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4권 7화 – 지옥을 보여 주마
지옥을 보여 주마
작전대로 철영이 거느린 2개 전투단이 장인걸과의 접전에 들어갔을 때, 묵향은 혈랑대를 거느리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가장 뛰어난 고수들로만 구성된 혈랑대가 함께하는 만큼, 이동 속도는 그야말로 전광석화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종적을 발견할 수 없도록 사람이 거의 다 니지 않는 악지형만 골라서 이동하고 있었기에 이동 속도가 생각만큼 그렇게 빠른 건 아니었다.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은 육포를 씹고 있는 묵향에게 동방뇌무 장로가 다가와 보고했다.
신장이 5척 6촌밖에 안 되는 그였지만, 워낙 바짝 마른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실제보다 좀 더 커 보였다. 아니, 그의 키가 커 보이는 것은 몸매 때문만이 아니 라,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길게 째진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만들어지는 무서운 인상 때문인지도 몰랐다.
무시무시한 외모와는 대조적으로 동방뇌무 장로는 묵향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머뭇 다가왔다. 마교의 전설적 고수인 묵향과의 동행이 내심 편하지만은 않았기 때 문이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교주가 딱딱한 육포 쪼가리나 씹어 먹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내일 점심나절쯤에는 돌격선에 도착할 수 있을 듯합니다, 교주님.”
묵향은 씹고 있던 육포를 삼킨 후 입을 열었다.
“모두들 충분히 휴식을 취하라고 해라. 오늘도 경계는 본좌가 서겠다.”
순간 동방뇌무 장로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지금까지 경계를 모두 교주님께서 서지 않으셨습니까? 교주님께서도 휴식을 취하셔야…….”
“본좌는 이 정도에 운기조식까지 취해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자네들은 다르지 않은가. 모두들 내일 전투에서 지닌 바 실력을 전부 발휘하려면 충분히 휴식을 취해 둬야지.”
“그, 그래도…….”
쭈뼛쭈뼛하면서도 동방뇌무 장로가 그대로 서 있자 묵향은 슬그머니 짜증이 일었다. 그렇지만 자신을 생각해 저러는 것인데 화를 낼 수도 없지 않은가.
“자네는 본좌가 경계를 서는 걸 못 믿겠다는 것인가?”
“그, 그건 아닙니다, 교주님. 너무 송구스러워서……?”
“송구스러워할 필요 없네. 본좌에게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수하들을 위해서 경계쯤 서 주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러는 겐가?”
사실 교 밖에만 나오면 거의 잠을 안 자는 묵향이었다. 안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주변의 모든 게 느껴지는 판에 따로 보초를 세워 둘 필요가 없지 않겠는 가.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동방뇌무 장로의 입장은 달랐다. 존귀한 천마신교의 교주가 자신들을 위해 피곤을 무릅쓰고, 직접 경계를 서겠다는 의미로 다가왔으니까. 동방뇌무 장로는 감격에 겨워 몸을 부르르 떨며 교주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내심 다짐했다.
“자네도 가서 좀 쉬도록 하게.”
재차 묵향이 이렇게 말하니 동방뇌무 장로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존명!”
다음 날 새벽부터 또다시 강행군이 이어졌다. 혈랑대가 연경 외곽에 도착한 것은 동방뇌무 장로의 추측대로 점심나절쯤이었다.
“이대로 곧장 돌격하라고 명령할까요?”
묵향은 하늘을 한번 힐끗 본 후, 시선을 지평선 저 먼 곳에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연경의 성곽 위로 향했다. 워낙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동방뇌무 장로의 눈 에는 기다란 성벽만이 보였지만, 묵향에게는 성벽 위 병사들의 얼굴까지 자세히 보였다. 나른한 듯한 표정으로 하품까지 하면서 옆에 서 있는 병사와 잡담을 나누고 있다.
