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250화


687화

대부분의 오색 기사단 기사가 그러하듯 데이노스 역시 어린 나이에 수련생으로 입성한 뼛속까지 소드 팰러스 생각뿐인 사람이다.

자질과 재능이 뛰어나 이른 나이에 황색 기사단의 기사가 되어 많은 실전 경험을 쌓았다. 그가 존경하는 단장을 닮아 막무가내인 점도 있지만, 황색 기사단 내의 평도 나쁘지 않고 상급 기사에 근접한 실력에 차기 황색 기사단의 인재로 주목받고 있었다.

그는 숙련된 기사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하하하, 운이 좋은 거냐, 나쁜 거냐? 나도 못 잡은 기회를 하필 나와 대련할 때 잡다니.”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데이노스는 부럽고, 어이가 없었다. 동시에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싸움에는 익숙하지만 남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는 애송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 상황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는 않는다. 검의 천재들이 모이는 소드 팰러스에 이런 일이 처음이겠는가.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없었던 일은 아니니까. 그러나 건너 건너 전해 들은 이야기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게다다 그 이야기가 지침서처럼 구체적인 것도 아니었다. 어떤 상급 기사는 무아지경에 빠진 후배에게 맞춰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헤매는 길을 알려 주며 이끌어 주었다던가? 과연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나에게 그런 섬세한 작업은 무리다.’

데이노스가 고개를 저었다. 실력에 자부심은 있어도 스스로의 역량 파악에 대해서는 냉정한 그다운 판단이었다.

그가 고민하는 사이 케마란의 링스피어가 기기묘묘한 형태로 공격해 들어왔다. 힘은 더해지고, 길이를 이용해서 빈틈을 온전히 메웠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대련 동안 링스피어를 온전히 파악하고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무아지경에 빠진 이 후배는 그 노력이 무색하게 찰나에 달라져 버렸다.

“허허허.”

문득 저 상태를 깨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고고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도 않았다. 콰르르륵!

거칠게 공기를 가른 링스피어의 날과 자루가 와이번의 긴 주둥이처럼 데이노스의 정수리와 사타구니를 노리고 아래위에서 덮쳐 왔다. 빠르게 반회전시킨 링스피어가 잔상을 남기며 허초와 실초를 섞어 날아든 것이다.

겨우 막아낸 공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데이노스가 결심을 굳히며 기력을 고조시켜 내공의 출력을 높였다.

잠시 고민했지만, 케마란을 다음 경지로 이끄는 일은 명백히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같은 황색 기사단에 속한 후배였다면 머리카락 빠지게 고민해 주겠지만, 타 기사단의 후배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정성을 쏟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줄 생각이다. 지금 무아지경에 들게 된 이유도 자신이 최선을 다했기 때문 아니겠는가.

“무아지경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네 행운이 거기까지뿐인 거지.”

우우웅-

이런 데이노스의 생각을 반영하듯 검에서 뿜어진 선명한 검기가 케마란의 빈틈을 노렸다. 그녀는 조금 전이었다면 회피할 법한 공격을 능수능란하게 막아 냈다. 그러나 마음을 정한 데이노스의 공격은 이전 같지 않았다.

쩌렁!

링스피어가 부서질 듯 진동하며 케마란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동시에 링스피어를 쥔 손아귀에서 피가 터졌다. 수련으로 단단해진 피부조차 충격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아무래도 데이노스 경이 잘해 주지 못할 것 같은데요.”

“……”

그 모습을 본 스폴의 말에 쉴라는 침묵했다. 오색 기사단에서 장래가 기대되는 기사들 중 하나로 꼽힌다는 기사가 설마 후배의 무아지경에 초를 칠 줄이야!

“지금이라도 제가 나설까요?”

허락만 떨어지면 당장 뛰쳐나갈 듯 비장한 표정으로 스폴이 물었다. 알게 된 시간은 길지 않지만, 성격이 잘 맞아 아끼게 된 후배가 신경 쓰였다.

쉴라는 바로 대답해 주지 않고 검기가 휘몰아치는 대련장을 살폈다.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기사들이 심각한 표정을 했다.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후배를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선배 기사. 대련이 끝나면 논란이 없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투두둑.

창대를 따라 흐른 피가 대련장에 뿌려지는 모습에 스폴이 참지 못하고 일어나자 쉴라가 그녀를 잡았다.

“단장님!”

“괜찮아. 데이노스 경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주고 있어.”

그 순간 데이노스의 공격을 방어하지 못한 케마란의 어깨가 검기에 베이며 피가 흘렀다. 검기조차 조심스러운 대련에 피까지 흘렀다. 그 모습에 검을 쥔 스폴의 주먹이 하얗게 변하며 살기가 흘렀다.

“저 칼질의 어딜 봐서요?”

스폴의 말이 거칠어졌지만 쉴라는 손을 풀지 않았다.

