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48화
685화
스위트가 네리베르의 승리를 선언하고 첫 번째 대련이 끝났다. 대련의 당사자들은 결과가 믿기지 않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정말 승리라는 결과를 얻어 내자 네리베르는 기쁨과 흥분으로 인해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눈 밑과 두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돌아오자 은색 기사단의 여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녀를 격하게 축하해 주었다.
“네리베르! 대단한 녀석. 쪽! 이 굉장한 녀석 쪽! 사랑한다. 자랑스런 후배야. 쪽!”
온 얼굴에 쪽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런 게 한두 사람이 아니니 얼굴에 입술 자국이 가득해졌다.
“정말 잘했다, 네리베르, 실력이 정말 몰라보게 늘었구나.”
“호호호, 정말이야. 이틀 만에 수련 기사 졸업하고 바로 정식 기사 서임 받아야 하는 거 아냐?”
기사단에 입단한 이상 한 가족과 다름이 없어서인지 껴안고, 쓰다듬고, 키스하는 등 거침이 없었다. 이런 격한 축하에 네리베르는 기쁨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평소의 예의 바른 모습을 잃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모두 선배님들이 응원해 주시고, 충고해 주신 덕분이에요.”
“호호호, 얘 봐. 말하는 것도 예뻐. 귀여워 죽겠네, 진짜 내 동생 삼고 싶어~!”
곱게 고개를 숙이는 네리베르의 모습에 선배 기사들이 또 까르르 웃으며 흐뭇해 죽겠다는 얼굴이 됐다. 하지만 마냥 축하만 할 수는 없는 일.
남자처럼 짧은 머리가 인상적인 장신의 기사가 흥분한 기사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우리 축하는 그만하면 됐고, 이제 단장님 말씀을 들어야지. 이 기특한 후배가 우리 은색 기사단의 기사로서 첫 승을 탔잖아?”
“아, 맞다. 당연히 첫 승은 단장님이 직접 축하해 줘야지.”
그녀의 말에 기사들은 그제야 가장 중요한 것이 생각났다는 듯 비켜서며 길을 만들어 주었다.
쉴라 앞에 선 네리베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쉴라가 그녀의 어깨를 묵직하게 잡아 주며 말했다.
“네리베르 경. 정식 기사로서의 첫 승리를 축하한다.”
기사를 뜻하는 경의 칭호.
네리베르는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은 낯선 칭호와 쉴라가 그것을 불러 주었다는 사실에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가………… 감사합니다. 단장님.”
평소 말실수를 하지 않는 네리베르의 목소리가 태풍 속 깃발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러자 주변 기사들이 작게 야유를 보냈다.
“우~ 어린애를 두고 너무 건조합니다~”
그들의 반응에 쉴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야유를 보낸 사람들을 노려보고는 네리베르를 가슴에 안아 주었다.
“앞의 것은 단장으로서의 축하고, 이건 선배 기사로서의 축하다. 잘했다, 네리베르.”
“역시 우린 이쪽이 어울려~”
“예~”
그 모습에 이번엔 끊이지 않는 환호가 터졌다.
한 걸음 물러나 그 모습을 부럽다는 듯 바라보던 케마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나도!”
그녀도 선배 기사와의 대련이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네리베르의 선전과 승리를 보며 부담은 용기와 승부욕으로 변했다.
‘네리베르가 이겼다면 나도 자신 있어!’
이드의 수업을 통해 성장한 그녀는 네리베르를 상대로 우위에 서 있다. 네리베르 역시 실력이 늘어 빠르게 실력 차가 좁혀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녀가 네리베르보다 조금 더 강했다.
‘더글라스 경 정도의 실력이라면 분명 이길 수 있을 거야. 그럼 나도 케마란 경이라고 부르면서 단장님이 축하해 주시겠지?”
케마란은 생각만 해도 짜릿한 쾌감에 저 혼자 히죽거렸다.
“어쭈? 요 녀석 보게? 긴장은커녕 웃어? 오라, 자신 있다 이거지?”
어느새 다가온 스폴이 짓궂은 악동 같은 웃음을 매달고 케마란의 어깨 위로 턱을 올렸다. 순간 케마란은 선배와의 대련을 우습게 안다고 혼나지 않을까 흠칫했다. 하지만 전혀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는 스폴의 얼굴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네. 더글라스 경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라면 이길 자신이 있어요.”
