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3권 17화 – 사방에는 박쥐들이 득실거린다네
사방에는 박쥐들이 득실거린다네
공식적으로 악비 대장군은 현재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추밀원에서는 그의 후임자에 대해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현재는 아쉬운 대로 대장군의 임무를 유광세 상장군이 대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황도에서 방금 전에 도착한 공문입니다, 상장군.”
중서성에서 도착한 공문을 읽기 시작한 상장군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재상 진회의 인장이 찍혀 있는 공문에는 악비 대장군이 감히 황실에 역심을 품었기에 그 죄를 물어 참수형(斬首刑)에 처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장군 따위가 감히 반란을 획책(劃策)할 수 있었던 것은 휘하에 있는 병사들을 사병화시키는 군벌 체제에 있다고 규정했다. 그렇기에 이후로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재발되지 않도록 군벌을 타파하고, 병권을 과거와 같이 추밀원으로 귀속하겠 다는 내용이었다.
공문을 읽고 있던 상장군의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윽고 공문은 그의 굳건한 손아귀 안에서 꾸깃꾸깃 구겨져 버렸다.
“이런 나쁜 놈들! 황실과 민초들을 위해 불철주야 최선을 다하신 대장군께 이딴 말도 안 되는 죄명을 덮어씌우다니. 대장군, 혹시 원통해서 눈도 못 감고 돌아가신 건 아니요? 크흐흐흑.”
오랜 세월 악비 대장군과 함께 전장을 누빈 상장군이다. 그랬기에 악비 대장군이 단 한 번도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살지 않았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대장군에게 역심을 품었다는 더러운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다니. 지금껏 그가 이뤄 놓은 공로를 생각한다면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한동안 악비 대장군을 생각하며 목을 놓아 오열하던 상장군은 어느 정도 감정이 진정되자 밖에 대고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슬픔에 잠겨 거칠게 쉬어 있었다.
“순우기 장군더러 이리 오라고 전하라.”
“옛, 상장군.”
잠시 후 순우기 장군이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상장군.”
“이걸 한번 읽어 보게.”
공문을 다 읽은 순우기 장군은 뭔가 미심쩍은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갑자기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상장군을 향해 입을 열었는데, 악비 대장군의 억울 한 죽음에 분노하기는커녕 뭔가 숨기는 것이라도 있는 듯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군벌 타파를 하겠다는 공문이로군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상장군. 과거부터 군권은 추밀원에 있었으니 돌려 달라면 줘야 하겠죠. 더군다 나 지금은 대장군께서도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말입니다.”
꽝!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순우기 장군의 말에 상장군은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섰다.
“자, 자네 어찌 그런 말을…….”
“시세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대장군께서도 돌아가신 이 마당에 우리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지 않습니까.”
순우기 장군은 말을 하면서도 연신 눈을 찡긋거리며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노화를 터트리려던 상장군은 그 순간, 얼마 전에 대장군을 감시하던 첩자들이 자신에게 붙었을 거라며 조심하라던 순우기 장군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순우기 장군의 눈가는 이미 물기로 흠뻑 젖어있었다. 상장군은 장탄식을 터트리며 자리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맞장구를 치려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분노로 인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렇겠지.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황실에서 이렇게 하지 않고 그냥 대장군께 군권을 내놓으라고 말만 했어도 그냥 내놨을 텐데…. 참으로 애석하구먼.” 너무나 원통했기에 상장군의 입에서 할 필요가 없는 말까지 흘러나왔다. 갑자기 순우기 장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장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기분도 그런데 술이나 한잔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혹시라도 상장군이 말실수라도 할까 봐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상장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오늘은 흠뻑 취해 보고 싶구먼.”
“마침 서문세가에 좋은 술이 있다고 하니 들러서 한 동이만 달라고 하죠.”
두 사람은 일어서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서문세가를 향해 곧바로 걸어갔다. 서문세가에 도착하자 순우기 장군은 일단 서문길 가주에게 면회 신청을 한 뒤, 대기 실에서 기다리는 와중에 목소리를 낮춰 상장군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현재 무림세력의 지휘부인 이곳 서문세가까지 첩자들이 따라올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앞으로 한층 더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상장군.”
“그게 무슨 말인가?”
“그 공문을 보고 뭔가 느끼신 게 없으셨습니까?”
“글쎄…, 놈들이 대장군에게 말도 안 되는 더러운 오명을 뒤집어씌워 죽인 뒤 군권을 회수하려고 한다는 것 정도?”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재상은 능구렁이 찜 쪄 먹을 정도로 노회한 인물입니다. 예전에 상장군께서도 황도에서 그에게 뒤통수를 맞아 보지 않으셨습니까?”
