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4권 3화 – 동맹의 증거
동맹의 증거
양양성 주둔 마교 파견대로부터 날아온 협조공문을 살펴본 옥화무제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건 또 뭐죠?”
총관은 자신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쪽에서 날아온 협조공문에 대해서는 최대한 빨리 답을 해 주라는 태상문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날아온 건 당최 그 의 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라서…….?”
그래서 옥화무제에게까지 공문이 넘어왔다는 것이리라.
협조공문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읽어 본 옥화무제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생각에 잠겼다. 양양성을 벗어나기 힘든 흑풍대주 관지가 금나라 황제에 대한 정보를 요 청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 요청은 관지 장로가 아닌 마교 교주, 즉 묵향이 보냈다고 봐야 했다.
그가 왜? 어디에다가 쓰려고 이 정보를 요청한 것일까?
“아직까지 본녀에게 보고되지 않은 마교 쪽의 움직임이 있었나요?”
“결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태상문주님. 1종대가 임시 둥지로 돌아갔다는 보고를 끝으로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1종대’라는 것은 혈랑대를 지칭하는 암호였고, ‘임시 둥지’는 곧 대별산맥에 마련된 마교 주력 부대의 임시 거처를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무영문에서는 아직까지도 혈랑대의 정식 명칭이 뭔지 모르고 있었다. 묵향이 마교를 장악한 후 무림은 오랜 세월 평화가 지속되었다. 20여 년 만에 처음 이들 이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인 만큼 마교의 최상위 무력 단체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정체를 마교 쪽에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무영문에서는 혈랑대를 ‘1종대’라고 불렀다. 어쨌거나 대별산맥에 와 있는 전투단들 중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옥화무제가 묵향이 무슨 꿍꿍이로 금나라 황제의 정보를 요구한 것인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총관이 슬쩍 입을 열었다.
“혹시 황제를 납치하려는 생각이라도…….”
옥화무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단순무식한 무골(武骨)이라고 하지만 그도 일파의 지존이에요. 그렇게 생각 없이 움직일 리는 없어요.”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무림맹에서 황실에 고수들을 파견해 뒀듯, 장인걸 또한 금 제국을 대표하는 지존을 무방비 상태로 놔뒀을 리 없다. 5만에 달하는 근위병을 연경에 배치한 것만으로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연경으로 통하는 군사적 요충지들에 도합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포진해 놨다.
이렇게 드러나 있는 전력 외에도 무영문의 조사에 따르면 40여 명에 달하는 특1급 고수들을 비롯해 1천에 가까운 고수들이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황 궁 내에 얼마나 많은 함정들이 설치되어 있는지는 무영문에서조차도 제대로 파악해 내지 못했다.
황궁에 투입한 첩자들 중 일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마다 그들이 뭔가에 접근했을 거라는 것 정도만 추정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만큼 장인걸 휘하의 편복대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집단이었다.
금송전쟁에 마교가 끼어들었다는 걸 장인걸이 알아차린 지도 꽤나 오랜 시일이 지났다. 그 정도라면 장인걸도 마교의 소수 정예가 치고 들어올 가능성에 대비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묵향이 생각이 없는 단순 무식한 무골이라고 해도 그런 곳에 단독으로 쳐들어갈 리는 절대로 없다.
더군다나 요 근래 묵향이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은 단순무식과는 거리가 먼, 아주 잔대가리가 잘 돌아가는 교활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혹, 황제를 암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현재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겠네요. 그런데 왜 갑자기 교주가 황제를 암살하려고 하는 거죠? 지금껏 그는 적의 우두머리를 암살해서 단번에 전쟁을 끝 내 버리는 방식을 선호하지는 않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옥화무제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총관에게 물었다.
“추밀단에는 문의해 봤나요?”
총관은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예, 하지만 너무나 정보가 부족해 추밀단에서도…….”
과거처럼 무영문의 많은 정보조들이 마교를 감시하고 있다면 혹 모르겠지만, 지금은 인력 부족으로 인해 마교에 대한 감시는 상대적으로 약해져 있었다.
“악비 대장군의 죽음에 대한 실망감이 그만큼 컸던 것인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왜 안 하던 짓을 하려고 하는지 정말 모르겠군요.”
잠시 고심하던 옥화무제는 이윽고 결정을 내렸는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넘겨주도록 하세요.”
그 말에 총관은 걱정스럽다는 듯 대꾸했다.
