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70화
707화
“아웅~”
오늘도 어제와 같이 무구를 닦던 케마란이 손을 멈추고 투정 부리듯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녀와 마주 앉아 있던 네리베르가 어깨를 움츠리더니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게 무슨 괴여운 척이에요? 당신에게 그런 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케마란은 자신의 기분을 몰라주는 네리베르의 엉뚱한 소리에 입을 삐죽였다.
“괴여운 건 뭐야?”
“괴물처럼 귀엽다?”
“똑똑해 보이는 너도 바보 같을 때가 있구나?”
킥킥거리며 훅 치고 들어오는 케마란의 말에, 그렇지 않아도 말해 놓고 이상한 단어라 생각하던 네리베르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움에 그녀가 빽 소리쳤다.
“윽, 이게 다 당신과 어울리는 바람에 바보기가 옮아서 그런 거잖아요.”
“흐응, 바보기가 옮는다는 말은 처음인데, 내가 바보란 것도 기분 나쁘고. 그래도 그 바보기가 옮아서 너도 바보가 된 거라면 나름 나쁘지 않은 거래 같아. 그렇지? 전염당한 바보 씨?”
“내가 왜 이곳에서 당신과 이런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지.”
네리베르는 울고 싶은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지금과 같은 두 사람의 대화는 무구를 손질하는 요 며칠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익숙해졌다고 할까? 케마란이 알면 바보 같다고 할 테지만.
수일 전 두 사람은 은색 기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사색 기사단의 기사들과 대련을 통해, 그녀들의 실력이 기존 기사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당장 대련을 마친 뒤부터 두 사람을 대하는 기사들의 태도가 바뀌었으니까. 그러나 두 사람이 가장 어린 막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화원에서 그녀들이 해야 할 일도 그대로였다. 실력과 상관없이 무구 손질은 기사단의 막내가 하는 것이 전통이었으니까. 현재 두 사람이 첫날과 마찬가지로 무구를 손질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다.
“그런데 갑자기 왜 괴여운 척이에요?”
“그거 그만둬! 정말 바보 같다고.”
“흥!”
고집이 느껴지는 코웃음에 묘한 기시감을 느낀 케마란이 입맛을 다시고 말했다.
“아니, 갑자기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어서.”
“……..”
양손에 무구와 가죽을 들고 할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케마란의 말뜻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네리베르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지금쯤이면 마스터, 파티 중이시겠지? 나는 여기서 걸레질이나 하는데. 우~ 파티 가고 싶어!”
“분위기 잡아 놓고………… 겨우 그거였나요!”
무언가 진지한 고민이 튀어나올까 봐 귀를 기울이던 네리베르가 바락 소리쳤다.
“당연하지. 매일 무구 손질만 하는 것도 지겹다고.”
“어차피 당신은 파티를 좋아하지도 않잖아요. 소드 팰러스에 파티가 있을 때마다 나오지 않거나 일찍 돌아갔으면서.” 소드 팰러스에서도 크고 작은 파티는 열린다. 특히 수련생들끼리 모이는 크고 작은 파티는 한 달에 몇 번이나 있다.
“그거야 지루했으니까. 무엇보다 음식이 부실했어.”
아마도 후자의 이유 때문이 확실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네리베르가 말했다.
“황궁의 파티도 다르지 않아요. 오히려 더 지루해요. 답답하고 조심스럽고, 절대 당신이 좋아할 분위기는 아니라고 확신해요.”
“그래도 황궁 파티잖아? 얼마나 화려하겠어. 아직 내가 먹어 본 적 없는 신기한 요리도 많을 테고, 마스터는 좋겠다. 그런 파티의 주인공도 되고.”
“뭐…… 그렇게 원한다면 몇 달 뒤에 있을 제 생일 파티에 초대할게요.”
고개를 살짝 돌리고 새침한 듯 말한 네리베르를 보고 케마란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내가 가고 싶은 건 황궁 파티지만…… 그렇게 원한다면 네 파티에는 가 주도록 할게.”
