될까? 물론 갈 길이 바쁘고 또 사질이 양양성에 하루라도 빨리 도착하기를 바라는 것은 잘 알지만…….?
“저는 상관없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하면서도 소연은 힐끔 현천검제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은 결코 5대 명산인 화산에서 유람이나 하자는 그런 것이 아 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뭐라 형용하기 힘든 깊은 슬픔이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제가 사숙께 화산에 들렀다 가자고 부탁드리고 싶었어요. 중원 5대 명산 중 한 곳을 구경한다는 게 그리 쉽게 찾아오는 기회는 아니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구먼.”
소연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뒤 현천검제는 화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그의 발걸음은 아주 무겁기만 했다.
서안에서 화산까지의 거리는 대략 250여 리. 1만 리 길을 걸어 양양성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에 비하면 지척이나 다름없는 거리다. 둘 다 뛰어난 경공실력을 지닌 고수들이기에, 현천검제가 소연의 상태를 감안하여 쉬어 가며 천천히 달린다고 해도 한 시진 반이면 능히 도착하고도 남았다. 더군다나 현천검제의 배려 덕분에 그 녀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져, 지금은 과거의 부상을 입기 전의 몸 상태로 거의 회복되었을 정도였다.
“정말 아름다워요.”
아직 봄이 오려면 멀었기에 화산은 순백의 눈에 덮여 단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옛 선인들이 화산을 중원 5대 명산에 넣은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수려한 모습이다.
소연이 화산의 절경에 탄성을 내지르자 현천검제는 씁쓰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산이 깊고 물이 맑기에 예로부터 도가의 성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었지. 이제는 그것도…….?
“예? 그건 무슨……?”
괜히 말을 꺼내봐야 화산 멸문에 마교가 개입되었고, 결국 이곳을 잿더미로 만든 당사자가 소연의 아버지임을 밝혀야 했기에 현천검제는 뒷말을 슬쩍 얼버무렸 다.
“아니다. 그건 그렇고,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사부님의 묘소가 있지.”
그제서야 소연은 현천검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화산의 풍경을 보면서도 왜 서글픈 표정을 짓는지도. 하지만 그건 소연의 착각이 었다. 지금까지 현천검제는 소연에게 자신이 화산파 출신임을 숨겼다. 그렇기에 소연으로서는 그가 사부님의 묘소를 찾기 위해 화산에 오르고 싶어 한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천검제가 사부의 묘가 화산에 있다고 얘기하는 순간, 소연은 그가 혹시 화산파 출신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문득 했다. 현천검제 같은 위대한 검객을 키우 려면 화산파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소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사람이 마교에 몸담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리고 묘소를 보는 순간 소연은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현천검제가 안내해 준 사부의 묘는 볕이 잘 드는 아담한 곳에 위치하고는 있었지만 너무나도 초라하고 쓸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홀로 자리 잡고 있는 이 무덤이 화산파 제자의 것일 리 없다.
“인사드리거라. 사형과 내게 검술을 가르쳐 주신 유백 사부님이시다.”
“소연이 사조님을 뵈옵니다.”
예를 다해 인사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의문이 가득 했다. 아버지와 사숙을 가르치셨다면 필히 마교의 인물일 텐데 왜 정도무림의 성지 중 하나인 이곳 화산에서 쓸쓸하게 홀로 잠들어 계시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화산에 비무를 청하러 왔다가 패해서 객사한 다음 이곳에 묻혔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소연은 감히 그 의문을 현천검제에게 묻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부님과의 추억을 나지막이 들려주는 현천검제의 표정이 너무나도 어두웠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얘기하고 있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유백 사부의 묘소를 떠나 이런저런 얘기를 해 주며 산길을 걷던 현천검제가 뭔가에 놀라기라도 한 듯 갑자기 멈춰섰다.
“무슨 일이세요?”
소연으로서는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전혀 이상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매복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멀리 고색창연한 도관들이 들어서 있을 뿐인데
현천검제가 왜 이리 놀란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하지만 소연의 예상과는 달리 현천검제는 바로 그 도관들 때문에 놀라고 있었다. 그는 사형이 화산파를 멸문시킬 때 건물들을 몽땅 다 불살라 버렸을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었다. 문파 간의 접전이 벌어졌을 때 상대 문파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깨끗이 밀어 버리는 데는 그 방법이 최고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형은 건물에 전혀 손대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불태웠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저 건물들은 무사한 듯 보였다. 수십 년에 걸쳐 봐 왔던 정 든 건물들을 향해 현천검제는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뒤를 소연이 영문도 모르고 뒤따랐다.