“예? 그래도 상관없겠습니까? 지금까지 파악된 정보로는 특급살수 열 명을 한꺼번에 투입한다고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한데요. 그러다가 괜히 흑살마 왕의 성질만 건드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옥화무제는 다음 문서를 집어 들며 물었다.
“이 안건은 뭐죠?”
“예, 황궁에서 무림맹에 무사들을 파견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답니다.”
“왜군 때문에 그러는 건가요?”
“예, 왜군들이 양양성으로 가기 위한 이동로가 황궁 인근을 통과할 뿐만 아니라, 마교에서 처음에 말한 1만이라는 숫자와도 너무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 문젭니다. 더군다나 교주가 황궁에 잠입해 대신들을 납치하여 고문했을 뿐만 아니라, 황군과도 접전을 벌여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혔기에 황실에서는 마교의 제안을 거부하 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모양입니다.”
“하긴, 지금까지 해적질을 일삼던 놈들이 갑자기 우리를 돕겠다고 병력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럽기는 하죠.”
잠시 문서를 뒤적거리며 읽고 있던 옥화무제는 슬쩍 고개를 들어 총관을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황실에서 무림맹에 무사들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그들을……?”
총관은 옥화무제가 채 말을 끝맺지 못했지만 자신에게 뭘 물어보는지를 금방 알아차렸다.
“예, 태상문주님이 생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흠, 아주 곤란한 일이군요. 지금과 같이 혼란한 상황에서 자칫 마교와 싸움이라도 일어난다면.
옥화무제는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픈지 손가락으로 이마를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던 옥화무제는 뭔가가 떠올랐는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바로 그거야!”
옥화무제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총관은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교주가 금나라 황제를 암살하려는 이유 말이에요.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마교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해 있어요. 교주는 금나라 황제를 암살함으로써 자신의 목 표는 금나라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리고 싶은 거예요.”
총관이 듣다 보니 옥화무제의 말이 그럴듯했다.
“태상문주님의 예측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엉클어진 실마리가 모두 풀려 아귀가 딱딱 맞아 들어갑니다.”
옥화무제는 다급히 무림맹에 보낼 문서를 작성한 후 총관에게 건네주며 명령했다.
“지금 당장 무림맹에 전서구를 띄우세요. 무림맹이 황궁을 도와 왜군을 치는 일을 반드시 막아야만 해요. 기껏 공들여서 10만에 가까운 구원병을 얻어 냈는데 그 걸 몽땅 다 잃는다면 교주가 얼마나 분노하겠어요?”
“존명! 지금 당장 전서구를 날리도록 하겠습니다.”
“최소한 다섯 마리 이상 날리도록 하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무림맹에 도착해야 하니까.”
“옛! 알겠습니다.”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총관이 밖으로 뛰어나가자 옥화무제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다시 한 번 더 찬찬히 생각해 봐도 자신이 내린 결론 외에 다른 이유는 없는 듯했 다. 하지만 만약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면?
옥화무제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어디에 쓸 정보인지 정확히 말해 주면 이용해 먹기도 편할 텐데.. 워낙 상식을 초월한 인간이다 보니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가 너무 힘들어.”
오랜 세월 무림에서 닳고 닳은 옥화무제였지만 묵향을 상대하는 것만큼은 쉽지 않았다. 어떨 때는 혹시 머릿속에 구렁이 열두 마리쯤 넣어 놓고 일부러 순진한 척 능청을 떠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묵향의 행동은 종잡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오랫동안 묵향과 부대끼며 지내오다 보니 이쪽에서 뒤통수만 치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로 그 신뢰를 절대로 저버리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 * *
은밀한 곳에 위치한 무림맹의 비밀회의실에는 무림맹주와 몇몇 수뇌부가 모여 황실에서 날아온 밀서에 대해 긴박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황실에서 정식으로 협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맹주님.”
황실에서 요구하는 것은 왜군 격퇴에 무림맹의 힘을 보태 달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관군의 힘만으로 왜군의 대군을 격파하려면 막대한 피해를 각오해야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습니다, 맹주님. 이제 결정을 내리셔야만 합니다.”
“허허, 이거 참. 아주 곤란한 일이로구먼.”
청호진인의 계속되는 채근에도 맹주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단순하게 처리할 사안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현재 마교와 무림맹은 동맹 관계다. 문제는 최근 마교의 행보를 보면 절대 동맹으로의 신뢰감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었지만.