은근히 빼기는 케마란의 대답에 발끈한 네리베르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수련하던 기사들이 익숙한 듯 멈춰서 구경을
시작했다.
네리베르와 케마란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곧 자세를 바로 하고 조용히 목소리를 낮췄다.
“에효~ 원래대로였으면 황궁 파티는 아니라도 기사단과 함께 임무에 나서기라도 했을 텐데. 지금쯤 우리 기사단은 어디쯤 도착했을까?” “아직 멀었어요. 최소 하루 이상은 더 필요할 거에요.”
케마란이 화원의 입구를 보며 하는 말에 네리베르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들의 눈에는 이틀 전 화원을 달려 나가던 은색 기사단의 웅장한 모습이 아른거렸다.
원래라면 그녀들도 그 속에 함께해야 했다. 이드가 두 사람을 이곳에 남겨 둔 것도 경험을 쌓으라는 이유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수일 전 대련을 본 쉴라가 그 계획을 바꾸었다.
지금의 두 사람은 실전을 겪는 것보다 일리나에게 난화십이식을 배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그녀는 대련의 마지막 순간 케마란이 풀어낸 난화십이식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날 밤 케마란에게 대련 중 응용했던 난화십이식을 다시 확인하고는 전율했다.
“넌 태양처럼 반짝이는 재능을 가진 천재란다.’
떨리는 쉴라의 목소리는 한 점의 여유도 담겨 있지 않은 진심이었다. 그 말에 케마란은 물론, 쉴라와 같은 결론을 내렸던 네리베르도 놀랐다. 설마 쉴라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너희들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구나. 아무래도 이번 임무에서는 빠지는 것이 좋겠다.”
지나가는 듯 가벼운 말이었지만, 은색 기사단장의 발언은 기사단에게 있어 곧 법이었다. 그 시간부로 두 사람은 임무에서 제외되었다.
쉴라가 너희들이라고 말했지만, 네리베르는 그것이 케마란만 지목한 것이라고 느꼈다.
다시 불쑥 솟아오른 부러움에 케마란에게 말했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 때문에 나까지 빠진 거라고요.”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바보 주제에 너무 잘났으니까요.”
저게 칭찬일까? 욕일까?
잠시 고민하던 케마란은 결론을 내리고 링스피어를 움켜쥐고 달려들었다.
“좋아. 싸우자!”
“덤벼요!”
하던 일을 팽개치고 갑자기 결투를 시작한 두 사람.
물론 결과는 좋지 못했다. 번개처럼 달려온 데일리에 의해 순간의 소란이 멈추고 하염없이 길고 긴 기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케마란이 이드를 부러워하던 그 시간, 파티는 시작되지 않았다.
이드는 저택에서 쉬고 있다가 저녁이 가까워지자 마차를 타고 황궁을 향했다. 주인공이 일찍 도착해서는 멋이 나지 않는단다.
뭐, 남작이나 자작이라면 그것과 상관없이 빨리 도착해야겠지만, 황제에게 작위를 약속받아 후작의 대우를 받는 이드이기 때문에 빨리 갈 이유가 없었다.
“일리나스에서도 백작 이상은 해가 진 후 파티장에 입장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무엘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늦게 저택을 나섰던 이드는 곧 한숨을 쉬며 후회했다.
“또 막히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나오는 건데.”
검증 날과 마찬가지로 황궁으로 향하는 길은 많은 마차로 체증을 겪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일찍 가서 기다렸을 것이다.
좁고 불편한 마차보다는 황궁에서 내어주는 방이 백배는 넓고 편하니까.
그렇게 이드가 길 위에서 고생하는 사이, 파티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그중에는 백작 이상의 고위 귀족도 적지 않았다. 다른 파티라면 느긋하게 등장하여 위세를 보였을 테지만, 적지 않은 여운을 남긴 검증 뒤에 이어지는 파티였기 때문에 서둘러 파티장에 나와 버린 것이다.
“아나크렌 제국 파일 영지를 다스리시는…….”
“드레인 왕국 니브랄 영지를 다스리시는…….”