“어쭈, 자신감 대단한데? 좋다. 은색 기사단에 어울려. 후배라고 무조건 선배에게 지라는 법은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들은 케마란은 싱글벙글한 얼굴이 되었다. 마치 미리 승리 축하를 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행복은 곧 이어지는 스폴의 말을 듣자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 대련에선 자신감은 넣어 놓고 긴장부터 해라, 후배. 저쪽에서 대련 상대를 바꿨다.”
갑작스런 변화에 케마란의 미소가 지워졌다. 어깨를 으쓱이게 하던 스폴의 칭찬에 바뀐 대련 상대에게 위축되지 말라는 뜻이 담겼다는 걸 눈치챘다.
저기서 축하받고 있는 네리베르를 보면 대련 상대가 바뀐 이유는 충분하고………….
“그럼 제가 싸워야 하는 상대 기사는 누군가요?”
“너희들을 보고 제일 처음 시비를 건 기사.”
“데이노스 경이요…………?”
“……다음 대련에 데이노스가 나선다고? 수련 기사를 상대로?”
우울한 표정으로 돌아온 더글라스는 그래도 같은 기사단 소속이라고 반겨 주는 동료 기사의 이야기에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수련 기사를 상대로 데이노스가 나서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어쩔 수 있나. 그대로 진행하면 세 경기에 모조리 패하게 생겼는데. 자네라도 이겼으면 모르지만…..”
・크윽. 제기랄.”
결국 자신이 져서 이런 꼼수가 나왔다는 말이다. 허망하다는 표정으로 더글라스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하다가 진 거야?”
“보고도 모르나? 하기야, 응원도 제대로 안 하던 네놈들이니……… 그런 꼼수를 꾸미느라 내가 어떻게 싸우는지도 안 봤지?”
“친구의 굴욕을 내가 어찌 보고 있겠나?”
“지랄! 궁금하면 아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 내 입으로 그 망신을 까라고?”
더글라스는 밀리고 밀리던 중 교묘한 발 기술과 완급을 조절한 검술로 인해 균형을 잃고 넘어지던 순간을 떠올리며 음침하게 웃었다.
“으흐흐흐, 다른 수련 기사의 실력도 네리베르 ‘경’ 정도라면, 어중간한 생각으로 덤볐다간 데이노스 놈도 낭패할걸?”
마치 저주 같은 장담에 귀를 기울이던 몇몇 기사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색 기사단의 요청에 의하여 대련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원래 케마란 경과 알폰스 경의 대련이 이어져야 했으나, 일리나 님의 상대였던 데이노스 경이 케마란 경과 대련하게 되었습니다.”
“우~”
“후배들을 상대로 이게 무슨 수작이야! 남자답지 못하게!”
대련 순서의 변경을 알리는 스위트 경의 목소리에 은색 기사단에서 야유가 터졌다. 특히 은색 기사단의 기사를 여자라며 무시하던 데이노스를 의식한 듯 어지간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성별에 대한 발언까지 터져 나왔다.
그녀들도 데이노스가 상급 기사에 근접한 실력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벽 위 매력적인 꽃처럼 그녀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온갖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사람들 덕분에 은색 기사단에는 다양한 정보와 소문이 모여들었고, 그중 데이노스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어느 정도 욕먹을 것을 각오한 남자 기사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데이노스를 응원했다. 두 눈은 절대 여기사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전방 60도 하늘을 보면서 말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지면 우린 화원에 못 있는다. 데이노스, 꼭 이겨라!’
네리베르 때와 같이 스위트의 당부와 격려를 받은 케마란은 긴장한 채 데이노스와 인사를 나누었다. 상대가 어떠한 실력자인지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당장 뒤에서 들리는 응원의 내용부터 네리베르 때와 다르다. 조심하라는 당부와 데이노스를 향한 협박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도 그녀의 승리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케마란은 섭섭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불만은 없었다.
‘당장 나도 이 선배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나 케마란, 날 우습게 보는 사람이든, 나보다 강한 사람이든 어떤 상대에게도 쉽게 물러선 적은 없어! 우습게 보지 말란 말이야!’
케마란은 은색 기사단과 여기사를 우습게 여기던 데이노스의 발언을 기억하고는 링스피어로 바닥을 찍으며 투지를 일으켰다.
“호오.”
그 모습에 데이노스가 감탄하며 마음에 들어 했다.
그녀와 마주 서기 직전까지는 은근히 기대하던 대련 상대를 빼앗기고 억지로 수련 기사 따위를 상대하게 된 상황에 마음이 거칠었었다.