황실의 고관대작뿐 아니라 고위직 환관까지 납치해 고문하는 만행을 저지른 마교. 그 과정에서 공동파, 아미파와 충돌해 수십에 달하는 고수들을 살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추포(追捕)하기 위해 출동한 황군 기마대 4백여 기를 도륙하기까지 했다. 맹주가 가장 언짢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무도한 짓거리를 해 놓고도 아직 까지도 무림맹에 일언반구조차 없다는 점이었다. 뭔가 해명을 하거나 그럴듯한 변명이라도 늘어놓아야 하는 것이 동맹된 자의 기본 예의가 아닌가.
그 때문에 황실과 마교 사이에는 더욱 골이 깊어진 모양이다. 절강성에 상륙한 왜군들이 마교가 불러들인 동맹군임을 뻔히 알면서도 전멸시킬 작정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무림맹으로서도 황실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이 자신들을 돕겠다고 병력을 보내온 것도 어이가 없을 지경인데, 그 숫자 또한 어마어마했다. 마교 쪽에서는 1만 명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현재 절강성에 상륙한 왜구의 수는 무려 7만을 상회한다는 정보였다.
그리고 그 수가 또 얼마나 더 불어날지는 개방조차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도 일주일에 두 차례에 걸쳐 계속 증원병들이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마교는 왜군을 양양성으로 이동시키겠다고 통보해 왔다. 하지만 그 이동로가 황도 부근을 통과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들이 양양성으로 가는 척하며 곧바로 황성을 향해 진격한다면 도저히 손쓸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지금 무림맹의 수뇌부는 시험 아닌 시험을 당하고 있었다. 황실의 말을 들을 것인가, 아니면 동맹인 마교를 믿을 것인가. 물론 마교를 믿어야 하겠지만, 최근에 보인 마교의 행보와 지원군이라고 온 병력이 그동안 노략질로 유명해진 왜군들이라는 걸 보면, 마교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그냥 손놓고 있기 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봤지만 맹주는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물을 한 번 쏟으면 다시 잔에 담을 수 없듯, 이번 결정이 마교와의 관계에 미칠 영향이 너무나도 크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때 감찰부 소속의 문사 한 명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와서는 감찰부주에게 문서 몇 장을 건네주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감찰부주가 뭔가 하고 힐끗 보다 갑자기 정 색을 한 뒤 몰두해서 문서를 읽고 있는 걸 보자 청호진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질책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사제.”
무슨 일인데 맹주님과의 회의조차 멈추고, 문서를 읽느라 정신을 팔고 있느냐는 질책이었다. 이에 감찰부주는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옥화 봉공님께서 긴급으로 보내신 겁니다. 이번 회의에 참고 자료가 될 듯해서 수하가 급히 들고 온 모양입니다.”
감찰부주는 문서를 맹주에게 공손히 바치며 말했다.
“읽어 보시는 게 결단을 내리시는 데 많은 도움이 될듯합니다.”
맹주는 문서를 쭉 읽어 본 후 궁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청호진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허~, 이게 사실이라면 출병은 불가하구먼.”
청호진인은 맹주에게서 문서를 넘겨받아 급히 읽어 본 후 맹주의 의견에 반박했다.
“황제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마교를 믿을 수 없다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왜군이 황성 부근을 통과하다가 창을 거꾸로 잡으면 누가 책임질 겁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황실의 뜻을 따르지 않으신 맹주님의 입지만 위태로워질 겁니다.”
“그러면 대체 어쩌자는 건가? 마교는 조잡한 변명쯤으로는 통하지 않을 것 같자, 이렇듯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려고 하는데 말이야.”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감찰부주가 끼어들었다.
“맹주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사형. 만일 이쪽에서 왜군을 전멸시켰는데 저들의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면 그만큼 난감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일단 황실 쪽을 설득해서 출병을 늦추고, 왜군의 이동 경로를 황도와 멀리 떨어진 다른 쪽으로 해 달라고 마교에 요청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자 청호진인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교주가 흑심을 품고 있다면 이쪽에서 시간 여유를 주는 게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교가 금나라 황제를 암살하는 데 성공이라도 해 보십 시오. 저들은 아주 당당하게 대군을 황성 쪽으로 이동시킬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만약 금나라 황제의 암살이 성공한다면 청호진인의 말대로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지금까지 마교가 행한 태도를 보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만한 사악한 집단이었으니까. 맹주는 머리가 아픈지 고개를 흔들다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흠…, 사질은 저들을 믿지 않는 모양이구먼.”