묵향은 자신들의 움직임을 아직까지 장인걸 쪽에서 포착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다면 병사들의 경계 태세가 저렇게 느슨할 리 없으니까. 잠시 궁리하던 묵향은 자신의 명령만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동방뇌무 장로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야습을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의견을 물은 것이었지만 동방뇌무 장로는 그걸 묵향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옛,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적회색 땅거미가 음산하게 사위를 물들일 무렵, 작전토의가 시작됐다. 동방뇌무 장로는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들고 땅바닥에 대충 지도를 그리며 수하들에게 설명 했다. 주위가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모두들 고수가 아닌 자가 없었기에 그 누구도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동방뇌무 장로는 한켠에 앉아 자신의 작전을 듣고 있는 묵향을 향해 긴장된 시선을 간혹 날렸다. 자신의 작전이 교주의 마음에 들었는지 내심 걸렸기 때문이다. 동방뇌무 장로가 세운 작전은 아주 단순했다. 먼저 혈랑대를 공격조와 수색조 두 개로 나눠, 공격조는 자신이 지휘하고 수색조는 제1대장이 지휘한다. 공격조가 천마혈검대를 중심으로 하는 적의 수비진을 제압하는 동안, 수색조는 전력을 다해 황제를 찾는다는 게 작전의 핵심이었다.
황제는 황궁 내에서도 가장 중심부에 있을 것이고, 수많은 병력들이 첩첩히 포진해서 지키고 있을 게 뻔했다. 바로 그 점을 역이용하면 손쉽게 황제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게 동방뇌무 장로의 생각이었다.
“시간을 끌어 봐야 좋을 건 없다. 성내에는 수만에 달하는 수비군이 주둔하고 있음을 명심해라.”
마지막을 훈시로 장식한 후 수하들을 둘러보며 자신 있게 말했다.
“자, 의문점이 있으면 질문하도록!”
그러자 제1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황제를 어떻게 찾아내죠? 만약 그놈이 병사들 사이에 섞인다면 알아볼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동방뇌무 장로는 그런 질문이 나올지 알았다는 듯 자신 있게 미소 지으며 품속에서 종이를 한 묶음 꺼내 들었다. 종이에는 초상화와 함께 뭔가 글씨들이 빼곡히 기 록되어 있었다.
“내 이럴 줄 알고 놈의 용모파기를 준비해 왔지. 자, 모두들 한 장씩 받으라구.”
황제의 얼굴은 의외로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천연색 물감으로 초상화를 그려 놔도 알아볼까 말까한 판국에, 먹물로 그려 놨으니 도무지 알아볼 방 법이 없다는 데 있었다.
황제가 쓰고 있는 화려한 모양의 관(冠)만 아니라면, 여기 모여 있는 혈랑대원들 중 비슷한 얼굴이 몇 명은 있을 정도로 평범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초상화를 펼쳐 본 대원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아니, 이걸 가지고 어떻게 찾으라구…….”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그러면서 옆에 있는 동료와 초상화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 언제 금나라 황제 노릇 했었나? 그러고 보니 초상화와 비슷하게 생겼구먼.”
웅성거리는 대원들의 모습을 보며, 묵향으로 인한 긴장감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동방뇌무 장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그러면 그런 줄 알 것이지, 교주님 앞에서 이런 개망신을 안겨 주다니. 나중에 두고 보자!’
동방뇌무 장로는 재빨리 교주의 안색을 한 번 더 살핀 후,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황제란 놈은 분명 온몸에 금은보화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용모파기를 참·조·하·여 놈을 찾는다면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알겠 나!”
동방뇌무 장로의 험악한 인상에 장난기 어린 대화를 주고받던 혈랑대원들은 모두 긴장 어린 어조로 외쳤다.
“존명!”
복명음이 터져 나오자 동방뇌무 장로는 내심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황제는 황궁 가장 중심지에, 그것도 수많은 호위병들에 의해 호위되고 있을 거다. 혹시 모르니 수비진을 돌파한 후 옷차림이 근사한 놈들은 몽땅 다 제압해라!” “존명!”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사위가 온통 시커먼 암흑에 잠겨들었을 때 묵향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들 시커먼 야행복으로 온몸을 감싼 채, 엄청난 속도로 밤하늘 을 가르며 성을 향해 돌진했다.
혈랑대원들은 하나같이 마교가 자랑하는 최정상급 고수들인 만큼 어둠 속에 녹아들자 그들의 움직임을 발견해 낸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몸 에서 뿜어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마기는 이들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적으로 하여금 무한한 공포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이때 내성(城) 안쪽 깊숙한 곳에서 엄청난 마기들이 느껴졌다. 황제를 지키기 위해 남아 있는 천마혈검대원들임에 분명했다. 마기를 느끼자마자 앞서 달려가고 있던 동방뇌무 장로는 등에 메고 있던 4척 3촌이나 되는 긴 기형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저쪽이다!”