길게 늘어선 높직한 담장을 뛰어넘자 수많은 도관들이 당당한 자태를 뽐내며 있었다. 현천검제가 떨리는 눈으로 아무리 둘러봐도 불에 탄 흔적이 있는 건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때 갑자기 어린 소년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오신 시주들이신지 모르오나 본관은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생존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현천검제에게 그 목소리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는 목이 부러질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재빨리 그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 다. 열두세 살 정도 되었을까? 어린 도사 하나가 헐렁한 도복을 펄럭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화산파 내에는 워낙 많은 문도들이 있었기에 그 어린 도사가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현천검제에게 있어 어린 도사가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에 화산파 제자가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랍고 고 마울 따름이었다.
“아아, 살아 있었구나…….’
현천검제의 눈에 희뿌연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죄송하지만 본관은 외인을 받지 않습니다. 치성을 드리러 오셨다면 산 아래쪽에 있는..
어린 도사의 말은 현천검제의 말에 막혔다.
“네 사부가 누구냐? 사부는 살아 계시냐?”
어린 도사는 예상외의 질문에 난처한 듯 그 커다란 눈을 굴리며 현천검제의 눈치를 잠시 살폈다. 지금껏 이런 식으로 물어온 시주가 없었기에 당혹스러웠던 것이 다. 하지만 자신을 자애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현천검제의 모습에 자파에 악의가 있어 온 사람은 아니리라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사부님은 이번 난에 입적(入寂)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누구에게…….”
“허억!”
갑자기 들려온 경악성에 현천검제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어린 도사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청수한 인상의 도사가 두 눈을 부릅뜨 고 마치 혼이라도 빠져나간 듯 굳어 있었다.
중년 도사는 바로 대사형이 아끼던 수제자 노궁(老)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현천검제는 지금까지 자신이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소수이기는 했지만 화 산파도 다른 9파1방에 소속된 문파들처럼 문도들을 무림맹에 파견해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현천검제의 몸이 아르티어스의 도움으로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된 것도 얼마 전의 일이다. 화산파의 멸문과 믿었던 사형제들의 배신. 수십 년에 걸쳐 공들여 키웠 던 제자들의 죽음. 거기에다가 배신자들이 자신에게 가한 악독하기 그지없는 신체적 제제. 아르티어스에 의해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평생 불 구로 살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괴로운 자신의 처지에 그는 화산파에 대한 작은 기억조차 떠올리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래서 지금껏 당시 무림맹에 파견 나갔던 노궁의 존재에 대해서 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허헛, 네가 살아 있다는 걸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구나.”
벅차오르는 환희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는지 현천검제의 눈에 물기가 어리는 듯하더니 곧 한 방울의 눈물이 또그르르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중년 도사는 무너지듯 엎드리며 외쳤다. 그 목소리에는 현천검제와 마찬가지로 격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노궁이 장문인을 뵈옵니다!”
그 모습에 어린 도사의 눈이 놀라움으로 화등잔만 해지더니 노궁을 따라 황급히 납죽 엎드렸다. 지금껏 이곳 화산에서 가장 큰 어른이 바로 노궁이었는데 그런 그 가 이런 예를 차릴 정도의 상대라니……. 어린 도사의 눈에 현천검제는 원시천존과 맞먹는 지고한 존재로 비춰졌을 게 뻔하다.
현천검제의 축출은 화산파 내에서도 극소수만이 관여하여 매우 비밀스럽게 이루어졌었다. 그리고 그 통보를 받은 무림맹의 수뇌부에서도 그 사실을 외부에 밝히 지 않았다. 정도무림의 치부(恥部)를 대놓고 떠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노궁은 지금까지도 현천검제를 장문인으로 알고 있었다.
어린 도사와 마찬가지로 노궁의 말과 행동에 깜짝 놀라기는 소연 역시 똑같았다. 아니, 당혹스러운 감정은 더했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현실이 너무나도 혼란스럽기만 했다. 마교 교주의 사제인 현천검제가 어찌 화산파의 장문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아무 내색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두 사람 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만큼 두 사람의 표정은 너무도 격동적이었고 슬펐기 때문이다.
