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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18화


855화

이드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고 있어서일 것이다.

비히더의 턱 아래, 목을 파고든 창이 정확히 척추를 반으로 바른 후 가랑이를 뚫고 튀어나와 땅에 박혔다.

즉사였다. 티엔이 들었던 작은 기침 소리가 비히더의 마지막이었다.

“일부러 비히더를 노렸나.”

땅으로 내려선 이드는 베일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감의 발을 묶어 두는 것이 사냥의 기본이니까.”

비히더가 두 사람을 데리고 이동하는 모습만 스무 번 넘게 본 이드였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굳이 창의 주인인 티엔을 두고 그 뒤에 있는 비히더를 노릴 이유가 없다.

“또 도망가면 곤란하니 말이야. 오랜만의 술래잡기도 피곤하고 뭐, 상태를 봐서는 다시 도망가도 멀리 가지는 못할 것 같지만.”

온통 핏줄이 터진 비히더의 눈동자를 확인한 이드가 베일록을 돌아보았다.

“순순히 항복할 생각은・・・・・・ 역시 없으려나?”

항복을 권하던 이드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베일록의 눈을 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이제와 항복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항복은 대항할 수단이 없을 때 하는 것이지.”

뭔가 더 남은 듯한 말투. 아무래도 프로즌 페더말고 최후의 수단이 더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이봐.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항복은 하는 게 아니라, 받아 주는 거라고.”

제네바 협약이 통하는 지구도 아니고, 이 야만이 살아 있는 그레센에서 마치 항복을 당연한 권리처럼 말하는 모습에 이드는 기가 막혔다. 베일록은 그런 말을 무시하고 티엔을 불렀다.

비히더의 몸에서 창을 뽑아 든 티엔이 베일록에게 다가갔다. 피범벅이 된 축축한 창이 기분 나쁘게 손을 적셨다.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 무조건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명령하시면 따르겠지만, 계획이 틀어진 만큼 지금 항복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겁니다.”

“……”

“으하!”

대답 없는 베일록에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긴 티엔이 이드 앞으로 나섰다.

“보신 대로 이렇게 됐습니다.”

이드는 죽을상을 한 티엔과 뒤로 물러나며 주문을 통해 마나를 움직이는 베일록을 번갈아 보고는 말했다.

“보아하니, 용병 같은데, 돈보다는 목숨을 선택해야 할 때가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 어떤가?”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목숨줄을 붙잡고 있는 계약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프리실라가 한 것과 비슷한 계약을 한 모양이다.

정신의 관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용병은 용병. 알려지면 문제가 많은 일을 하다 보니, 특수한 계약으로 그들의 입을 막아 놓은 것이리라.

“쯧쯧, 계약서에는 함부로 이름을 적으면 안 되는데, 몰랐나 보군.”

이드는 진심으로 혀를 찼다. 계약을 잘못해서 피해를 본 이야기라면 지구에서 지겨울 정도로 보고, 들었다. 덕분에 계약의 무서움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집을 계약할 때도 라미아는 물론이고 변호사까지 대동했었다. 사기는 아무리 무공이 신화의 경지에 이른 이드라도 완벽히 막을 수 없는 무서운 범죄였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후회 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디 사정을 봐주시기를 바랍니다만, 어렵겠죠?”

“최대한 고통은 없도록 해 주지.”

괜히 티엔을 상대하다 또 프로즌 템페스트의 위조품 같은 것이 튀어나오는 것은 사양이다.

말을 마친 이드가 들어오란 의미로 검 끝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후, 후, 크압!”

티엔은 거부하지 않고 기합을 내질렀다. 이드가 공격하는 순간 자신에겐 반격의 기회도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후두두두둑!

바닥을 향해 있던 창날이 땅을 긁으며 흙을 뿌려 시야를 가리고, 섬뜩한 창기가 흙먼지에 숨어 날아왔다. 하찮아 보이는 닭 뼈도 우리면 훌륭한 육수가 되는 것처럼, 뻔하지만 수천 번을 반복한 듯 깊이가 느껴져 천박하지 않은 수였다. 하지만 티엔의 분위기와 행동으로 봐서는 이걸로는 뭔가 아쉽다. 그렇게 느낀 순간, 땅에서 튀어 오르는 독사처럼 시커먼 단창 한 자루가 바닥에서 솟아났다.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 티엔을 살렸던 최강의 한 수.

