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24권 11화 – 마화의 변화
마화의 변화
잠에서 깬 묵향은 언제나처럼 가볍게 운기조식을 취했다. 그런 다음 차를 마시며 소연이 아침 문안 인사 오는 것을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다. 묵향에게는 이런 소소 한 일상의 생활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런데 소연과 함께 손을 잡고 들어오는 마화를 본 순간, 묵향은 자신도 모르게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뿜어내야 했다. 세상에! 마화가 연한 초록색이 감도는 아름 다운 궁장을 입고 들어왔던 것이다.
“풋!”
자신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고 소연이 꼬셨기에 어쩔 수 없이 입었던 것인데, 들어오는 순간 묵향이 보여 준 행동에 마화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속옷은 물론이요, 움직이는 데 거추장스럽다며 언제나 한결같이 단순한 형태의 무복(武服)만을 고집했던 마화였다. 그런 그녀가 하늘거리는 궁장을 입은 것만 해 도 큰 용기를 낸 것이다.
그런데 예쁘다거나 아주 잘 어울린다는 말이라도 한마디 해줄 줄 알았던 인간이, 저딴 반응을 보이자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마화의 눈이 실쭉 가늘어졌고 눈썹이 매섭게 위로 치솟았다.
“왜 갑자기 그러시죠? 뭔가 못 볼 것이라도 보셨나요?”
“그, 그게 아니라. 너, 너무 놀라서…….”
당황해하는 묵향을 보다 못한 소연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버지, 어때요? 마 언니 정말 예쁘죠?”
이런 말에 익숙하지 못한 묵향은 마화의 눈초리에 마지못해 대답했다.
“응, 저, 정말 아름답구나.”
너무 창피했던 것일까? 마화는 되려 뻔뻔스럽게 나왔다. 이판사판 합이 육판인 것이다. 괜히 이런 옷을 입었나 보다 후회하는 마음뿐이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옷 을 갈아입으러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흥! 표정을 보니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뭐 그 정도로 참아 주겠어요. 자, 어서 식사나 하러 가요.”
뽀루퉁한 얼굴로 앞장 서서 나가는 마화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묵향은 그제서야 마화의 변화를 눈치 챌 수 있었다. 맞다. 대별산맥으로 찾아왔을 때도 마화 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은은한 향기를 풍겼었다.
묵향은 소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어기전성을 날렸다.
《네가 그런 거냐?》
소연은 묵향의 눈을 마주 쳐다보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마화가 묵향에게 마음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약간의 친분이 있다고 그런 얘기를 꺼냈다가는 무례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우려가 있는 것이다.
교주와 마화의 신분은 그녀와 하늘과 땅이라고 할 정도로 차이가 났다. 그런데 자그마한 친분을 빌미로 그런 민감한 얘기를 꺼냈다가는 오냐오냐 해 주니까 수염 까지 뽑으려고 드는 무례한 계집으로 낙인찍힐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입장이 바뀌었다. 묵향의 딸로서 그녀는 마화가 싫지 않았고, 또 눈치를 보아하니 묵향 또한 그녀를 싫어하지 않는 듯했다. 그렇기에 마화에게 강력 하게 밀어붙이라고 옆에서 충동질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 이런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자신이 내심 사모했었던 남자를 문주의 딸에게 뺏긴 아픈 경험이 소연에게 있었기에.
마화가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밖으로 나간 것을 묵향은 다행스럽게 생각했지만, 사실 마화로서는 지금 화내고 있을 정신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왜군에 대한 일을 소 연을 방패막이로 해서 어떻게 하면 묵향의 진노를 적게 사면서 얘기할 수 있을까 궁리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객잔에서 제공된 아침식사는 꽤나 그럴듯한 것이었다. 맛있게 잘 먹은 후 후식이 나왔을 때쯤, 마화는 전음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사실, 얼마 전에 보고가 올라온 게 있어요. 그런데 미처 교주님께 보고할 여유를 찾지 못해서…….>
소연과 보내는 즐거운 시간에 마화가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낸 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묵향은 시원스럽게 받아들였다. 소연과 평상적인 대화는 계속적으로 이 어 나가면서…….