노궁이 고개를 들며 울먹이듯 말했다.
“장문 어르신, 정녕 돌아가신 줄만 알았습니다.”
“허허, 선재, 선재로고.”
현천검제 역시 감정이 북받치는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선재라는 말만 되뇌었다.
마교와 달리 무림맹은 9파1방, 5대세가의 연합체였기에 맹주의 권한은 마교 교주만큼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맹주를 배출하지 못한 다른 문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권한이 커진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세력 약화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각 문파들은 맹주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여러 가지 조항들을 만들었고, 그중 가장 강력한 족쇄가 바로 무림맹은 자체적으로 고수를 키울 수 없다는 조항 이었다. 그 대신 부족한 힘의 공백은 각 문파에서 고수들을 파견하는 형식으로 채워졌다.
무림맹에 5천에 달하는 쟁쟁한 고수들이 있긴 했지만, 맹주의 독단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고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맹주를 배출한 문파의 동문제자들이야 쉽 게 움직일 수 있겠지만, 그 외의 인원들은 장로회의를 통해 각 문파의 지지를 얻어 낸 후에야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무림맹에 파견된 각 문파의 고수들이 먹고 마시고, 무기를 정비하는 등 생활하기 위해 들어가는 돈은 전액 자비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문파들이 수백 명에 달하는 뛰어난 고수를 맹에 파견하는 것은 자신들의 발언권을 확대하려는 의도였다.
그것도 다 맹주의 힘이 약하기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맹주의 힘이 약한 이상 맹에 많은 무력을 파견해 놓은 쪽이 조금이라도 더 발언권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 치였다. 더군다나 무림맹에서는 보다 많은 무사들을 확보하기 위해 맹의 일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는 문파들의 경우 무림맹의 장로직까지 줬다. 물론 맹의 일에 열성적이지 않은 문파들의 경우, 아무리 덩치가 크다 할지라도 장로직을 주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화산파다. 화산파는 검으로 이름 높은 문파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림맹의 장로직을 얻어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권력에 대한 욕망이 없었 던 현천검제는 다른 문파들로부터 욕이나 안 들을 정도의 최소 인원만을 맹에 파견했기 때문이다. 그 수는 겨우 1백 명. 그것도 뛰어난 실력을 지닌 1류고수도 아니 었다. 수련에만 매진해 온 문도들에게 잠시 세상 구경이나 하며, 다른 문파의 인재들을 사귀라는 의미에서 파견했던 것이다.
현천검제는 장문인이 된 직후 이런 인원 1백 명을 뽑아 무림맹에 보내라는 지시를 장로들의 수장인 백화 장로에게 내렸다. 그리고 그 일을 자신이 하겠다고 자원 한 인물이 바로 공천 장로다.
해마다 수천이 넘는 제자들 중 1백 명을 뽑아 무림맹으로 보내는 작업이다 보니 어떻게 보면 꽤나 귀찮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을 권력욕이 강한 공천 장 로가 떠맡은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무림을 위해 피 흘려 싸우러 가는 게 아니다. 넓은 세상 구경과 함께 쟁쟁한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어떻게 보면 1년 동안 근사한 휴가를 받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 인사권을 쥔 공천 장로는 막강한 권력을 쥔 거나 다름없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뽑은 인원들을 웬수같은 현천검제에게 그가 보고했을 리도 없다. 괜히 보고해 봐야 그 사람들을 뽑은 이유등의 시시콜콜한 내용으로 골머리를 썩을 게 뻔하니 아예 보고 자체를 생략해 버린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오랜 세월 이어지다 보니 화산의 문도 1백 명이 무림맹에 파견 나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현천검제는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화산에는 맹에 서 돌아온 1백 명과, 이런저런 이유로 그 당시 문을 떠나 있었기에 화를 피할 수 있었던 34명을 더해 총 134명의 문도들이 남아 있었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난 둘이었기에 서로 할 말도 많았다. 현천검제가 뒤에 서 있는 소연의 존재까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 던 두 사람의 대화를 중단시키는 인물이 있었다. 웬 젊은 도사 한 명이 달려오며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사숙! 드디어 찾아냈답니다.”