‘제법이네, 어지간한 기사들은 다 당하겠어.’

문제라면 이드가 어지간한 기사들을 아득하게 뛰어넘은 존재라는 점일까.

“수라섬광단이라는 것이다.”

어떤 수에 죽게 될지 알려 준 이드가 선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일라이져를 휘둘러 붉은 그물을 던졌다.

서거거걱!

그물을 이룬 강사는 흙먼지부터 검은 단창, 그리고 그 뒤에 선 티엔의 심장까지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모조리 잘라 냈다. 털썩.

그리고 티엔이 쓰러지는 순간.

콰과과과광!

기다렸다는 듯 온갖 마법이 날아들어 폭발했다. 가장 먼저 티엔의 시체가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정작 그 마법들이 노리고 있던 이드는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나 베일록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무투파로는 안 될 것 같으니, 이제는 전통 마법사 노릇인가?”

“인시너레이트! 체인 라이트닝! 플레어거스트 윈드!”

이드의 말을 무시한 베일록은 헤이스트를 사용해서 도망치며 쉬지 않고 마법을 쏟아 냈다. 그의 손끝에서 번쩍이는 마법은 3클래스에서 7클래스까지 두서가 없었다.

그저 최대한 빠르게 준비되는 마법을 갈겨 댔다.

그 속에는 이드에 대한 살의보다 시간을 끌겠다는 의도와 살겠다는 의지가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그 노골적인 냄새에 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용감히 싸우라고 부하의 등을 떠밀고 정작 자신은 도망 다니며 지원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인간을 보통 뭐라고 하는지 알아?”

“바인드! 링 오브 파이어! 기가 라이데인!”

파앙!

바인드를 진각으로 끊어 내고,

슈가가각!

링 오브 파이어는 수라 검강으로 잘라 내고,

짜자자작!

기가 라이데인은 수신으로 흘려보내며 베일록의 코앞으로 다가선 이드가 말했다.

“겁쟁이라고 하지.”

서거걱!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라이져가 베일록의 가슴을 갈랐다.

왼쪽 어깨에서 반대편 갈비뼈 아래까지. 살이 쩍 벌어지며 잘린 뼈가 노출되었다. 보통은 움직일 수 있기는커녕 당장 쇼크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큰 상처.

하지만 베일록은 벌어진 살을 잡고서 훌쩍 뒤로 물러났다.

“아까도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봐 겁쟁이 당신 고통을 느끼지 않는 건가?”

“내 몸에 이식한 임플란트 브레인 덕분이지. 이것이 있는 한 나는 쉽게 죽지 않는다. 겁쟁이라 불려도 끝까지 살아 있으면 승자가 되는 것이다.” 

임플란트 브레인.

이드는 그 이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프리실라에게 듣기로 임플란트 브레인은 그녀가 사용하는 상자보다 발전한 형태의 이식 기술이라고 했다. 초인의 몸에서 정확하게 초인기와 연관된 부분만을 도려 내어 압축해서 몸에 심는 행위. 그것이 임플란트 브레인이었다.

다만 이 시술은 선천적인 신체적 결손으로 영체가 이지러진 사람만이 가능했다. 그것이 임플란트 브레인을 만든 베일록의 의도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설명하는 프리실라도 알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러면서 자신만 알고 있는 정보라며 말한 것이 있었다.

“그럼 그 등에 있는 혹을 떼어 낸 후에도 그런 승자라고 자랑할 수 있을지 한번 볼까?”

“……그걸 어떻게?”

베일록은 자신의 혹에 임플란트 브레인을 심어 두었다. 다른 제자들이 하나, 많아야 두 개의 임플란트 브레인을 이식한 것에 비해서, 혹이 유난히 큰 베일록은 그곳에 여섯 개를 이식하고 있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당신의 모든 힘이 혹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걸 보고도 모르면 바보지.”

물론 그보다는 프리실라의 정보 덕에 알게 된 것이 크지만, 이드는 추후의 일을 위해 일부러 밝히지 않았다.

“……”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베일록의 표정은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자신이 임플란트 브레인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그보다 이제 항복하는 게 어때? 고통은 몰라도 피는 슬슬 부족할 것 같은데, 진심으로 말하지만 이게 마지막 기회야. 당신이 아니라도 정보라면 프리실라에게서 충분히 얻어 낼 수 있으니까.”

촤악!