공격조로 선택된 5개 대가 동방뇌무 장로의 뒤를 좇아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들보다 조금 뒤쳐져서 수색조 5개 대가 묵향과 함께 뒤를 따랐다. 천마혈검대가 있는 곳에 황제가 있을 게 뻔했기에, 형식상 두 개 조로 나눴을 뿐이지 그들의 움직임은 함께였다.
금나라 수비군 수천 명이 미지의 공포감에 당황하여 허둥대고 있는 게 먼발치로 보였다. 동방뇌무 장로는 가소롭다는 듯 그들을 힐끗 바라본 후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자신들의 적은 저 앞에 있는 장인걸이 키운 고수들이었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이변이 벌어졌다.
“끄아아아악!”
“끼에에에엑!”
자신의 뒤를 바짝 뒤따라오던 수하들이 모두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꿈에 볼까 두려운 끔찍한 형상의 괴물들만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요란한 괴성을 흘리고 있다.
“헉! 모, 모두들 어디로 간 것이냐?”
동방뇌무 장로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눈치 챘다. 오랜 관록이 거저 얻어진 게 아닌 것이다. 그는 이빨을 뿌드 득 갈며 외쳤다.
“빌어먹을! 진법에 빠졌구나.”
이때 뒤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걸 느낌과 동시에 동방뇌무 장로는 번개처럼 신형을 돌리며 검으로 막았다. 그의 손에는 뭔가와 격돌한 듯 강렬한 반 탄력이 느껴졌지만, 이럴 때 들려와야 할 그 어떤 격타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오직 기괴한 괴물의 울음소리뿐이다. 그리고 그의 눈에 보이는 것도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괴물들의 모습뿐이다.
동방뇌무 장로는 자신의 손을 힐끔 쳐다봤다. 방금 전에 손을 통해 느껴진 반응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었다. 뭔가가 자신의 검과 충돌했음이 틀림없었다.
“눈도, 귀도 믿지 못한다는 건가? 이런 지독한 진법이 있을 줄이야…….”
혈랑대를 함정에 빠뜨리는 건 너무나도 간단했다.
혈랑대와 천마혈검대 양쪽 다 마공을 극한까지 익힌 고수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서로 간의 위치는 10리 밖에서도 쉽게 포착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함정을 가운데 놓고 상대가 달려오는 그 반대편 쪽에 서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기만 하면 상대는 마치 불을 본 불나방처럼 알아서 함정에 빠져 주게 되는 것이다.
혈랑대의 첫 번째 목표는 천마혈검대였다.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곳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해 들어가 다른 세력들이 끼어들기 전에 제압하는 게 최우선적인 목표 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혈랑대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혈랑대원들이 전각 앞의 넓은 광장 중앙을 막 통과할 무렵 구양운 장로의 차가운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발동시켜!”
그와 동시에 혈랑대원들의 눈에 비친 주위 경관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바로 코앞에 황제가 거주함직한 거대한 전각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평원 위를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더군다나 동료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생전 듣도 보도 못 한 무시무시하게 생긴 괴물들만 보였 다.
이런 경우는 단 한 가지뿐이다. 진세에 빠졌을 때! 그것도 아주 지독한 환영을 보여 주는 진세에 빠졌을 때뿐인 것이다.
그걸 느낌과 동시에 혈랑대원 각자는 반사적으로 진세를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에 들어갔다. 일부 대원들은 전속력으로 앞으로 치달렸다. 일직선으로 달리다 보면 진세를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다.
그리고 어떤 대원들은 전력을 다해 위로 솟구쳐 보기도 했다. 하지만 하늘 위로 까마득히 솟구쳤음에도 불구하고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평원의 모습밖에 보이는 게 없었다.
‘이런 젠장! 도대체 진세가 얼마나 큰 거야?”
혈랑대원들은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사실 진세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자신들도 모르게 광장 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위로 솟구 친 대원들도 진세가 지니는 지독한 견인력 때문에 자신은 높이 날아올랐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리 높이 솟구치지 못했을 뿐이다.
진세를 벗어나기 위해 이리저리 날뛰다 보니 꿈에 볼까 두려운 괴물들과 접촉하게 된다. 이게 동료일까? 아니면 적일까? 그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환영일까? 주위는 온통 지독한 마기와 사기, 요기가 들끓고 있어 마공을 익힌 마교 고수들 특유의 마기조차도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지독했다. 그들이 엄청난 고수였기에 지금 이 안에서 날뛰고 있었던 거지, 만약 무공이 약한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진세가 지닌 가공스러운 기운에 짓눌려 죽던지 아니면 미쳐 버렸을 것이다.