《말해 봐.》
<지원군으로 올 예정이었던 왜군이 전멸 당했어요.>
밑도 끝도 없는 보고에 묵향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마화는 황군과 무림맹의 고수들이 동원되어 왜군을 전멸시킨 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묵향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까지도 황실과의 인연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그녀로서는 과연 묵향이 이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염려됐던 것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묵향의 눈치만 살피 며 보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그렇게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군. 안 그래도 소모품으로 다 죽여야 할 놈이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무림맹의 행위는 좀 괘심하군. 어찌 보면 본좌에게 검을 겨 누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생각 외로 묵향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자, 긴장을 하고 있던 마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 기회를 잘 노린 보람이 있는 것이다. 마화 로서는 묵향이 송 황실에 악감정만 가지지 않는다면 일이 어떻게 진행된다 해도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정보에 의하면 지원을 하러 온 왜군들의 숫자가 10만을 넘는다고 하자, 지례 겁을 먹고 기습을 한 것이라고 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10만이라는 숫자에 묵향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인원이 불어난다는 보고는 들었지만, 묵향이 알고 있었던 왜군의 숫자는 1만 명 정 도였기 때문이다.
<또한 며칠 전 절강성 분타주로부터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왜군에 들어가던 보급 통로를 조사하는 모종의 세력을 포착했답니다. 그걸 눈치 채는 즉시 분타주가 연 락망을 폐쇄, 상대의 추적을 따돌렸지만 그들에 대한 역추적은 실패했답니다.>
《흠, 기밀 유지를 위해 당분간은 밀무역을 멈추고 주변 정세 파악에 주력하라고 해. 고생해서 무역로를 뚫어 놨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지.》
일단 마화가 근심하던 보고는 다 끝마친 상태였기에 그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묵향에게 물었다.
<무림맹에 왜군을 공격한 것에 대해 공식적인 항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에 온 왜군은 우리들의 동맹군이고, 그들을 양양성으로 이동시켜 전장에 투입하겠 다고 사전에 분명히 밝혔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왜군을 전멸시켰다는 것은…….>
《흠, 하여튼 그 문제는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 지금은 소연이하고 대화하랴, 자네하고 얘기하랴 정신이 없으니까>
그렇게 마화에게 어기전성을 보낸 후, 소연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라고?”
소연 같은 고수가 자신만 빼고 묵향과 마화 간에 뭔가 대화가 오가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척 일상적인 대화를 계속 유지 해 나갔다. 만약 자신이 알아도 괜찮은 내용이었다면 전음이 아닌 직접적으로 얘기를 해 줬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제 천지문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양양성에 왔는데도 아직까지 천지문에 연락을 안 하고 있다가, 누가 저를 보기라도 한다면 입장이 곤란해지잖아요.” 그 말에 묵향은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끔 시간 내서 식사 정도는 같이 하도록 하자꾸나.”
너무나도 부드러운 말투에 소연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아버지.”
자신을 위해서 양양성까지 동행해 줬던 현천검제가 화산파로 돌아간다고 하자, 소연은 그에게 식사를 함께하자고 청했다. 일파의 장문인인 그에게 그것 외에는 자 신의 감사함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현천검제는 기꺼운 마음으로 초대에 응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질녀와 헤어지는 마당에 오붓한 식사를 나누자고 하니 그가 마다할 리 없었다.
소연은 천지문도들이 자리 잡은 장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 객잔으로 현천검제를 안내했다. 가격도 쌌고, 무엇보다 조용한 분위기에 음식이 꽤 깔끔하 고 맛있어 소연이 자주 이용하던 객잔이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인지 오늘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어 객잔 안은 상당히 시끄러웠다. 일단은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술에 취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나누는 대화로 인해 귀가 아플 정도였다.
그런 시끄러움 속에서도 현천검제의 흥미를 돋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현천검제의 귀에는 그들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 렸다.
“연경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게 사실인가?”
그러자 또 다른 사내도 자신의 궁금증을 물었다.
“듣자하니 연경 전체가 쑥대밭이 됐다는 거야. 그뿐만이 아니라 남양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인가?”
현천검제는 흥미진진하게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걸 알 리 없는 소연은 주위가 너무 시끄럽자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시는 게…….”