황제 앞에서 당했던 그날의 치욕이 떠오르자 유광세 상장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황제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 믿으라’며 호언장담을 하더니, 막상 황제의 코앞에서 딴소리를 지껄여 자신을 완전히 물먹이지 않았던가.
썩 유쾌하지 못한 과거를 떠올리며, 상장군은 퉁명스런 어조로 되물었다.
“그 얘기를 꺼낸 이유가 뭔가?”
“그렇게 노회한 인물이 이렇게 뻔히 보이는 술책을 쓸 리가 없다는 거지요. 재상이 이런 공문을 보낸 의도는 좀 더 깊숙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어떤 저의로 이런 공문을 보낸 것인지 말입니다.”
“저의?”
“예, 이런 말도 안 되는 공문을 받고 분노하지 않을 군벌은 단 한 명도 없을 겁니다. 더군다나 지금 당장 군권을 반환하지 않는다면, 네놈들도 대장군처럼 참수형에 처하겠다고 하는 위협이나 다름없으니 말입니다. 이걸 보시고 상장군께서도 불같이 분노를 터뜨리지 않으셨습니까?”
듣고 보니 이상했다. 황성에 주둔해 있는 황군이라고 해 봐야 겨우 5만이 전부다. 악가군이 아니라도 서너 개 군벌만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황실을 뒤집어엎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 그렇군. 설마 미친 게 아니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공문을 보낼 수가 없을 텐데.”
“그러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진회의 진짜 저의가 뭔지 말입니다. 아마도 뭔가 믿는 구석이 없지 않고서는 마치 반란이라도 일으키려면 일으키라는 식의 충동질 을 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유광세 상장군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아무리 믿는 구석이 있다고는 해도 그렇게 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병법 중에 타초경사(打草驚蛇)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부러 풀을 쳐서 뱀을 놀라게 하여 뱀의 반응을 살펴보는 거지요.”
“흐음…, 그렇다면 내 반응을 살펴보기 위한 첩자들도 있겠군.”
“예, 상장군. 그 때문에 상장군을 뫼시고 여기로 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자네가 철저하게 내 주위를 한번 점검해 보게. 뭔가 수상쩍은 놈이 있는지 말이야.”
그 말에 순우기 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하는 것보다는 묵 대인에게 부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묵 대인에게?”
“예, 제가 원하는 것은 은밀하게 첩자를 찾아내자는 것이지 찾아서 죽이자는 게 아니니까요.”
“아니, 우리를 감시하는 놈들을 찾아 죽여 버리면 되지, 뭐 하러 그놈들을 살려 두나?”
거칠 것 없이 전장을 휩쓸고 다녔던 상장군으로서는 첩자들의 눈과 귀를 피해 이런 식으로 밀담을 나누는 것이 너무 답답하기만 했다. 순우기 장군은 그런 상장군 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미소 지으며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
“그들을 찾아서 없앤다는 건 이쪽에서 뭔가 찔리는 일을 행하고 있다는 걸 상대에게 알려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대신 첩자들이 누군지 알고 있다 면, 암도진창(暗渡陣倉)의 계책을 써먹을 수 있지요. 그래서 묵 대인에게 부탁하여 무공이 뛰어난 자들로 하여금 은밀하게 첩자들을 찾아내자는 말입니다.”
암도진창이란 허위 정보를 누설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계책이었다.
“첩자들을 역이용해서 허위 정보를 흘리고 앉아 있을 시간 여유가 있을까? 형부에서 명령서가 날아온 지 꽤나 시간이 지나지 않았나?”
그 말에 순우기 장군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씨익 미소 지었다.
“재상이 보낸 이번 공문으로 인해 시간 여유가 충분히 생겼으니, 그리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형부에서 묵 대인 일행을 체포해서 압송하라고 한 이유는 그들에게 대장군 납치 혐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재상이 자기가 대장군을 처형했다 고 공표했는데 형부의 명령에 따를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상장군은 그제서야 형부에서 온 명령서의 내용을 기억해 냈다.
“오호라, 그렇구먼. 그럼 이제부터 천천히 기회를 엿보며 일을 추진해도 되겠구먼.”
“예,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대한 조심, 또 조심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입니다. 진회가 뭘 믿고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기까지는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젊은 장수들을 포섭하여 일을 벌일 준비를 해야겠지요.”
“일을 벌이다니…, 혹시 자네 말은?”
“얼마 전에 상장군께서 묵 대인에게 들은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에 잠시 상장군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악비 대장군을 역모라는 음모로 잡아 죽인 자들이 대장 군의 심복인 자신을 가만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해야겠지? 아니, 하겠네. 날 좀 도와줄 수 있겠는가?”
“당연히 도와 드려야지요. 대장군을 죽인 놈들을 치는 일인데 제가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제 목숨이라도 드리겠습니다.”
그런 순우기 장군의 말에 상장군은 감격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내가 어찌 행동하면 되겠는가?”