“응?”
현천검제가 고개를 돌렸을 때, 헐레벌떡 달려온 젊은 도사는 턱까지 올라온 숨을 씩씩거리며 다급히 말했다.
“개방에서 연락이 왔사온데, 귀주성(貴州省) 개리(凱) 인근에서 청류(淸柳) 사조님을 뵈었다는 사람이 있답니다.”
청류라면 현천검제의 사숙으로서 정확히 말한다면, 사부의 사제(師弟)다. 만약 아직까지도 생존해 있는 게 사실이라면 90세가 넘었을 것이다.
“청류 사숙께서 살아 계시다고?”
그제서야 젊은 도사는 현천검제를 돌아봤다. 처음에는 사숙께 웬 손님이 찾아오셨나 했는데, 곧바로 그의 머릿속을 뒤흔드는 말. 청류 사숙’이라는 명칭은 아무 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는 손님이 아니라 동문 선배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젊은 도사는 실례를 무릅쓰고 뚫어져라 현천검제를 바라봤고 곧이어 상대가 누군 지 기억해 냈다. 젊은 도사는 쓰러지듯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왕적삼(迪三)이 장문인을 뵈옵니다.”
“허허, 어서 일어나거라. 그래, 청류 사숙께서 살아 계시다고?”
“예, 개방에서 보내온 연락에 의하면 개리 인근에서 2년 전에 사조님을 만났다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 매우 정정하셨다고 하니, 어쩌면…”
아마 노궁은 은거한 전대(前代)의 선배들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화산파는 지금 수뇌부 고수들이 대부분 전멸당한 상태가 아닌가? 그렇 기에 노궁은 화산과 연이 닿아 있거나 지금은 은퇴하여 세상을 유람하며 유유자적 살고 있는 전대의 선배들을 찾으러 사방으로 제자를 보냈다. 물론 개방에도 사람 을 보내 그 일에 협조해 줄 것을 잊지 않았다.
노궁은 기쁨에 찬 눈빛으로 현천검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장문인, 어찌해야 할까요?”
“사숙께서 살아 계시다면 이곳으로 모시는 것도 좋겠지. 왕적삼, 너는 당장 사숙을 찾아가 본파가 처한 어려움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한다고 전하거라.”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노궁은 적삼이 제대로 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동행자를 선택해 주고 노자도 넉넉하게 주도록 해라.”
이렇게 지시를 내리던 현천검제는 문득 떠올랐다는 듯 다급히 물었다.
“참, 돈은 충분히 있는지 모르겠구나?”
“예, 마교도들은 무공서나 보물 같은 비교적 부피가 작은 것들만 약탈했을 뿐, 다른 것은 일체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장문인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런 뒤 노궁은 현천검제에게 고개를 조아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노궁과 왕적삼이 자리를 뜬 후 지금껏 아무런 말없이 조용히 서 있던 소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숙께서 화산파 장문이실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했습니다.”
“허허, 노부도 유백 사부님과의 인연으로, 괴팍하지만 멋있는 사형과 자네같은 아름다우면서도 현숙(賢淑)한 사질을 얻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 네.”
“과, 과찬이십니다, 사숙.”
감회에 젖은 눈으로 도관을 바라보던 현천검제의 입에서 소연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 싶은 말이 흘러나왔다.
“노부의 사문을 이렇게 만드셨지만 그래도 나는 사형과의 인연을 원망하지는 않네. 왜냐하면 그분의 행동에는 언제나 인과율(因果律)에 따른 명확한 선이 있기 때 문이지.”
“인과율이라니요?”
현천검제는 대답을 하지 않고 허허롭게 웃으며 계속 도관들을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 보수하며 관리해 온 고색찬연한 도관들을 말이다. 적이라 생각되면 풀 한 포 기 남기지 않고 초토화를 시켰던 지금까지의 마교의 행동으로 봤을 때 도관이 이렇게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사형의 배려였으리라.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기 만 하던 사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사형께서는 못난 내겐 너무나도 과분하신 분일세. 세상 사람들이 아는 것과는 달리 정도 많으신 분이고 말이야.”