“물론입니다, 맹주님. 믿을 사람이 따로 있지, 어찌 마교도들의 말을 믿는단 말입니까.”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동안 감찰부주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열심히 고민을 해 보았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허허, 이거 참. 일이 정말 고약하게 되었습니다.”
“고약할 것도 없네. 저들이 황제를 암살하지 못하도록 막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될 게 없어.”
그 말에 맹주는 귀가 솔깃했는지 급히 물었다.
“그건 대체 무슨 말인가?”
“금나라 쪽에 정보를 슬쩍 흘리는 겁니다. 마교가 황제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이죠. 안 그래도 철옹성 같은 곳인데 만반의 대비까지 갖추게 되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살수라도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겁니다. 만약 왜군을 전멸시킨 것을 따지고 들면, 너희들이 저지른 만행으로 인해 황실에서 도저히 못 믿겠다고 협조를 요 청해 왔다고 하는 겁니다. 저희들이야 충성스러운 송나라 백성들이니 황실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마교가 우리에게 믿을 만한 동맹의 ‘증 거’를 보이지 못했으니 더 이상 따지지 못할 걸로 생각합니다.”
이 말대로라면 충분히 명분은 서게 된다. 그러나 맹주는 선뜻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흐음…….”
고심하는 맹주를 바라보며 청호진인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이 일은 황실에서 진행하고 있는 작전입니다. 애초에 황실과 이런 갈등 관계를 조장한 쪽은 마교가 아닙니까? 씨앗을 뿌린 것은 그들이니 그에 따른 결과도 그들 이 책임져야지요.”
한참 동안 고심하던 맹주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구먼. 청호 사질은 각 파의 장문들에게 협조공문을 발송하도록 하게.”
그 말에 청호진인은 멋쩍은 표정으로 품속에서 문서 몇 장을 꺼내 들며 맹주에게 보여 주었다.
“시간이 촉박할 듯하여 제가 임의로 각 파의 장문인들에게 전서를 보냈습니다. 열두 개 문파에서 제자들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맹주님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먼저 전서를 보낸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했음에도 맹주는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은 듯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랬군. 잘했네, 잘했어.”
청호진인이 맹주의 허락도 떨어지기 전에 각 문파에 전서를 보낸 건 사안의 급박함도 있었지만, 무림맹 체제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무림맹에는 맹주의 명령으로 즉각 동원할 수 있는 독립 세력이 없기에, 대규모로 무사를 동원하려면 각 문파의 수장들에게 요청해서 인력 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그 러다 보니 급작스럽게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에 맞춰 인력을 동원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청호 장로는 월권행위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맹주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각 파의 장문들에게 협조공문을 날렸던 것이다. 맹주의 허락이 떨어 진 후에 협조공문을 날려서는 너무 늦으니까 말이다. 문서에는 각 파에서 파견하겠다고 통보해 온 인원들이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문서를 살펴보고 있는 맹주의 눈치를 살피며 청호진인이 슬쩍 물었다.
“지휘는 누구에게 맡기는 게 좋겠습니까?”
청호진인의 물음에 맹주는 별다른 생각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맹호검군 장로에게 맡길까 하네.”
“맹호검군보다는 차라리 만수에게 맡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사제가 공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그걸 맹호검군에게 양보한다는 건 참으로 아쉽다고 생 각합니다, 맹주님.”
왜군들의 숫자가 많다고는 하지만 각 파에서 보내 주기로 한 무사들만 제대로 온다면 그들을 처리하는 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따라서 무사들을 지휘 하는 자는 커다란 공을 거저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호진인은 그런 공을 다른 문파에게 양보한다는 게 속이 쓰렸던 것이다.
“흠…, 사질이 그리 생각한다면 만수에게 맡기기로 하지. 누가 가도 별 상관 없는 일이니까 말이야.”
“그럼 만수 사제에게 일러두겠습니다.”
“언제 출발할 수 있겠나?”
“이미 각 파로부터 차출된 인원이 맹을 향해 출발한 상태니, 늦어도 이틀 안에는 출발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제서야 문서에서 눈을 뗀 맹주는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차질이 없도록 잘 부탁하네.”
“옛, 맹주님!”
현 시점에서 맹주로서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무작정 동맹 관계인 마교를 믿기에는 왜군의 막대한 수가 너무나도 큰 압박으로 다가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