“거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훈련교두(訓練敎頭)이신 여문덕(德) 상장군께서 이 일에 동참해 주셔야 합니다.”
여문덕 상장군은 매사에 모든 일을 꼼꼼하게 처리하는 전투보다는 병참 쪽에 더욱 뛰어난 자질을 지닌 장수였다. 그렇기에 악비는 훈련교두라는 직책과 함께 30 만 신병의 훈련을 그에게 맡겼던 것이다.
순우기 장군의 말에 상장군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빙그레 웃었다.
“나보다 더 대장군께 충성을 다했던 사람이 바로 여문덕이네. 아직 대장군의 죽음에 대한 음모를 알지 못해서 그렇지, 만약 알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한 팔 거들 겠다고 뛰어올게 분명해.”
악가군이 흔들릴까, 상장군이 철저하게 악비 대장군의 죽음을 비밀로 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여문덕 상장군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에 순우기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번 거사는 거의 성공한 것이나 진배가 없습니다. 여 상장군께도 진회가 보낸 공문이 갔을 테니, 지금쯤은 그분도 일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조금은 눈치 채고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몇몇 장수들과 이미 접촉해 운을 띄워 보았는데 모두들 분노하며 참여하겠다고 의사를 밝혀 왔습니다. 그럼 저는 본격적으로 나머지 장수들과 접촉해 거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포섭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허어, 대장군께서 자네를 총애하며 아끼신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군. 그렇다면 나는 여문덕이를 만나 이야기를 해 보겠네.”
하지만 순우기 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현 시점에서 상장군께서 움직이신다면 괜한 의심을 받기 쉬울 겁니다. 차라리 묵 대인을 만나 거사를 도와준다는 확답을 다시 한 번 받으십시오. 그리고 첩자 건 에 대한 도움도요.”
“그래, 자네 말대로 하지. 그럼 여문덕이는?”
“제가 며칠 뒤 병사를 보충받기 위해 무한으로 가야 하니 그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그래, 그럼 자네가 힘 좀 써 주게. 내 자네만 믿겠네.”
잠시 후 총관이 나와 서문길 가주에게로 두 사람을 안내해 갔다. 악비 대장군의 명에 따라 무림인들과의 협조를 얻기 위해 평소 자주 이곳을 들락거렸기에 서문길 과도 충분히 안면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문길과 한동안 봄에 재개될 금과의 전쟁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술 한 동이를 청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문길은 흔쾌히 총관을 시켜 술 을 가져오게 하면서도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이곳에서 드시지요. 왜 다른 곳으로 가서 드시려고 하십니까?”
“하하, 마음이 답답한 듯하여 사방이 툭 트인 곳에서 마시려고요.”
서문길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물었다.
“혹시 아름다운 미인들과 함께 드시려고 그러시는 것은 아닙니까?”
“미인? 핫핫핫, 미인은 없지만 밤이 되었으니 박쥐들은 있겠군요. 그놈들과 같이 술을 마시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을 법합니다그려.”
두 사람이 술을 가지고 집무실 밖으로 나가자, 서문길도도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 시비에게 술상을 차려오라 지시를 내렸다. 그 또한 가슴이 답답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무 말도 없이 어딘가로 떠난 아버지 수라도제를 생각하면 말이다.
다음 날 점심 무렵 유광세 상장군은 시찰을 한다는 명목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마교가 있는 장원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하지만 묵향을 만날 수는 없었다. 뭔가 일이 있어서 한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무슨 일 때문에 교주님을 찾으시는 겁니까? 교주님께서는 가능하다면 상장군의 요청을 모두 들어 드리라고 명령하셨으니 부담 갖지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흑풍대주 관지 장로가 그렇게 말했지만 상장군으로서는 선뜻 입을 열기가 곤란했다. 잘못하면 반역죄를 덮어쓸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만도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상장군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을 하려고 찾아왔소이다.”
그러면서 상장군은 추밀원이나 황성사에서 양양성에 집어넣은 첩자들을 찾아 줄 것을 요청했다. 물론 순우기 장군의 말대로 첩자들이 누군지만 파악해 달라는 말 도 잊지 않았다.
첩자를 찾아내는 일은 의외로 힘들다. 하지만 그 첩자가 감시할 인물이 누군지만 안다면 의외로 쉽게 찾아낼 수도 있다. 상장군은 첩자가 감시할 가능성이 가장 높 은 인물로 자신과 함께 순우기 장군, 그리고 10여 명에 이르는 고위급 장수들을 지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관지 장로는 그들에게 두 명씩 눈치 빠른 녀석들을 뽑아서 붙여 놨다. 그들의 임무는 상장군이 말해 준 인물들을 감시하는 또 다른 인물들이 있는지 찾아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