당황해서 이리저리 날뛰고 있는 혈랑대원들. 간혹 가다가 자기들끼리 적으로 오인해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곧바로 멀어졌다. 상대가 적인지 아군인지 불분명 한 상황에서 접전을 자제했기 때문이다.
진세가 발동됨과 동시에 구양운 장로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공격!”
* * *
적들이 함정에 빠지자마자 구양운 장로는 독 안에 든 쥐들을 향해 집중 사격을 명령했다. 적은 마교의 최정예 엄청난 무공을 지닌 놈들로 구성된 특급전투단이다. 조금이라도 여유를 줬다가는 어떻게든 진법을 돌파할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 게 분명하다.
놈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함정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최대한 피해를 입혀야만 한다. 놈들에게 생각할 여유를 줘서는 안 된다.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붓는 길만이 최 선이었다. 지금 여기서 얼마나 많은 놈들을 죽이느냐에 이번 전투의 승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구양운 장로였기에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자리를 잡는 대로 모두 화살을 쏴!”
구양운 장로는 사격 명령을 내리며, 자신도 손수 활을 쏘기 시작했다. 구양운 장로의 명령에 천마혈검대원들은 공력을 한껏 끌어올려 혈랑대를 향해 화살을 날리 기 시작했다.
쉬이이잉! 쉬잉!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괴음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며 광장으로 화살들이 빗살처럼 날아들었다.
진 속에 갇힌 혈랑대원들에게 이 공격은 정말이지 마른하늘에서 떨어지는 날벼락과도 같았다. 진세로 인해 온 천지 사방이 환영으로 뒤덮여 코앞도 제대로 분간하 기 힘든 상태다. 더군다나 괴수들의 울부짖는 괴성으로 인해 다른 소리를 들을 수조차 없다.
그런 최악의 조건에서 강맹한 내공을 머금은 화살 세례까지 받다 보니 정말이지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모두들 워낙 뛰어난 무공의 고수들이었기에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강맹한 기의 흐름을 놓칠 리 없었다. 처음에는 당황한 듯했지만 그들은 곧이어 침착한 표정으로 살벌한 공격들을 막아 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적들의 공격은 점점 더 거세졌다. 연경에 배치되어 있던 1천5백에 달하는 모든 고수들도 서둘러 달려와 공격에 가담했다.
그들이 가세해서 쏴 댄 화살만 해도 엄청난 양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1만에 달하는 근위병들이 도착한 다음에는 그야말로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을 정도로 막대 한 양의 화살들이 밤하늘을 가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이들이 날리는 화살은 전혀 내공이 실려 있지 않았기에 자신의 몸에 도달하기 직전쯤에나 알 수 있었다. 진세의 틈새로 포착할 수 있었던 기의 흐름만으 로 적의 화살을 어렵게 막아 내고 있었던 혈랑대원들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내공이 실려 있지 않아 위력이 떨어졌기에 온몸에 철갑처럼 둘러놓은 호신강기로 막아 내며 버티고 있었다.
부하들을 독려하며 연신 활을 쏘아대고 있던 구양운 장로는 이런 엄청난 공격에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버티고 있는 혈랑대의 놀라운 무공에 내심 혀를 내둘 렀다.
“지독한 새끼들! 이렇게 퍼붓는데도 버티다니……. 하지만 전력으로 호신강기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계속 쏴 대다 보면 언젠가는 내공이 바닥 나겠지.”
“차라리 진천뢰(震天雷)를 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편복대주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두 번째 화약 병기가 바로 진천뢰다. 커다란 쇠구슬처럼 생긴 폭탄으로 그 속에 철질려를 무려 2백여 개나 집어넣어 놨다. 화약이 폭발할 때 발생하는 강력한 힘으로 철질려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가 인마를 살상할 수 있도록 고안된 무기였다. 아무리 고수라도 사방에서 폭풍처럼 날아드 는 수백, 수천 개의 철질려를 전부 막아 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리라.
하지만 구양운 장로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재수 없으면 진세를 발동시키고 있는 기관 장치가 부서질 수도 있다.”
진천뢰의 엄청난 위력이야 충분히 믿음이 갔지만, 자칫 진세가 파괴되어 애써 우리에 가둬 놓은 호랑이를 밖으로 내보내는 자살 행위에 가까운 짓은 피하고 싶었 던 것이다.