“잘 봐. 피부만 베었잖아. 포션과 신성 치료면 흔적도 안 남아. 본래 데이노스 경 정도의 실력이면 최소한 뼈가 상하거나 팔이 잘렸을 거야. 아마 지도 대련에 익숙하지 않은 그 나름의 최선이겠지.”

“상처가 점점 늘어 가는 게요?”

“아니, 원래 하던 대로 봐 주지 않는 것 말이야. 거칠긴 하지만 그 나름대로 신경 쓰고 있는 게 틀림없어.”

“여자를 상대로 칼질하는 사내놈치고 제대로 된 놈 드문 건 아시죠?”

“여자에게는 문제지만, 기사에게 상처는 훈장이야. 지금 케마란 경은 기사로서 싸우고 있어. 지금 스폴 경이 뛰어나가 데이노스 경을 대신하면 흐름이 깨져. 그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이상 함부로 대련을 중지시킬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

데이노스를 대변한 쉴라의 말에 작게 한숨을 쉰 스폴이 대련장의 데이노스를 한 번 노려보고는 검을 놓았다. 실시간으로 케마란의 상처가 늘어 가는 것은 안타까웠지만, 쉴라가 이렇게 말리는데 뛰쳐나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진짜 위험할 때는 나서 주셔야 해요.”

“그녀도 어제부터 내 기사야. 이미 두 사람이나 준비하고 있다고.”

쉴라의 말에 일리나가 살짝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만약의 경우 쉴라 뿐만 아니라 일리나 자신도 나서겠다는 표시였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케마란은 피투성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쉴라의 말처럼 최소한의 배려를 남겨 둔 데이노스와 달리 고삐 풀린 망아지가 달려 나가는 것과 비슷한 상태에 있는 케마란에 의해 대련이 온전히 통제되지 않아 생기는 상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관전하는 기사들 사이에서 야유와 욕설이 터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데이노스는 처음에 그 소리를 무시했다.

아니, 신경 쓰지 못했다. 눈에 보이게 성큼성큼 성장하는 케마란의 실력과 기기묘묘하게 쓰이는 링스피어의 모습에 군침을 흘리며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케마란에게서 새로운 형태의 공격도 보이지 않고, 몇 번이나 두드려 피를 흘리게 만들었던 빈틈도 메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쯧쯧쯧, 여기까지인가.”

데이노스가 혀를 찼다. 절대 자신을 욕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가 아니다. 케마란이 성장할 수 있는 한계가 나온 듯해서다.

“나쁘지 않은 무기지만 역시 검이 아니기 때문인가. 듣던 것만큼 실력이 늘진 않는군.”

짧은 시간 쑥쑥 늘어난 케마란의 성장이 결코 모자란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통해 전해 들었던 것에 비하면 절반 정도 모자라 보였고, 데이노스는 그것을 무기가 주는 한계 때문이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 끝을 볼까?”

마침 피칠갑이 된 케마란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주변의 욕설도 그렇지만, 이 이상 후배를 괴롭히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찌릉!

링스피어를 끌어 내린 데이노스가 케마란의 코끝이 닿을 듯 얼굴을 마주했다.

“끝은 화려하게 장식해 주마. 황색 기사단 비전 검법, 코틀… 크억!”

빠악!

자기 딴에는 멋진 말이라고 하고 있던 데이노스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 물러났다. 무아지경 중에도 그의 말이 듣기 싫었는지, 케마란이 데이노스의 얼굴에 머리를 박아 버린 것이다.

대련 중 최고의 유효타! 데이노스의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잘했다. 정신도 없는 후배에게 헛짓거리하던 놈이 천벌을 받았구나!”

“그게 아니었다고! 제기랄!”

억울한 누명에 코를 쥔 데이노스가 반박했지만 들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야유만 늘어났다.

그리고 야속하게도 케마란의 공격도 치열하고 강해졌다.

‘아무리 꿈이라도 그렇지. 이 아저씨가 새파란 처녀에게 무슨 짓이야!”

아직도 현 상황을 꿈이라고 생각한 케마란이 씩씩거렸다. 수천의 자신이 모여도 공격 방법이 나오지 않아 답답했는데, 상대가 되지도 않는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느끼한 낯짝을 저렇게 가까이 들이대며 할 소리는 정해져 있는 것. 아무리 꿈이라지만 저런 아저씨와의 키스는 싫었다. ‘꿈이라면 최소한 어느 나라 왕자님이나 이드 님 정도는 나오란 말이야! 저런 아저씨 따위 죽어도 싫어!’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공격과 방어의 수를 구경하는 것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 움직여 보려고 해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꿈이라도, 아무리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비록 꿈이라 할지라도 이런 아저씨와의 첫 키스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영혼을 끌어모아 반항했고, 그 마음이 꿈을 움직였는지 느끼한 얼굴에 제대로 한 방을 먹이는 데 성공했다. 천 명의 자신이 모여서도 하지 못한 일을 성공했다는 사실, 그리고 첫 키스를 아저씨에게 날릴 뻔한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그녀는 환호하며 상대를 몰아붙였다.