대화 내용에 흥미를 느낀 현천검제는 말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조금 추레한 복장을 하고 있는 사내들이 몇 명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 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행색에 비해 음식이나 술이 꽤나 고급인 걸 보면, 아마도 오랜 시간 여행을 한 여행객들인 모양이었다.
현천검제는 소연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들의 얘기를 더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 괜찮네. 다소 시끄러우면 어떤가? 음식이 맛있다니 여기서 먹기로 하지.”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삿갓을 쓰고 있었던 현천검제는 남의 이목에 띄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그 여행객들과는 꽤나 거리가 떨어진 자리였지만, 화경
의 고수인 그에게 있어서 이 정도 거리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질문을 받은 중년 사내는 일부러 딴전을 피우며 술잔을 쭉 들이켠 후 안주를 집어 우물거렸다. 동료들의 애타는 듯한 시선을 받으며 시간을 끌던 그는 행여 누가 엿듣는 사람은 없는지 힐끔 주위부터 둘러봤다.
그 모습에 한 사내가 애가 닳았는지 약간 큰 소리로 채근했다.
“아, 뜸들이지 말고 얘기 좀 해 보게. 나도 지금 상단을 꾸려 연경 쪽으로 가 볼까 하는 중이었는데, 그런 소문을 접하니 불안해서 원. 어떻던가? 가도 괜찮을까?” 정보에 목말라 하는 것은 개방이나 무영문뿐만이 아니다. 상거래에 큰 영향을 주기에 상인들의 경우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요즘처럼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전쟁터를 찾아다니며 물건을 팔아 한몫 잡는 상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상인들은 전쟁에 휩쓸려 재산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잃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가급적 이면 위험을 피해 가려고 했던 것이다.
한참 뜸을 들이던 중년 사내는 행여 누가 엿들을 새라 낮은 어조로 물었다.
“자네들, 그건 어디서 들었나?”
“다 아는 수가 있지. 자네 연경에서 오는 길이라며? 거기 얘기 좀 해 보게.”
“나 같으면 연경 쪽으로는 죽어도 안 가겠네.”
그 말은 곧 소문이 사실이라는 말이었다.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던 사내는 침울한 어조로 급히 물었다.
“도대체 연경이 어떻게 됐기에 죽어도 가지 말라는 건가?”
질문을 받은 중년 사내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그날은 내 생애 최악의 밤이었다네. 여기저기서 화광이 충천하고, 처절한 비명 소리에……. 나중에 들으니 마교도들이 기습을 해 왔었다는 거야. 얼마 나 전투가 치열했는지 연경의 태반은 불에 탔을 정도였다네.”
“허, 그 정도라면 사람도 많이 죽었겠군.”
“아침에 보니 금나라 병사들 시체가 천지사방에 널려 있었네.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 연경의 중심가였던 봉황로 주변이었는데, 그 일대에 살던 고관대 작들까지 큰 피해를 당했다고 할 정도니, 일반 백성들이야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나. 지금 그쪽으로 가 봐야 물건 팔아먹긴 힘들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중년 사내가 입을 다물자, 상단을 꾸려 연경으로 가겠다던 사내는 몸이 달았다.
“그렇게 대충 말하지 말고, 자세하게 이야기 좀 해 봐.”
“허~참, 이거 맨입으로 하기는…….”
“알겠네, 알겠어. 내가 오늘 걸쭉하게 한잔 사겠네. 자넬 만난 덕분에 나도 연경까지 헛걸음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일세.”
그렇게 말하며 사내는 점소이를 불러 음식과 술을 좀 더 시켰다. 그제서야 중년 사내는 씩 미소 짓더니 그날 일을 자세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상단을 데리고 연경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난 그곳에서 전쟁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네. 사실 그 어떤 조짐도 없었고, 전쟁에 대한 소문도 듣 지 못했으니 말일세. 그런데 일이 벌어진 것은 도착한 다음 날이었네. 한밤중에 갑자기 엄청난 폭음이 들려와 나는 깜짝 놀라서 일어났지. 내 생전에 그렇게 큰 소리 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거든.”
“천둥소리보다도 크던가?”
“허허, 이거 참. 내가 달리 생전 처음이라고 했겠나? 천둥소리보다 수십 배는 더 컸던 것 같네. 그런데 그 소리가 들린 후 한동안 잠잠하더란 말이지. 그래서 나는 황제가 사는 연경이다 보니 천둥도 지랄 맞게 크게 운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빨리 좀 말해 보게.”