“그렇다면 상자노를 이리 운반해 오라고 할까요?”
그렇다. 초대형 쇠뇌에서 발사하는 강맹한 화살이라면 호신강기만으로는 막기 힘들 게 분명하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빨리 가져오라고 해.”
“존명!”
수하를 보내 놓고 다시금 활을 쏘려고 하던 구양운 장로의 눈에 어디서 본 듯한 무기가 시선을 끌었다. 짤막하면서도 완만하게 휘어진 기형검. 바로 반역도 묵향의 애검 묵혼이 아닌가. 그걸 지닌 흑의복면인 역시 탈출로를 찾아 우왕좌왕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두건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에는 긴장감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 호기심 가득한 눈 길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헉!”
구양운 장로는 기절초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그가 직접 여기에 왔단 말인가? 구양운 장로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묵향으로 추정되는 흑의복면인을 향 해 조준해서 화살을 날렸다.
흑의복면인은 다른 놈들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그를 향해 화살을 날린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워낙 빠른 속도로 움직였기에 마지 막 순간에는 기를 이용해서 조금씩 각도를 틀어 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사리 유도한 화살도 흑의복면인은 검을 휘둘러 간단하게 처리해 버렸다. 구양운 장로는 급히 주위에 있는 대원들에게 소리쳤다.
“모두들 저기 생쥐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놈을 노려라. 시커멓고, 짤막한 기형검을 가지고 있는 놈! 서둘러!”
구양운 장로의 명령에 그의 옆에 서 있던 10여 명의 대원들이 일제히 활 끝을 돌려 흑의복면인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방어막을 뚫을 수는 없었다. “과연! 역대 최강이란 게 헛소리는 아니었군.”
이때 흑의복면인이 아무리 달려 봐야 답이 안 나온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위로 뛰어올랐다. 기세 좋게 위로 솟구쳤지만 3장 정도 올라가자 뭔가에 막히기라도 한 듯 멈칫거렸다. 아래 쪽으로 빨아들이는 진세의 강력한 흡인력 때문이었다.
이전에도 몇몇 혈랑대 고수들이 위쪽으로 뛰어올라 진세를 벗어나려고 시도했었지만 모두들 실패한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 자신은 진세가 가져다주는 환각
에 의해 평소처럼 수십 장을 날아오른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전혀 위쪽으로 올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흑의복면인은 달랐다. 다른 고수들이 3장을 고비로 아래쪽으로 내려왔음에 비해, 그의 몸은 3장쯤에서 멈칫하더니 다시금 조금씩 위쪽으로 솟구치기 시 작한 것이다.
그걸 바라보는 구양운 장로의 눈에 경악심이 어렸다. 진세의 흡인력이 얼마나 지독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양운 장로는 정신없이 외쳤다.
“빨리 폭발시켜라!”
“예? 폭발은 최후에나…….”
“잔말 말고 빨리!”
구양운 장로는 묵향으로 추정되는 고수가 진세를 탈출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자마자 심지에 불을 붙이라고 명령했다. 저런 엄청난 고수가 진을 벗어나게 되면 도저히 뒷감당을 할 수가 없을 게 뻔하니까.
구양운 장로의 명령에 제3대장은 진세 밑에 설치되어 있는 자폭 장치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특별하게 제작된 심지는 말이 달려가는 속도보다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타 들어갔다.
환혹파멸진의 아래쪽에는 대략 3만여 근(약 11톤)에 달하는 화약과 1천5백여 개의 진천뢰가 깔려 있었다.
처음 진세를 구축할 때, 편복대주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그때까지 제작된 화약과 진천뢰를 몽땅 다 이 진세 밑에다가 설치했다. 이건 최강의 적들을 상대하기 위한 함정이었고 그런 만큼 진세만으로 상대하기 벅찬 경우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경우 적들을 아예 진세 채로 날려 버리는 게 최선이라고 편복대주는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편복대주의 말에 구양운 장로는 이런 엄청난 진세에 뭣 때문에 아까운 화약과 진천뢰까지 묻어 두냐고 불평을 늘어놨었다. 천하에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천 마혈검대를 이끄는 대주였기에 자신들을 믿지 못해서 편복대주가 이런 짓거리를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구양운 장로는 애타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그도 이렇게 많은 화약이 폭발하면 얼마나 엄청난 위력을 보여 줄지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상대는 무림 최고의 고수. 과연 이걸로 놈을 없앨 수 있을까?