어떻게 하는지는 몰랐다. 모든 행동을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박치기 때처럼 온 마음을 다하면 짜릿한 순간이 겹치며 꿈속의 자신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다.

현실의 대련과 마찬가지로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은 알았다. 꿈속 천 명의 자신이 모여도 이기지 못한 상대였다. 꿈속 자신이 새롭게 보여 준 수를 모두 알고 있지만, 그것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도 못 하고 끝나 버린 대련을 여기서라도 끝내고 싶었다.

‘죽어! 죽어! 죽어!’

그녀는 잠시지만 최선을 다해 꿈속의 데이노스를 몰아붙였다.

곧 정신을 차린 데이노스에 의해서 순식간에 반전되긴 했지만 정말 짜릿하고 신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동시에 데이노스에게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맹렬한 기세가 솟구쳐 올랐다.

‘아, 이제 끝이구나.’

어떤 공격이 올지 몰랐지만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판단이 정확했다는 듯 데이노스가 크게 뭐라고 외치더니 푸르게 타오르는 방패로 허공을 때렸다.

‘어쿨라타?”

기술 이름인 듯 데이노스의 입 모양을 따라 하던 그녀는 방패에서 뿜어진 충격파가 꿈속의 자신을 찍어 누르며 커다란 원형의 고리를 만드는 모습에 신기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동시에 데이노스의 등 뒤에서 태양의 빛줄기처럼 뻗어 나온 검기가 먼저 자리 잡은 원형의 고리를 타고 흐르며 기형적인 각도로 쏘아져 왔다. 케마란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이건 앞서 보여 주었던 공격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젠장, 이런 걸 어떻게 상대하라고?’

차라리 허탈했다. 꿈속이라서 그런지 한없이 느려 보이지만 도저히 대응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방법을 떠올리고 모두 가망성이 없다고 포기한 순간.

“아!”

불현듯 번뜩이며 떠오르는 어떤 것.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이한 감각에 케마란이 홀린 듯 몸을 움직였다. 아까 꿈속의 자신을 움직일 때의 그 짜릿한 감각이 길게 이어졌다.

그러자 자신도 알지 못하는 형태로 검기를 베고 거슬러 오른 링스피어가 잉어의 꼬리처럼 펄떡이며 원형의 충격파를 부수고 데이노스의 가슴을 때리는 장면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짜릿함이 사라지고 온몸에 힘이 빠졌지만, 그 환상적인 모습이 아른거려 히죽 웃음이 났다.

투웅!

“무슨…… 커헉!”

모양은 빠지지만 해 놓은 말대로 비전 검법을 꺼내 들었던 데이노스는 어이없이 쓰러졌다. 충격에 순간 심장이 멈추며 함께 굳어 버린 몸을 움직이지 못해서다.

설마 그 순간에 그렇게나 수준 높은 공방 일체의 반격을 가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동시에 그는 대련 중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패배를 떠올렸다.

현재 그는 너무 무방비했다. 눈 깜작할 짧은 순간이지만 기사라면 몇 번이나 그의 목을 자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정작 머리에 남는 것은 패배보다 도대체 케마란이 어떻게 그런 수준 높은 공격을 가한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거기다 무언가 익숙한 그 느낌은 뭐지?’

머릿속이 복잡한 중에 엉덩이가 바닥에 닿고 몸이 움직여지자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그의 몸이 반격의 순간을 기다렸지만 당연히 이어져야 할 공격은 없었다.

그 대신 자신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드러누워 히죽거리는 얼굴로 부들부들 손을 들어 올리는 케마란의 모습이 보였다.

“졌습니………… 다. 히히히.”

“……?”

누가?

허탈하던 데이노스의 얼굴이 기묘하게 구겨졌다.

“…..”

놀라움을 숨기지 못한 쉴라가 입을 떡 벌렸다.

승패가 갈리고 스폴과 기사들이 뛰쳐나갔지만 쉴라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일리나를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네리베르와 함께 대련장에 올라가 있었다.

“분명 난화십이식의 분영화야. 절대 잘못 본 게 아니라고.”

당장 일리나에게 확인받고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 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전날 밤 일리나에게 배우기는 했지만 난화십이식은 검법이라 케마란은 참고만 하도록 했었다. 아니, 케마란이 링스피어가 아니라 검법을 익혔다고 해도, 단 하룻밤 배운 검술을 대련에서 저렇게 환상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런데 지금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기가 막히게도 검이 아닌 케마란의 링스피어를 통해서, 링스피어에 맞게 변형된 상태로.

아무리 그녀가 깊은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고 해도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가능, 불가능 이전에 이미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순간 오싹한 느낌에 솜털이 곤두섰다.

“천재…….

쉴라는 언젠가 이드가 케마란을 보고 했던 말을 따라 하고 있었다.

숨을 멈추고 사람들에 둘러싸인 케마란을 바라보던 쉴라가 팔을 쓸어내리며 알 수 없는 눈빛을 했다.

“혹시 그녀라면………….”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