그런데 자신을 앞에 두고 투지를 불태우는 케마란의 모습을 보고 그런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야유를 보내는 여기사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듯, 본인이 이길 수 없는 실력자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어린 수련 기사의 태도는 그가 후배와 동료 기사들에게 항상 바라던 것이었다.
‘여자치고는 제법 거친 투기를 보일 줄 아는군.’
보통 여기사들은 정련되고, 매끄러운 투기를 가졌다. 또한 그 투기를 노골적으로 내보이는 경우도 드물다. 그만큼 철저히 훈련받았다는 뜻이지만, 반대로 약하기 때문에 자신을 감추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케마란은 다른 것이다.
“좋은 투기를 가졌구나. 마음에 든다. 하지만 더글라스 경처럼 어중간하게 상대해 주지 않겠다. 선전을 기대하지. 최선을 다해라.”
자연 목소리에 은근한 호감이 담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무 은근하다 보니 케마란은 그 호감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그 말이 더글라스의 말과 비슷하다 생각하며 그에 답하던 네리베르의 말을 열심히 떠올리고 말했다.
“최선을 다해서, 충분히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데이노스를 노려보며 크게 콧김을 뿜었다.
그때, 남자 기사들 사이에서 유심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 기사가 옆에 있던 기사에게 조용히 속삭이며 말했다.
“야, 그런데 저 애들이 하는 말 있잖아. 가만히 들으면 굉장히 야하게 들리지 않냐? 만족시켜 주겠다니, 뭔가……………”
빠악!
점점 음흉한 표정으로 변해 가던 그는 차마 말을 다하지 못하고 뒤통수를 감싸야 했다. 그의 말을 듣던 기사가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의 뒤통수를 때린 것이다.
“어이구, 인간아. 저 후배들을 두고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냐? 정신 차려! 까딱 잘못하다가는 후배들에게 순식간에 뒤처지게 생겼다고!”
“각자 자리로!”
케마란은 스위트 경의 목소리에 따라 뒤로 물러나 양손으로 링스피어를 들었다.
아직 에고를 각성하지 않은 링스피어는 전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무기였지만, 그녀에게는 다시없을 반쪽이었다.
이번에는 그 반쪽과 함께 버거운 상대와 싸우게 되었다.
“하지만 전혀 겁나지 않는다고. 이래 보여도 우리는 마인드 마스터를 상대로 싸워 봤잖아? 어디까지나 지도 대련이지만. 그러니 감히 여기사를 무시하는 저딴 무식한 선배는 전혀 부담스러울 거 없어! 그러니 이번에도 잘 싸워 보자, 링스피어!”
케마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힘이 들어간 손에서 링스피어가 꿈틀거리는 듯하다.
물론 진짜 갑자기 링스피어의 에고가 깨어난 것은 아니다. 그저 손에 힘을 더하자 흔들린 것. 그러나 그것이 꼭 링스피의 대답 같이 느껴져 든든했다.
“시작!”
그리고 그 순간 떨어지는 시작 소리에 케마란은 큰 기합과 함께 뛰쳐나갔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인데도 망설임 없이 성난 들소처럼!
“저 바보가!”
케마란은 귓가에 아른거리는 네리베르의 욕설을 뒤로하고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데이노스를 향해 링스피어를 휘둘렀다.
참격(斬擊)이 아닌 타격(打擊). 링스피어에 달린 긴 검의 존재를 무색게 하는 호쾌한 공격에 데이노스가 입술을 핥았다.
강자를 상대로 망설이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고, 대충 떠도는 이야기로만 들었던 새로운 낯선 무기를 상대한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말했듯 전혀 봐 줄 생각은 없다. 왼팔에 장비한 작은 원형 방패로 공격을 막은 그가 반격을 위해 성큼 발을 내디뎠고, 그 모습에 눈을 번뜩인 케마란이 이드의 말을 떠올렸다.
‘링스피어는 창도 아니고 검도 아니지만, 두 무기의 장점을 가졌으며 제삼의 장점을 가졌다. 필요한 순간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라.’
무섭게 다가오는 데이노스의 모습에 위축되지 않은 케마란이 손목을 꺾었다.
빙글!
그러자 링스피어가 회전하더니 하늘을 향해 서 있던 검 끝이 데이노스를 향하며 그의 얼굴을 갈랐다.
푸스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