편복대주는 진세 아래에 묻은 화약의 양이 웬만한 성(城) 하나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양이라고 장담했지만, 이 진세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흡인력을 뚫고 올라오 는 흑의복면인의 가공할 만한 신위를 생각하면 전혀 미덥지가 못했다.
“완성되는 시일을 조금 더 늦추더라도 더 많은 양을 묻으라고 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그렇다고 지금 땅을 파고 화약을 더 가져다 묻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어차피 화살은 시위를 떠난 상태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흑의복면인이 진세를 돌파하는 최악의 사태를 막는 것뿐이었다.
“대주! 화약이 터지기 전에 빨리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심지에 불을 붙이고 달려온 제3대장의 말에 구양운 장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여기서 저자를 잡지 못한다면 우린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만약 저자가 내 예상대로 묵향 부교주라면 같이 죽는다고 해도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니 야. 자네는 무공이 떨어지는 자들에게 폭파 범위 밖으로 나가라고 해라. 그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니까!”
“존명!”
말을 마친 구양운 장로는 입술을 꽉 깨문 뒤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등에 메여 있던 검 네 자루가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듯 스르르 검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흑의복면인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구양운 장로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어기동검술(御氣動劍術)이 시전된 것이다.
불과 몇 초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구양운 장로에게 있어서 그건 마치 영원과도 견줄 만큼 긴 끔찍한 시간이었다. 점점 위쪽으로 상승하고 있는 흑의복면 인. 만일 그가 진세를 탈출하면 모든 게 끝이라는 걸 구양운 장로가 모를 리 없다.
그렇기에 그는 화약이 터질 동안 조금이라도 흑의복면인의 움직임을 늦추기 위해서 전력을 다한 일격을 날린 것이다.
콰콰쾅!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미리 지시를 받은 고수들은 뒤로 빠졌지만, 후퇴 명령을 받지 못한 근위병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온몸이 산산이 찢겨 나갔을 정도로 폭발의 충격파는 엄청난 속도로 사방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뛰어난 고수인 구양운 장로의 눈에는 마치 천천히 흘러가는 연극이라도 되듯 하나하나가 다 보였다.
1차 폭발의 압력에 의해 1천5백여 개의 진천뢰가 하늘 위로 솟아올랐고, 그 진천뢰들이 폭발함과 동시에 가공스러운 2차 폭발이 이어졌다.
땅속에 묻혀 있던 진천뢰들이 불과 1장 정도 떠오른 후 폭발했기에, 1차와 2차 폭발 간의 시간 차는 거의 순간이라고 불러도 무색할 정도로 짧았다.
구양운 장로는 폭발의 여파로 몸이 휘청거리는데도 불구하고 흑의복면인이 있는 쪽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광장을 몽땅 집어삼킨 검붉은 화염과 빗살처럼 날아다 니는 철질려들. 그리고 처절한 비명성만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더라도 결코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것도 폭발의 중심점인 저 안쪽에서는 더더욱.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구양운 장로는 소름이 오싹 돋을 만큼 엄청난 기의 파장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시뻘겋게 솟아오르는 불덩이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바로 그 흑의복면인이었다.
“이, 이런 젠장! 그 속에서 살아남았단 말이냐?”
구양운 장로는 더 이상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며 주위에 있는 천마혈검대원들과 고수들에게 전음을 날렸다.
<전력을 다해 탈출해라! 빨리!>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목숨을 걸고 흑의복면인과 싸울 수도 있겠지만, 그래 봐야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저런 무시무시한 함 정 속에서 살아남은 괴물을 무슨 수로 당한다는 말인가?
묵향은 진세에서 탈출하자마자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는 적의 고수들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망할 새끼들!”
편복대주가 연경에 만들어 놓은 함정이 얼마나 치밀했는지 진세에서 막 탈출한 묵향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야행복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화기에 새까맣게 그을 렸다.
묵향은 찢어진 복면을 벗어 땅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내던지며 적들을 추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여기저기에서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 다.
“크으으윽!”
마음 같아서는 자신에게 이토록 큰 곤욕을 치르게 만든 놈들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를 갈면서도 묵향은 뒤로 신형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적을 쫓기보다 는 부상을 입고 쓰러진 생존자를 구출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동방뇌무 장로가 비틀거리며 달려왔다. 그의 왼팔이 통째로 찢겨 날아가고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묵향의 안위를 걱정해서 달려온 것이다.