그리고 그러는 중에도 시종의 호명과 함께 귀족들이 파티장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검증 때 대전에 있던 자들도 있었고, 검증에 참석하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특히 지방에서 자신의 영지를 운영하느라 검증에 참석하지 못한 귀족들은 친분이 있는 자들을 찾아 검증 때 있었던 일과 이드에 대해 물었다.
“오랜만입니다, 백작님.”
“참으로 그러하네. 내, 영지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어 나라의 중요한 일을 몰랐지 무언가. 듣자니 자네는 검증에 참가했다지? 어땠나?”
“대단했지요.”
자작이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대전에서 있었던 일들을 자랑하듯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 검증에서 황녀와 이드가 주고받았던 문답의 내용은 빠져 있었다.
그리고 백작 또한 내심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지만 캐묻지 않았다. 묻는다고 해서 쉽게 이야기해 줄 성질의 것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똑똑하게만 사용하면 가문의 직접적인 무력 상승을 불러올 수 있는 귀중한 가르침이니까.
무엇보다 좋은 의미로 개최된 파티에서 거절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억지를 부리기엔 시간이 아깝다. 타 귀족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행위가 어리석은 짓이란 사실을 검증에 참가하지 못한 귀족들은 잘 알았다.
대신 기대는 있었다. 검증의 문답을 들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
두 사람이 아는 사실은 비밀일 수 없듯, 당시 문답을 들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지금이야 각자 욕심에 입을 닫고 있지만, 곧 누군가를 통해서든 슬금슬금 알려지게 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물론 그 정보를 얻기 위해서 제법 돈이 들겠지만,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 중 돈이 아쉬운 사람은 없었다. 문답의 내용을 얻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돈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둘째 문제. 지금은 우선 새 후작과 안면을 트는 것이 중요하다.’
셈이 빠른 자들은 결코 선후를 헷갈리지 않았다.
당장 이 파티에서 이드와 안면을 트고 친분을 만들면, 검증의 문답 따위보다 백배 천배 귀중한 것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귀족들이 사냥감 기다리듯 이드를 기다리는 사이, 황궁에 도착한 이드는 시종을 따라 대기실로 이용되는 방에서 잠시 쉬어야 했다.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시기 때문에 후작님의 입장 순서가 정해져 있습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파티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황궁의 파티는 확실히 다른 게 있는 모양이네.”
이드는 황궁의 배려에 순순히 따랐다. 무엇보다 일찍 파티장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아쉽네요. 이럴 때 시르피가 옆에 있었으면 어지간한 인물들은 접근하지 못했을 텐데.]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왜요?]
“시르피가 있었으면 공식적으로 검증을 받고 파티를 하는 일도 없었겠지.”
그랬다. 시르피가 실종되는 일이 없었다면 그녀를 통해 필요한 일을 처리하면 될 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라미아는 계속 생명의 관처럼 큰일에 관련되다 보면 어차피 이드의 존재가 알려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렇게 되면 황제가 부를 것이고.
그 뒤는…………….
결국 늦은가 빠른가의 차이가 있을 뿐인 이야기다.
쿵! 쿵!
“주인공이 입장할 시간인가 보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이드가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연 이드와 라미아는 시종이 아닌 의외의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황녀 전하?”
[밀리아리아 황녀?]
황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라미아를 일견한 후 검증 때보다 한층 화려해진 드레스 자락을 출렁이며 말했다.
“파티에 입장할 준비는 되셨나요? 후작님.”
“마침 시종이 입장을 알리길 기다리고 있지요. 황녀 전하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후작님과 함께 입장하려고 찾아왔지요. 파티의 주인공이면서 파트너도 없이 홀로 쓸쓸히 입장하실 후작님을 위한 배려랍니다.”
[・・・・・・이드, 당장 날 사람으로 변신시키세욧!]
대담한 황녀의 권유에 라미아의 역지가이드의 머릿속을 두드렸다.
그러는 중에 황녀가 팔을 살짝 들어 보였다.
“가실까요?”
“……”
이드는 그 손을 보고 순간 깊이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