일라이져를 휘둘러 검신의 피를 털어 낸 이드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참고로 말하자면 당신이 기다리는 지원은 없을 거야. 이럴 것 같아서 미리 통신을 막아 뒀거든.”

그 부분은 이미 라미아에게 확인도 마친 일이었다.

다행히 라미아는 이드가 부탁한 순간 바로 기사단을 두고 최우선적으로 통신을 막아 둔 것이다.

“……사실이겠군.”

“난 언제나 사실만을 말하는 사람이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는 이드였다. 베일록 앞에서 프리실라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좋다. 마지막 수가 통하지 않으면 항복하지.”

“거, 사람 말 안 듣네. 지금 아니면 안 받아 준다니까.”

이드가 투덜거렸지만, 이미 베일록은 마지막 수단을 쓰고 있었다.

부글부글.

등의 혹이 숨을 쉬듯 울룩불룩 움직이더니 쑥쑥 커지며 베일록의 전신으로 퍼져 갔다. 혹이 번진 몸의 살은 울퉁불퉁해지고, 툭툭 불거졌으며, 쩍 갈라져 피가 흐르기도 했다.

앞서 근육질의 아름다운 몸으로 변했을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츠츠츠츠.

하지만 분명 이유 없이 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혹이 이전의 공격으로 갈라졌던 가슴까지 번지자, 벌어졌던 살이 흐물흐물 녹아 내리며 붙어 버렸다.

“쭛.”

그 모습까지 본 이드는 혀를 차고는 곧장 움직였다. 보기 좋은 모습도 아니고, 더 보아 줄 생각이 없었다.

앞서야 마법사면서 무투파의 흉내를 내기에 그 실력을 보았다지만, 지금의 모습에서는 어떤 호기심도 들지 않았다.

형태는 달라도 어차피 쓰는 사람이 하나인 이상 근본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지는 못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단숨에 거리를 좁힌 이드가 베일록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악마의 자궁 같은 혹을 향해 검은 철황권을 박아 넣었다.

“안 돼!”

“안 되기는 뭐가? 항복이 네 맘대로면, 공격은 내 맘이야.”

뒤늦게 이드의 공격을 알아차린 베일록이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고는 바람의 갑옷을 두르며 몸을 틀었다.

‘이것도 이상하지. 무술 수준은 크게 높지 않은데, 이상하게 권로를 잘 읽어 낸단 말이야.’

기본적인 권각법의 수련 없이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하늘이 내린 동체 시력을 가졌거나, 뛰어난 분석력을 가져야 한다. 분명 그가 뛰어난 마법사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권로를 읽고 분석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짧다.

‘어쩌면 그런 부분을 보완하는 임플란트 브레인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지.’

이드의 생각은 정확했다.

무공에 대한 수련이 깊지 않은 베일록이 무투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외부와 다르게 흐르는 뇌의 시간 감각에 있었다.

1초가 10초로 늘어져 보이면 아무래도 생각할 시간은 그 열 배가 되니까. 충분히 보고 생각한 후에 움직이면 된다.

일반인은 이런 초인기를 각성해도 당장은 쓸 수 없다. 머리로 분석한 것을 풀어내기에는 몸이 너무 약하니까.

그래서 베일록은 이 문제를 자신의 몸을 강화하는 것으로 극복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두 가지 형태의 몸을 가지게 되었다. 단단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육체와 흉측하지만, 빠르고, 부드러운 육체를 말이다. 뭐, 그래 봤자 철황권 앞에서는 단백질로 이루어진 고깃덩이일 뿐이지만.

푸욱!

베일록이 피하려는 동작까지 계산한 이드의 주먹이 물 풍선을 두드린 듯 혹 안에 깊게 박혔다. 부드러운 육체가 충격을 흡수하려 했지만, 

“그 정도는 이미 예상 범위 안이라고.”

박혀 든 주먹이 살짝 떨리는 순간, 주먹에서 뱀을 닮은 구불구불한 경력이 나와 혹 안으로 스며든다.

철사심인경.

철황권의 제일 침투경이 폭발했다.

구르르르륵!

배탈도 아닌데, 몸속에서 배탈이 났을 때의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베일록은 누군가 자신의 몸속에 뜨겁게 달군 쇠꼬챙이를 박아 넣은 것 같은 통증에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끄……..끄아아아아악!”

“그러게 얌전히 항복하면 얼마나 좋아.”

삼십 분을 고통에 몸부림치다 겨우 기절한 베일록을 보며 이드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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