“교주님! 괜찮으십니까?”
“동방뇌무 장로! 몸은 괜찮은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 심려하지 마십시오.”
동방뇌무 장로는 강인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의 얼굴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대폭발로 인해 외상은 물론이고 꽤 깊은 내상까지 입은 모양이다.
“우선 살아남은 대원들을 한곳으로 모아라.”
“송구스럽습니다. 속하가 불민하여…….?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대원들부터 모아.”
“예? 예.”
“그리고 누구 한 명 보내서 이 근처에 의원이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해라. 부상을 입은 대원들을 모두 다 살려야만 한다. 알겠나!”
“존명!”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동방뇌무 장로는 자신들이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고 있었다. 묵향의 명령을 실행하는 한편, 비교적 부상이 적은 세 명의 고수를 차출하 여 황제를 찾아내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동방뇌무 장로와 비교적 부상이 적은 자들은 분주히 움직여 광장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던 대원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태반이 심각하리만큼 큰 외상과 내상을 입 고 있었다.
중상자와 경상자를 가려 어느 정도의 전력이 손상됐는지 파악하고 있을 때, 성 외곽에 포진해 있던 금군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폭발의 여파에 간신히 살 아남은 금군들과 합류하여 마교 고수들을 향해 닥치는 대로 화살을 쏴 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림고수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들로서도 양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곳은 그들의 지존 황제와 그의 일가가 기거하는 황궁이었으니까.
“쏴라! 쏴!!”
“놈들을 벌집으로 만들어라!”
평상시라면 병사들이 쏴 대는 화살쯤이야 그리 대단한 위협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몸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거대한 폭발의 충격으 로 인해 외상은 물론이고 내장까지 뒤흔들려 버린 상태였다.
몇몇 대원들은 척 봐도 도저히 살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부상을 입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내공이 담겨 있지 않다 하더라도 금군들이 쏘아 대는 화살은 치명적으 로 작용할 게 뻔하다.
묵향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천마혈검대가 탈출해 버린 이상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병사 놈들이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고 덤벼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망할 새끼들! 꼭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린단 말이냐?”
지금껏 무공도 모르는 장졸들을 상대로 그가 칼부림을 한 건 몽고에서의 전쟁 때뿐이었다.
중원 최강이라는 자부심을 지닌 그였기에 적군이라고는 하지만 일반 병졸들에게까지 칼을 빼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만약 칼을 빼 든다면 그건 일방적인 학 살이 될 게 뻔하다. 하지만 그는 오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새끼들! 오늘 다 죽었어!”
분노한 묵향의 온몸에서 일순 살이 찢겨 나갈 정도의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묵향의 허리를 떠난 묵혼검이 앞쪽으로 향했고, 그와 동시에 시퍼런 강 기 다발들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번쩍! 콰콰쾅!
묵혼검을 통해 뿜어져 나간 기의 폭풍이 금군을 강타했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수십 명의 금군이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그리고 강기 가닥이 뚫고 들어간 벽과 전각 여기저기에는 구멍들이 숭숭 뚫렸다.
묵향은 미친 듯 주위를 돌아다니며 금나라 병사들을 학살했다. 묵혼검이 번쩍일 때마다 금나라 병사들의 몸은 피를 내뿜으며 갑옷째로 토막 났다.
한 5백여 명 정도 죽였을까? 묵향은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쯤 자신의 학살극에 질려 금군 병사들이 겁에 질려 도망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금군은 그의 기대와 달리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묵향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병사들의 눈에는 전혀 공포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동료들에 대한 복수심만이 이글거리 고 있었다. 묵향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원래가 일반 병사들의 경우 초월적인 존재를 눈앞에 두면 도망치기 바쁘지, 이렇게 미친 듯이 달려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다 제령단이라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약물의 힘이었지만 묵향이 그걸 알 도리가 없었다.
“황제라는 놈이 이토록 병사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던가? 그게 아니면 장인걸인가? 그도 아니라면 놈들을 지휘하는 장수가 꽤나 유능한 인물인지도 모르겠 군.”
상대 쪽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다. 좀 더 피를 흘려 놈들이 깨닫게 만드는 수밖에.
“그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말이지? 그래, 끝까지 버텨 봐라. 어떻게 되는지 본좌가 가르쳐 주마!”
그날, 연경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은 지옥이라는 게 뭔지 경험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