자신을 바라보는 소연에게 현천검제는 그렇게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신을 음해하긴 했지만 죽은 제자들은 명문정파 화산의 제자들이 다. 이미 그들이 모두 죽은 이 마당에 그들의 치부를 들춰서 무엇 하겠는가. 그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현천검제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던 것이다.
화산파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현천검제는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느낌이었다. 물론 사형의 배려는 가슴이 메이도록 감격스러웠지 만, 어쨌든 자신은 화산파의 장문인이다. 앞으로의 행보를 고민하는 것은 당연했다. 화산파의 장문인으로 되돌아온 이상, 오랜 세월 정파의 한 기둥을 담당해온 화 산이 악의 무리라는 마교의 손을 대놓고 들어 주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사형에게 검을 겨누고 싶지도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현천검제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겠군. 이번 일을 계기로 화산은 다시 태어나게 될 게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연의 질문에 현천검제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코 미소를 지으며 할 소리는 아니었다.
“봉문을 할 것일세. 10년이든 20년이든 혼탁해진 화산의 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사형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말이야.”
“그, 그게 무슨……?”
“허허, 무량수불.”
결심을 굳히고 나자 마음이 평온해진 듯 현천검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도호를 외웠다. 바람이 그의 수염을 살랑이며 지나갔다. 따스한 햇볕이 내려쬐는 도 관은 세사와는 동떨어진 듯 마냥 평화롭게만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요란한 종소리가 정적을 깼다. 주위에 있는 새들도 놀랐는지 한순간에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노궁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의 손에는 장검이 들려 있었고, 그를 뒤따라 온 여러 명의 도사들도 모두 다 무장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노궁은 급히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마교도들이 나타났습니다.”
“마교도가?”
“예, 장문인. 무시무시한 고수들을 10여 명씩이나 보낸 걸 보면, 아예 여기를 끝장낼 생각인 모양입니다.”
그 말에 현천검제와 소연은 아차 할 수밖에 없었다. 노궁이 말하는 것은 바로 여문기가 이끌고 있는 호법원의 고수들일 것이다. 순간 현천검제는 노궁에게 마교의 고수들이 왜 이곳 화산에 왔는지 이야기를 해 줄까 하다 곧 그 생각을 접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 사실이 밖으로 새 나간다면 소연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나 화산파에도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현천검제는 중후한 어조로 제자들을 꾸짖었다.
“뭘 그렇게 당황하고 있는 것이냐? 너희들은 대화산파의 제자들이다. 그런 너희들이 마교도들이 두려워 우왕좌왕한다면, 지금까지 협의를 행하기 위해 수많은 악
도들과 싸우다 산화하신 선대의 조사님들께 면목이 서겠느냐?”
현천검제의 질책에 모두들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지만, 그들이 설마 극마급에 이르는 고수들이겠느냐? 저들을 대적하는 데는 나 혼자만으로도 족하니 너희들은 안심하고 하던 일에나 전념하도록 하거라.”
“존명!”
그제서야 자신들의 장문인이 화경급의 고수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모두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셨다. 하지만 장문인 혼자 마교도들과 대적하겠다는 말에 제자들 은 도관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현천검제는 엄한 어조로 어서 도관으로 돌아가 일을 하되 항시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다시 명령을 내렸다. 현천검제는 머뭇거리면서도 자신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리는 노궁을 불러세웠다.
“궁아, 잠깐 얘기할 것이 있구나.”
“하명하십시오, 장문인.”
다른 문하제자들이 모두 도관으로 돌아간 후에야 현천검제는 노궁에게 입을 열었다.
“노부는 마교도들을 처리한 뒤, 이 처자를 양양성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마.”
“예? 하지만 어찌 장문인 혼자서 저 흉악한 마교도들을……”
“허허, 그건 노부에게 따로 복안이 있으니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설마 노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현천검제의 말에 노궁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어찌 감히 하늘같은 장문인의 실력을 의심하겠는가?
“아, 아니옵니다. 제자, 장문인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현천검제는 노궁에게 자신과 마교도들과의 관계를 일부러 말해 주지 않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때론 진실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라 면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혀지는 것이 가장 좋을지도 모른다.
“그럼 노부가 양양성에 다녀올 때까지 네가 제자들을 잘 통솔하도록 해라.”
“제자 노궁, 장문 어르신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열과 성을 다해 노력하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