“좀 찬찬히 들어 봐. 그래서 나는 아무 일 없는 줄 알고 다시 잠을 청했지. 그런데 이번에는 엄청난 비명 소리에 놀라 다시 일어났다네. 벌떡 일어서서 창문으로 달 려가 보니 저쪽 중심가 쪽으로 화광이 충천하고 있었고, 요란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네. 무수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틀림없이 전쟁이 벌어졌다고 생각했지. 그렇지 않고서야 수만이나 되는 금나라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연경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지 않겠나?”
이리저리 말을 돌리는 걸 보며, 한 사내가 눈치 챘다는 듯 능청스레 미소 지었다.
“쓸데없이 서론이 긴 거 보니…, 자네가 직접 전투를 본 것은 아니군.”
“물론이지. 내 목숨이 열 개쯤 되는 것도 아닌데 뭐 하려고 그리로 갔겠나? 황급히 일행들을 깨우고, 여차하면 달아날 준비를 한 뒤 눈치만 보고 있었지. 그런데 우 리 쪽으로 병사들이 달려오지도 않았고…, 뭐 그래서 그냥 객잔에 쥐죽은 듯 숨어 있었다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살그머니 봉황로 쪽으로 가 보니 완전히 폐허가 되 어 있더군. 끔찍하게 죽은 금나라 병사들의 시체가 얼마나 많던지, 헤아리기조차 불가능하더란 말일세. 그런데 이상한 건 그들을 죽인 자들의 시체가 전혀 눈에 띄 지 않더군.”
“허, 거참 이상하군. 그렇다면 금나라 병사들이 누구랑 싸웠단 말인가? 설마 반역?”
사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리 압도적인 전력으로 싸워 이긴다 해도 피해는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금나라 병사들의 시체만 보였다면 금 나라 병사들끼리 싸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반역밖에는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지 않은가.
하지만 중년 사내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네. 그런데 자세히 알아 보니 소문으로만 들었던 무림의 영웅들이 연경을 친 거였어. 하늘을 휙휙 날아다니고, 무예에 도통한 무 림의 영웅들에게 감히 오랑캐들 따위가 상대나 됐겠나?”
“뭐야? 무림의 고수들이 연경을.. .?”
“그렇다면 분명 소림이나 무당파일 게야. 내 듣자하니 그들은 도를 깨쳐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한다더군.”
생각지도 못했던 중년 사내의 말에 좌중은 일순 시끄러워졌다. 그리고는 각자 지금까지 자신이 주워들은 무림에 대한 얘기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가 장 많이 들먹여지는 문파는 역시 구대문파와 무림맹이었다.
사내들이 서로 자신의 말이 옳다고 우기기 시작할 때, 중년 사내는 느긋하게 술을 한 잔 들이켠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 했다.
“나중에 그쪽에서 들은 소문으로는 마교라는 단체가 야습했다고 하더군. 금군 병사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놈들을 물리쳤으니 이제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 라며 외쳐대긴 했지만, 나하고 거래하던 박 영감한테 듣기로는 그게 아닌 모양이야. 봉황로가 불바다가 되면서 그 일대에 살고 있던 고관대작들도 큰 피해를 입었 다고 하더군.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황궁 쪽도 엉망진창인 모양이었어. 그 정도로 깨졌는데 그게 적들을 물리친 것이겠나? 모르긴 몰라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후퇴한 것이겠지.”
소란스런 객잔 안이었지만,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게 현천검제 일행들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그들의 뒤편에 앉아 있던 듬직한 덩치의 장한 한 명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보슈,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어디 있소? 금나라 황제가 있는 곳이 바로 연경이오. 수많은 금군들과 절정고수들이 막강한 방어막을 치고 있는 곳이란 말이 오. 아무리 마교의 전력이 뛰어나다고 하나, 그런 곳을 단독으로 공격했다니 말도 되지 않소.”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모는 무사의 말에 중년 사내는 분통이 터진 모양이다. 사실 상인들에게 이 정도의 정보를 얻으려면 돈푼깨나 쥐어 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쉽게 입을 열게 만든 걸 보면.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 연경의 중심가인 봉황로 일대가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있는 걸 말이오. 수많은 금군 병사들의 시체가 쫙 깔 려 있었는데, 그게 거짓말이라는 말이오? 물론 저쪽에서 들은 소문이 잘못됐을 수는 있겠지. 마교가 공격한 게 아니라, 무림의 여러 문파들이 연합해서 쳤을 수는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연경이 잿더미가 된 것만은 사실이오. 그건 내 이 두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 말이오.”
중년 사내는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외쳤고, 이제 이들의 대화 내용을 객잔 안에서 못 들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원래 상인들이라는 게 이렇게 귀중한 정보를 쉽게 알려 주지는 않지만, 중년 사내는 술에 취한 김에 화가 나서 외쳐 댄 것이다.
하지만 무사는 마치 상대의 거짓말을 완전히 간파하고 있다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지은 뒤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난 서문세가에 소속된 무사요. 만약 그런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면 마교가 미치지 않고서야 왜 우리랑 같이 연수를 하지 않았겠소?”
그 말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주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는 사람들의 반응이 마음에 든다는 듯 씨익 웃다, 자신의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 던 허름한 옷차림의 거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천하에서 정보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문파가 개방이 아니겠소. 이 친구가 바로 그 개방의 제자라오.”
한마디로 이곳에 정보통인 개방 고수가 있으니 헛소리를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런 다음 그는 개방 제자를 향해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자네가 말해 주게. 개소리하지 말라고 말이야.”
하지만 개방 제자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술잔을 쭉 들이켠 후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말이야. 사실, 이런 얘기 하면 안 되는데……. 어쩔 수 없구먼. 저들의 말이 사실일세.”
개방 제자의 말에 서문세가의 무사는 경악한 모양이다.
“뭐, 뭐라고?”
“마교가 연경을 친 건 사실일세. 남양 쪽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자세한 건 잘 모르겠고, 연경 쪽은 수많은 시체가 사방에 널려 피비린내 가 진동한다고 하더군. 그뿐만 아니라 금나라 황제조차도 채 피신을 못 해, 현재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네.”
“그 말이 정말인가?”
“나도 처음에는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연경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한두 사람이 본 게 아니더군. 몇몇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마교에서 이번 전투에 엄청 난 전력을 투입한 듯하네. 그리고 무엇보다 마교의 교주인 암흑마제가 앞장서서 무시무시한 신위를 보이며 연경을 지옥으로 바꿔놨다고 하더군.”
무사는 어이가 없는지 잠시 멍하니 서 있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술잔을 쭉 들이켠 뒤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오랜만에 거둔 대단한 쾌거가 아닌가? 그런데 왜 마교에서 우리 무림맹과 같이 전투를 하지 않고 그들 혼자……..”
“글쎄, 그것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뭔가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겠지. 어쩌면 자신들끼리 왕창 해치운 다음 공치사를 할 생각이었는데, 예상외로 피해가 커져 차마 입을 못 열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사방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거의 다 연경 전투에 대한 통쾌함이었다.
지루할 만큼 대치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언제 전장에 나가 목숨을 잃을지 몰라 팽팽하게 긴장을 하고 있던 병사나 일반 무사들에게 이번 연경 전투 의 쾌거는 속이 후련하다고 할 만큼 통쾌한 일이었다.
무림맹의 수뇌부들이야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하급 무사나 송을 걱정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마교가 이번에 행한 전격적인 작전에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경 전투와 남양 전투의 자세한 정보가 속속 알려지면서 마교 고수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마귀처럼 전장을 날뛴 묵향의 활약상이 어땠는지 이 야기하느라 양양성이 술렁거렸다.
현천검제는 다시금 사형인 묵향의 자신에 대한 배려에 몸을 떨어야 했다. 지금 들은 이 정도의 말로도 마교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 다.
마교가 피해를 입기 전이라 해도 화경급 고수가 가지는 전력은 엄청나다. 그런데 지금과 같이 커다란 피해를 입은 상황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사형은 자신이 화산파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아무 말 없이 보내 줬다.
현천검제는 갑자기 심하게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마치 기갈이라도 들린 듯 찻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켜는 그의 두 눈에는 어느덧 희미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